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조선의 당파는 근대 정당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영국의 당파는 근대 정당으로 발전했을까?"는 질문을 중심에 놓고 있지만, 나는 이 문제제기 자체가 다소 핀트가 어긋난 것이라고본다. 동아시아의 근대란 어떤 영역의 문제든, 내부적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파나 정당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대신, 본문에도 나오는 '타협정치'라는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 같다. '왜 조선의 당파는 매양 서로에 대한 살육으로 끝나는 당쟁을 멈출 수 없었으며, 영국의 당파는 그렇지 않았는가.'
기사에서는 두 가지 답을 내놓는데, 나도 수긍한다. 1) 의회가 있었던 영국에서는 당파가 대중을 설득하는데 애써야 했다(조선에서는 그런 무지랭이들은 신경쓰지 않아도 좋았다) 2) 조선의 당쟁은 군자-소인론에 따라 상대방의 '도덕적' 존립근거를 무너뜨리려는 싸움으로 점철되었다.
하지만 여기엔 한 가지 요인이 더 추가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당쟁의 핵심적인 '플레이어'인 국왕의 역할이다. 국왕은 당쟁의 관전자거나 최종적으로 시비만 가려주는 판관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다. 국왕은 사실상 특정한 당파의 멤버였고, 구성원들을 십분 활용했고, 자신의 정략적 의지를 당쟁을 통해 관철하려고 했다.
국왕씩이나 되었으면서 그런 일에 골몰했던 이유는, 조선의 역대 국왕치고 제대로 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통성 문제든, 친인척문제든, 병권이든 매양 신하들에게 약점을 잡혀있었던 국왕은 언제나 정국의 주도권을 갈망했고 사대부 지배체제가 공고한 국가에서 연산군처럼 막가는 식이 아니고서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당쟁의 현장에서 노회한 신하들이 그보다 더 의뭉스럽고 고단수인 국왕에게 뒤통수 얻어맞는 장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기사에서 등장하는 예송논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보았던 것처럼 조선 국왕의 행차를 재현하는 행사가 서울에서 벌어진다면, 민주공화국의 시민인 우리는 돌 비슷한 것(사람들 다치니까...)을 던져 이 시대에 대한 환상을 떨쳐버리는 퍼포먼스가 들어가야 한다고 본다. 비록 민중인 우리의 손으로 직접 국왕의 목을 쳐서 얻어낸 주권은 아닐지라도, 오늘의 정치가 조선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민의에 기반해 있고, 외세에 일방적으로 조리돌림 당하지 않을 만큼 부강해졌다는데 자부심을 느낄 이유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역사 속 공간] 서인-남인은 왜 휘그-토리가 되지 못했을까
집권하면 상대방 파멸시키려 한 붕당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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