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편 총론
일. 사의 정의와 조선사의 범위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의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인류가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면 조선민족이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무엇을 「아」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느뇨? 깊이 팔 것 없이 얕게 말하자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선 자를 아라 하고 그 외에는 비아라 하느니, 이를테면 조선인은 조선을 아라 하고 영·로·법·미(영국·러시아·프랑스·미국) … 등을 비아라 하지만 영·미·법·로(영국·미국·프랑스·러시아) … 등은 각기 제 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은 비아라 하며, 무산계급은 무산계급을 아라 하고 지주나 자본가 … 등을 비아라 하지만, 지주나 자본가 … 등은 각기 제 붙이를 아라 하고 무산계급을 비아라 하며 이뿐 아니라 학문에나 기술에나 직업에나 의견에나 그밖에 무엇이든지 반드시 본위인 아가 있으면 따라서 아와 대치한 비아가 있고 아의 중에 아와 비아가 있으면 비아 중에도 또 아와 비아가 있어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번극할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가 더욱 맹렬하여 인류사회의 활동이 휴식될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나니.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니라.
「아」나 아와 상대되는 비아의 아도 역사적의 아가 되려면 반드시 양개의 속성을 요하나니.
(일) 상속성이니, 시간에 있어서 생명의 불절함을 위함이요,
(일) 보편성이니, 공간에 있어서 영향의 파급됨을 위함이라.
그럼으로 인류 말고 다른 생물의 아와 비아의 투쟁도 없지 않으나, 그러나 그 「아」의 의식이 너무 미약 - 혹 절무 - 하여 상속적 보편적이 못됨으로 마침내 역사의 조작을 인류에 뿐 양함이라. 사회를 떠나서 개인적의 아와 비아의 투쟁도 없지 않으나 그러나 그 아의 범위가 너무 협소하여 또한 상속적·보편적이 못되므로 인류로서도 사회적 행동이라야 역사가 됨이라. 동일한 사건으로 양성 - 상속·보편 - 의 강약을 보아 역사의 재료될 만한 분량의 대소를 정하나니. 이를테면 금석문(김석문)이 삼백년 전에 지원설을 창도한 조선의 학자이지만, 이를 「브루노」의 지원설과 같은 동양의 역사적 가치를 쳐주지 못하는 것은, 피는 그 학설로 인하여 구주(유럽) 각국의 탐험열이 광등한다, 「아메리카」의 신대륙을 발견한다 하였지만, 차는 그런 결과를 가지지 못함이라. 정여립(정여립)은 사백년 전에 군신강상설을 타파하려 한 동양의 위인이지만, 이를 민약론을 저작한 「루소」와 동등되는 역사적 인물이라 할 수 없음은, 당시에 다소간 정설의 영향을 입은루소 釖계나 양반살륙계 등의 전광일섬의 거동이 없지 않으나, 마침내「루소」 이후의 파도장활한 프랑스 혁명에 비길 수 없는 까닭이라.
비아를 정복하여 아를 표창하면, 투쟁의 승리자가 되어 미래 역사의 생명을 이으며, 아를 소멸하여 비아에 공헌하는 자는 투쟁의 패망자가 되어 과거 역사의 진적만 끼치나니. 이는 고금 역사에 바꾸지 못할 원칙이라. 승리자가 되려 하고 실패자가 되지 않으려 함은 인류의 통성이거늘, 매양 예기와 위반되어 승리자가 아니 되고 실패자가 됨은 무슨 까닭이뇨? 무릇 선천적 실질부터 말하면 아가 생긴 뒤에 비아가 생긴 것이지만, 후천적 형식부터 말하면 비아가 있은 뒤에 아가 있나니. 말하자면 조선민족 - 아 - 이 출현한 뒤에 조선민족과 상대되는 묘족·지나(중국)족 등-비아-이 있었으리니. 이는 선천적인 것에 속한 자이다.
그러나 만일 묘족·지나(중국)족 등 - 비아 - 의 상대자가 없었다면 조선이란 국명을 세운다, 삼경을 만든다, 오군을 둔다, 하는 등 - 아 - 의 작용이 생기지 못하였으리니. 이는 후천적인 것에 속한 자라. 정신의 확립으로 선천적의 것을 호위하며 환경의 순응으로 후천적의 것을 유지하되, 양자의 일이 부족하면 패망의 림에 귀하는 고로 유태의 종교나 돌궐의 무력으로도 침륜의 화를 면치 못함은 후자가 부족한 까닭이며, 남미의 공화와 애급(이집트) 말세의 흥학으로도 쇠퇴의 환을 구치 못함은 전자가 부족한 까닭이니라.
이제 조선사를 서술하려 하매, 조선민족을 아의 단위로 잡고
(가) 아의 생장발달의 상태를 서술의 제일 요건으로 하고 그리하여
(일) 최초 문명의 기원이 어디서 된 것,
(이) 역대 강역의 신축이 어떠하였던 것,
(삼) 각 시대 사상의 변천이 어떻게 되어 온 것,
(사) 민족적 의식이 어느 때에 가장 왕성하고 어느 때에 가장 쇠퇴한 것,
(오) 여진·선비·몽고(몽골)·흉노 등이 본디 아의 동족으로 어느 때에 분리되며 분리된 뒤에 영향이 어떠한 것,
(육) 아의 현재의 지위와 흥부 문제의 성부가 어떠할 것 등을 분서하며,
(나) 아와의 상대자인 사린 각족의 관계를 서술의 제이의 요건으로 하고 그리하여
(일) 아에서 분리한 흉노·선비·여진·몽고(몽골)이며, 아의 문화의 강보에서 자라온 일본이 아의 거×이 되던 아니 되어 있는 사실이며,
(이) 인도는 간접으로 지나(중국)는 직접으로 아가 그 문화를 수입하였는데 어찌 하여 그 수입의 분량을 따라 민족의 활기가 여위어 강토의 범위가 줄어졌나,
(삼) 오늘 이후는 서구의 문화와 북구의 사상이 세계사의 중심이 된바, 아조선은 그 문화사상의 노예가 되어 소멸하고 말 것인가? 또는 그를 저작하며 소화하여 신문화를 건설할 것인가? 등을 분서하여 우의 (가), (나) 양자로 본사의 기초를 삼고,
(다) 언어·문자 등 아의 사상을 표시하는 연장의 그 이둔은 어떠하며 그 변화는 어떻게 되었으며,
(라) 종교가 오늘 이후에는 거의 가치 없는 폐물이 되었지만, 고대에는 확실이 일민족의 존망성쇠의 관건이었으니 아의 신앙에 관한 추세가 어떠하였으며,
(마) 학술·기예 등 아의 천재를 발휘한 부분이 어떠하였으며,
(바) 의식주의 정황과 농상공의 발달과 전토의 분배와 화폐의 제도와 기타 경제조직 등이 어떠하였으며,
(사) 인민의 천동과 번식과 또 강토의 신축을 따라 인구의 가멸이 어떻게 된 것이며,
(아) 정치제도의 변천이며,
(자) 북벌진취의 사상이 시대를 따라 진퇴된 것이며,
(차) 귀천빈부 각 계급의 압제하며 대항한 사실과 그 성쇠소장의 대세며,
(카) 지방자치제가 태고부터 발생하여 근세에 와서는 형식만 남기고 정신이 소망한 인과며,
(타) 자래 외력의 침입에서 받은 거대의 손실과 그 반면에 끼친 다소의 이익과,
(파) 흉노·여진 등의 일차 아와 분리한 뒤에 다시 합하지 못한 의문이며,
(하) 종고 문화상 아의 창작이 불소하나 매양 고립적 단편적이 되고 계속적이 되지 못한 괴인 등을 힘써 참고하며 논열하여, 우의 (다) (라) 이하 각종 문제로 본사의 요목을 삼아 일반 독사자로 하여금 거의 조선 면목의 만분 일이라도 알게 될까 하노라.
이. 사의 삼대 원소와 조선 구사의 결점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지으란 것이요, 역사 이외에 무슨 딴 목적을 위하여 지으라는 것이 아니오. 상언하자면 객관적으로 사회의 유동상태와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역사요.
저작자의 목적을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첨부 혹 변개하라는 것이 아니니, 화사가 인상을 화할 새, 연개소문(연개소문)을 그리려면 상모 괴걸한 연개소문(연개소문)을 그릴 것이며, 강감찬(강감찬)을 그리려면 형구 왜루한 강감찬(강감찬)을 그릴지니, 만일 피차 억양의 심으로 호리라도 상환하면 화사의 직분에 어길뿐더러 본인의 면목도 아니리니. 이와 같이 영국사를 지으면 영국사가 되며, 로국사(러시아역사)를 지으면 로국사(러시아역사)가 되며, 조선사를 지으면 조선사가 되어야 하겠거늘, 유래 조선에 조선사라 할 조선사가 있었던가 하면 수긍하기 어렵다.
안정복(안정복)이 『동사강목』을 짓다가 개연히 내란의 빈번과 외구의 출몰이 동국의 고사를 탕잔케 함을 비탄하였으나, 나로서 보건데,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구의 병화에서보다 곧 조선사를 저작하던 기인들의 손에서 더 탕잔되었다 하노라. 어찌 하여 그러하냐 하면, 머리에 쓴 말과 같이 시간적 계속과 공간적 발전으로 되어 오는 사회활동 상태의 기록인 고로, 시·지·인 삼자는 역사를 구성하는 삼대 원소라. 일례를 들자면 신라가 신라됨은 박·석·김 삼성과 돌산고허 등 육부의 「인」으로서 일뿐이 아니라, 또한 경상도인 기「지」와 고구려·백제의 동시인 기「시」로써 신라가 됨이니, 만일 그보다 진하여 이천년 이전의 왕검(왕검)과 같은 년대거나, 강하여 이천 년 이후 금일의 우리와 같은 시국이면, 비록 혁거세(혁거세)의 성지에, 육부인의 질직에, 계림의 본강을 가질지라도, 당시에 되던 신라와 꼭 같은 신라가 될 수 없으며, 또 신라의 위치가 구라파(유럽)에 놓였거나 아불리가(아프리카)에 있었을지라도, 또한 다른 면목의 나라는 될지언정 신라는 되지 않았으리니, 이는 지명한 리거늘, 이왕의 조선의 사가들은 매양 그 짓는바 역사를 자가목적의 희생에 공하여, 도깨비도 뜨지 못한다는 땅 뜨는 재주를 부리어, 졸본을 떠다가 성천 혹 영변에 놓으며, 안시성을 떠다가 용강 혹 안주에 놓으며, 아사산을 떠다가 황해도의 구월산을 만들며, 가슬라를 떠다가 강원도의 강릉군을 만들어, 이와 같은 허다한 지의 빙자가 없는 역사를 지어, 더 크지도 말고 더 작지도 마라 한 압록강 이내의 이상적 강역(『아방강역고』왈불대불소 극부제심)을 획정하려 하며, 무극(무극)·일연(일연) 등 불자가 지은 사책에는 불법의 일자도 유입하지 않은 왕검시대부터 인도의 범어로 만든 지명 인명이 충만하며, 김부식(김부식) 등 유가가 적은 문자에는 공·맹의 인의를 막시하는 삼국 무사의 구중에서 경전의 사구가 관용어 같이 전송되며, 『삼국사열전』에 누백년간 조선의 전토의 인심을 지배하던 영·술·안·남 사대성의 논설은 볼 수 없고, 지나(중국) 유학의 일학생인 최치원(최치원)만 진진히 서술하였으며,
『려사제강』에 원효(원효)·의상(의상) 제 거철의 불학에 영향된 고려 일대의 사상계의 어떠함은 볼 수 없고, 왕태조 통일 이전에 죽은 최응(최응)이 그 통일 이후에 올린 간불만 적히어, 이와 같은 허다한 시의 구속을 받지 않는 역사를 지어, 자가의 편벽한 신앙의 주관적 심리에 부합하려 하며, 심한 경우에는 「인」까지 무하여, 신라의 김왕을 인도의 찰제리종(『삼국유사』)이라 하며, 고구려의 추모왕을 고신씨후(『삼국사기』)라 하며, 거기다 조선 전 민족을 진한유민(『동국통감』·『삼국사기』 등) 혹 한인지동래자『동사강목』)라 하기까지 하였다. 이조(조선) 태종에 이르러서는 더욱 차등 맹목파의 급선봉이 되어, 조선사상의 근원되는 서운관의 문적을 공자(공자)의 도에 위배된다 하여 일거의 화에 던졌다.
이두형(이두형)[이조(조선) 정조시인?]이 가로되, 「근일의 어느 행상과 묘지명을 보든지, 그 서중의 주인이 반드시 용모는 단엄하며 덕성은 충후하며 학문은 정·주(정자·주자)를 종하며 문장은 한·유(한유·유종원)를 상하여 거의 천편일률이니, 이는 기인을 무할 뿐 아니라 기문도 가치가 없다.」 하였으니, 이는 개인 전기의 실실에 대한 개탄 뿐이나, 이제 존군천민의 춘추부월 하에서 자라난 후인들이 그 심습으로 삼국 풍속을 이야기하며, 문약 편소로 자안하는 이조(조선) 당대의 인신들이 주관으로 상고 지리를 그릴 새, 이에 조선(단군)이나 부여나 삼국이나 동북국이나 고려나 이조(조선)-오천년 이래 전조선이, 거의 한 도가니로 부어낸 것 같이, 지면의 창축을 따라 민족활동의 승강한 점이나 시대의 고금을 쫓아 국민사상의 갈린 금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크롬웰」이 화사가 자기의 상을 그릴 때에 그 좌목상의 「혹」을 뺌을 불허하여 가로되, 「나를 그리려면 나의 본면대로 그리라」 하였으니, 이 말은 화사의 납도함만 가척함이 아니라 곧 자기의 진상을 잃을까 함이거늘, 조선사를 지은 이왕의 조선의 사가들은 매양 조선의 「혹」을 베고 조선사를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네들의 쓴 안경이 너무 철면인 고로, 조선의 눈이나 귀나 코나 머리 같은 것을 「혹」이라 하여 베어 버리고 어디서 무수한 「혹」을 가져다가 붙였다. 「혹」 붙인 조선사도 이왕에는 읽는 이가 너무 없다가, 세계가 대통하면서 외국인들이 왕왕 조선인을 만나 조선사를 물으면, 어떤 이는 조선인보다 조선사를 더 많이 아는 고로 참괴한 끝에 돌아와 조선사를 읽는 이 있도다. 그러나 조선인이 읽는 조선사나 외국인이 아는 조선사는 모두 「혹」 붙은 조선사요, 옳은 조선사가 아니었다.
이왕에 있는 기록이 그와 같이 다 틀렸으면 무엇에 거하여 바른 조선사를 짓겠느냐? 사금을 이는 자가 일두의 사를 일면 일립의 금을 얻거나 혹 얻지 못하거나 하느니, 우리의 문적에서 사료를 구함이 이 같이 어려운 바라. 혹자는 조선사를 연구하자면 위선 조선과 만주의 등지에 지중을 발굴하여 허다한 발견이 있어야 하리라. 금석학·고전학·지리학·미술학·계보학 - 등의 학자가 쏟아져야 하리라 하는 운운이 많으나, 이도 그러하거니와 현금에는 위선 구급의 방법으로 존재한 사책을 가지고 득실을 평하며 진위를 교하여 조선사의 전도를 개척함이 급무인가 하노라.
삼. 구사의 종류와 그 득실의 약평
조선의 역사에 관한 서류를 치자면 신지부터 비롯되었으니, 신지는 권람(권람) 응제시에서 단군시 사관이라 한 자라. 그러나 나로서 보건대, 단군은 곧 수두(소도)임금이요 신지는 인명이 아니라 곧 수두 임금의 수좌인 관명의 신지니 (소도와 신지의 상설은 사상사에 보임), 역대의 신지들이 매양 십월 수두 대제에 우주의 창조와 조선의 건설과 산천지리의 명승과 후인의 감계할 일을 들어 노래하더니, 후세의 문사들이 그 노래를 혹 이독문으로 이를 편집하며, 혹 한자의 오언시로 이를 역등하여 왕궁에 비장한 고로, 신지비사 혹 해동비록 등 명칭이 있었더라.
그 적은 바가 사실보다 잠언이 많아서 석인이 왕왕 예언의 일류로 보았으나, 이조(조선) 태종이 유학을 중심하고 그밖에 일체를 배척하여 이단시하는 문자를 모두 소화할 때, 신지도 그때에 액운을 면치 못하여 겨우 『고려사』 「금위제전」 에 적힌 여칭추극기 칭간부소량 추자오덕지 극기백아강 수미균평위 흥방정태평 조강칠십국 뢰덕호신정 약폐삼유지 왕업유쇠경주1)이라 한 것 열 쪽만 전하였다.
만일 그 전부가 다 남아 있으면 우리의 고사연구에 얼마나 대력을 주리오. 북부여는 왕검 이후 그 자손들이 서로 그 보장을 지키어 태평 은부로서 자랑하여(진서부여전 기국은부 자선세이래 미상파괴) 가관할 사료가 많았으나 모용외(모용외)의 난에 그 국명과 함께 망실하고 고구려는 동명성제·대무신왕의 제에 사관이 조선 상고부터 고구려 초엽까지의 정치상 사실을 기재하여 『유기』라 이름한 것이 백권이었더니, 위장 관구검(관구검)의 난에 피탈하였으나, 단군왕검의 명과 삼한·부여의 약사가 『위서』에 구재함은 위인이 『류기』에서 주워간 바며, 그 뒤에 백제 중엽에 고흥(고흥) 박사가 서기를 지으며, 고구려 말엽에 이문진(이문진) 박사가 신집을 지으며, 신라는 진흥대왕의 전성시대에 거칠부(거칠부)가 신라 고사를 저술하여 삼국이 다 일대의 전고를 비하였으나, 금일에 그 편언척자도 끼친 자가 없으니 이는 천하만국에 없는 일이라. 역사의 영이 있다 하면 처참의 루를 뿌리리라.
이상의 말한 바는 다 일종의 정치사이거니와 려·제(고구려·백제) 망후에 신라는 무를 언하고 문을 수하여 상당한 저사가 간출하였으니, 무명씨의 선사는 종교사로 볼 것이며, 위홍(위홍)의 향가집은 문학사로 볼 것이며, 김대문(김대문)의 고승전과 화랑세기는 학술사로 볼 것이니, 사학이 얼마큼 진보되었다 할 것이나 이것들도 모두 몰자의 비가 되었다.
고려에 와서는 작자의 성명을 알 수 없는 『삼한고기』·『해동고기』·『삼국사』 등과 김부식(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일연)의 『삼국유사』가 있었으나, 금의 전하는 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뿐인데, 그 전부전의 원인을 생각하건대, 김부식(김부식)·일연(일연) 양인만의 저작이 우승하여 이것만 전한 것이 아니라, 대개 고려 초엽부터 평양의 정도하고 진하여 북부에 고강을 회복하자는 화랑의 무사가 일파가 되며, 사대로 국시를 삼아 압록강 이내의 편안을 주장하는 유교도가 일파가 되어, 양파가 논봉을 마하여 대치한 지 수백년만에, 불자 묘청(묘청)이 화랑의 사상에다가 음양가의 미신을 보태어, 평양에 거병하여 북벌을 실행하려다가 유도의 김부식(김부식)에게 패망하고, 김부식(김부식)이 이에 그 사대주의를 근본하여 『삼국사기』를 지은 것이라. 고로 동·북 양 부여를 빼어 조선문화의 소자출을 진토에 묻으며, 발해를 버려 삼국 이래 결정된 문명를 초개에 던지며, 이문과 한역의 구별에 어두워 일인이 수인 되고 일지가 수지된 자가 많으며, 내이나 외적의 취사에 홀려서 전후가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한 자가 많아 거의 사적 가치가 없다 할 것이나, 불행히 그 뒤 미기에 고려가 몽고(몽골)에 패하여 홀필열(쿠빌라이)의 위풍이 전국을 진경하여 황경·제궁 등의 명사가 철폐하며 해동천자의 팔관락부가 금지되고, 유래 문헌에 만일 독립자존에 관한 자 있으면 일체로 기휘가 될 때에, 역사의 허다 저작 중에 유일한 사대사상의 고취자인 김부식(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그 부용인 『삼국유사』가 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고려 당대에 사승을 말하면, 고려 말세에 군신들이 고종 이전에의 국세 강성하던 때의 기록은 더욱 몽고(몽골)의 기악를 촉할까 공하여 산삭하며 혹 도개하고, 오직 비사 후폐로 북방 강국 등에게 복사하던 사실을 부연 혹 위조하여 민간에 전포하더니, 차등 기록이 곧 이조(조선) 정인지(정인지)가 찬술한 『고려사』의 람본이 되었고, 이조(조선) 세종이 비상히 사책에 류의하였으나, 다만 그 할아비인 태조와 아비인 태종이, 호두재상 최영(최영)의 북벌군 중에서 반하여, 사대의 기치를 들고 혁명의 기초를 세운 고로, 자신이 권근(권근)·정인지(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조선사략』·『고려사』·『고려사절요』 등을 편찬할 새, 몽고(몽골)의 압박을 받던 고려 말엽 이전의 조선의 각종 실기에 거하여 사를 짓지 못하고, 몽고(몽골)의 압박을 받은 이후 외국의 도미한 문자와 위조한 고사에 거하여 사를 지어, 구차히 업을 졸하고, 정작 전대의 실록은 인간에 전포됨을 불허하고 규장각 내에 비장으로 두었다가, 임진왜란(임진왜란, 1592)의 병화에 몰소하였고, 그 뒤에 세조가 단종의 위를 탈하고, 만주 침략의 몽을 포하여 강계의 둔병을 경영하다가, (일) 자가 태조의 존명건국의 주의에 충돌되어 제신의 간쟁이 분망하며, (이) 지나(중국)대륙의 용무음지한 명주 성조가 있어 조선에 대한 정찰이 엄밀하며, (삼) 마침내 명사 장령(장녕)이 엄중히 둔병의 이유를 힐문함으로, 세조가 그 상무희공의 심이 운소하고 조선 문헌의 정리로 자임하여, 불경을 인하며 유학을 장하는 이외에, 사료 수집에도 전력하여 조선 역대 전쟁사인 동국장감과 조선풍토사인 『동국여지승람』을 편술하고, 그 이외에도 허다한 서적을 간행하니, 비록 대다한 공헌은 없으나 미소한 노적은 있다 할 것이며, 선조·인조 이후에는 유교계에 철학·문학의 거자가 배출되며, 사계도 차차 진보되어, 허목(허목)의 단군·신라 등 각 세기가 너무 간략하나 왕왕 독득의 견이 있으며, 유형원(유형원)이 비록 사에 관한 전저가 없으나 역대 정치제도를 논술한 『반계수록』이 또한 사계에 비익이 적지 않으며, 한백겸(한백겸)의 「동국지리설」이 비록 수십행에 불과한 간단한 논문이나 일반 사학계에 대광명을 열어, 후래 정약용(정약용)의 『강역고』나 한진서(한진서)의 「지리지」나 안정복(안정복)의 『동사강목』에 부재한 강역론이나 그 외에 각가의 조선역사·지리를 설하는 자 모두, 한(한백겸) 선생의 그 간단한 지리설를 부연하였을 뿐이다.
