단상斷想 35

기본기란 무엇인가

어떤 분의 피드에선가 '기본기'에 관한 얘기를 듣고 나서 떠오른 에피소드. 족히 3년은 넘게 커트를 다닌 미용실 사장님이 내린 '기본기'에 대한 정의가 찰떡 같았다. "미용에서 기본기가 뭔지 아세요? 하던 대로 똑같이 할 수 있는 능력이에요" 머리 스타일을 일 년에도 몇번씩 바꾸는 손님이 아닌 한, 미용사가 손님에게 가장 많이 받는 주문은 "저번처럼 해주세요"라고 한다. 나도 그렇다. 거기에서 계절마다 기장이나 조금씩 바꿀 뿐. 그래서 미용사가 손님을 단골로 붙들어둘 수 있으려면, 최신 트렌드에 민감해서 온갖 스타일을 줄줄이 꿰고 있는 것보다 어떠한 컨디션에서도 "저번처럼 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손님의 니즈를 맞출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원장님이 보기에, 가게가 잘 안되는 미용사들은 그게 안된다. 더 결정..

단상斷想 2023.03.24

근본 요리책 발견

요리책 좀 사볼까 해도 유튜브 영상 요약해놓은 것 같은 그림책만 난무하길래 금방 마음을 접었다. 책으로 사기에는 정보량이 너무 적지 않나 생각하지만... 다 베스트셀러. 오늘 노들서가에서 저 벽돌책(828p)을 보았고, 최근 처참히 말아먹었던 오믈렛 편을 찾아읽고 반해버렸다. 세상에 '용어정리'부터 시작하는 요리책이라니. ※제본이 아쉽다는 의견에 적극 동의한다. 이북으로도 나와주면 좋겠지만, 최소한 양장본으로는 나와주어야 하지 않을까. 나도 구매에 주저하게 된다. 800페이지 짜리 책 마구 넘겨보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뻔히 보여서.

단상斷想 2023.03.12

'익명'이라는 이름의 인격

학교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매년 요맘때에는 교원평가가 진행된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반 쯤은 우스개소리로 "이번주에는 학생님들 심사를 거스르는 언행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곤 한다. 초등학교에는 그런 경우가 드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중고등학교쯤 되면 막나가는 식의 응답도 없지 않아서(ex. "선생님이 나가 뒤지셨으면 좋겠어요") 안 볼 수도 있지만 신경을 아예 안 쓸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프로세스 전체에서 가장 동의하기 하기 어려운 것은 '익명'을 기반으로 한 응답은 개인의 가장 솔직한 의견을 반영한다고 보는 전제다. 철학적이라고 해야 할까 인식론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 전제는 인간에 대한 몰이해에 기대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익명'의 응답이 가장 내밀할 수 있을지언정, 솔직함과는..

단상斷想 2022.10.21

2022. 10. 7. 아침의 단상

종목을 불문하고 고급기기를 사용하면 필연적인 사이드 이펙트를 경험하게 되는데, 다른 사람들 다 쓰는 평범한 기기를 쓸 때 그 한계와 불편함이 증폭된다는 것이다. 요즘엔 키보드가 딱 그러한데, 손 달달 떨면서 산 아래 사진의 키보드를 쓰게 된 이후 손목 찌릿찌릿함 입력 뭉침 등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없으면 작업시에 상당한 이질감을 느낀다 ㅠㅠ 집에서는 로지텍 세트를 쓰다가 결국 복지비 남은 걸로 한 대 더 장만하고 있으려니까 드는 단상이다. 아마 물건 뿐만 아니라 지적 생산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겠지. 예전에 그렇게 추앙하며 읽고 배웠던 컨텐츠(사람)에 이질감을 느끼는 건 그리 불행한 사태가 아닐 것이다. *뒷광고아니다^^

단상斷想 2022.10.07

[아내가 만든 라따뚜이와 내가 만든 김치볶음밥]

오븐(내 경우에는 LG 광파오븐)만 있으면 라따뚜이는 보기보다 정말 쉬운 요리다. 요리라고 할 것도 없이 썰어서 굽기만 하면 된다. 급식에서 접하던 때부터 느끼는 것이지만, 라따뚜이는 참 괜찮은 한식 반찬이다. 소스를 꾸덕꾸덕하고 되직하게 넣으면 흡사 장류에 밥 비벼먹는 듯한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물론 다량의 채소를 섭취할 수 있는 건 유익한 덤이고.

