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의 피드에선가 '기본기'에 관한 얘기를 듣고 나서 떠오른 에피소드. 족히 3년은 넘게 커트를 다닌 미용실 사장님이 내린 '기본기'에 대한 정의가 찰떡 같았다.
"미용에서 기본기가 뭔지 아세요? 하던 대로 똑같이 할 수 있는 능력이에요"
머리 스타일을 일 년에도 몇번씩 바꾸는 손님이 아닌 한, 미용사가 손님에게 가장 많이 받는 주문은 "저번처럼 해주세요"라고 한다. 나도 그렇다. 거기에서 계절마다 기장이나 조금씩 바꿀 뿐. 그래서 미용사가 손님을 단골로 붙들어둘 수 있으려면, 최신 트렌드에 민감해서 온갖 스타일을 줄줄이 꿰고 있는 것보다 어떠한 컨디션에서도 "저번처럼 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손님의 니즈를 맞출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원장님이 보기에, 가게가 잘 안되는 미용사들은 그게 안된다. 더 결정적으로는 자기가 뭐가 안되서 손님들이 떨어져나가지는지도 모른다. "저번처럼 한다"는게 쉬워보여도 사실 미용사와 손님의 컨디션은 매번 바뀐다. 그 변화에 대응하는 미세 조정을 수행하면서도 결과물에서는 일정한 퀄리티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원장님의 '기본기'론을 들으면 연구자로서의 기본기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실, 연구하는 직업의 장점으로 꼽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것 중에 하나가 내가 스스로 설정한 어젠다에 종사한다는 건데, 사실 이건 낭만적인 이상일 뿐이고, 학위논문도 그러했거니와, 순수한 나의 어젠다를 붙들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자의반 타의반'이라는 정치사 불후의 명언이 여기에도 딱 맞다. 반쯤은 외주작업의 성격을 띈다는 것.
그렇다면 훌륭한 연구자(라고 평가받는)란 설사 내 취향에 쏙 들어맞지 않는 어젠다에 마주친다 해도, "저번처럼 해주세요"를 기대하는 학계(?)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연구자일 수 있겠다. 컨디션에 따라 들쭉날쭉한 결과물을 내놓은 연구자에게 안심하고 외주를 맡기고 싶은 고객은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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