나로서 보건대, 그 지리설 중에 삼한과 조선을 분개함이 범엽(범엽)이 전한 「동이열전」의 지리를 설명함에는 족하나, 이로써 조선 고대 삼천년 간의 지리를 단정하여 「아국 자고 한강이남 위삼한 한강이북 위조선」이란 결론을 내림은 너무 맹장적이요 무단적이라 하노라.
이는 선생이 삼신·삼경·삼한·삼조선의 연락적 관계와 발조선·발숙신·부여조선·예맥조선·진국·진국·진번조선·진한마립간·마한·모한 등의 동음이역됨을 모르므로 이 같은 대착오가 있음이나, 그러나 「동이열전」에 보인 삼한의 위치는 선생으로부터 비로소 간명히 부석하여, 이왕에 사의 기록만 있고 사의 연구가 없었다고 할만한 조선사계에서, 선생이 처음 사학의 단서를 열었다 하여도 가할 것이다.
안정복(안정복)은 종신을 역사 일문에 노력한 오백년래 유일한 사학 전문가라 할지나, 그러나 다만 산야의 한유로서 서적의 열람이 부족하여 『삼국사기』 같은 것도 그 만년에야 겨우 인가에서 수서한 책의 오자 많은 것을 얻어 보았으므로, 그 저술한 『동사강목』에 궁예(궁예)의 국호를 마진기라 한 소화를 썼으며, 지나(중국) 서적 중에도 참고에 필요한 『위략』이나 『남제서』 같은 것에 존재함을 몰라서 고루한 언구가 적지 않으며, 게다가 시대에 유행하는 공구(공구, 공자) 『춘추』, 주희(주희) 『강목』의 과구에 빠져 「기자본기」 밑에 군과 부여를 부용으로 하며, 신라 종국 끝에 궁예(궁예)와 왕건(왕건)을 참주로 한 망발도 있고, 너무 황실 중심의 주의를 고수하여 정작 민족 자체의 활동을 무시함이 많았다. 그러나 연구의 정밀은 선생의 이상 될 이 없는 고로, 지지 와오의 교정과 사실 모순의 변증에 가장 공이 많다 하여도 가할 것이다.
유혜풍(유혜풍)의 『발해고』는 대씨 삼백년간 문치무공의 사업을 수록하여 천여년 사가의 압록강 이북 창기한 결실를 추보하며, 이종휘(이종휘)의 『수산집』은 단군 이래 조선 고유한 독립적 문화를 영가하고, 김부식(김부식) 이후 사가의 노예사상을 갈파하여, 특유한 발명과 채집은 없다 하여도 다만, 이 한 가지로도 또한 불후에 수할 것이다. 한치윤(한치윤)의 『해동역사』는 오직 지나(중국)·일본 등 서적 중에 보인 본사에 관한 문자를 수집하여 거연이 거질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삼국사』에 빠진 부여·발해·가락·숙신 등도 모두 일편의 세기가 있으며, 『동국통감』에 없는 저근(저근)·사법명(사법명)·혜자(혜자)·왕인(왕인) 등도 각기 기행의 전기가 있으며, 궁어·문자·풍속 등의 분문이 있고, 게다가 그 조카 진서(한진서)씨의 「지리속」이 있어 후인 고증의 노를 들 뿐 아니라, 또한 사학에 두뇌가 있다 할 것이나 다만, 제(일) 너무 자구간에서 조선에 관한 사실을 찾다가 민족대세의 관계를 잃어, 곧 부루(부루)와 하우의 국제 대교제로 볼 오월춘추의 주신의 창수사자와 이천년간 흉노와 연과 삼조선과 혹 화 혹 전한 전후 대사를 다 궐루하며, 제(이) 유교의 위력에 눌리어 고죽국이 조선족의 분계됨을 발견하지 못하는 동시에 백이(백이)·숙제(숙제)의 성명을 탈락하며, 제(삼) 서적 선택의 부정이니, 『진서』 속철전으로 보면 우살백익·태갑살이윤 등을 기한 『죽서기년』이 진본이요, 현존한 『죽서기년』은 위서거늘, 이제 그 위서를 논박 없이 그대로 기재하며 사마상여(사마상여)의 『무릉서』는 당인의 위조거늘, 그대로 신용하며, 이밖에 지나인(중국인)이나 일본이 없는 사적을 만들어 본국을 무욕한 자를 많이 그대로 수입한 것이 해서의 결감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이조(조선) 일대의 사를 적은 역사로 말하면, 내가 일찍 정종조 한 때에 기록을 만든 『수서』하는 승두세자로 쓴 이백권의 거질을 보았었다. 만일 관서의 『국조보감』·『조야첨재』 등을 시하여 허다한 사가가 저술한 사서까지 치면 기백의 차궤를 절할 것이다. 나는 일찍 고려 이전 역사의 쌓인 의문부터 결정하려하여, 이태조 이하 사실을 적은 역사로는 『조야집요』·『연려실기술』 등 몇몇 책을 대강 우목한 이외에는 자세히 독람한 것이 없으므로 아직 그 장단득실을 말하지 못하거니와, 대개 십지칠팔이 사색당전사됨은 단언할 것이니, 차부라, 이조(조선) 이래 수백년 조선인의 문화사업은 이에 끝이었도다.
이상에 열거한 역사의 서류를 재론하자면, 대개가 정치사들이요. 문화사에 상당한 자는 몇 못 됨이 일감이요, 정치사 중에도 『동국통감』·『동사강목』 이외에는 고금을 회통한 저작이 없고 모두 일왕조의 흥망전말로 글의 수미를 삼았음이 이감이요, 공구(공구, 공자)의 『춘추』를 사의 극칙으로 알아 그 의례를 효빈하여 존군억신을 주하다가, 민족의 존재를 잊으며 숭화양이를 주하다가 말내에 자국까지 양하는 벽론에게까지 이름이 사감이요, 국민의 자감에 공하려 함보다 외인에게 도미하려 한 의사가 더 많아[이수산(수산 이종휘) 일파를 제하고] 자가의 강토를 촌촌척척이 할양하여 말내에 건국시대의 수도까지 모르게 하였음이 오감이다. 우리의 사학계가 이와 같이 맹농파벽의 각병을 모두 가져 정당한 발달을 얻지 못함이 무슨 까닭이오? 너무 빈번한 내란외환(비교적 구안한 이조(조선) 일대는 제하고) 등 천연화재에 계한 자는 그만두고라도 인위의 장초로 이룬 자로 들건대,
(일) 신지 이래 역사를 비장하던 버릇이 역사의 고질이 되어, 이조(조선)에서도 중엽 이전에는 『동국통감』·『고려사』 등 수종 관행본 이외에는 사사를 금하였음으므로, 이수광(이수광)이 내각에 들어가서 고려 이전의 비사를 많이 보았다 함이며, 이언적(이언적)이 「사벌국전」을 지어 붕우에게 보임을 기함이라. 현대 왕조의 득실을 기록하지 못하게 함은 타국에도 혹 유하거니와 왕고사의 사저나 사람까지 금함은 아국에 독유하였었다. 그리하여 역사를 읽는 이가 결하였으며,
(이) 송도를 지나다가 만월대를 쳐다보아라. 반편의 와가 끼쳤더냐? 일개 초가 남았더냐? 막막한 전토에 이름만 만월대라 할 뿐 아니더냐? 차부라. 만월대는 이조(조선)의 부행되어 멀지 않은 고려조의 궁궐로 무슨 병화에 탔다는 전설도 없는 데 어찌 이와 같이 무정한 유허만 남았느냐? 이와 동일한 예로 부여에서 백제의 유물을 찾을 수 없으며 평양에서 고구려의 구형을 볼 수 없도다. 이에서 나오는 결론은 후기한 왕조가 전조를 미워하여 역사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파양하며 소탕 시키기를 위주로 하므로, 신라가 흥함에 려·제(고구려·백제) 양국사가 볼 것 없게 되며, 고려가 작함에 신라사가 볼 것 없게 되며, 이조(조선)가 대함에 고려사가 볼 것 없게 되어, 매양 현재로써 과거를 계속하려 아니하고 말살하려 하였도다. 그리하여 역사에 쓰일 재료가 박약하였으며,
(삼) 현종이 「조총의 길이가 얼마냐?」 함에, 유혁연(유혁연)이 두 손을 들어 「요만」하다 형용하였다. 기주관이 그 문답의 정형을 받아쓰지 못하여 붓방아만 찍었다. 유혁연(유혁연)이 돌아보며 「상문조총지장어유혁연 연거수척여 이대왈여시라 쓰지 못하느냐?」고 질책하였다. 숙종이 박태보(박태보)를 국문할 새, 「이리 저리 잔뜩 결박하고 뭉어리 돌로 때려라.」 함에 주서 고사직(고사직)이 서슴없이 「필자형박지 무우석격지」라 썼다. 그래서 크게 숙종의 칭상을 받았다 한다. 이것들이 궁정의 가화로 전하는 이야기지만, 반면에서 남의 글대로 내 역사를 기술하기 힘듦을 볼 것이다. 국문이 나기도 늦게 낳지마는, 나온 뒤에도 한문저술의 역사만 있음이 또한 기괴하도다. 이는 역사전술의 기구가 부적함이며,
(사) 회제(회재 이언적)나 퇴계(퇴계 이황)더러 원효(원효)나 의상(의상)의 학술사상 위치를 물으면 일구의 대답을 못할 것이며, 원효(원효)와 의상(의상)에게 소도나 나을의 신앙적 가치를 말하면 반분의 이해를 못할 것이며, 이와 비례로 이조(조선)의 인사들이 고려시대 생활의 취미를 모르며, 고려나 삼국의 인사들은 또 삼한 이전 생활의 취미를 모를 만큼, 반식·거처·신앙·교육 등 일반사회의 형식과 정신이 모두 격변하여, 금일 「아메리카」 사람이 명일 「러시아」 사람됨과 같은 현격이 있으니, 이는 역사사상의 연락이 단절함이라. 어디서 과거를 소구할 동기가 생기리오. 우 수종의 원인으로 사학이 발달되지 못한 것이다.
삼백년간 사색의 당전이 거대하게 국가에 해를 끼쳤다 하나, 당론이 극렬할수록 각기 아시피비를 전파하기 위하여 사가의 기술이 성행하며, 당의 시비가 매양 국정과 관계되므로, 따라서 조정의 득실을 논술하게 되고, 부지중 역사 사저의 금이 타파되어, 마침내 한백겸(한백겸)·안정복(안정복)·이종휘(이종휘)·한치윤(한치윤) 등 사학계 기개 인물들을 산출함도 그 결과이라. 혹은 「사색 이후의 사는 피차의 기록이 서로 모순되어 그 시비를 분석할 수 없어 가장 사의 난관이 된다」하나, 그러나 피등의 시비가 무엇이냐 하면, 모당이 이조(조선)의 충신이니 역적이니, 모 선생이 주학의 정통이니 위통이니 하는 문제들 뿐이니,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보면 상인을 휘하여 군왕의 시체를 두 동강이 낸 연개소문(연개소문)을 쾌남이라 할 것이며, 기견을 주장하여 명륜당 기둥에 공자(공자) 기평한 글제를 붙인 윤백호(윤백호)를 걸물이라 할 것이다. 고로 우리는 다만 냉정한 두뇌로서 회재(회재 이언적)·화담(화담 서경덕)·퇴계(퇴계 이황)·율곡(율곡 이이)의 학술상 공헌의 다과나 알고, 주자(주자)의 정통되는 여부는 희담이 될 뿐이며, 노론·소론·남인·북인의 분쟁이 정치상 미친 영향의 양악을 물을지니, 이조(조선)의 충노되는 여부는 몽예가 될 뿐이라.
지어 개인 사덕의 결점을 지적하여 남의 명예를 더럽히며, 혹 애매한 사실로 남을 구함하여 죽인 허다한 의안은, 그 반면에 당시 사회경알의 악습으로 민과 국을 해한 일종 가통한 사료됨을 볼 뿐이니, 만일 시어미의 역정과 며느리의 푸닥거리 동류에 불과한 일에 일일이 재판관을 불러 그 곡직을 판결하려 하면, 이는「수편사르」의 이른바 「이웃집 고양이 새끼 낳았다는 보고」같아, 도리어 이로써 사계의 다른 중대한 문제를 한각할 염려가 있으니, 던져둠이 가하고, 빨리 지리의 관계라든지 사상계에 변동이라든지 국민생활의 관계라든지 민족 성쇠소장이라든지 등 대문제에 주의하여, 와를 정하며 진을 구하여 조선사학의 표준을 세움이 급무의 급무라 하노라.
사. 사료의 수집과 선택에 대한 상각
만일 한걸음 더 나아가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여야 되겠느냐 하면, 그 답안이 매우 곤난하지만 나의 경과부터 말하고자 한다.
거금 십육년 전에 국치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을 열독하면서, 사평체에 가까운 「독사신론」을 지어 『대한매일신보』 지상에 발포하며, 이어서 수십 학생의 청구에 의하여 지나(중국)식의 연의를 본받은 비역사 비소설인 「대동사천년사」란 것을 짓다가 양역이 다 사고로 인하여 중지하고 말았었다. 그 논평의 독단임과 행동의 대담임을 지금까지 자괴하거니와 그 이후 얼마큼 분면한 적도 없지 않으나 나아간 것이 촌보쯤도 못된 원인을 오늘에 국내 일반 독사계에 앙소코자 하노라.
(일) 고비의 참조에 대하여는,
일찍 『서곽잡록』(저자 실명)을 보다가 「신립문 선춘영하 유고구려구비 잠견인 도두만강 모본이래 소가변식자 불과삼백여자 기왈황제 고구려왕자칭야 기왈상가 고구려대신지칭야」 일절이 있음을 보고 크게 기뻐서 만주 심산에 천고고사의 결을 보할 만한 단비가 이것 하나 뿐만이 아니라 하고, 해외에 나오던 날부터 고구려·발해의 구강을 답사하리라는 회포가 가장 깊었다. 그러나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프스크」를 왕래하는 선객들에게 그 해로 중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석혁산악에 흘립한 윤관(윤관)[혹은 연개소문(연개소문)]의 기공비를 바라보았다는 말이며, 봉천성성에서 간접으로 이통주를 유람하였다는 내인에게서 해읍 동편 칠십리에 유존한 해부루(해부루)의 송덕비를 보았노라는 이야기며, 발해 고도로부터 오는 친우가 폭광 삼십리인 경박호(고사에 홀한해)의 전면에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와 견줄만한 만장비폭을 구경하였다 하며, 해룡현으로 나오는 과객에게서, 죽어서 용이 되어 일본 삼도를 함몰하겠노라 한 문무대왕의 유묘를 첨배하였다는 … 등이 나에게는 귀로 들을 인연만 있었고 눈으로 볼 기회는 없었다.
일차 사·오의 우인과 동행하여 압록강 상의 집안현 곧 제이 환도성을 별람함이 나의 일생에 기념할만한 장관이라 할 것이나, 그러나 로비단핍으로 능묘가 모두 몇인가 세어 볼 여가도 없어 능으로 인정할 것이 수백이요, 묘가 일만장 내외라는 억단을 하였을 뿐이다.
촌인이 주신 죽엽 그린 김척과 해지 주거하는 일인이 박아 파는 광개토비문을 가격만을 물어 보았으며, 잔파(그 지상에 출한 부분만)한 수백의 왕릉 가운데 천행으로 유존한 팔층석탑 사면방형의 광개토왕릉과 그 우변의 제천단을 붓으로 대강 모본하여 사진을 대하며, 그 왕릉의 광과 고를 발로 밟아 신체로 견주어 측척을 대하였을 뿐이다.(고십장 가량이요 하층의 주위는 팔십발이니, 다른 왕릉은 상층이 잔파하여 고는 알 수 없으나 그 하층의 주위는 대개 광개토왕의 릉과 동일) 왕릉의 상층에 올라가 석주가 섰던 자취와 복와의 남은 파편과 드문드문 서 있는 송백을 보고, 『후한서』에 「고구려인금은재백 진어후장 환석이축 역종송백」주2)이라 한 간단에 과한 문구를 비로소 충분한 해석을 얻고 수백원이 있으면 묘 한 장을 파 올 것이오, 「수천원 혹 수만원이면 릉 한 개를 파 볼 것이라. 그리하면 수천 년 전 고구려 생활의 활사진을 보리라」 하는 몽만 하였었다.
차부라. 이와 같은 천장비사의 보고를 만나서 나의 소득이 무엇이었던가? 인재와 물력이 없으면 재료가 있어도 나의 소유가 아님을 알 것이다. 그러나 일일지간 그 외부에 대한 조천한 관찰만이지만, 고구려의 종교·예술·경제력 등의 여하가 안전에 활현하여, 당지에 「집안현의 일람이 김부식(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독함보다 낫다」는 단안을 내리었다. 후래에 항주 도서관에서, 아방 금석학자 추사 김정희(추사 김정희)가 발견한 유적을 가져다가 지나인(중국인)이 간행한 『해동금석원』을 보니, 나말여초의 사조와 속상의 참고될 것이 많으며, 한성 일 우인이 보낸 총독부 발행에 계한 조선고답도본도, 그 조사한 동기의 여하나 주해의 견강한 기부분을 제하면, 또한 우리 고사연구에 보조될 것이 많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우리 한서생배의 손으로는 도저 성취치 못한 사료임을 자각하겠다.
(이) 각서의 호증에 대하여는,
(갑) 일찍 『고려사』 「최영전」 에 거한즉 최영(최영)이 가로되, 「당이 삼십만병으로 고구려를 침함에 고구려 승군 삼만을 발하여 차를 대파하다.」 하였으나 『삼국사기』 오십권 중에 이 사실이 보인 곳이 없으며, 그러나 승군이 무엇이냐 하면, 서긍(서긍)의 『고려도경』에 말하되, 「재가화상은 가사도 입지 않으며, 계율도 행치 않으며, 조백으로 요를 속하고 도선하여 걸으며, 처를 취하며, 자를 양하며, 기용의 부대와 도로의 소제와 구혁의 개치와 성실의 수축 등 공사에 복역하며, 변수에 적경이 있으면 수시로 단결하여 부전하는데, 중간에 계단(거란)도 차배에게 패하니, 기실은 형여의 역인인데, 이인이 그 수발을 곤삭한 고로, 화상이라 명함이라.」 하니 이에서 승군의 면목을 대강 알 수 있으나, 그러나 그 래역이 어디서 시하였느냐의 의문이 없지 않다. 이에서 『통전』·『신당서』 등 각서에 거하면 「조의(혹왈 백의)」 선인이란 관명이 있고, 『고구려사』에 명임답부를 연나조의라 하고, 『후주서』에는 조의선인을 예속선인이라 하였으니, 선인·선인은 다 국어의 「선인」으로 한자로 음역함이요, 조의라 혹 백의라 함은 도경이 이른바 「조백」으로 요를 속하므로 명함이니, 선인은 신라고사의 국선과 같은 종교적 무사단의 단장이요, 승군은 국선의 수하가 속한 단병이오. 승군이 재가화상이라 함은 후인이 가한 별명이니, 서긍(서긍)이 외국의 사신으로 아국에 와서 이것을 보고 그 단체의 행동을 서술할 새, 그 근원을 모르므로 형여의 역인이라는 췌측의 명사를 올림이라. 이에 『고려사』로 인하여 『삼국사』에서 빠진 승군을 알게 되며, 『고려도경』으로 인하여 『고려사』에 자세하지 않은 승군의 성질을 알게 되며, 『통전』·『신당서』·『후주서』·『신라고사』 등으로 인하여 승군과 선인과 재가화상이 동일한 단체의 당도됨을 알게 되니, 다시 말하면, 당의 침입하는 삼십만 대병이 고구려의 종교적 무사단인 선인군에게 대패하였다는 기십자의 약사를, 육칠종 서적 수천권을 섭렵한 결과에서 비로소 안출함이오.
