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斷想

[어휘력 부족과 학력저하]

걷는생각 2022. 4. 5. 19:41

학교가 아닌 곳에서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 친구와 대화하다가 요즈음 학생들의 학력 저하에 관한 주제로 얘기가 나왔다. 친구가 든 예시는 어휘력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지적理智的'이라는 말을 들은 친구가 "그거 이기적 잘못 쓴 거 아님?", "쉽다는easy 뜻임?" 이라고 자기들끼리 어리둥절하는 모습을 보고 살짝 충격을 받았다고. 그렇게 학업 수준이 낮은 친구들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도 수업하면서 관찰한 현상이기도 하고 최근 이 비슷한 일이 뉴스거리가 된 일도 있기 때문에(대표적으로 '무운' , '외람되오나' 논란. 그러고 보니 모두 기자분들) 내 생각을 정리해두고 싶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문제는 전반적인 학력 저하로 설명하기 보다 한자를 베이스의 '표의문자'라는 우리말의 정체가 점차 망각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느 시대에나 '독서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계층은 한정적이었고 문맹의 수준을 벗어났을 뿐 이러한 정황은 현대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하루키는 10프로 정도라고 했었나). 그러니까 모국어라 할지라도 어지간한 사람들에게 일상생활에서 모르는 단어 무시로 튀어나오는 일은 그리 특기할 일이 아니라는 것.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모른다'는 사실 자체보다, 몰랐다는 걸 알았을 때 다음 스텝을 어떻게 밟느냐이다. 주머니에 든 스마트폰으로 때려보는 게 가장 좋겠지만 이 정도면 상당한 학구열을 가진 사람이니 걱정할게 없고, "한자 베이스의 '표의문자'" 라는 앞선 규정을 염두에 둘 때 실행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하고 안전한 방법은 단어 낱글자의 한자를 전반적인 문맥에 비추어 추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지적'으로 예를 든다면, 저 단어가 쓰인 맥락은 뭔가 스마트한 일과 관련이 있었을테고 설사 정확한 한자를 모른다고 해도 그런 상황에서 쓰인 '이理'라면 '이성', '합리' 등과 같은 계열에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실제로도 그렇고)

그런데 많은 학생들은 이런 프로세스를 따르지 않는다. 낱글자의 뜻이 아니라 음가를 기준으로 자신이 아는 어휘 풀에서 비슷한 걸 찾아낸 뒤 의미 또한 그와 비슷하리라고 멋대로 추측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러니까 단어를 각각의 의미값을 가진 낱글자의 합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뭉뚱그려 하나의 소리값을 의미 단위로 인식하는 것. '理智적'이라고 입력했는데 'easy적'이라고 출력되는 프로세스가 이와 같을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받아쓰기를 하면 소리나는 대로 글자를 옮겨적어 놓고 틀렸다는 지적을 받으면 대부분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고 한다. 이 또한 그 증거다.

'무운' 사태나 '외람'된 기자님 머릿 속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설마 "운이 없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을리 만무하지만, 자신이 아는 가장 쉬운 '무無'자를 골라 그 자리에서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멋대로 믿어버린 것이다. '외람'된 기자님의 경우 나는 그분이 "나의 행동이나 생각이 분수에 지나치지만"이라는 뜻을 염두에 두고 저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저기여" 좀 격을 높이면 "실례지만" 정도의 뜻으로 생각하고 쓴 것이 아닐까? 권력에 대한 기자들의 저자세를 예시한다고 보기엔 너무 나간 것 같다(그것 말고도 다른 무수한 증거들이 있...)

그게 학력저하 현상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거창하게 문제 설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 애초에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것을 두고 학력저하 운운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자 베이스의 말을 쓰고 있으면서 매우 협소한 낱글자 풀을 가지고 있다는 문제일 뿐이다. '우리말 일상어에 자주 쓰이는 낱글자의 원래 뜻이 무엇이고 그 말과 같은 계열로 묶일 수 있는 단어가 무엇인지만 최대한 이른 시기에 배울 수 있다면 음가로 대충 때려맞추는 불행한 사태를 아주 쉽게 방지할 수 있다. 어려운 말 쓰는 것을 고리타분하고 잘난체하는 것으로 매도하고 때와 장소 나이 불문 베이비 토킹하는 것을 귀엽고 따듯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반지성적 경향 또한 분명히 한 몫 할테지만 그건 따로 얘기해야할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