단상斷想 2022.09.22

[어휘력 부족과 학력저하]

학교가 아닌 곳에서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 친구와 대화하다가 요즈음 학생들의 학력 저하에 관한 주제로 얘기가 나왔다. 친구가 든 예시는 어휘력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지적理智的'이라는 말을 들은 친구가 "그거 이기적 잘못 쓴 거 아님?", "쉽다는easy 뜻임?" 이라고 자기들끼리 어리둥절하는 모습을 보고 살짝 충격을 받았다고. 그렇게 학업 수준이 낮은 친구들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도 수업하면서 관찰한 현상이기도 하고 최근 이 비슷한 일이 뉴스거리가 된 일도 있기 때문에(대표적으로 '무운' , '외람되오나' 논란. 그러고 보니 모두 기자분들) 내 생각을 정리해두고 싶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문제는 전반적인 학력 저하로 설명하기 보다 한자를 베이스의 '표의문자'라는 우리말의 정체가 ..

단상斷想 2022.04.05

조선시대 민중의 상대적 박탈감?

얼마전 짝으로부터, "조선시대 평민들은 대궐같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는 양반들 보면서 박탈감 같은 거 안느꼈을까?" 질문 받은 적이 있는데 이 인용문으로 내 답변을 대신하고 싶다. ------------------------------ "먹고 사는 것이 아슬아슬한 사람들은 삶의 목표가 뚜렷하다. 먹을 것과 누워 잘 곳을 구하느라 애면글면하노라면 허무감 같은 것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들의 목표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다. 매 끼니가 하나의 성취이며 배부른 상태로 잠자리에 드는 것은 하나의 승리요 어쩌다 생기는 공돈은 기적이다. 그런 사람들한테 '인생의 의미와 존엄성을 부여하며 삶의 용기를 줄 초개인적 목표'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 입에 풀칠하기 위해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노동하는 사람들은 불평..

단상斷想 2022.02.23

명산 대첩의 바윗돌 훼손에 대한 조식의 일갈

대장부의 이름은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 사관이 책에 기록해두고 넓은 땅 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차하게도 원숭이나 너구리가 사는 수풀 속 돌에 이름을 새겨 썩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아득히 날아가 버린 새의 그림자만도 못한 것이니, 후세 사람이 과연 무슨 새였는지 어찌 알겠는가? 大丈夫名字 當如靑天白日 太史書諸冊 廣土銘諸口 區區入石於林莽之間 㹳狸之居 求欲不朽 邈不如飛鳥之影 後世果烏知何如鳥耶 - 조식(曺植, 1501-1572), 『남명집(南冥集)』 권2, 「유두류록(遊頭流錄)」 "남명 조식은 1558년 4월 10일부터 26일까지 지리산 청학동을 유람하였다. 그가 찾아간 청학동은 현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불일폭포 일대를 일컫는다. 4월 19일, 아침 일찍 청학동으로..

단상斷想 2022.02.09

교훈 없는 학교

[숨] 원주여고 학생들을 응원하며 - 경향신문 (khan.co.kr) [숨] 원주여고 학생들을 응원하며 얼마 전 원주여고의 신문 동아리 학생에게 연락이 왔다. 교훈을 개정하고픈데 동문들의 반대로 ... www.khan.co.kr 저자는 "교훈을 시대에 맞게 바꾸어 나갈 것"을 주문하고 그런 실천에 나서려는 학생들을 응원한다. 그런데 나는 교훈을 바꾸는 것보다 교훈이랄 것이 없는 교육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 더 근본적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반쯤 웃자고 하는 얘기인데, 사실 이 근본적 변화는 가열차게 진행중이어서, 자기 학교 교훈을 마음에 두고 다니는 사람을 찾는 것이 더 어렵다. 요즘엔 만드는 사람들도 구성원들이 그것을 기억해주지 않기를 온 마음으로 바라는지, 음가 외에는 별 뜻도 없는 세상의 좋은 말들을 ..

단상斷想 2022.02.06

[올해의 소비 혹은 학술적 대화의 일상성]

올해도 없는 살림에 이것저것 많이 샀지만, 그 중 가장 큰 포션을 차지하면서도 가장 큰 만족감을 주고 있는 아이템은 새로 맞춘 pc다. 이건 작업용 pc에 대한 기존 인식을 싹 바꾸게 만들었다. 이제까지 나는 무릇 작업용 pc란 게임하고 싶은 욕구가 들지 않을 만큼 최소한의 사양으로 문서나 잘 띄울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어디 폐기 직전의 중고 같은 것을 10만원 주고 가져다가 뻑(?) 날 때 까지 쓰다 버리곤 했다. 이번에는 그보다는 좀 나은 걸 맞추려는 생각에 한 50정도 쓸 생각으로 견적을 요청했는데 내 요구 사항을 듣더니 근 90에 가까운 견적을 추천해서 당황했다. "줌 돌리면서 문서작업하고, 검색 창 팍팍 띄우는 데 이 정도나 필요한가요?" 나를 롤이나 배그할 사람으로 본 게 아..

단상斷想 2021.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