(을)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하다가 안시성에서 활에 맞아 눈을 상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후인이 매양 사에 올리며, 이색(이색)의 정관(당태종의 연호) 음에도 「나지현화(목)낙백우(시)」라 하여 그 실연함을 증하였으나, 그러나 김부식(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지나인(중국인)의 『신·구당서』에 보인 데가 없음은 하고이냐? 만일 사실의 진위를 불문하고 일은 취하고 일은 사하다 가는 역사상의 위증죄를 범할지라. 고로 다만 「당태종의 눈이 상한 사실을, 지나(중국)의 사관이 국치를 휘하여 『당서』에 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 해답을 구하더니, 종래에 명인 진정(진정)의 양산묵담에 거한즉, 송태종이 계단(거란)을 치다가 류시에 상하여 둔귀하여 수년여에, 필경 그 시창이 발하여 붕하였다 하니, 이를 송사나 요사에 보이지 않음은, 사건이 누백년 후 진정(진정)의 고증에 발견된 바라. 이에 지나인(중국인)은 그 군신이 외족에게 패하여 상하거나 죽거나 하면, 이를 국치라 하여 사에 휘닉하는 실증을 얻어, 나의 가설을 성립하였다. 그러나 지나인(중국인)의 국치휘닉하는 버릇이 있다 하여, 드디어 당태종이 안시성에 활에 상함이 확실하다는 실증이 못되므로, 다시 『신·구당서』를 취하여 상열한즉, 「태종본기」에 당태종이 정관 십구년 구월에 안시성에서 회군하였다 하고, 「유계전」에 그 동년 십이월에 태종의 병세가 위급하므로 유계(유계)가 심히 비구하였다 하고, 「본기」에 정관 이십년에 상의 병이 전유치 못하여 태자에게 정사를 위하다 하고, 정관 이십삼년 오월에 상이 붕하였다 하였는데, 그 붕락의 원인은 강목에는 이질이 다시 증극함이라 하고,
『자치통감』에는 요동서부터 질옹의 환이 있었다 하니, 대개 존자와 친자의 피욕을 휘하여 주천자가 정후(정후)의 활에 상함과, 노은공·소공 등이 피살함과 피축함을 춘추에 쓰지 않은 공구(공구, 공자)의 벽견이, 지나(중국) 역사가의 습심이 되어, 당태종의 이미 빠진 눈을 류리편으로 가리며, 그 임상 병록의 보고를 모두 딴 말로 바꾸어, 전창이 내종이 되며 안통이 항문병이 되며, 전쟁의 부상으로 죽는 자가 이질이나 늑막염의 환병에 죽은 기록으로 하였다.
그러면 『삼국사기』에는 어찌 실제대로 적지 않았는가? 이는 신라가 려·제(고구려·백제) 양국을 미워하여 그 명예의 역사를 소탕하여, 위병을 깨친 사법명(사법명)과 수군을 물린 을지문덕(을지문덕)이 다 도리어 지나(중국)사로 인하여 그 성명을 전케 됨이니, [을지문덕(을지문덕)이 『삼국사기』에 보임은 곧 김부식(김부식)이 지나사(중국사)에서 채용한 고로, 그 논평에 「을지문덕(을지문덕)이 중국사가 아니면 알 리가 없다」 함] 당태종이 눈을 잃고 달아남이 고구려전사에 특기할 명예인즉, 라인(신라인)의 발거함이 또한 사실 당유할 일이라.
그런즉 우리가 당태종의 눈이 빠진 일을 처음 전설과 『목은집』에서 의희하게 안출하여, 『신·구당서』나 『삼국사기』에 이것을 기재치 않은 의문을 깨칠 새, 진정(진정)의 양묵담에서 동류의 사항을 발견하며, 공구(공구, 공자)의 『춘추』에서 그 전통의 악습을 적발하고, 『신·구당서』·『통감강목』 등을 가져, 그 모호은미한 문구 속에서, 제일 당태종 병(이질 등)록 보고가 실실임을 갈파하며, 제이의 목은관정음(당태종의 눈 맞은 사실로 지은 시)이 신용할 만함을 증실하며, 제삼에 신라인이 고구려 승리의 역사를 훼멸하므로, 당태종의 전패 부상한 사실이 『삼국사기』에 빠지게 되었음을 단정하고, 이에 간단한 일결론을 얻으니, 이른바 「당태종이 보장왕 삼년에 안시성에서 눈을 상하고 도망하여 돌아가서, 당지에 외과의료의 불완전하므로 거의 삼십개월을 규통하다가, 보장왕 오년에 붕서하였다.」의 수십자더라. 이 수십자를 얻기에도 오육종 서적 수천권을 반복하며 출입하여 혹은 무의중에서 획득하며 혹은 유의중에서 안출하여 얻은 결과이니, 그 노역이 또한 적지 않았다.
승군의 래역을 모르면 무엇이 해되며, 당태종 부상한 사실을 안들 무엇이 이하기에, 이런 사실을 힘써서 탐소하느뇨? 하는 이가 있겠지마는, 그러나 사학이란 것은 개별을 수집하며 오전을 교정하여, 과거 인류의 행동을 활화하여 후인에게 끼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물며 승군 곧 선인군의 래역을 모르면, 다만 고구려가 당병 삼십만을 물리친 원동력 뿐 아니라, 곧 이 앞에 명임답부(명림답부)의 혁명군의 중심과, 강감찬(강감찬)이 계단(거란)을 깨친 군대의 주력이 다 무엇인지 모르며, 따라서 삼국부터 고려까지의 천여년 군제상 중요한 부분을 모를 지며, 당태종이 안통으로 죽은 줄을 모른다면 안시성 전국의 속결한 원인을 모를 뿐 아니라 신라와 당의 연맹된 공안이며, 당고종의 군신이 일절의 희생을 불고하고 고구려와 흥망을 겨룬 전제며,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휴수하게 된 동기인 것들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우에 거한 바는 그 일이의 예뿐이라. 이 밖에도 이 같은 사가 얼마인지 모를 것이니, 고로 조선사의 황무를 개척하자면, 도저히 일이인 기개년의 힘으로 완결할 바가 아님을 료해하였다.
(삼) 각종 각사의 해석에 대하여,
아국이 고대에 「후에닛기(페니키아)」인이 「이집트」의 상형자를 가져다가 「알파벳」을 만든 것 같이, 한자를 가져다가 리독문을 만들 때, 그 초창하던 처음에는 한자의 자음을 취한 것도 있고 혹 자의를 취한 것도 있으니, 『삼국사기』에 보인바 인명으로 보면, 「소지일명비처」라 함은 「빛」의 의가 소지가 됨이며 음이 비처됨이요, 「소나일명금천」이라 함은 「쇠내」의 의가 김천이 됨이며 음이 소나가 됨이요, 「거칠부(거칠부)일명황종」이라 함은 「거칠위」의 음이 거칠부(거칠부)가 됨이며 의가 황종이 됨이요, 「개소문(연개소문)일명개김」은 「신」의 음이 소문이 됨이며 의가 김이 됨이요, 「이사부(이사부)일명태종」은 「있위」의 음이 이사부가 됨이며 의가 태종(훈몽자회에 태를 「있」으로 훈함)이 됨이요.
지명으로 보면, 「밀성일운추화」라 함은 「밀무」의 음이 밀성이 되며 의가 추화가 됨이요, 「웅산일운공목달」이라 함은 곰대의 의가 웅산이 됨이며 음이 공목달이 됨이요, 「계립령일명마목령」이라 함은 「저름」의 음이 계립이 됨이며 의가 마목이 됨이요, 「모성일운아막성」이라 함은 「어미」의 의가 모가 됨이며 음이 아막이 됨이요, 「흑양일운금물노」라 함은 「거물라」의 「거물」의 의가 흑이 됨이며 음이 금물이 됨이며, 양과 노는 다 「라」의 음을 취함이요.
관명으로 보면, 「각간을 혹 발한」이라 함은 「불」의 의가 각이 되고 음이 발이 되며 간과 한은 다 「한」의 음을 취함이니 불한은 군왕의 칭이요, 누살을 혹 도사라 함은 「라」의 의가 도가 되고 음이 누가 되며 「살」의 의가 사가 되고 음이 살이 됨이니, 「라살」은 지방장관의 칭이요. 「말한·불한·신한」은 삼신에서 원한 자인데 의로서 천일 지일 태일이 되고 음으로서 마한·변한·진한이 됨이며, 「도가·개가·크가·소가·말가」는 오대신의 칭호인데 「도·개·크·소·말」 등은 의로 「가」는 음으로서 저가·구가·대가·우가·마가가 됨이라.
이 같은 세한 고증이 무슨 역사상의 대사가 되느뇨? 이것은 세한 듯하나 지지의 오도 이로써 교정할 수 있으며, 사료의 의도 이로써 첨보할 수 있으며, 고대의 문학부터 일체 생활상태까지 연구하는 열쇠가 될 것이니, 예를 들자면 해모수(해모수)와 유화(유화)왕후의 만나던 압록강이 어디냐? 금 압록이라 하면 당시 부여 서울인 합이빈(하얼빈)과 너무 멀고, 다른 곳이라면 다른 곳에 압록이 없어 그 의문을 깨치지 못하였더니,
제일보에 광개강토호태왕의 비의 압록강을 아리수라 함을 보고 압록의 명이 「아리」 곧 아리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
제이보에 『요사』의 「요 흥종의 압자하를 혼동강이라 개명」한 것을 보고 「압자」가 곧 「아리」인즉 「혼동강-즉 송화강-이 고대의 북압록강인가」의 가설을 얻었고,
제삼보에 『동사강목』 고이에 ‘『삼국유사』의「요하 일명 압록」 과 주희(주희)의 「여진기거압록강」으로 인하여 삼압록이 있다’ 함을 보고 송화가 고대 일압록됨을 알고 따라서 해모수(해모수) 부처가 만나던 압록이 곧 송화강임을 정하였다.
「마한전」에 「비리」를 건륭제의 삼한증록에는 만주의 「패륵(음 패리)」와 같이 관명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나는 쓰되, 삼한에 비리는 삼국 지리지 백제의 부리니, 비리부리는 다 「울」의 취음이요 도회의 의이니, 마한의 비리와 백제의 부리를 삼조하면 마한의 벽비리는 백제의 파부리요, 여래비리는 이릉부리요, 모노비리는 모량부리요, 감해비리는 고막부리요, 산도비리는 미동부리요, 고랍비리는 고막부리니, 비록 매양 차음 피의의 이역이 있으나 그 대략을 얻을 지며 인하여 조선이 관중과 싸우던 때에 산서성이나 영평부에 비이의 계를 둔바, 비이로 비리 곧 「울」의 역이라. 이에서 조선 고대의 「울」이 곧 산해관 이서까지에 있었음을 알지라. 고로 세한 고증이 역사상의 대사가 아울니나 도리어 역사상의 대사를 발견하는 연장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만일 다시 일보를 진하여 훈몽자회·처용가·훈민정음 등에서 고어를 연구하고, 『삼국유사』에 쓰인 향가에서 리독문의 용법을 연구하면, 역사상 허다한 발견이 있을 것이다. 필자가 일찍이 이에 유의한 바 있었으나, 해외에 나온 뒤부터 일권의 서적을 사기가 심난하여 십년을 두고 『삼국유사』를 좀 보았으면 하였으나 또한 불가득이었다.
(사) 위서의 변별과 선택에 대하여
아국은 고대에 진서를 분기한 때[이조(조선) 태종의 분서 같은]는 있었으나 위서를 조작한 일은 없었다. 근일에 와서 천부경·삼일신지 등이 처음 출현하였으나 누구의 변박이 없이 고서로 신인할 이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국 서적은 각씨의 족보 중 그 조선의 사를 혹 위조한 것이 있는 이외에는, 그리 진위의 변별에 애쓸 것이 없거니와, 다음 접양된 인국인 지나(중국)·일본 양국은 종고로 교제가 빈번함을 따라서 우리 역사에 참고될 서적이 적지 않다. 그러나 위서 많기로는 지나(중국)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다. 위서를 변인치 못하면 인증치 않을 기록을 아사에 인증하는 착오가 있다. 그렇지만은 그 위가 분량이 있나니, 일은 위중의 위이니, 예를 들면 『죽서기년』에 진본이 망하고 위작이 출하였음은 전자에 이미 진술한 바이거니와, 구사가들이 늘 고기의 「단군 여요병립어무진」의 문에 의하여, 단군의 년대를 알고자 하는 이는 항상 요의 년대에 비교코자 하며, 요의 년대를 찾는 이는 『속강목』[김인산(김인산) 저]에 고준하나, 그러나 주소 공화 이전의 년대는, 지나(중국) 사가의 태조라 할만한 사마천(사마천)도 알지 못하여 그 『사기』 연표에 쓰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그보다 요원한 요의 연대리오. 고로 『속강목』은 다만 위『죽서기년』에서 거하여 적은 연대거늘, 이제 『속강목』을 거하여 고대의 연대를 찾으려 함은 도리어 년대를 흐림이며, 공안국(공안국)의 『상서전』에 「구려간맥」의 구로 인하여, 구려와 삼한이 주무왕과 교통하였음을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사기』 공자세가에 「안국위금황제박사조졸」이라 하였는데, 금황제는 무제이니, 무제를 「금황제」라 함은 사마천(사마천)이 무제의 죽어 시 받음을 못 본 까닭이요, 공안국(공안국)을 「조졸」이라 함은 사마천(사마천)의 생전에 안국(안국)의 죽음을 본 고로 적음일지라. 그러면 공안국(공안국)은 사마천(사마천)보다 먼저 죽고, 사마천(사마천)은 무제보다 먼저 죽음이 명백하거늘, 『상서전』 중에 무제의 자인 소제시대에 창설한 김성군 명이 있으니, 공안국(공안국)이 그 사후에 창설된 지명을 예언할 만한 복자라면 모르거니와,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면 『상서대전』의 위서됨이 또한 적확하고, 거기에 기록한 간·맥·구려 등의 위증임은 자연 명백할 것이다.
그는 진중의 위이니, 이것을 또 이로 분하면,
(갑)은 본서의 위증이니, 마치 『초학집』·『유학집』 등은 전겸익(전겸익)이 저한 실유한 글이지만, 그 집중에 쓴 아국에 관한 일은 대개 전겸익(전겸익)의 위조요 실유한 것 아닌 것이 많은 류가 이것이라. 그러나 이는 아사에 그 반박할 확증들이 있거니와, 만일 아사에 반박할 재료는 민멸하고 피사의 무안만 유전된 자가 있으면 다만 가설의 부인으로는 안되리니, 어찌하면 가할가?
석자에 장유(장유)가 『사기』 「무왕봉기자우조선」주3)을 변정할 새, 제일에 『상서』에 「아망위신복」을 들어, 기자(기자)가 이미 남의 신복이 되지 아니할 줄로 자서하였은즉, 무왕의 봉작을 받을 리가 없다는 전제를 세우며, 제이에 『한서』의 「기자피지우조선」을 들어 반고(반고)는 『사기』 지은 사마천(사마천)보다 충실하며 정밀한 역사가로서 천사에 쓴바, 기자봉작설을 빼었은즉 봉작은 사실 아니라고 단언을 내렸으니, 이는 인증이요, 삼국 이후 고려 말엽 이전[몽고(몽골) 입구 이전]에 우리 국세가 강성하여, 지나(중국)에 대하여 간과로 상견한 때도 피국에 보낸 국서에 비사가 많았으나, 그러나 제일에 타국이 견사하면 반드시 「래조」라 씀은 지나인(중국인) 병리적 자존성이니, 이는 근세 청조가 처음 서양과 통할 때에 영·로(영국·러시아) 제국의 통상한 사실을 모두 「모국 칭신봉공」이라 씀을 보아도 가지이니, 그 기록을 랑신할 수 없는 것이다. 제이 지나인(중국인)이 만든 열조시집·양조평양록 등 시화 가운데 조선 사람의 시를 가져다가 게재할 때에 늘 대담하게 일구일연을 도개하였음을 보니, 우리 역사 담록할 때에도 자구를 개하였음을 알 것이며, 제삼 몽고(몽골)의 위력이 아국을 진습할 때에 우리의 락부·사책 등을 가져다가 황도·제경·해동천자 등 자구를 모두 고친 사실이 『고려사』에 보였으니, 그 고친 기록을 다 리정치 못한 『삼국사』·『고려사』 등도 지나(중국)와 관계된 문자는 실록이 아님을 알 것이니, 이는 사증이오.
년전 김택영(김택영)의 『역사집략』과 장지연(장지연)의 『대한강역고』에, 신공여주 십팔년에 신라정복과 수인주 이년에 임나부 설치 등을 모두 『일본서기』에서 채입하여 그 굉박을 자랑하였으나, 그러나 신공 십팔년은 신라 나해의 사년이요, 나해 당년에는 신라가 압록강을 구경한 일도 적을 터인데, 이제 나해가 아리나예(압록강)를 가리켜 중서하였다 함은 무슨 말이며, 수인(수인)은 백제와 교통하기 이전에 일본 황제인즉, 백제의 봉직도 수입이 못된 때이니, 수인(수인) 이년에 임나국인에게 적견 이백필을 주었다 함은 어찌 된 말이뇨? 후 양개의 의문을 답하기 전에 그 양건의 기사가 자연히 부정되리니, 이는 이증이라. 이렇게 고인의 위증을 드러낼 것이다. 인으로 사로 또 리로 증하여 부합치 않으면 위록임을 알 것이며,
(을) 후인의 위증이니, 본서에는 원래 위증이 없는데, 후인이 문구로 증가하여 위증한 것이니, 마치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려하여 그 『사기』·『한서』·『후한서』·『삼국지』·『진서』·『남사』·『북사』 등에 보인 조선에 관한 사실을 가져다가 자가에 유익하도록 꾸밀 때, 안사고(안사고) 등을 시키어 곡필을 잡아 도개하며 첨보하여 변역하고 억주하여 사군의 연혁이 가로써 진이 되며 역대 양국의 국서가 더욱 본문대로 유전된 것이 없게 되었다. 이러한 증거는 본편 제이장 지리연혁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삼은 위중에 진이니, 마치 「관자」 같은 것은 관중(관중)의 작은 아니나 지나(중국) 육국시대의 저작으로, 조선과 제의 전쟁은 도리어 그 실을 전한 자이니, 위서로도 진서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할 것이다.
(오) 몽·만(몽골·만주)토 제족의 언어와 풍속의 연이니,
김부식(김부식)은 김춘추(김춘추)·최치원(최치원) 이래에 모화주의의 결정이니, 그 저한 『삼국사기』에 고주몽(고주몽)은 고신씨의 후예라, 김수로(김수로)는 김천씨의 후예라, 진한은 진인의 동래자라 하여, 말이나 피나 뼈나 교나 풍속이 한 가지도 같은 데가 없는 지나(중국)족을 동종으로 보아, 말 살에 소 살을 무친 어림없는 붓을 놀린 뒤로 그 벽견을 갈파한 이가 없었으니, 우리 부여의 족계가 분명치 못하여, 드디어는 조선사의 위치를 어두운 구석에 둔 지가 오래였다. 언제인가 필자가 『사기』 「흉노전」을 보니, 삼성의 귀족 있음이 신라 같으며 좌우 현왕 있음이 고려나 백제 같으며, 오월의 제천이 마한과 같으며, 무기일을 상함이 고려 같고 왕공을 한이라 함이 삼국의 간과 같으며, 관명 말자에 「치」(제)라는 음이 있음이 신지의 「지」와 비지의 「지」와 같으며, 후를 알씨라 함이 곧 「아씨」의 역이 아닌가? 의 가설이 일며, 인축 회계의 처를 담림 혹 대림이라 함이 「살임」의 의가 아닌가의 의문이 나고, 휴도는 소도와 음이 같을 뿐 아니라, 국중에 대휴도를 둔 휴도국이 있고, 각처에 또 소휴도가 있어, 더욱 삼한의 소도제와 틀림이 없는지라. 이에 조선과 흉노가 삼천년 전에는 일실내에 형제였다는 의안을 가지고 그 해결을 구하였더니, 그 뒤에 건륭제가 흠정한 만주원류고와 요·금·원 삼사국어해를 가져 비교하여 보니, 비록 그 중에 부여의 대신 칭호인 「가」를 음으로 해하여 조선 말에 금「가」·이「가」라는 「가」와 동의라 하지 않고, 의로 주하여 「가」의 오라 하며, 금사의 리극렬을 음으로 맞는 신라의 불구내에 상당한 것이라 하지 않고, 청조에 패륵(파리)의 동류라 … 한 것 등에 실이 없지 않으나, 주몽(주몽)의 만주어 「주림물」 곧 선사의 의라 하며, 옥저가 만주어 「와지」 곧 삼림의 의라 하며, 삼한 관명 말자에 「지」가 곧 몽고(몽골)어 마관을 「말치」 양관을 「활치」라는 「치」의 류라 하며, 삼한의 한은 가한의「한」과 같이 왕의 칭이요, 국의 호가 아니라 한 … 다수한 고거 거리를 얻고, 또 그 뒤에 동몽고승을 만나 동몽고 말의 동서남북을 물음에, 연나·준나·우진나·회차라 하여 『고려사』의 「동부왈순나 서부왈연나 남부왈관나 북부왈절나」와 같음을 알았으며, 또 그 뒤 일인 조거룡장(조거용장)이 조사 발표한바, 조선·만주·몽고(몽골)·토이기(터키) 사족의 현행하는 같은 말이 수십종(이제 나의 기억하는 바는 오직 귀자를 아기라, 건장을 메주라는 일이마디뿐)이 있음을 보고, 제일보에 조(조선)·만(만주)·몽(몽골)·토(터키) 사어는 동어계라는 억단을 내리며, 다시 지나(중국) 이십사사의 선비·흉노·몽고(몽골) 등에 관한 기록을 가져 그 종교와 풍속의 동이를 참조하며, 서양사로서 흉노의 유종이 토이기(터키)·흉아이(헝가리) 등지로 이주한 사실을 고열하여, 제이보에 조선·만주·몽고(몽골)·토이기(터키) 사족은 동혈족이라는 억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 억단의 정부는 고사하고, 조선사를 연구하자면 조선의 고어뿐 아니라 만·몽(만주·몽골) 등 어를 연구하여, 고대의 지명·관명의 의의를 깨닫는 동시에 이주 교통의 적이며, 공전 침탈의 허이며, 풍속 동이의 차며, 문야 고하의 인이며, 기타 허다한 사적의 탐구와 오록의 교정에도 이익함이라 하겠다.
이상의 오자는 재료의 수집과 선택 등 노고에서 자가의 경력을 말한 것이라. 차부라. 조선·지나(중국)·일본 등 동양문헌에 대한 대도서관이 없으면 조선사를 연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본의 학자들은 국내에 아직 십분 만족하다 할 도서관은 없다 하나, 그러나 동양으로는 제일이며, 또 지금에 와서는 조선의 소유가 그 외부의 장이 되며, 또 서적의 구람과 각종 사료의 수집이 우리 같이 표박생활 중에 있는 한사보다 나을 것이니, 게다가 상당한 신사학에 소양까지 있다고 자랑하나 지금까지 동양학에 위걸이 나지 못함은 무슨 연고이냐. 가장 피중에서 성예책책한 자가 백조고길(시라토리 쿠라키치)이라 하지만, 그 저한바 신라사를 보면 배열정리의 신식도 볼 수 없고 일이의 발명도 없음은 무슨 까닭이냐? (이행략) 협애한 천성이 조선을 무하기에만 급하여 공평을 결함으로 인함인가? 조선사람으로서 어찌 조선사학이 일본인으로부터 개단하기를 바라리오마는 조선의 보장을 남음 없이 가져다가 암매 중에 썩임은 탄석지 않을 수 없다.
오. 사의 개조에 대한 우견
역사재료에 대하여 그 망을 보하며 결을 충하며 위를 거하며 무를 변하여 완비를 구하는 방법의 대략을 이미 말하였거니와, 편찬하며 정리하는 절차에 지하여도 구사의 투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근일에 왕왕 신사의 체로 사를 만들었다는 일이종의 신저가 없지 않으나, 다만 신라사라 고려사라 하던 왕조단으로의 식을 고쳐 상세·중세·근세대하여 권지일이라 권지이라 하던 통감 분편의 명을 고쳐 제일편·제이편이라 하며, 그 내용을 보면 재기와 이단이라 하던 것을 예술이라 학술이라 하여 그 귀천의 위치가 바뀔 뿐이요, 늑왕이라 한외라 하던 것을 애국이라 민족적 자각이라 하여 그 신구의 명사가 다를 뿐이니, 털어놓고 말하자면 한장책을 양장책으로 고침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나의 우견으로 개조할 방법의 대강을 말한다면,
(일) 그 계통을 구할 것이니,
구사에는 갑대왕이 을대왕의 부요, 정대왕이 병대왕의 제이니 하여, 왕실의 계통을 구하는 외에 다른 곳에서 거의 계통을 구하지 않았으므로, 무슨 사건이든지 중천에서 거인이 나 내려오고 평지에서 신산이 솟아오른 듯하여 일편의 신괴록을 읽는 것 같도다. 역사는 인과관계로 청구하자는 것인데, 만일 이와 같은 인과 이외에 일이 있다 하면 역사는 하여 무엇하랴 마는, 그러나 이는 지은 사람의 불주의요 본실이 그런 것은 아니다. 고로 구사에는 그 계통을 말하지 않았다 하여도 우리가 이를 찾을 수 있으니, 『삼국사기』 신라사에 적힌 신라의 국선이 진흥대왕 때부터 문무대왕 때까지 전성하여 사다함(사다함) 같은 이는 겨우 십오·육세의 소년으로 그 제자의 수가 지나(중국) 대성 공구(공구, 공자)와 겨누게 되었으며, 이밖에 현상·량장·충신·용사가 모두 이 가운데서 나왔다[『삼국사기』에 인용한 김대문(김대문)의 설]하였으나, 그동안이 수십년에 불과하여 성식이 아주 그쳐 국선 이전에 국선의 조도 볼 수 없으며 국선 이후의 손도 볼 수 없이 돌연이 왔다가 돌연히 간 국선이니, 이것이 이 신라 신괴록이 아니냐마는, 고기에서 왕검(왕검)이 국선의 시됨을 찾으며 『고구려사』에서 조의선인 등을 알 것이며, 국선의 일됨을 찾음에 이에 국선의 래원을 알며, 『고려사』에서 이지백(이지백)의 「선랑을 중흥시키자」던 쟁론과 예종의 「사선 유적을 가영하라」, 의종의 「국선 복로를 중개하라」주4)는 조서를 늘 봄에, 고구려까지도 오히려 국선의 유통 있음을 볼지니, 이로써 계통을 구하는 방법의 일례로 드노라.
(이) 그 회통을 구할지니,
회통은 전후 피차의 관계를 유취한다는 말이니, 구사에도 회통이란 명칭은 있으나 오직 예지·과목지 등 - 이것도 회통의 방법이 완미하지 못하지만 - 이외에는 이 명칭은 응용한 곳이 없다. 그러므로 무슨 사건이든지 홀연히 모였다가 흩어지는 채운도 같고 돌연히 불다가 그치는 선풍도 같아서 도저히 모착할 수가 없다. 『고려사』 「묘청전」 을 보면 묘청(묘청)이 일개 서경의 승려로서 「평양에 천도」하며 「금국을 치자」 함에, 일시에 군왕 이하 다수 신민의 동지를 얻어 기세가 혁혁하다가, 마침내 평양에 거하여 국호를 대위라 하며 원년을 천개라 하고 인종더러 대위국 황제의 위를 천하라고 협박상식인 상소를 올리더니, 반대당의 수령인 일개 유생 김부식(김부식)이 왕사로 와서 문죄함에, 묘청(묘청)이 변변히 일전도 못하고 부하에게 죽었으므로 묘청(묘청)을 풍광자라고 한 사평도 있지만, 당시의 묘청(묘청)을 이와 같이 신앙한 이가 많았음은 무슨 까닭이며, 묘청(묘청)이 일조에 이와 같이 졸패됨은 무슨 까닭이냐? 『고려사』의 세기와 열전을 참고하여 보면, 태조 왕건(왕건)이 계단(거란) - 요 - 와 절교하고 북방의 고강을 회복하려다가 거사치 못하고 붕서하므로 그 후예되는 제왕인 광종·숙종 같은 이는 다 그 유지를 성취하려 하였으며, 신하에도 이지백(이지백)·곽원(곽원)·왕가도(왕가도) 같은 이들이 있어 열렬하게 북벌을 주장하였으나 다 실치 못하고, 예종과 윤관(윤관)이, 군신이 동심하여 두만강 이북을 경영하려는 봉총을 소시하다가, 반대자가 너무 많아 그 기득 토지인 구성까지 금태조에게 다시 양환하니, 이는 당시 무사들이 천고에 한사로 여기는 바이며, 그 뒤에 김태조가 요를 멸하고 지나(중국) 북방을 차지하여 황제라 칭하며 천하에 호시하니, 금은 원래 백두산 동북의 여진부락으로 아에 복역하던 노민(『고려도경』의 여진노사고려라 하고, 『고려사』에 재한 금경조(금경조)의 국서에도 여진이고려위부모지방이라 함)으로 일조에 강성하여 형제의 위치가 바뀌며(고려사에 재한 금 태조의 국서에 형대금황제 치서우제고려국왕이라 함), 이에 국인 중 조금 혈기가 있는 자이면 국치에 체루할 날이라. 묘청(묘청)이 이 짬을 타서 고려 초엽부터 전래하는 「정도평양 삼십육국래조」의 도참을 가져 부르짖음에, 사대주의의 벽견을 가진 김부식(김부식) 등 약간인 이외에는 모두 묘청(묘청)에 향응하여, 대문호인 정지상(정지상)이나 무장인 최봉심(최봉심)이나 문무겸전한 윤언이(윤언이)[윤관(윤관)자]가 일치로 북벌론을 주창하므로, 묘청(묘청)의 세력이 일시에 전성하였으며, 미구에 묘청(묘청)의 거조가 광망하여 평양에서 왕명도 없이 국호를 고치며 거조를 협박함에, 이에 정지상(정지상)은 왕의 좌우에 있어 묘청(묘청)의 행동을 반대하며, 윤언이(윤언이)는 도리어 주의가 다른 김부식(김부식)과 동사하여 묘청(묘청) 토벌의 선봉이 되니, 이는 묘청(묘청)이 실패한 원인이라. 그러나 김부식(김부식)이 출정하기 전에 정지상(정지상)을 죽이고 묘청(묘청)을 토평한 후에, 또 윤언이(윤언이)를 찬축하여 북벌론자의 근저를 소탕하여 버렸다. 김부식(김부식)은 성공하였으나 조선 쇠약의 터는 이로부터 잡혔다고 하리라. 이렇게 참고하여 보면 묘청(묘청)이 성패한 원인과 그 패한 뒤에 생긴 결과가 소연하지 않은가? 이로써 회통을 구하는 일례를 보였을 뿐이오.
(삼) 심습을 거할 것이니,
모년(년조를 잊어버렸으므로 후거에 양함) 영국 해군성 보고에 세계 철갑선의 비조는 일오구이년경 조선 해군대장 이순신(이순신)이라고 한 기재가 영국사에 오른바, 일(일본)인들은 모두 당시 일(일본)인의 선이 철갑이요, 이순신(이순신)의 것은 철갑이 아니라 하여[일인(일본인)의 이 말한 각종 조선사의 그 서명들을 망하고, 이조(조선) 오백년사에도 이 말이 있으나 그 저작자의 성명을 잊었으므로 여고에 양함] 그 보고의 틀림을 변박하며, 조선의 집필자들은 이를 과장하기 위하여 그 보고를 그대로 인용하여 조선이나 일본 중에 하국이 먼저 철갑선을 제조하였는가가 암중에 쟁논이 되었다. 일본인의 말은 아무 명증 없는 위안이라 족변할 것 없거니와, 이충무공전집의 그 설명한 구선의 제도를 보건대, 선을 목판으로 장하고 철판으로 함이 아닌 듯하니, 이순신(이순신)을 장갑선의 비조라 함은 가하나 철갑선의 비조라 함은 불가할 것이다. 철갑선의 창제자라 함이 장갑선의 창제자라 함보다 더 명예가 되지마는, 이것을 창제하지 않은 것을 창제하였다고 하면 이것은 진화의 계급을 난할 것뿐이라. 가령 모호한 기록 중에서 부여의 어떤 학자가 물리학을 발명하였다든지, 고려의 어떤 명장이 증기선을 창제하였다는 문자가 발견되었다 하여도, 우리가 신용치 못할 것은 기할 수 없음으로서 그럴 뿐 아니라, 곧 자기함도 불가한 까닭이겠다.
(사) 본색을 존할 것이니,
대동운옥에 「국선 구산(구산)이 출렵하여 금수의 알 안은 놈이나 새끼 가진 놈을 낭자히 살육하였더니, 주인이 석반에 자기 다리 살을 베어 놓고 공은 인인이 아니니 사람의 고기도 먹어보라」 하였다. 이는 대개 신라 당시에 술랑(술랑)·영랑(영랑) 등의 학설이 사회에 물들어 국선오계의 일조되는 『살상유택』을 인인이 봉행하던 때이므로, 이에 위반하는 자는 사람의 고기도 먹으리라는 반감으로 야점의 객주가 이같이 참혹하게 무안을 줌이니, 그것이 수십자 뿐 되는 기록이지마는 신라 화랑사에 일부라 할 수 있으며, 『고구려사』 「미천왕기」 에 가로되 「봉상왕이 그 제인 돌고(돌고)가 이심이 있다 하여 죽이니 돌고(돌고)의 자인 을불(을불, 미천왕의 명)이 겁이 나서 출분하여 수실촌인 음모(음모, 당시 부호의 성명인 듯)의 집에서 품을 팔더니, 음모(음모)가 밤마다 와석을 던져 가측 초택의 와오을 금하게 하며, 낮이면 나무하라 하여 잠시의 휴식을 허치 않았다. 주년만에 도거하여 동촌인 재모(재모)와 소금장사가 되어 압록강에 저하여 소금짐을 강동 은취촌의 인가에 부렸더니, 한 노구가 외상으로 소금을 달라고 하므로 한 말쯤 주었더니, 그 후 또 달라고 함을 거절하였었다. 노구가 앙심을 품고 가만히 초리 한 켤레를 소금 짐 속에 묻었다가 발정한 뒤에 쫓아 와서 도적으로 압록재에 고하여, 초리 한 켤레의 값으로 소금 한 짐을 다 빼앗고 결태까지 한 뒤에 방송하였다」. 이것도 불과 몇 줄의 기록이나, 또한 봉상왕 시대에 부호의 폭학과 시민의 수령의 사악한 행위를 그린 략도이니, 봉상왕 시대 풍속사의 일반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고려사』에는, 맛없는 「모왕 즉위 모대왕 졸」 등의 년월이나 쓰며 보기 싫은 『견사 모국 모국 래보』 등의 사실을 적은 것들이요, 우 양절과 같이 시대의 본색을 그린 문자는 보기 어렵다. 이는 유교도의 춘추필법과 외교주의가 편견을 령하여 전래하는 고기 문자를 마음대로 도개하여 각 해시대에 상당한 사상을 흐리게 한 까닭이라.
옛적 서양의 어떠한 역사가가 격벽한 린가에서 갑·을 양인의 쟁론하는 말을 역력히 들었다. 그러나 그 익일에 남들이 전하는 갑·을의 시비가, 자기가 들은 바와는 모두 틀렸다. 이에 「종고 역사 모두 갑·을 이인의 시비와 같이 오전함을 적은 것이 아니냐?」 하고 자기가 지은 역사를 모두 불에 넣어 버렸다. 탐보원이 들어다가 편집원이 교정하여 내고, 그 뒤에 또 오하는 례까지 있는 신문·잡지의 기사도 오히려 그 진상과 대이한 것이 허다할 뿐 아니라, 갑파 신문이 그러하다 하면 을파의 신문에는 이러하다 하여 준신할 수 없는 일이 많으니, 하물며 고대의 일이 사가가 자기의 호악대로 아무 책임감이 없이 지은 것을 어떻게 준신할 수 있으랴?
그리고 이성계(이성계)가 고려 말왕 왕우(왕우)의 목을 베고 그 자리를 빼앗을 때, 후인이 이신시군의 죄를 가할까 하여 백방으로 왕우(왕우)는 원래 왕씨의 왕통을 잇지 못할 요승 신돈(신돈)의 천첩 반약(반야)의 소출이라 하여 경효왕이 신돈(신돈)의 집에서 어떻게 왕우(왕우)를 데려왔다, 반약(반야)가 왕우(왕우)가 궁인 한씨로 친모 정함을 보고 통한하여 일차 호곡함에, 궁문도 그 원을 알고 무너졌다 하여, 아무쪼록 왕우(왕우)가 신씨임을 교증하였다. 그러나 왕우(왕우)는 오히려 송도 유신들이 있어 암혈에 숨어서라도 왕우(왕우)의 피무를 절규하였으므로, 금일 독사자들이 비록 확증은 없으나 오히려 왕우(왕우)가 왕씨요 신씨 아님을 신인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왕건(왕건)이 궁예(궁예)의 제장으로 궁예(궁예)의 은총을 받아 대병을 맡게 됨에, 드디어 궁예(궁예)를 쫓아 객사케 하고, 또한 「이신시군」의 죄를 실현하여 전력을 집중하여 궁예(궁예)의 가주할 죄를 구할 새, 「궁예(궁예)는 신라 헌안왕의 자식으로서 왕이 그의 오월 오일 생함을 미워하여 기하였더니, 궁예(궁예)가 이를 원하여 기병 토적하여 신라를 멸하려 하여, 모사에서 벽에 그린 헌안왕의 상까지 칼로 쳤다.」고 하였다. 다시 적증을 만들 새, 「궁예(궁예)는 뒤에 헌안왕이 엄명하여 궁예(궁예)를 죽이려 하는데, 궁녀가 루상에서 루하로 궁예(궁예)를 던지니, 유모가 받다가 손가락이 그릇 그 눈을 찔러 일목이 묘하였다. 그 유모가 비밀히 길러 내었더니 십여세가 되어 유희가 심하거늘, 유모가 울며 가로되, 왕이 너를 버리신 것을 내가 차마 못하여 길렀더니, 이제 너의 광망이 이러하니, 만일 남이 알면 너와 내가 다 죽으리라 하니, 궁예(궁예)가 듣고 울며 락발하여 승이 되었다. 그 뒤에 신라 정치의 문란함을 보고, 병중만 모이면 대지를 성취하겠다 하고, 적괴 기훤(기훤)에게 갔다가 불합하고, 다시 적괴 양길(양길)에게서 선대를 받아 병을 분하여 동으로 나와 지를 략하였다 하니, 가령 우의 소신을 다 참말이라 하면, 이는 궁예(궁예)와 유모의 종생 비밀이려니, 듣고 전한 자 누구이며, 가령 궁예(궁예)가 왕이 되어 신라 형법 외에 있게 된 뒤에 수시로 발표한 말이라 하면, 어찌하여 그 말한 날짜나 처소는 적지 않는다 할지라도 데리고 말한 사람이 어찌 쓰지 않았느냐」. 오늘의 눈으로 보면 부모를 부모라 함은 생아한 은을 위함이니, 만일 생아의 은은 없고 살아하려는 구가 있는 부모야 무슨 부모리오. 궁예(궁예)가 헌안왕의 아들이라도 만일 사관의 말과 같이 그 락지하던 날 루상에서 죽으라고 던진 날부터 부라는 명의가 끊어졌나니, 궁예(궁예)가 헌안왕의 본신에 칼질하여도 시부의 죄가 될 것 없고, 신라의 왕능도 유린될지라도 모조의 론이 될 것 없으려거든, 하물며 왕의 등신을 치며 문란한 신라을 혁명하려 함이 무슨 큰 죄나 론이 되리오만은, 고대의 협애한 윤리관으로는 그 양사 - 헌안왕의 상과 신라국에 대한 불공으로만 하여도, 궁예(궁예)가 죽어도 죄가 남을지니 죽어도 죄가 남을 궁예(궁예)를 죽이는 데야 무엇이 불가하였으랴. 이에 왕건(왕건)은 살아서 고려 통치권을 가져 죽어도 태조 문성의 존시을 받아도 추호의 참덕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고려 사관이 구태여 세달사 중에 일개 걸승이던 궁예(궁예)를 가져다가 고귀한 신라 황궁의 왕자를 만듦인가 한다.
제왕이라 역적이라 함은 성패의 별명뿐이며, 정론이라 사론이라 함은 다과의 차이뿐인데, 게다가 문견의 와오와 집필자의 호악가 섞이지 않았는가. 사실도 흘러가는 물질과 같이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나니, 이미 간 사실을 그리는 저사자도 치인이거니와 그 그림을 가지고 앉아서 시비곡직을 가리려는 독사자가 더욱 치인이 아닌가. 아니다. 아니다. 역사는 개인을 표준하는 것이 아니요, 사회를 표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의 성이 왕인가 신인가를 사교하느니보다 다만 당시 지나(중국)에 대하여 선전하고 요동구강을 회복하려 함이 성할 일인가 패할 일인가? 성패간 그 결과가 이할까 해할까부터 정한 후에 이를 주장한 우와 반대한 이성계(이성계)의 시비를 말함이 가할 것이며, 궁예(궁예)의 성이 궁인가 김인가를 변론하는 것보다, 신라 이래 존상하던 불교를 개혁하여 조선에 신불교를 성립하려 함이 궁예(궁예) 패망의 도화선이니, 만일 왕건(왕건)이 아니었다면 궁예(궁예)의 그 계획이 성취하였을까, 성취하였다 하면 그 결과가 어떠할까를 확인한 뒤에야 이를 계획하던 궁예(궁예)와 적대하던 왕건(왕건)의 사정을 말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개인으로부터 사회를 만드느냐. 사회로부터 개인을 만드느냐?」 이는 고대부터 역사학자의 쟁론하는 문제다.
이조(조선) 전반기의 사상계는 세종대왕의 사상으로 지배되며, 후반기의 사상계는 퇴계(퇴계 이황)산인의 사상으로 지배되었다. 그러면 이조(조선) 오백년간의 사회는 세종·퇴계(퇴계 이황) 양인의 만든 바가 아닌가? 신라 하대부터 고려 중엽까지의 육백년 동안은 영랑(영랑)·원효(원효)가 각기 사상계의 일방면을 차지하여 영랑(영랑)의 사상이 성하는 때에는 원효(원효)의 사상이 물러가고, 원효(원효)의 사상이 성하는 때에는 영랑(영랑)의 사상이 물러가, 일진일퇴 일왕일래로 갈아들어 사상계의 패왕이 되었으니 육백년 동안의 사회는 그 양가의 만든바 아닌가? 백제의 치제를 온조대왕이 마련하여 고이대왕이 마치며, 발해의 치제를 고제가 마련하여 선제가 마치었으니, 만일 온조(온조)와 고이왕이 아니면 백제의 정치가 무슨 형식으로 되었을는지? 고제와 선제가 아니면 발해의 정치가 무슨 형식으로 되었을는지 또한 모를 것이다. 삼경·오도의 제도가 왕검과 부루(부루)로부터 수천년 동안 정치의 모형이 되었으니, 왕검과 부루(부루)가 아니었다면 조선의 국가사회가 어떠하게 되었을는지 모를 것이니, 이로써 보면 일개 위대한 인격자의 손끝에서 사회라는 것이 되는 것이요 사회의 자성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다시 일방으로 보자. 고려 말엽 불교의 부패가 극도에 달하여 원효종은 이미 쇠미하고 임제종에도 또한 걸물이 없고 다만 십만인의 반승회와 백만인의 팔관회가 재곡이 미비하여 국민이 머리를 앓을 뿐이라. 사회는 벌써 불교 밖에서 신생명을 찾기에 급급함으로 안유(안유)나 우탁(우탁)이나 정몽주(정몽주)들이 유교의 목탁을 들은 지가 오래였다. 그 밑에서 세종이 나고 퇴계(퇴계 이황)가 남이니, 그러면 세종이 세종이 되며 퇴계(퇴계 이황)가 퇴계(퇴계 이황)됨은, 세종이나 퇴계(퇴계 이황) 자신이 아니요 사회가 만듦이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삼국 말엽 그 누백년간에 찬란히 발달한 문학과 미술의 영향을 받아, 소도·천군의 미신이나 율종·소승의 하품불교로는 영계의 위안을 줄 수가 없어 사회가 그 신생명을 찾은 지가 또한 오래인 고로 신라의 진흥대왕이나 고구려의 연개소문(연개소문)이 피차 다 제교 통일의 신입안을 내려 한 일이 있었다. 그럴 때에 영랑(영랑)이 도령의 노래를 부르며 원효(원효)가 화엄의 자리를 베풀며 최치원(최치원)이 사유사불사선의 신통한 재주를 보임에, 이에 각계가 갈채하여 이 세 사람을 맞음이니, 영랑(영랑)이나 원효(원효)·최치원(최치원)이 모두 본인 자신으로 됨이 아니요 사회가 만듦이 아닌가? 이에 따라서 일개 의문이 생기한다. 원효(원효)는 신라 그 때에 낳기에 원효(원효)가 됨이요, 퇴계(퇴계 이황)는 이조(조선) 그 때에 낳기에 퇴계(퇴계 이황)가 됨이니, 만일 그들이 희렵(그리스) 철학의 강단에서 낳았다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되지 않았을까? 법국(프랑스)이나 덕국(독일)의 현대에 낳았다면 「베르그송」이나 「오이켄」이 되지 않았을까? 나파륜(나폴레옹)의 웅재대략으로도 도포 입고 대학 읽던 백년전 도산서원 부근에서 낳았다면 물러가 송시열(송시열)이 되거나 나아가 홍경래(홍경래)가 되었을 뿐 아니었을까? 대소의 분량이 그와 같이 되지는 않는다 하여도, 그 면목이 아주 달랐을 것은 단언할 수 있다. 논조가 이곳까지 미쳤으나 개인은 사회 풀무에서 지어질 뿐이니, 개인의 자성은 어디에 있느냐? 개인도 자성이 없고 사회도 자성이 없으면 역사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느냐? 나는 이것을 볼 때, 개인이나 사회의 자성은 없으나 환경과 시대를 따라서 자성이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이나 만주나 몽고(몽골)·토이기(터키)·흉아리(헝가리)나 분란(핀란드)가 삼천년 이전에는 적확한 일혈족이었다. 그러나 혹은 아세아(아시아)에 잉거하며 혹은 구라파(유럽)으로 이도하여 주의 동서가 다르며, 혹은 반도로, 혹은 대륙으로, 혹은 사막, 혹은 비토, 혹은 온대·한대로 분포하여 지의 원근이 다르며, 목축·농업, 침략·보수 등 생활과 습속이 해와 달을 지내며 더욱 현격이 생기어 각자의 자성을 가졌나니, 이것이 즉 환경을 따라 성립한 민족성이라 할 것이다. 같은 조선으로도 이조(조선)시대가 고려시대와 다르고 고려시대는 또 동북국과 다르고 동북시대는 삼국과 같지 않으며, 왕검·부루시대와 똑같지 아니하여 멀면 천년의 전후가 다르며 가까우면 백년 전후가 다르니, 종금 이후로는 문명진보가 더욱 속도로 되어 십년 이전이 홍황이 되고 일년 이전이 원고가 될는지 모르는 것이라. 이것이 이른바 시대를 따라 성립한 사회성이라.
원효(원효)와 퇴계(퇴계 이황)가 시대와 경우를 바뀌어 낳다 하면, 원효(원효)는 유자가 되고 퇴계(퇴계 이황)는 불자가 되었을는지 모르거니와, 도양발달한 원효(원효)더러 주자(주자) 규구만 근수하는 퇴계(퇴계 이황)가 되라 하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충실용졸한 퇴계(퇴계 이황)더러 불가의 별종을 수립하는 원효(원효)가 되라 하면 이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니, 하고이냐? 하면, 시대와 경우가 인물을 산출하는 원료됨 같으나 인물이 시대와 환경을 이용하는 능력이 다른 연고이니, 민족도 개인과 같이 모지 모시에 갑이라는 민족이 가서 그 성적이 여하하였으니, 을 민족이 갔더라도 꼭 이만한 성적을 가졌으리라 하면 너무 급속한 판단이라. 대개 개인이나 민족이 양개성이 있으니, 일은 항성이고 이는 변성이니, 항성은 제일 자성이요, 변성은 제이의 자성이니, 항성이 많고 변성이 적으면 환경에 순응치 못하여 멸절할 것이며, 변성이 많으면 우자의 정복을 벗고 열패할 것이니, 늘 역사에 회고하여 양개 자성의 다과를 조제하며 경중을 평균이 하여 그 생명이 천지와 같이 장구하게 될 것인지는 오직 민족적 반성에 뢰할 것이다.
이상에 의하여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하여 양개 결론을 지었으니, (일) 사회가 기정된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쓰기 매우 곤난하고, (이) 사회가 미정된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쓰기 아주 쉽다는 것이다. 정여립(정여립)이 「충신은 이군을 불사하며, 열녀는 이부를 불경한다」의 유가 윤리관을 일필로 말살하여, 「인민에 해되는 군은 시함도 가하고 행의 부족한 부는 거함도 가하다」 하며 「천의 인심이 이미 주실에 거하였는데 존주가 무엇이며 인중과 토지가 벌써 조조(조조)와 사마의(사마의)에게 돌아갔는데 구구일우 유현덕(유현덕)의 정통이 다 무엇이냐」 하는 공구(공구, 공자)·주희(주희)의 역사 필법을 반대하니, 그 제자 졸극성(졸극성) 등은 「이는 참 전성의 미발한 말씀이라」 하고 재상과 학자들도 그 재기와 학식에 경도하는 이가 많았으나, 세종대왕의 삼강오륜의 부식이 벌써 터를 잡고, 퇴계(퇴계 이황) 선생의 존군모성의 주의가 이미 집을 지어 전사회가 안돈된 지 오래이니, 이 같은 돌비적 혁명적 학자를 용납하리오. 그러므로 애매한 일지의 고변상에 신수가 이처하고 전가가 구허하니 평생 저술이 모두 화장에 들어감이니, 이는 곧 (일)에 속한 것이라.
최치원(최치원)이 지나(중국) 유학생으로 발정할 때, 그 아비가 「십년이 되어도 과명을 얻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아니라」 하여, 일개의 한문 졸업생됨을 바랐을 뿐이다. 최치원(최치원)이 돌아와서 「무협중봉지세 사입중원 은하열숙지년 금환동국」을 노래하여, 최치원(최치원) 자신도 또한 일개 한문 졸업생됨을 남에게 자랑하였다. 그 사상은 한이나 당에만 있는 줄 알고 신라에 있는 줄은 모르며, 학식은 유서나 불전을 관통하였으나 본국의 고기 일편도 보지 못하였으니, 그 주의는 조선을 가져다가 순지나(중국)화하려는 것뿐이요 그 예술은 청천으로 백일을 대하며 황화로 록죽을 대하는 사육문에 능할 뿐이었다. 당시 영랑(영랑)과 원효(원효)의 양파가 다 노후하여 사회의 중심되는 힘을 잃고 신인물에 대한 수요가 마치 기자가 밥을 구함 같으니, 제일보에 대선생 휘호가 일개 한문 졸업생에게로 돌아가며, 제이보에 천추혈식의 예까지 그에게 바치어 고려에 들어와서는 영랑(영랑)과 원효(원효)의 양파가로 대석하게 됨이니, 「때를 만나면 수자도 성공한다」 함은 이를 두고 말함이니 이는 (이)에 속한 것이라.
어찌 학계뿐이랴? 모든 사업이 그러하니, 기훤(기훤)과 양길(양길)도 일시에 웅장함은 라말의 미정한 국면에서 일어남이요, 이징옥(이징옥)이나 홍경래(홍경래)가 거연이 패망함은 이조(조선)의 기정한 국면으로서이라. 림백호 - 제 -(백호 임제)가 말하기를 「나도 중국의 육조나 오계시대를 만났다면 돌림 천자는 얻어 하였겠다」고 하였다. 림백호(백호 임제) 같은 시인에게 육조 오계의 류유(유유)나 주전충(주전충)같은 홍호적 괴수와 동등이 되어, 돌림 천자나마 돌아오게 할 위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러나 지나(중국)의 천자를 경영하려면 『한서』의 치세보다 육조오계의 난세가 쉬울 것은 자연한 리일 것이다.
기정한 사회의 인물은 늘 전인의 필법을 배워 이것을 수연하여 이를 확장할 뿐이니, 인물되기는 쉬우나 그 공이나 죄가 크지 못하며 혁명성을 가진 인물[정여립(정여립)의 류]은 매양 실패로 마칠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그를 한질하여 언론이나 행사의 종적까지 소멸시키는 고로 후세에 끼치는 영향이 거의 영도가 되고 오직 삼백년이나 오백년 뒤에 일이 지음이 있어 그 유음을 상할 뿐이오. 미정한 사회의 인물은 반드시 창조적 혁명적 남아라야 될듯하나 어떤 때는 꼭 그렇지도 않아서, 소도세공의 하품재자[최치원(최치원)의 류]로서 외국인의 구문을 모방하여 언소가곡의 핍진이 인을 동할 만하면 거연이 인물의 지위를 소득하기도 하나, 인격적 자성의 표현은 없고 노예적 습성만 발휘되어 전민족의 항성을 매몰하고 변성만 조장하는 악기계가 되고 마나니, 이는 사회를 위하여 공구하는 바이며, 인물되기에 뜻을 둔 자가 계신할 바라 하노라(총론완).
제이편 수두시대
제일장 조선고대의 편론
(일) 조선민족의 구별
고대 아세아(아시아) 동부의 종족이 (일) 우랄어족 (이) 지나(중국)어족 양지로 나뉘었으니, 한족·묘족·요족 등은 후자에 속한 자요, 조선족·흉노족 등은 전자에 속한 자이다.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선비·여진·몽고(몽골)·퉁구스 등 족이 되고, 흉노족이 천산하여 돌궐(금 신강족)·흉아리(헝가리)·토이기(터키)·분란(핀란드) 등 족이 되었나니. 금 몽고(몽골)·만주·토이기(터어키)·조선 사족 사이에 왕왕 동일한 어사와 물명이 있음은 몽고(몽골, 대원) 제국시대에 피차 관계가 많았으므로 받은 영향도 있으려니와, 고사를 참고하면 조선이나 흉노의 사이에도 관명·지명·인명의 같은 자가 많으니 상고에 있어서 동일한 어족인 명증이니라.
(이) 조선족의 동래
인류의 발원지에 대하여 (갑) 파미르고원 (을) 몽고(몽골)사막이란 양설이 있는바, 아직 그 시비를 확정치 못하였으나, 우리의 고어로써 참고하면 왕성을 해(해)라 함은 태양에서 뜻을 취함이요, 왕호를 불구레(불구내)라 함은 태양의 광휘에서 뜻을 취함이요, 천국을 환(환국)이라 함은 광명에서 뜻을 취함이니, 대개 조선족이 최초에 서방 파미르고원 혹 몽고(몽골)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동방으로 나와 불함산 - 금 백두산을 명월의 출입하는 곳 - 곧 광명신의 서숙소로 알아 그 부근의 토지를 조선이라 칭하니, 조선도 고어의 광명이란 뜻이니 조선은 후세에 리독자로 조선이라 쓰니라.
(삼) 조선족의 분포한 「아리라」
우리 고어에 기리를 「아리」라 하고 강을 「라」라 한바, 압록강·대동강·두만강·한강·낙동강과 길림성의 송화강, 봉천성의 요하, 영평부의 란하 등을 리독자를 쓴 고명을 찾으면 아례강·아리수·욱리하·오열하·열수·무열하·압자하라 하였나니, 아례·아리·오열·무열 - 열은 다 「아리」의 의역이며 압자(고어에 오리를 아리라 함)는 「아리」의 의역이요 강·하·수는 다 「라」의 의역이니, 우 각 대강은 다 조선족의 선조가 지은 이름이니, 조선고대의 문화는 거의 우 각 대강의 강빈에서 발생한 고로 『삼국지』에도 「구려작국 호방대수이거」라 하니라. 「나라」는 고어의 「라라」니, 「라라」는 본래 「진도」를 가리키던 명사로서 국가를 가리키는 명사가 되었나니, 고대 지명의 말미에 붙던 나·라·노·루·누·량·랑·양·양·강·양·아·사 등은 다 「라」의 음역이며 천·원·경·국 등은 거의 「라」의 의역이요 양자가 모두 「라라」의 축역이니, 강이 어렵을 자하며 주선을 교통하는 편의가 있으므로 상고문명이 거의 강빈에서 발원한 것이니라.
(사) 조선 최초 개척한 부여
원시인민이 강하의 어류와 산야의 금수와 초목의 과실 같은 각종 천산물로 식료를 삼다가 인구의 번식함을 따라 그 식료의 부족을 감하므로, 그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목축업과 농업이 발생하였으며, 농업은 대개 불(화)의 힘을 이용하여 초목을 분소하여 전야를 개척한 뒤에 발생한 고로 고어에 야지를 「물」이라 하였나니, 불의 이용의 발견이 한갓 농업을 유발할 뿐 아니라 불로써 굴혈을 태워 맹수도 죽이며, 피혁을 눅이어 의와 리도 만들며, 니토를 구어 성벽을 쌓으며, 철을 달구어 기계를 만들며, 기타 인생 일용의 모든 편의를 주어 인지를 계발한 고로, 근세의 일반 사학자들이 고대 「불」의 이용의 발견을 곧 근세의 증기나 전기의 발견 같은 사회생활의 대혁명을 일으킨 대발견이라 한다.
동서 고대의 인민들이 다 「불」의 발견을 기념하여 「그리스의 화신」·「페르시아의 화교」·「지나(중국)의 수인(수인)씨」 등 전설이 있고, 우리 조선에는 더욱 불을 사랑하여 인명을 「불」이라 지은 것이 많으니, 「부루」·「품리」 등이 다 「불」의 음역이요. 「불」이라 지은 지명도 적지 않으니, 부여·부리·불내·불이·국내·불·벌·발 등이 다 「불」의 음역이다. 고기·고사기 등을 참고하면 조선문화의 원시 「수두」의 발원이 거의 송화강반의 합이빈(하얼빈) 부근이며, 합이빈(하얼빈)은 그 고명이 부여니, 그런즉 송화강은 조선족이 최초로 근거한 「아리라」요, 합이빈(하얼빈)은 조선족이 최초로 개척한 야지 - 「불」이요. 그 이외의 모든 부여 부리 … 등은 년대를 따라 차제로 개척된 야지 - 불이니라.
제이장 대단군왕검의 건국
(일) 조선 최초의 일반 신앙의 단군
전술한 바 같이 조선족이 각 「아리라」에 분포하여 각 「불」을 개척하는 동시에 일대 공동의 신앙이 유행하였나니, 이른 바 단군이니라.
원시인민이 우주현상을 과학적으로 해석할 지식이 없으므로 가상적으로 우주에 신이 있다 정하고 모든 것을 신의 조작으로 돌리어 신을 숭배하는 동시에 각기 천연 환경을 따라, 혹 만유의 물을 다 신으로 인하여 이를 배하며 혹 만유의 물의 상에 일신이 있다 하여 이를 배하나니, 이것이 이른바 종교이며 원시시대 각 민족사회에 각기 고유한 종교를 가진 실재니라.
조선족은 우주의 광명(제일장 참고)이 그 숭배의 대상이 되어 태백산의 수림을 광명신의 서숙소로 믿어 그 뒤에 인구가 번식하여 각지에 분포함에 각기 거주지 부근에 수림을 길러 태백산의 것을 모상하고 그 수림을 이름하여 「수두」라 하니, 「수두」는 신단이란 뜻이니, 매년 오월과 십월에 수두에 나아가 제할 새, 일인을 뽑아 제주를 삼아 수두의 중앙에 앉혀 하느님·천신이라 이름하여 중인들이 제를 올리고 수두의 주위에 금줄을 매어 한인의 출입을 금하고 전쟁이나 혹 기타 대사가 있으면 비록 오월·십월의 제기가 아니라도 소를 잡아 수두에 제하고 소의 굽으로써 그 앞에서 길흉을 점할 새, 굽이 떨어지면 흉하다 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 하였나니, 이는 지나(중국)의 팔괘·음서·양서의 기원이 될 것이니라. 강적이 침입하면 각 수두 소속의 부락들이 연합하여 이를 방어하고 가장 공이 많은 부락의 수두를 제일위로 존숭하여 「신수두」라 이름하니, 「신」은 최고최상을 의미한 것이며, 기타의 각 수두는 그 앞에 부속하였나니, 삼한사에 보인 「소도」는 수두의 음역이며, 「신소도」는 신수두의 음역이요 진단구변국도에 보인 「진단」의 「진」은 「신」의 음역이며, 단은 수두의 의역이요 단군은 곧 「수두 하느님」의 의역이니라. 수두는 소단이요 신수두는 대단이니, 일수두에 일단군이 있었은즉 수두의 단군은 소단군이요 신수두의 단군은 대단군이니라.
(이) 대단군왕검의 창작한 신설
고기에 가로되, 환국제석이 삼위·태백(양 산명)을 하시하고 널리 인세에 이익을 끼칠 만한 곳이라 하여 아들 웅(웅)을 보내어 천부와 인 삼개를 가지고 왕리케 하여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하에 내리어 신시라 칭하니, 이른바 환웅천왕이니, 풍백·우사·운사를 지휘하며 곡·명·병·형·선·악 등 … 세간 삼백육십여사를 주하더니, 때에 일웅일호가 있어 동혈에 거하며 인됨을 기하거늘, 웅이 애 일주와 산 이십매를 주며 이를 먹고 백일동안 일광을 보지 않으면 인형을 얻으리라 하더니, 호는 그 기를 행치 못하나 웅은 삼칠일 동안 그대로 기하여 여자가 된지라. 그러나 결혼할 남자가 없으므로 매양 신단에 향하여 회잉을 원하거늘, 웅이 이에 남자의 신으로 가화하여 이와 결혼하여 단군왕검(단군왕검)를 낳았다 하였다.
그러나 「제석」이니 「웅」이니 「천부」니 하는 따위가 거의 불전에서 나온 명사며, 또는 『삼국사』의 초두의 사회에도 매우 여성을 존시하였다는데, 이제 남자는 신의 화신이요 여자는 수의 화신이라 하여 너무 여성을 비시하였으니, 나는 이것이 순수한 조선 고유의 신화가 아니요 불교 수입 이후에 불교도의 점철이 적지 않은가 하노라.
그러나 평양의 구명이 왕검성이요 신라의 선사에도 평양자 선인 왕검지택이라 하고, 『위서』에도 내왕이천재전 유단군왕검 입국아사달 국호조선주5)이라 하니, 그러면 조선 고대에 단군왕검을 종교의 교조로 존봉하여 왔음은 사실이며, 왕검을 리독자의 독법으로 해독하면 「님금」이 될 것이니, 대개 「님금」이라 이름한 사람이 당시에 유행하는 수두의 미신을 이용하여 태백산의 수두에 출현하여 수시로 상제의 화신이라 칭하여 조선을 건국한 고로, 이를 기념하여 역대 제왕의 칭호를 님금이라 하며, 역대 경성의 명칭도 님금이라 한 것이다.
「선인왕검」이라 함은 삼국시대에 수두 교도의 일단을 「선배」라 칭하고, 「선배」를 리독자로 「선인」 혹은 「선인」이라 기한 것이며, 「선사」는 곧 왕검 설교 이래 역대 선배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니, 후세에 불·유 양교가 호성하면서 수두의 교가 쇠퇴하고 선사도 유망하여 그 상세는 알 수 없으나, 지나(중국)고서 - 굴원(굴원)의 초사, 사마천(사마천)의 『사기』, 반고(반고)의 『한서』에 산견한 것이 오히려 그 대개를 알 수 있다.
『사기』의 「봉선서」에 「삼일신」은 천일·지일·태일이니 삼일의 중에 태일이 최귀하며, 오제(동·서·남·북·중 오방의 신)는 태일의 좌라 하고, 「진시황본기」에 천황·지황·태황의 삼황 중에 태황이 최귀라 하며, 초사에 동황태일의 가명이 있고, 『한서』 「예문지」 에 태일잡자의 서명이 있으니, 삼일신과 삼황은 곧 고기에 기한 삼신·삼성 등의 류니, 삼일신을 다시 우리 고어로 역하면 천일은 「말한」이니 상제를 의미한 것이요, 지일은 「불한」이니 천사를 의미한 것이요, 태일은 「신한」이니 「신」은 최고최상이란 말이니, 「신한」은 곧 「천상천하 독일무이」를 의미한 것이니, 말한·불한·신한을 리독자로 마한·변한·진한이라 기한 것이며, 오제는 「돗가·개가·소가·말가·신가」 등 오「가」가 곧 오방신을 가리킨 것이니, 차서로 말하면 말한(마한)이 불한(변한)을 낳고 불한(변한)이 신한(진한)을 낳았으나, 권위로 말하면 신한이 신계와 인계의 대권을 총지하여 말한과 불한보다 고귀한 고로, 삼일의 중에 태일이 최귀라 함이며, 「오제(곧 오가)는 곧 태일의 좌라」 하였으나, 「신가」가 오가의 수위임은 「신」의 어의로 말미암아 명백하니, 구의 삼신·오제는 곧 왕검(왕검)이 창작한 신설이니라.
(삼) 신수두의 삼경 오부 제도
대단군왕검이 이미 삼신·오제의 신설로써 우주의 조직을 설명하고 그 신설에 의하여 인세 일반의 제도를 정할 새, 신한(진한)과 말한(마한)·불한(변한)의 삼한을 세워 대단군이 신한이 되니, 신한은 곧 대왕이요, 말한과 불한은 곧 좌우의 양부왕이니 신한을 협조하는 자더라. 삼경을 두어 삼한이 분주하며, 삼한의 하에 돗가·개가·소가·말가·신가의 오가를 두고, 전국을 동·남·서·북·중 오부로 나누어, 오가가 중앙의 오개 국무대신이 되는 동시에 오부를 분치하는 오개의 지방장관이 되고, 신가는 오가의 수위가 되며, 전시에는 오부 인민으로서 중·전·후·좌·우의 오군을 조직하여 신가가 중군대원수가 되고, 기타 사가가 전·후·좌·우의 사원사가 되어 출전하느니라.
현금까지 유행하는 윷판이 곧 오가의 출진도니, 그 도가 좌와 같으니라.
도중의 도·개·걸·유·모는 곧 리독자로 쓴 오가의 칭호이니, 도는 돗가요, 개는 개가요, 유는 고음에 「소」니 소가요, 모는 말가요, 걸은 신가니, 걸로 신가를 기함은 그 의의를 알 수 없으나, 부여시대에 견사란 관명이 있으니, 대개 견사는 신가의 별칭인 고로, 걸은 곧 견사의 견을 의역한 것인가 하노라. 돗(저)·개(견)·소(우)·말(마) 등 축류로 오방의 신명을 삼는 동시에, 일로써 관명을 삼은 수렵시대가 지나고 농목시대가 된 증적이다.
제삼장 수두의 홍포와 문화의 발달
(일) 부루의 서행
고기에 가로되 단군왕검이 자 부루(부루)를 보내어 하우를 도산에서 만났다 하고, 오월춘추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어 가로되, 당요의 때에 구년 홍수가 져서 당요가 하우를 명하여 이를 다스리라 하더니, 우가 팔년 동안이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매우 걱정하여 남악형산에 이르러 백마를 잡아 천에 제하여 성공을 빌더니, 꿈에 어떤 남자가 스스로 현이의 창수사자라 칭하면서, 우더러 가로되, 구산 동남의 도산에 신서가 있으니, 삼월을 재계하고 이를 내어보라 하므로 우가 그 말에 의하여 금간옥첩의 신서를 얻어 오행 통수의 리를 알아 홍수를 다스려 성공하고, 이에 주신의 덕을 잊지 못하여 정전을 화하며 율도량형의 제를 입한다 하니, 현이는 조선 당시에 동·남·서·북·중 오부를 람·적·백·현·황으로 별칭한바, 북부가 곧 현부인데 지나인(중국인)이 현부를 가리켜 현이라 한 것이며, 창수는 곧 창수며, 주신은 지나(중국) 춘추시대의 문자에는 매양 조선을 주신·숙신·직신, 혹 「식신」으로 역한바, 주신은 곧 조선을 가리킨 것이며, 고기의 부루(부루)는 오월춘추의 창수사자니, 이때에 지나(중국)에 일대홍수의 재가 있음은 각종의 고사가 동증하는바, 대개 단군왕검이 지나(중국)의 수재를 구제하여 주려 하여, 자 부루(부루)로서 창해사자를 배하여, 도산에 가 하우를 보고 삼신·오제교의 일부분 되는 오행 「수·화·금·목·토」설을 전하고, 치수의 방법을 가르친 고로, 우가 이미 왕이 됨에 부루(부루)의 덕을 생각하며 삼신오제의 교의를 믿어 이를 지나(중국) 안에 전포한 것이며, 정전과 율도양형도 또한 지나(중국)의 창작이 아니요 조선의 것을 모방한 것이니라. 하고로 꿈에 「창수사자를 만났다」 하였느뇨? 신성을 장식하여 사실을 신화화함이니, 이는 상고에 상유한 일이니라.
(이) 기자의 동래
하우가 홍수를 다스린 공으로 왕이 되어 국호를 하라 하여 수두의 교를 행하며, 도산에서 받은 신서를 홍범구주라 이름하여 신봉하더니, 하가 수백년만에 망하고 상이 계하여 또한 수백년만에 망하고, 주가 흥하여서는 주무왕이 홍범구주를 배척하므로 은의 왕족 기자(기자)가 홍범구주를 지어 무왕과 변론하고 조선으로 도망하니, 이제 『상서』 「홍범」의 이 곧 그것이니, 「홍범」편 중에 「초일」 왈오행 「차이」 왈경용오사 「차삼」 왈농용팔정 「차사」 왈협용오기 「차오」 왈건용황극 「차육」 왈예용삼덕 「차칠」 일서용계의 「차팔」 왈감용서징 「차구」 왈향용오복 위용육극 「일, 오행」 일왈수 이왈화 삼왈목 사왈금 오왈토 「이, 오사」 일왈모 이왈언 삼왈시 사왈청 오왈사 「삼, 팔정」 일왈식 이왈화 삼왈사 사왈사공 오왈사도 육왈사구 칠왈빈 팔왈사 「사, 오기」 일왈세 이왈월 삼왈일 사왈성진 오왈역수 「오, 황극」 황건기유극 「육, 삼덕」 일왈정직 이왈강극 삼왈유극 「칠, 계의」 택건입복서인 「팔, 서징」 왈우 왈양 왈욱 왈한 왈풍 「구, 오복」 일왈수 이왈부 삼왈강녕 사왈유호덕 오왈고종명 「육극」 일왈흉단절 이왈질 삼왈우 사왈빈 오왈악 육왈약 등 구는 곧 도산신서의 본문이요, 기여는 기자가 연술한 것이며, 천내석우 홍범구주는 곧 기자(기자)가 단군을 가리켜 「천」이라 하고, 단군으로부터 전수한 것을 천이 수하였다 함이니, 이는 수두의 교의에 단군을 천의 대표로 보는 까닭이요, 기자(기자)가 조선으로 도망함은, 상이 주에게 망하는 동시에 상의 국교인 수두교가 압박을 받으므로, 고국을 버리고 수두교의 조국으로 돌아옴이니라.
『한서』에 구가 문자를 지고 낙수에서 나오므로 우가 홍범을 연하였다 하나, 이 계사에 「하출도 락출서 성인칙지」라 하여 명백히 하도낙서가 다 이괘 지은 원인됨을 기하였거늘, 이제 낙구의 서로 인하여 홍범을 지었다 함은 어찌 망증이 아니랴[우 일절은 청유 모기령(모기령)의 설을 채함]. 오월춘추에 거하여 홍범오행이 조선에 전한 것임으로 믿음이 가하여, 또 초사에 거하여 동황태일 곧 단군왕검을 제하는 풍속이 호북·절강 등지에 많이 유행하였으므로 보면, 대개 하우가 형산에서 천에 제하고 도산에서 부루(부루)에게 신서를 받은 곳인 고로, 가장 수두교의 유행한 지방이 된 것이니라.
(삼) 흉노의 휴도
수두의 교가 지나(중국) 각지에 홍포함은 전술과 같거니와, 『사기』 「흉노전」에 거하면 흉노도 조선과 같이 오월에 천에 제하며 천제를 상한 동인을 휴도라 이름하니, 곧 「수두」의 역이요, 휴도의 제를 맡은 자를 휴도왕이라 하여 또한 단군이란 뜻과 비슷하며, 휴도에 삼룡을 사하고, 룡은 또 신을 가리킨 것이며, 삼룡은 곧 삼신이니, 흉노족도 또한 수두교를 수입함이 무의하다. 고대에 종교와 정치가 구별이 없어, 종교상에 제사장이 곧 정치상의 원수며 종교가 전파되는 곳이 곧 정치상의 속지이니, 대단군 이래 조선의 교화가 지나(중국)·흉노 등의 각족에게 널리 전포되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정치상 강역이 광대하였음을 볼 것이니라.
(사) 한자의 수입과 리독문의 창작
조선 상고에 조선 글이 있었다는 사람이 있으나, 그러나 이는 아무 증거가 없는 말이니, 최초에 한자를 썼을 것은 사실이다. 한자가 하시에 수입되었던지 알 수 없으나, 대개 토지가 지나(중국)와 련접하여 양민족이 기록 이전부터 교통이 있었을 것이며, 한자의 수입도 기록 이전의 일임이 명백하다. 왕검이 자 부루(부루)를 보내어 도산에서 우를 보고 김간옥첩의 문자를 가르쳐 주었은즉, 이 문자는 곧 한자일지니, 조선이 한자를 독습함이 이구함을 볼 것이니라.
그 뒤에 한자의 음 혹 의를 빌려 리독문을 만드니, 리독문은 곧 조선 고대의 국문이라 할 수 있다. 고대에는 「국서」 혹 「향서」·「가명」이라 칭하고, 고려조 이후에 비로소 리독문이라 칭하였으나, 이제 통속의 편의를 위하여 고대의 것까지 리독문이라 쓰거니와, 흔히 리독문을 신라 설총(설총)의 작이라 하나, 그러나 설총(설총) 이전의 고비(진흥왕 순수비의 류)에도 왕왕 이독문으로 적은 시가가 있은즉 설총(설총) 이전의 작임이 무의하다. 그러면 어느 시대의 작이냐? 님금을 왕검이라 역하여, 왕은 그 자의에서 소리의 초반을 취하여 「님」으로 독하며, 검은 그 자음에서 소리의 전부를 취하여 「금」으로 독하며, 「펴라」를 낙랑이라 역하여 락은 그 자의에 세 소리의 초반을 취하여 「펴」로 독하며, 랑은 그 자음에서 소리의 초반을 취하여 「라」로 독한 것이 곧 리독문의 시초니, 적어도 거금 삼천여년전 -기원전 십세기경에서 리독문이 제작된 것 같다.
도회가 진하여 문자가 되고, 형자가 진하여 음자가 됨은 인류문화사의 통칙이니 형자인 한자를 가져다가 음자인 리독문을 만듦은 「페니키아」인이 「이집트」 형자의 편방을 따라 「알파벳」을 만듦과 일례로 볼 만한 문자사상의 일진보라 할 것이며, 후세의 글단(거란)문·여진문·일본문이 모두 리독문을 모방한 것인즉, 인류문화의 보익한 공덕도 적지 아니하다 하겠으나, 다만 결감되는 바는, (일) 자모음을 구분하지 못함이니, 예컨대 「가」는 자 「ㄱ」·모 「ㅏ」의 음철이오, 「라」는 자 「ㄹ」·모 「ㅏ」의 음철이어늘, 이를 구분치 아니하여 일음철이 일자가 되어, 「가」는 「가」 혹 「가」로 쓰며, 「라」는 「량」 혹 「나」로 써서 음자의 수효가 너무 많으며, (이) 음표를 확정하지 못함이니, 예컨대 「백」의 일자를 「백활」이라 쓰며 「발」로 읽으며, 「위백제」라 쓰면 「살」로 읽고, 「의」의 일자를 「의신」이라 쓰면 「의」로 읽으며, 「교의」라 쓰면 「대」로 읽어 아무 준칙이 없으며, (삼) 상음 하몽의 리를 획청하지 않음이니, 례컨대 「달이」를 「월이」이라 쓰지 않고 「월리」라 써서 「달이」로 읽으며, 「바람이」를 「풍이」라 쓰지 않고 「풍미」라 써서 「바람이」로 읽어 언어의 근간지엽이 서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러므로 리독문으로 적은 시나 문은 물론이요, 곧 인명이나 지명이나 관명 같은 것도 오직 동시대 동지방 사람들이 그 관습에 의하여 서로 해독할 뿐이요, 다른 시대 다른 지방의 사람이면 입을 벌릴 수가 없으니, 문자가 사회진화의 보익된다 함은 피의 사실과 사상을 차에 전달함으로써 이거늘, 이제 이 같은 곤난이 있어, 「갑」 시대 「갑」 지방의 기록을 「을 시대, 을 지방」에서 해독하지 못하면, 어찌 문화보익의 이기가 될 수 있으랴.
그러나 고인이 리독문을 쓴 지 천여년 동안에 그 불만한 점을 개정하지 못한 원인이 어디 있느냐? 당시에 매양 적국 외환으로 인하여, 정치상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일체 문자를 적국인이 료해치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이 같이 불통일 불확실한 글을 쓴 것이요, 이윽고 삼조선이 붕궤하여 열국이 병립함에 일조선 내에도 상호의 적국이 많아 일명사나 일동사나 일토거리를 더욱 다종다양으로 써서 동부여인이 북부여의 리독문을 알지 못하며, 신라인이 고구려의 리독문을 알지 못하였나니, 그러면 리독문의 그 같이 불통일 불확정한 방식으로써 얻음이 학적 재지가 부족하므로 그리 됨이 아니라, 거의 정치상의 장애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오) 신지의 역사
전사에 단군 때에 신지(신지)란 사람이 있어 사관이 되었다 하나, 기실은 신지는 곧 「신치」의 역이요, 「신치」는 「신크치」의 략자요, 신크치는 「신가」의 별칭이요, 「신가」는 전술한 오「가」의 수석대신이니, 「신치」 곧 「신가」가 매양 신수두의 제일에 우주창조의 신화와 영웅용사 등의 행사와 예언류의 경계담을 노래하여 역대의 례가 되더니, 후세에 문사들이 그 노래를 수습하여 일서를 만들어 그 관명 「신치」로 서명을 만든 것이다. 이른바 신지가 곧 그것이니, 이제 신지의 본서가 멸절하여 그 가치의 여하를 알 수 없으나 그 서명이 리독문으로 지은 것인즉, 그 내용의 기사도 리독문으로 기재한 것일지니라.
『고려사』 「김위제전」 에 신지 비사의 「여칭추극기 칭간부소량 추자오덕지 극기백아강 수미균평위 흥방정태평 조강칠십국 뢰덕호신정 약폐삼유지 왕업유쇠경」주6)의 십구를 재하고, 부소량은 금 송도, 오덕지는 금 한양, 백아강은 금 평양으로 증하였다. 그러나 송도·한양·평양은 고려의 삼경이요, 대단군의 삼경은 일은 금 합이빈(하얼빈)이니, 고사에 부소갑 혹은 비서갑 혹 아사달로 기한 자며, 이는 금 해성·개평 등지니, 고사에 오덕지 혹 오비지 혹 안시홀 혹 안시성으로 기한 자며, 삼은 금 평양이니, 고사에 백아강 혹 락낭 혹 평원 혹 평양으로 기한 자니, 리독문의 독법에 부소·비서·아사는 스로 독하며, 오덕·오비·안지·안시는 아리로 독하며, 백아강·락랑·평원·평양은 펴라로 독한 것이니, 우의 비사 십구는 리독문의 신지를 한시로 역출한 것이다. 대개 삼국 말엽에 한학이 흥성하여, 한학자들이 유래 리독문으로 기한 시와 문을 한시와 한문으로 역출함을 시하였나니[최치원(최치원)의 향락잡영의 류], 신지의 한시역도 이의 일례이다.
하고로 비사라 칭하였느뇨? 고대에 역사 종류를 성서라 하여 왕궁에 비장하고 민간에 유행함을 불허한 까닭이니라. 신지와 신지 비사류가 어찌하여 하나도 후세에 전치 못하였느뇨? 이는 (일)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할 때에 왕궁의 비장이 병화에 타고, 신라의 것이 겨우 전하여 고려조까지도 왕궁에 한 벌이 있어, 이조(조선)에 와서는 이를 서운관에 장치하였더니, 또한 이조(조선) 임진의 란에 병화에 타니라.
(육) 조선 전성시대
기원전 십세기경으로부터 그 후 대략 오육백년 동안은 곧 대단군 조선의 전성시대니라. 수문비고에 고죽국(금 영평부)은 조선종이라 한바, 백이(백이)·숙제(숙제) 형제는 고죽국의 왕자로서 왕위상속권을 폐리 같이 버리고 지나(중국)의 주(금 합서성)에 유역하다가, 주무왕을 대하여 격렬히 비전론을 창하였으며, 고대 지나(중국)의 강회역에 조선인이 많이 이식하여 다수한 소왕국을 건설하더니, 서언왕(서언왕)이 그 중에 굴기하여 인의를 행하여 지나(중국) 삼십육국을 조공하였다.
이상은 조선의 본국과 정치적 관계가 없는 식민 중 일이호걸의 행동이어니와 기원전 오육세기 경에 불리지(불리지)란 자가 조선의 병을 솔하고 금 직예·산서·산동 등 성을 정복하고, 대현 부근에 일국을 건하여 자기의 명으로 국명을 삼아 불리지국이라 하니 ‘『주서』에 불령지와 『사기』의 리지’가 다 「불리지국」을 가리킨 것이며, 불리지(불리지)가 또 그 정복하는 지방을 그 성 「불」 - 불의 음으로써 지명을 지었나니, 요서의 「비여」나 산동의 「부역」이나 산서의 「비이」(기자에 보임)가 다 「불」의 역이며, 상고에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가 다 연륙하고 발해는 일개의 대호이었는데, 발해의 「발」도 음이 「불」이요 또한 (불리지(불리지)가 준 이름이니, 불리지(불리지)가 산동을 정복한 뒤에 조선의 유·초·호·리 등 모구와 금계 등 직물을 수출하여 발해를 중심하여 상업을 진흥하였더니라.
(칠) 조선의 쇠약
기원전 칠세기 말에, 조선이 고죽에 거하고 불리지국과 합하여 연과 진을 벌하니, 연과 진이 제에 구를 걸한 이때 제환공이 현상 관중(관중)과 명장 성부(성보)를 얻어 지나(중국)를 패할 새, 조·위·허·노 등 십여국을 솔하여 연을 구하고 태행산을 넘어 불리지국을 파하고 연을 지나 고죽을 이긴지라. 조선이 이에 병을 퇴하고 불리지의 고지를 다 잃으니, 지나인(중국인)이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보전을 얻은 고로 공구(공구, 공자)씨가 관중(관중)의 공을 찬하여 가로되 「휘관중 오기피발좌임」이라 하니, 피발은 조선의 편발을 가리킨 것이요 좌임은 조선의 좌편으로 염위는 의금을 가리킨 것이다. 관자에 대개 이 전쟁의 결과를 적었으나 (일) 지나(중국)문자가 매양 부과가 많은 중 그 대외전쟁에 우심하며, (이) 관자는 관중(관중)의 작이 아니요 지나(중국) 전국말엽에 어떤 사람의 저작인 고로, 목격의 담이 아닌 까닭에 다만 그 대체만 말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조선이 서북의 지방을 잃어 오랫동안 쇠약에 빠졌던 것은 엄닉하지 못할 사실이니라.
(팔) 단군년대의 고증
전사에는, 단군왕검 일천이백이십년 후에 기자(기자)의 왕조선을 기재하였으나, 기자(기자)는 기자(기자) 자신이 왕됨이 아니요, 기원전 삼백이십삼년 경에 이르러 그 자손이 비로소 불조선 왕이 되었나니, 이는 제이편 제이장에 기술하려니와 이제 사실을 따라 기자조선을 삭하노라.
또 전사에 단군(단군)이 처음 평양에 도하였다가 뒤에 구월산으로 천하고 그 자손에 이르러서는 기자(기자)를 피하여 북부여로 갔다 하나, 이도 또한 무계의 망설이다. 무릇 구월산에 천도하다 함은 『고구려사』에 초록한 『위서』의 「단군왕검 입국아사달 국호조선」의 구어로 인하여 아사의 음이 아홉(구)에 근하다 하고 달의 음이 달(월)과 동하다 하여 드디어 구월산을 아사달이라 함이다. 그러나 구월산은 황해도 문화현의 산인바, 문화의 고명이 궁홀이요, 궁홀은 이독문의 「궁골」로 독할 것이 궁골에 있는 산인 고로 궁골산이라 함이니, 마치 개홀(음개골)에 있는 산인 고로 개골산(금 금강산)이라함과 같거늘, 어제 궁골산을 구월산이라 와전하며, 구월산을 아홉달산으로 억해하여 구월산을 아사달산으로 망증하니, 어찌 가소할 일이 아니냐. 아사달은 리독문에 「스대」로 독한바, 고어에 송을 「스」라 하고 산을 「대」라 한 것이니, 금 합이빈(하얼빈)의 완달산이 곧 아사달이니, 이는 곧 북부여의 고지니 왕검의 상경이요, 금 개평현 동북의 안시고허인 「아리티」는 중경이요, 금 평양 「펴라」는 단군의 남경이니, 왕검 이래로 시의를 따라 삼경 중 그 일을 골이나 서울로 함이나, 그 본부는 북부여고지가 스대거늘, 이제 그 자손이 기자(기자)를 피하여 비로소 북부여에 갔다 함이 어디에 단소리냐? 그러므로 이를 채용치 않음이오. 또 전사에는 단군의 원년 무진을 당요 이십오년이라 하였으나 지나(중국)도 주소 공화(기원전 팔백사십일년) 이후에야 년대를 기함이어늘, 어찌 당요 이십오년이 하년인지를 알 수 있으랴. 그러므로 단군 원년을 적지하지 않노라.
고기에 단군이 수 일천사십팔 일천구백팔세 등 설이 있으나, 이는 신라 말엽에 신수두를 진단으로 환국을 환인으로 써, 불전의 구어로 조선 고사를 환롱하는 불교도들이 인도 고전의 삼만년·삼천년·오백년 등 장수를 가졌다는 불조에 방하여 만든 말이라 일박할 가치도 없다. 이조(조선) 초에 권근(권근)이 「전세불지기 역년회과천」의 시를 지어 이를 번안하였으나, 이는 다만 불가의 황탄어를 교정하였다 하면 가하나, 그러나 또한 단군의 시말을 모른 말이다. 내왕이천년전 유단군왕검 입도아사달이라 하였은즉 고구려 건국 이전 이천년이 단군왕검(단군왕검)의 원년이오. 삼국 중엽까지도 신수두를 갓 봉하여 단군이 거의 정치상 반주권을 가져 그 시말이 이천 몇 백년이 될지니, 어찌 천년만으로 산하리오. 그러나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 대왕과 대단군 병립하여 교정분립의 싹이 시작한 고로 본편을 이에서 그친다.
제삼편 삼조선분립시대
제일장 삼조선의 총론
(일) 삼조선의 명칭의 유래
역래에 각사에 삼조선 분립의 사실이 빠졌을 뿐 아니라 곧 「삼조선」이란 명사까지도 단군·기자·위만의 삼왕대라고 억해하였다. 삼조선은 신·불·말(진한·변한·마한) 삼한의 분립한 자니, 「신한」은 대왕이요, 불·말(변한·마한) 양한은 부왕이니, 삼한이 삼경에 분주하여 조선을 통치하였음은 이미 제일편에 술하였거니와, 삼조선은 곧 삼한이 분립한 뒤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신한의 소통은 신조선이라 하며, 말한의 소통은 말조선이라 하며, 불한의 소통은 불조선이라 하였나니, 신·말·불(진한·마한·변한) 삼한은 이두문으로 진·마·변 삼한이라 기한 자며, 신·말·불(진한·마한·변한) 삼조선은 이두문으로 진·막·번(진한·마한·변한) 삼조선이라 기한 자이다.
동일한 신·말·불(진한·마한·변한)의 역이거늘, 하고로 일은 진·마·변(진한·마한·변한)이라 하고, 타일은 진·막·번(진한·마한·변한)이라 하여 양역이 같지 않느뇨. 이는 남북의 리독문의 용자가 다른 까닭이거나 혹 지나인(중국인)의 한자음역이 조선의 리독문의 용자와 다른 까닭이니라.
조선에는 고전이 결망하였으므로 삼조선의 유래를 찾을 곳이 없으나 왕왕 지나(중국)사에 보였으니, 『사기』 「조선열전」에 「진막조선」은 신·불(진한·변한) 양조선을 대거함이며, 주에 「번 일작막」이라 한바, 번자를 막자로 대하면 「진막조선」이니, 진·막조선은 신·말(진한·마한) 양조선을 대거함이니, 「진막번조선」 혹 「진번막조선」이라 써 신·말·불(진한·마한·변한) 삼조선을 병거치 않고, 혹 막자를 빼어 진번조선이라 하거나, 혹 번자를 빼어 진막조선이라 기함은 하고이뇨. 이는 지나인(중국인)이 외국의 인명·지명 등 명사를 쓸 때에 매양 문세의 평순을 위하여 축자를 쓰는 관례로 쓴 것이니라.
목천자전의 ◉(연+조)한은 신한(변한)을 가리킨 것이요, 관자의 발조선과 대대례의 발식신은 불조선(변한)을 가리킨 것이요, 오직 말조선(마한)은 지나(중국)와 좀 격원하므로 『사기』 이외에는 타서에 보인 것이 없느니라.
(이) 삼조선의 위치와 범위
그러면 한은 국명이 아니라 왕이란 뜻이니, 삼한은 삼조선을 분통한 삼대왕이며, 삼조선은 삼한 - 곧 삼왕의 분통한바, 삼대 지방임은 물론이어니와 그 삼도의 위치와 강역의 범위도 기술할 수 있을까.
삼한의 도는 (일) 제일편에 술한 「스라」 금 합이빈(하얼빈)과 (이) 「알티」 금 개평현 동북 안시고허와 (삼) 「펴라」 금 평양이니, 삼조선이 분립하기 이전에는 신한(진한)이 전조선 통치의 대왕이 되고 불·말(변한·마한) 양한이 그 부왕이므로, 신한(진한)이 「스라」에 주하는 때는 말·불(마한·변한) 양한은 일은 펴라 타일은 알티에 류수하고, 신한(진한)이 알티 혹 펴라에 주하는 때는 말·불(마한·변한) 양한은 또 타 양경을 분수하다가, 밋(이윽고)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는 삼한이 각기 삼경의 일을 차지하고 조선을 삼분하여 가졌나니, 이때의 삼한의 가진 부분을 고컨대, 만주원류고에 ‘『한서』 「지리지」 요동의 번한현 금 개평 등지가 변한의 고도’라 한바, 번한과 변한이 동음인즉 개평 동북의 「알티」가 불한(변한)의 고도일 것이며, 『삼국유사』에 마한은 평양의 마읍산으로 명한 것이라 한바, 마한으로 인하여 마읍산이 명을 얻은 것이요 마읍산으로 인하여 마한이 명을 얻은 것은 아니나, 마한은 곧 평양에 도하였다가 후래에 남천함이 사실인즉 평양 - 곧 「펴라」가 말한(마한)의 고도일 것이며, 신한(진한)은 비록 가고할 곳이 없으나, 라리티와 펴라의 양경이 불·말(변한·마한) 양한의 분점한 바가 되었은즉, 신한(진한)이 합이빈(하얼빈) 즉 스라에 도하였을 것이 무의하니라.
이에 강역의 윤곽도 대개 그럴 수 있으니, 금 봉천성의 서북·동북(개원 이북, 흥경 이동)을 금 길림·흑룡의 양성과 금 연해주의 남단은 신조선의 소유며, 요동반도(개원이남, 흥경이서)는 불조선(변한)의 소유며 압록강 이남은 말조선(마한)의 소유이다. 그러나 전쟁의 세에 고정한 강역이 없은즉 시세를 따라 삼조선의 국토가 창축이 많았을 것이다.
(삼) 기록상 삼조선의 구별할 조건
이제 독사자들이 귀에서 들은 「신조선」·「불조선(변한)」·「말조선(마한)」이란 소리만 들어도 벌써 만반 경해하려든, 하물며 전사에 아무 구별 없이 쓴 「조선」이란 명사들을 가져다가 구별을 가하여, (갑) 사에 쓰인 조선을 신조선(진한)이라 하며, (을) 사에 쓰인 조선을 불조선(변한)이라 하며, (병) 사에 쓰인 조선을 말조선(마한)이라 하면 믿을 자가 누구이냐? 그러나 『삼국사기』를 독하면 「고구려본기」에 동·북 양부여를 구별치 않고 다만 부여라 썼으며, 「신라본기」에 대·소 등 오가야를 구별치 않고 다만 가야라 썼나니, 만일 전사에 구별치 아니한 것이라고 구별치 아니하면 양부여사나 오가야사의 본면목을 회복할 날이 없을 것이 아니냐? 하물며 삼조선의 분립은 조선고사상에 유일한 대사니, 이를 구별치 못하면 곧 그 이전에 대단군왕검(단군왕검)의 건국의 결론을 찾지 못할 것이며, 그 이후에 동북부여·고구려·신라·백제 등의 문화적 발전의 서론을 어찌 못할 것이니, 어찌 습견에 젖은 자의 두뇌에 맞추기 위하여 삼조선의 사적을 구별치 않으랴.
삼조선의 사적 재료는 오직 『사기』·『위략』·『삼국지』 등 지나사(중국사)뿐이나 피 지나사(중국사) 작자들이 그들의 유전적 교오병이 있어 조선을 서술할 때에 「조선」의 자체를 위하여 조선을 계통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오직 자가의 정치적 관계되는 조선을 서술할 새, 그나마도 왕왕 피아의 성패 시비를 전도하였음이 그 (일)이요, 조선의 국명·지명 등을 적을 때에 왕왕 조선인이 지은 본 명사를 쓰지 않고 자의로 딴 명사를 지어 동부여를 불내예라 하며, 오열홀을 요동성이라 한 류의 필법이 많음이 그 (이)이요, 조선은 특수한 문화로 특수한 발달이 있어 왔거늘, 매양 기자(기자)나 진의 유민에 귀공하려 하여 허다한 위증을 가짐이 그 (삼)이라. 그러므로 사마천(사마천)이 『사기』를 지을 때에 연의 멸망이 미구하여 연과 삼조선과의 관계된 사실의 가고할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며, 한무제가 조선의 일부분이요 삼경의 일인 「아리리」의 문화고도를 점령하여 고래의 전설과 기록이 적지 않았을 것이거늘, 이러함을 불구하고 『사기』의 조선전은 조선의 문화적 정치적 사실을 하나도 쓰지 않고, 오직 위만(위만)의 동주와 한병의 동침을 썼을 뿐이니, 이는 조선전이 아니라 위만(위만)의 소전이며 한의 동방침략의 략사요, 『위략』·『삼국지』 등 서는 관구검(관구검)이 실어간 고구려의 서적으로 재료하였으나 또한 그 폐습의 심리를 가지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무엇에 거하여 피등 기록에 보인 조선들을 가져 이것이 신조선(진한)이니 말조선(마한)이니 불조선(변한)이니 하는 구별을 내릴까. 『사기』 「조선전」에는 위만(위만)의 거한 불조선(변한)만을 「조선」이라 쓰는 대에, 신조선(진한)은 동호라 칭하여「흉노전」 에 넣었으니, 이제 『사기』 「흉노전」에서 신조선(진한)의 유사를, 「조선전」에서 불조선(변한)의 유사를 줍고, 『위략』이나 『삼국지』의 「동이열전」의 기록을 교정하여 이를 보충하고, 말조선(마한)은 지나(중국)에 격원하여 지나사(중국사)의 필두에 오른 적은 적으나 마한·백제의 선대는 곧 말조선(마한)의 말엽의 왕조이니, 이로써 삼조선의 파별된 역사의 대개를 알 것이다.
(사) 삼조선의 분립의 시
대단군의 정제에는 비록 삼한이 있어 삼경에 분주하였으나, 신한(진한)은 곧 대단군이니 제사장 겸 정치상의 원수가 되고, 말·불(마한·변한) 양한은 신한(진한)을 보좌하는 양 부왕에 불과하여 국의 체제를 확립하였으므로, 삼조선이란 명칭이 없었다가 밋(이윽고) 삼한이 분립한 뒤에 삼조선이란 명사가 생김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삼한이 하시대에 분립한 것이뇨. 『사기』에 보인 진·막·번(진한·마한·변한) 조선은 「전연시」 곧 연의 전성시대라 한바, 연의 전성시대는 지나(중국) 전국의 초며 「발조선」을 기한 「관자」는 관중(관중)의 소작이 아니요 전국시절의 위서며, 「발숙신」을 기한 대대례는 비록 한인 대승(대승)의 작이나 「발식신」 운운은 제인 추연(추연)의 소전인 바, 추연(추연)은 전국시대의 인물이니 신·말·불(진한·마한·변한) 삼조선의 명사가 이 같이 지나(중국) 전국시대인의 구문에 오르내렸은즉, 삼조선의 분립은 곧 지나(중국) 전국시대의 일이며 지나(중국) 전국시대는 기원전 사세기 경이니, 그러면 기원전 사세기경에 신·말·불(진한·마한·변한) 삼조선이 분립한 것이며, 신조선(진한)은 성 해씨니 대단군왕검의 자손이라 칭한 자며, 불조선(변한)은 성 기씨니 기자(기자)의 자손이라 칭한 자며, 말조선(마한)은 성 한씨니 그 선대의 연원은 알 수 없으나, 왕부(왕부) 잠부론에 「한서역성한 위위만소벌 천거해중」이라 한바, 한서는 대개 말조선(마한)의 속이니, 말조선(마한)은 성 한씨인가 한다.
위략에 「기자지후조선후 견주쇠 연자존위왕 욕동략지 조선후역자칭위왕 욕흥병역격연 이존주실 대부례 간지내지 사례서설연 이지지불공」이라 하였으니, 『위략』은 곧 서양의 백인종인 대진 「나마(로마)」까지도 중국인의 자손이라 기한 바, 가장 지나(중국)식의 자존적 병심리를 발휘한 글월이니, 그 전부 문자를 맹신할 수 없으나, 그러나 신한(진한)·불한(변한)을 당시 조선에서 진한·마한·변한으로 음역한 이외에 신한(진한)은 혹 의역하여 「진왕」·「태왕」·「대왕」이라 하였나니(단 진왕의 진은 음역), 신한(진한)은 한자로 쓰면 조선왕이라 하였을 것이며, 말한(마한)·불한(변한)은 의역하여 좌보·우보라 하였으니, 한자로 쓰면 조선후라 하였을 것이니, 기자(기자)가 이때에 불한(변한)의 위에 있는 자인즉, 조선후라 칭함이 또한 가하다. 불한(변한) 조선후 기씨가 신한(진한) 조선왕 해씨를 반하여 스스로 「신한」이라 칭하여 삼조선 분립의 국을 개시한바, 불한(변한)의 신한(진한)을 칭함이 연의 칭왕한 뒤요 연의 칭왕은 『사기』 주신정왕 사십육년 - 기원전 삼백이십삼년인즉, 신·말·불(진한·마한·변한) 삼조선 분립이 기원전 사세기경 되는 확증이며, 대부례(대부례)는 대개 불한(변한)의 유악 중의 모사니, 불한(변한)을 권하여 신한(진한)을 반하여 또한 신한(진한)이라 칭케 하고, 연과 결탁하여 동·서 양개의 신왕국을 동맹케 한 자가 또 대부례(대부례)니, 대부례(대부례)는 삼조선 분립을 주동한 중심 인물일 것이다.
삼조선 분립 이전에는 신한(진한)이 그 일이러니, 삼조선 분립 이후에는 신한(진한)이 삼이니 신조선(진한)의 신한(진한)이 그 일이요, 말조선(마한)의 신한(진한)이 그 이요, 불조선(변한)의 신한(진한)은 그 삼이니 곧 삼대왕이니라.
제이장 조선 분립 후의 신조선(진한)
(일) 신조선의 서침과 연·조·진의 장성
삼조선이 분립한 후 말기에 신조선(진한) 왕 모갑(모갑)이 영무하여 마침내 말·불(마한·변한) 양조선을 다시 연합하여, 금 동몽고(몽골) 등지를 쳐 선비를 정복하고 연을 쳐 우북평 - 금 영평부와 어양 - 금 북경 부근과 상곡 - 금 산서·대동부 등지를 다 차지하여 불리지의 고지를 회복하니, 연왕이 대공하여 세폐를 신조선(진한)에 바치고 칭신하며 태자를 보내어 류질하더니, 모갑(모갑)이 붕하고 모을(모을)이 왕이 되어서는, 연 태자가 돌아가 연왕이 되어 장군 진개(진개)를 왕자로 속여 견질하거늘, 모을(모을)이 그 속임을 깨닫지 못하고 진개(진개)의 민혜함을 사랑하여 좌우에 두더니, 진개(진개)가 모든 군국 비밀을 탐지하고 도귀하여 연병으로서 신조선(진한)을 습하여 신·말·불(진한·마한·변한) 삼국의 수병을 돌파하고 서북변경 - 곧 전자에 신조선(진한) 왕 모갑(모갑)이 점령한 상곡·어양·우북평 등지를 탈취하고, 진하여 불조선(변한)의 변경을 습하여 요서 - 금 노용현과 요동 - 금 요양 부근을 함락하여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 등 오군을 두고 이천여리 장성을 쌓아 조선을 막으니, 『사기』 「조선열전」의 「전연시 상침략진번조선」주7)과 「흉노열전」의 「연유현장진개 위질어호 호심신지 귀이습파동호 동호각천여리 … 연역축장성 자조양 지양평 치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과 『위략』의 「연유현장진개 위질어호 호심신지 귀이습파동호 동호각천여리 … 연역축장성 자조양 지양평 치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과 『위략』의 「연내견장진개 공기양방 취지이천여리 지만반한」주8)이 모두 이 일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진개(진개)가 질자로 갔던 조선은 신조선(진한)이요 불조선(변한)이 아니며, 만반한은 불조선(변한)이요 신조선(진한)이 아닌 고로, 『사기』에는 이를 「흉노전」·「조선전」 양처에 분기함이요, 『위략』에는 비록 「조선전」에 기하였으나 진개(진개)의 질자된 사실을 쓰지 않음이다. 만반한은 조선의 역사지리상 대문제니 이는 본편 제삼장에 술하리라.
이때 지나(중국) 북방의 국이 조선을 막기 위하여 장성을 쌓은 자가 연의 일국뿐 아니라 조(금 직예 서반과 하남 북단과 산서성) 무영왕의 장성(금 산서의 북)이 또한 조선과 조선의 속민인 담림·루번 등 때문에 쌓은 것이요, 진(금 합서성) 소왕의 장성은 의거(의거)를 멸하고 흉노를 막기 위하여 쌓은 것이나, 의거(의거)는 원래 조선종으로 금 감숙성에 이주하여 성곽과 궁실도 건축하며 농업도 발달하여 상당한 문화가 있고, 그 병력이 진을 압하더니, 진의 선태후(진시황의 고조모)는 절세의 미인이라, 의거(의거)가 진을 멸할까 공하여 의거왕을 유하여 간통하여 이자를 낳고, 마침내 의거왕을 유치하여 공살하고 이자까지 살하며 그 국을 습멸하니라.
(이) 창해력사의 철추와 진시황의 만리장성
신조선(진한)이 연·조와 격전하는 동안에 진이 강성하여 마침내 한·위·조·연·제·초 등 지나(중국) 열국을 다 멸하거늘, 한인 장량(장량)이 망국의 한을 품고 조선에 들어와 구원을 구하거늘, 왕모병(왕모병)이 역사 려씨를 소개하여 주어 진시황의 순행을 기회하여 백이십근 철추를 가지고 양무현 박랑사 중에서 이를 저격하다가 그르쳐 부차를 부수고 성공치 못하니라.
>『사기』에 장량(장량)이 창해군을 보고 역사를 구하였다 하였으므로, 혹자는 창해를 강릉이라 하고, 창해군을 강릉의 군장이라 하고, 역사 려씨를 강릉의 출생자라 하나, 그러나 창해는 동부여의 별명이요, 동부여 양국은 (일) 북갈사(금 혼춘), (이) 남갈사(금 함흥)에 도하였는즉, 창해는 우 양지 중의 일이니, 강릉 창해는 무근의 담이니라.
미기에 진시황이 동북의 조선과 서북의 흉노를 려하여 고 연·조·진의 장성을 연락하여 건축할 새, 전 지나(중국)의 인민을 발하여 요역에 종사하며 장군 몽념(몽염)으로 하여금 삼십만병을 거느리고 감독케 하여 동양사상 소위 유명한 만리장성을 완성하더니, 기원전 이백십년에 시황이 죽고 이세가 즉위함에, 익년에 진승(진승)·항적(항적)·유방(유방) 등 혁명군웅들이 봉기하여 진이 망하니라. 이두산(이두산)이 론하여 가로되 진의 위력이 긍고 이래 짝이 없도록 팽창하여 만성이 바야흐로 시황을 천신으로 우러러보는데, 난데없는 벽력 같은 일철추가 시황의 혼백을 치탈하며 육국 유민의 적개심을 고동한 고로, 시황의 시가 땅에 들어가기 전에 망진의 기가 사방에 날리었나니, 이는 창해역사의 공이 아니라 할 수 없다 하니라.
(삼) 흉노 모돈의 동침과 신조선(진한)의 위축
지나(중국)의 항적(항적)·유방(유방) 등 팔년동란이 이는 사이에 신조선(진한) 왕모정(왕모정)이 서방으로 출병하여 상곡·어양 등지를 회복하고 금 동몽고(동몽골) 일대의 선비를 강복하여 국위가 다시 떨치더니, 그 자손의 대에 마침내 흉노 모돈(묵돌)의 난을 만나 국세가 드디어 쇠약하고 말았다.
흉노는 제일편에 술함과 같이 조선과 어계가 같고 조선과 같이 수두를 신의하여 조선의 속민이 되었던 자인데, 금 몽고(몽골) 등지에 산포하여 목축과 수렵에 종사하여 천성이 침략을 즐겨 자주 지나(중국) 북부를 유린하며 신조선(진한)에 대하여서도 반부가 무상하더니, 기원전 이백년 경에 두만(두만)이 흉노 단우(흉노 추장의 호)가 되어 장자 모돈(묵돌)을 미워하고 소자를 사랑하다가 모돈(묵돌)에게 죽고 모돈(묵돌)이 대하여 단우가 되거늘, 신조선(진한) 왕이 모돈(묵돌)의 흉한함을 모르고 청구가 빈수하였다. 그러나 모돈(묵돌)은 짐짓 그 환심을 사기 위하여 신조선(진한) 왕이 천리마를 구한즉, 모돈(묵돌)이 그 애마를 주고 신조선(진한) 왕이 미인을 구한즉, 모돈(묵돌)이 그 알씨(단우 처첩의 칭)를 주니, 신조선(진한) 왕이 더욱 모돈(묵돌)을 믿어 사자를 보내 양국 중간의 천여리 구탈을 신조선(진한)의 소유로 달라 하였다. 구탈은 당시 중립 공지의 칭이니, 모돈(묵돌)이 이 청구를 접하고 대노하여 가로되 「토지는 국의 본이니 어찌 이것을 달라 하느뇨」 하고 드디어 사자를 죽이고 전흉의 기병을 총발하여, 신조선(진한)의 서방-금 동몽고(동몽골) 등지를 습격하여 거민을 유린하고 다수 선비를 학살한지라. 신조선(진한)은 퇴각하여 장성 이외 수천리지를 버리며 선비의 여중들은 선비산 - 금 내외 흥안령 부근으로 도주하니, 이로부터 신조선(진한)이 미약하여 오랫동안 린족과 겨루지 못하더라.
엄복(엄복, 청말 학자)이 가로되, 「흉노는 수초를 따라 천사하는 만족이니 어찌 「토지는 국의 본이란」 말을 내었으랴. 이는 한갓 사마천(사마천)의 부과한 문필이 될 뿐이라」 하였다. 그러나 『사기』·『한서 』등을 참고하면 흉노가 음산의 험조를 빼앗긴 뒤에는 그 지방에 지나는 자가 반드시 통곡한다 하며, 연지의 산하는 언지산을 빼앗긴 뒤에는 비가를 지어 상위하였으니, 흉노의 토지수요가 비록 문화적 민족과 같지 못할지나, 아주 토지의 관념이 없다 함은 벽단인가 하노라.
제삼장 삼조선 분립 후의 불조선(변한)
(일) 불조선의 서북경 피탈
불조선(변한)이 신조선(진한)과 합작하다가 연에게 패함은 이미 전술한지라 여기에는 다만 그 소실한 토지의 기하인 것이나 말하리라. 『위략』에 「진개공기서방 취지이천여리 지만반한위계」라 한 바, 선유들이 조선과 연의 유래 국경을 금 산해관으로 잡으며, 진개(진개)가 탈취한 이천여리를 산해관 이동의 종선 이천여리로 잡고, 만반한은 대동강 이남에서 찾으려 하였으나, 이는 대착오의 억단이다. 『사기』나 『위략』을 참조함에, 진개(진개)의 탈취한 토지가 명백히 상곡부터 요동까지니, 만반한을 요동 이외에서 구함이 불가하며, 『한서』 「지리지」 에 거하면 요동군현 내에 「문번한」의 양현이 있는 바, 만반한은 곧 문번한이며 문현은 비록 연혁이 전치 못하였으나 번한은 금 개평 등지인즉, 문현도 개평현 부근됨이 가한즉 만반한은 금 해성 개평 등지의 부근이 될지어늘, 이제 만반한을 대동강 이남에 구하려 함이 무엇에 의거함이뇨. 대개 만반한은 진개(진개) 입구시의 지명이 아니요 후세 진시 혹 한시의 명칭인 것을 『위략』 작자가 이를 가져다가 진개(진개) 입구 시에 양국의 국경을 입증한 것일지며, 번한은 불한(변한) 고도의 부근인 고로 명한 것일지니라.
사기의 천여리는 신조선(진한)의 소실한 토지만 단지한 것이오, 『위략』의 이천여리는 신·불(진한·변한) 양조선의 소실한 토지를 병지한 것이니, 어양·상곡 일대는 신조선(진한)의 소실한 토지요 요동·요서·우북평 일대는 불조선(변한)의 소실한 토지니라. 만반한은 사군 연혁의 문제와 관계가 심절한 자이니 본절은 독자의 뢰기를 요한다.
(이) 불조선의 진한과의 관계
연왕 희(희)가 진시황에게 패하여 요동으로 천도하거늘, 불조선(변한)이 왕일 연에 대한 숙원을 잊지 못하여 진과 약하여 연을 공멸하더니, 미기에 진시황이 몽괄(몽염)으로 하여금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거늘, 불조선(변한)이 진과 국경을 정할 새, 금 헌천락 이남의 연안 수백리지를 양국의 중립공지로 정하여 양국 인민의 입거를 금하니, 『사기』의 소위 고진공지는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위략』에 거하면 이때에 불조선(변한)왕의 명을 「부」라 하였으나, 그러나 『위략』과 동일하게 관구검(관구검)이 실어간 고구려 문헌으로 재료한 『삼국지』와 『후한서』의 「동이열전」에는 부를 기치 아니하였으니, 『위략』에서 신조선(진한) 말엽의 왕 곧 동부여 왕된 부루(부루)를 「부」로 와전함인가 하여 여기에 채용치 않는다.
기원전 이백여년 경에 기준(기준)이 불조선(변한) 왕이 되어서는 진의 진승(진승)·항적(항적)·유방(유방 한 고조) 등이 반하여 지나(중국)가 대란하여 상곡·어양·우북평 등지의 조선 구민과 연·제·조의 지나인(중국인)들이 난을 피하여 투화하는 자가 많거늘, 준(기준)이 이를 서방의 고 중립공지에 입거함을 허하더니, 밋(이윽고) 한고조 유방(유방)이 지나(중국)를 통일함에 준(기준)이 다시 한과 약을 정하여 고 중립공지는 불조선(변한)의 소유로 하고 헌천락으로 국경을 삼은 바, 『사기』 「조선전」에 「한흥 … 지패수위계」와 『위략』에 「한흥이노관위연왕 조선여연 계어패수」주9)(선유들이 패는 패의 오라 하므로 본서에 이를 좇는다)라 한 자가 다 이것을 가리킨 것이니, 대개 불조선(변한)과 연이 만반한으로 정계하였다가 이제 만반한 이북으로 퇴하였은즉, 양서의 패수는 다 헌천락을 가리킨 것임이 명백하다. 선유들이 왕왕 대동강 패수를 고집함은 물론 대오어니와, 근일 일본 백조고길(시라토리 쿠라키치) 등 압록강 하류를 패수라 하니, 또한 대망이니라.
우에 패수에 관한 론술은 전절의 만반한과 하절의 왕검성과 대조하여 볼 것이니라.
(삼) 위만(위만)의 반란과 불조선(변한)의 남천
기원전 일백구십사년에 한의 연왕 노관(노관)이 한에 반하다가 패하여 흉노로 도망하고 관(노관)의 동당 위만(위만)이 불조선(변한)으로 들어와 투화하거늘, 준왕이 위만(위만)을 신임하여 박사관을 배하여 패수 서변(고 중립공지) 수백리를 주어 해지에 이주한 구민과 연·제·조인을 치리하게 하더니, 위만(위만)이 이로써 군사를 만들며 더욱 조선과 지나(중국)의 망명 죄인을 초치하여 사당을 만들어 병력이 이미 성장함에, 「한병이 십도로 입구한다」는 허위의 보고를 준왕에게 올리고, 사자를 준왕에게 보내어 들어와 시위함을 청하여 허가를 얻고, 위만(위만)이 이에 정병으로 질치하여 준(기준)의 도성 곧 왕검성을 습하니, 준왕이 역전하다가 불리하여 좌우 궁인을 싣고 잔병으로써 해도를 쫓아 마한의 왕도 월지국으로 들어가 이를 습파하고 왕하더니, 미구에 마한 열국이 공기하여 준왕을 멸하니라.
왕검성은 대단군 제일세의 명으로 명한 자니, 대단군의 삼경이 금 합이빈(하얼빈)과 금 평양과 전술한 불한(변한) 고도 - 금 개평 동의 삼처인즉 삼처가 다 왕검성의 명을 가졌을 것인 바, 위만(위만)이 도한 왕검성은 곧 개평 동북이니,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주왈 「조선왕만도야」)이 그것이요, 마한의 왕도는 금 익산이라 하나 대개 와전이니 차장에 논술하리라.
제사장 삼조선 분립 후의 말조선(마한)
(일) 말조선(마한)의 천도와 개호 마한
말조선(마한)의 초도가 평양임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그 후(연대는 불명)에 국호를 말한(마한)이라 개하고 남방의 월지국으로 천도하여 불조선(변한) 왕 기준(기준)에게 망하였다. 그 천도한 원인이 무엇인지 전사에 보인 곳이 없으나, 대개 신·불(진한·변한) 양조선이 흉노와 지나(중국)의 질차 침략을 받아, 북방의 풍운이 번급함에, 말조선(마한) 왕이 난을 염하여 드디어 남방의 격원한 지방으로 천도하는 동시에, 모든 침략주의를 가진 역대 제왕들에 검두에서 빛나던 「조선」이란 명사는 외국인이 시악하는 바라 하여 드디어 말조선(마한)이란 칭호를 버리고, 구일에 왕호로 쓰던 「말한」을 국호로 써 리독자로 마한이라 쓰고 새로 쓰는 왕호인 「신한(진한)」은 리독자로 진왕이라 써 「마한국 진왕」이라 칭하니, 동일한 「한」이란 명사를 (일)은 음을 취하여 「한」이라 하여 국호로 쓰고, 타(일)은 의를 취하여 왕이라 하여 왕호로 씀은 문자상 국호와 왕호의 혼동을 피함이니라.
국호를 마한이라 쓰는 동시에 왕조는 한씨가 세습하여 국인들이 한씨 왕의 존재만 아는 고로, 기준(기준)이 그 왕위를 탈취하고는 국인의 불평을 조화하기 위하여 본성 기씨를 버리고 한씨로 개성함이니라. 『삼국지』에 「준 … 주입해 거한지 호한왕」이라 하고, 『위략』에 (준자급친 류재국자 모성한씨) 월지국을 전사에는 백제의 금마군 - 금 익산이라 하였으나, 이는 속전의 익산군 마한 무강왕릉을 인하여 무강왕을 준(기준)의 시라 하며, 해 부근 미륵산의 선화부인 유적을 준(기준)의 왕후 선화(선화)의 유적이라 하여, 드디어 준(기준)이 남주하여 김마군에 도하였다 한 것이다. 그러나 무강왕릉은 일명 말통대왕릉이요, 말통(말통)은 백제무왕의 유명이요(무왕의 명은 「마동」이니, 『삼국유사』의 서동(서동)은 그 의역이요 『고려사』 「지리지」 의 말통은 그 음역) 선화(선화)는 신라 진평대왕의 공주로서 무왕의 왕후된 자며, 백제가 왕왕 마한이라 함은 역사에 그 예가 적지 않은 즉, 이따위 고적은 한갓 익산이 백제 고도됨을 증함이 족하고 준(기준)의 고도됨을 증하기에는 부족할뿐더러 마한 오십여국 중에 월지국과 건마국이 있는바, 건마국이 곧 김마군-금 익산일 것인즉, 월지국 - 마한 고도는 타국에서 구함이 가하니, 그 적확한 지점은 알 수 없으나 마한과 백제(백제건국 십삼년)의 국경이 웅천 - 금 공주니, 월지국이 대개 그 부근일 것이니라.
말한(마한)이 비록 국호가 되었으나, 그 오육백년 후에도 오히려 왕호로 쓴 이가 있다. 신라의 눌지·자비·소지·지증 사왕은 다 「마립간」이라 칭한바, 눌지마립간 주에 「마립 궐야」라 하니 궐은 자의가 「말」인즉, 마립의 「마」는 그 전성을 취하여 「마」로 독하며 「립」은 그 초성을 취하여 「ㄹ」로 독하고 「간」은 그 전성을 취하여 「한」으로 독한 것임이 명백한즉, 「마립간」은 곧 「말한」이요 말한을 왕호로 쓴 증거니라.
(이) 락랑과 남삼한의 대치
마한이 월지국으로 천도한 뒤에 그 고도 평양에는 최씨가 굴기하여 그 부근 이십오국을 통속하여 일대국이 되니, 전사에 이른바 락랑국이 그것이다. 락랑이 이미 분리함에 마한이 금 임진강 이북을 실하였으나, 오히려 임진강 이남 칠십여국을 통어하더니, 미기에 북방에서 지나(중국)와 흉노의 난을 피하여 마한으로 들어오는 신·불(진한·변한) 양조선의 유민이 날로 많으므로 마한이 금 락동강 연안 우편의 백여리지를 할하여 신조선(진한) 유민을 주어 자치계(고대에 회를 계라 칭함)를 입하여 명을 「진한부」라 하고 낙동강 연안 우편에 다소 지방을 할하여 불조선(변한) 유민을 주어 또한 자치계를 입하여 변한부라 칭하더니, 변한에는 신조선(진한) 유민들도 잡거하는 자가 있으므로 변진부라고도 칭하니 이는 남삼한이니, 마한이 구태여 진·변 양한을 입함은 또한 삼신을 의하여 삼한 수를 채운 것이다. 대단군왕검의 삼한은 신한(진한)이 중심주권자가 되고 말·불(마한·변한) 양한은 좌우 보상이더니, 이제 남삼한은 말한 곧 마한이 최대국 곧 종주국이 되고, 신한(진한) 곧 진한과 불한(변한) 곧 변한이 양소국 곧 소속국이 됨은 그 이주민의 계통을 쫓아 이름을 지은 까닭이거니와, 그러나 삼한이 다 왕을 신한(진한)이라 칭하여(이를테면 마한의 왕은 말한나라의 신한이라 하며 진한의 왕은 신한나라의 신한이라 하며 변한의 왕은 불한나라의 신한이라 함) 신한(진한)이 삼개가 되니, 대개 전자(삼한 분립)는 왕검이 지은 명사를 잉용함이며 후자(신한 삼개)는 삼조선 분립 이후에 삼 신한을 잉용함이요, 진·변 양한의 양 신한(진한)은 자립하지 못하고 세세로 마한의 신한(진한)이 예겸하여 명만 있고 실이 없으니, 이는 남삼한의 창례니라. 「삼한」이 우리 역사상에 비상히 시비 많은 문제로 되었으나, 그러나 역래의 학자들이 다만 진수(진수) 『삼국지』 「삼한전」 의 삼한 곧 삼남한을 거하여 그 강역의 위치를 결정하려 할 뿐이요, (일) 삼한의 명칭의 유래와 (이) 삼한의 례제의 변혁은 알지 못하므로 비록 공력은 많이 들였으나, 북방 원유의 삼한을 발견하지 못할 뿐 아니라 곧 남삼한의 상호관계도 명백함을 얻지 못하니라.
(삼) 낙랑 이십오국과 남삼한 칠십여국
낙랑제국이 사에 보인 자가 이십오니, 조선·감감·패수·함자·점선·수성·증지·대방·사망·해명·열구·장잠·둔유·소명·루방·제해·혼미·탄열·동이·불이·잠태·화려·사두미·전막·부조 등이니, 우 이십오국은 『한서』 「지리지」에 한 낙랑군의 이십오현으로 기재하였으나, 이는 『한서』의 본문이 아니라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입코저할 때에 그 신민의 적개심을 고발하기 위하여 조선 고지가 거의 지나(중국)의 구물임을 위증하려 하여, 전대 지나(중국)의 사책 중 무릇 조선에 관계되는 문자를 가지고 다수 개찬할 새, 드디어 조선 고대의 낙랑 이십오국을 낙랑 이십오현으로 고쳐 우 지리지 중에 넣은 것이니, 이는 제삼편에 다시 상론하리라. 이십오국 중 「조선」과 「패수」는 다 평양에 있는 국인바, 조선은 곧 「말조선(마한)」의 고지인 고로 조선이라 칭하여 낙랑의 종주국이 된 자요 패수는 「펴라」로 독할 것인바, 이십사 속국의 (일)이니 조선국과 패수국의 관계는 비컨대, 전자는 평양감영과 같고 후자는 평양윤과 같은 것이며, 소명은 금 춘천 소양강이요, 불이는 그 뒤에 동부여된 자니 금 함흥이니, 낙랑국의 전체가 금 평안·황해 양도를 시하여 강원도·함경도의 각 일부분을 소유한 것이니라. 삼한 제국이 사에 보인 자가 칠십여니, 마한은 원양·모수·상외·소석삭·대석삭·우휴모탁·신분활·백제·속노불사·일화·고탄자·고리·노람·월지·자리모노·소위건·고원·막노·노비리·점비리·신흔·지침·구노·비미·감해비리·고포·치리국·염로·아림·사노·내비리·감해·벽비리·구사오단·일리·불리·지반·구소·첩노·모노비리·신소도·고랍·임소반·신운신·여미비리·초산도비리·일난·구해·불운·불사분사·원지·건마·초리 등 오십사국을 통하니, 비리 제국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부여와 백제지리지의 부리이니, 「비리」는 부여 - 금 부여요 감해비리는 고막부리 - 금 공주요. 벽비리는 파부리 - 금 동복이요, 여래비리는 이릉부리 - 금 릉주요, 신소도는 신수두 곧 대신단이 있는 곳이니, 성대호(일명 소태) - 금 태안이요, 지침은 지심 - 금 진천 등지요, 건마는 김마군 - 백제 무왕릉 있는 곳이요. 이외에도 가고할 것이 많으나 아직 궐하노라.
변한은 미리미동·접도·고자미동·고순시·반로·락노·미오사마·감로·구사·주조마·안사·독노 등 십이부의 통칭이니, 미동은 「믿」으로 독하니 수만의 의요, 고자는 「구지」로 독하니 반도의 의요, 사는 「라」로 독하니 강의 의니, 우의 십이부는 신라 지리지와 가락국지에서 그 유지를 찾은즉, 고자미동은 고자군 - 금 고성만이요, 고순시는 고령가야 - 금 상주 함창 간의 공갈못이니 공갈은 고령가야의 촉음이요, 반로는 「벌」로 독하니 성의 의니 성산가야 - 금 성주요, 미오사마는 「미오마사」로 작하여 「밈라」로 독하니 임나 - 금 고영이요, 구사는 「가라」로 독하니 대지의 의니 금 김해요 , 안사는 「아라」로 독하니 수명이니 금 함안이니, 우의 육국은 곧 후래에 가라 육국(제삼편 제사장 제이절 참고)된 자요, 그 나머지는 미상하나 대개 그 부근이니라.
진한은 기기·불사늑기·염해군미·여담·백로·주선·마연·사노우중 등 십이부의 통칭이니, 우의 십이부는 오직 사노가 신라인 줄을 알 수 있고 그 이외 각부의 연혁은 알 수 없으니, 이는 신라말에 한학자들이 그 명사는 모두 구래의 리독자를 버리고 한자로 의역한 까닭이니, 그 상세는 제삼편 제사장에 논하리라.
마한이 본래 거의 압록 이동 전부를 소유하였다가 따로 낙랑·진한·변한 삼국이 생겨 금 조령 이남과 임진강 이북을 분점하였으나 진·변 양한은 명은 국이로되 실은 신·불(신한·변한) 양조선의 유민의 자치부며, 마한에 대하여 조공과 세납을 부절하여 낙랑 같은 적국이 아니었더라.
제오장 삼조선의 붕궤의 그 원인과 결과
(일) 삼신설의 파탄
본편 제이, 삼, 사의 삼장의 역술한 바와 같이 신·말·불(진한·마한·변한) 삼조선이 이렇게 동시에 붕궤함은 하고이뇨. (일) 삼한은 원래 천일·지일·태일의 삼신설에 의하여 인민들이 「말한」은 천신의 대표 「불한」은 지신의 대표, 신한(진한)은 천보다 높고 지보다 큰 우주 유일신의 대표로 신앙하여 오다가, 밋(이윽고) 말·불(마한·변한) 양한이 신한(진한)을 반하여 각기 신한(진한)이라 자칭하여, 삼대왕이 병립하여 지력으로 지위를 획득하매, 이에 일반인들이 계급은 자연적 고정적이 아니요 력만 있으면 파괴할 수도 있고 건설할 수도 있음을 깨달아 삼신설을 회의함에 이름이 그 원인이요. (이) 역대의 삼한이 한갓 삼신의 미신으로만 인심을 유번함이 아니라 매양 외구를 척축하고 국토를 확대하여 천하가 다 그 위영에 전률케 하더니, 이제 삼국의 신한(진한)들로서 흉노와 지나(중국)의 질차 침구를 저항치 못하여 국토가 많이 할기됨에, 일반인들이 이에 「제왕도 인의 자요 천의 자가 아닌 고로 그의 성패흥망도 범인과 같음을 알아 삼한의 신엄을 부인함에 이름이 그 근인이니, 삼신설의 기초 위에 세운 삼한인 즉 삼신설에 파탄이 생긴 이후에야 어찌 붕궤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 열국의 분립
삼신설의 파탄이 생겨 삼한에 대한 신앙이 타락되니, 이는 확실히 조선 유사 이래의 일대 변국이다. 그러므로 일부 인민들이 신인과 영웅들의 허위를 각오하고 왕왕 자치촌·자치계 같은 것을 설립하여 민중의 력으로 민중의 일을 자결함을 시험하였나니, 기록에 보인 증적은 진한부·변한부 같은 것이 그 일종이요 그 이외에 사책에 누락된 그따위 시험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신을 타파하여 우주문제·인생문제 등을 진정하게 해결한 학설이 없으며, 사린에는 조선보다 문화가 저급되는 예·선비·흉노·왜 등 만족들이라, 진화에 보조하여 줄 붕우가 없으며 지나(중국)는 비록 구원한 문화를 가졌으나 거의 군권을 옹호하는 사상과 학설뿐이라 그 문자의 수입이 도리어 민중의 진보를 방해하게 된지라. 민중의 지력은 유치하고 구세의 근저는 심후하여 이에 제왕의 묘예들은 그 조전의 지위를 회복하려 하며, 민간의 효웅들은 사회의 신지위를 획득하려 하며, 소국은 대국됨을 희망하며 대국은 더욱 강토를 확장하려 하여, 혹은 신수두님(대단군)이라 칭하며, 혹은 신한(진한)(진왕)이라 하며, 혹은 말한(마립간)이라 칭하며, 혹은 불구례(불구내)라 칭하며, 혹은 천상에서 강하하였다 운하며, 혹은 해외에서 표래하였다 하며, 혹은 태양의 정기로 낳았다 운하며, 혹은 란 속에서 나왔다 운하여, 전통적 미신세력을 의거하여 민중을 유혹 혹 위협하매, 구구한 민중세력의 새싹이라 할 다소의 자치단체가 그 정복을 받아 스스로 소헐하고 세력쟁탈의 란이 사방에서 일어나 열국쟁웅 시대를 형성하였느니라.
제사편 열국 쟁웅시대(대한족 격전시대)
제일장 열국의 총론
(일) 열국 년대의 정오
삼조선이 붕궤하고 신수두님·신한(진한)·말한(마한)·불구례 등의 참호자가 각지에서 군기하여 열국 분립의 국을 만듦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열국사를 말하려면 전사의 열국의 연대를 소감하였으므로 이제 그 연대부터 말하여야 하겠다. 어찌 열국년대가 소감되었다 하느뇨. 먼저 고구려 년대가 소감된 것부터 말하리라.
고구려가 신라 시조 혁거세 이십일년 - 기원전 삼십칠년에 건국하여 신라 문무왕 팔년 - 기원 육백육십구년에 망하니, 형국이 도합 칠백오년이라고 일반 사가들이 적어왔다. 그러나 고구려가 망할 때에 「불급구백년」이란 비기가 유행한 바, 비기가 비록 요서라 할지라도 그 시대에 그 비기가 인심동요의 도선이 되었은즉, 이때(문무왕 팔년)에 고구려 년조가 팔백 몇 십년 이상됨이 명백하니, 「본기」의 칠백오년이 의문됨이 (일)이요. 「고구려본기」로 보면 광개토왕이 시조 추모왕 십삼세손이 될 뿐이나 광개토왕의 비문에 「전지십칠세손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구로 거하면 광개토왕이 시조 추모왕의 십삼세손이 아니요 십칠세손이니, 이 같이 세대를 궐한 「본기」인즉 그 칠백오년이라 운하는 년조도 족신할 수 없음이 (이)요.
「본기」로 고하면 고구려 건국이 위우거 멸망한 지 칠십이년만이지만, 『북사』 「고려전」에는 「막래(막래)」가 립하여 부여를 쳐 대파하여 이를 통속하더니, 밋(이윽고) 한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사군을 립할 때에 고구려를 현이라 한 바, 막래(막래)는 해동역사에 「모본의 오자인가」 하였으나 막래는 「무뢰」로 독할 것이니, 박의 의며 신의 의니 대주류왕의 명 「무휼(무휼)」과 음이 같을뿐더러 「본기」에도 동부여를 정복한 자가 곧 대주류왕인즉, 막래(막래)는 모본왕이 아니라 대주류왕일 것이며, 막래(막래) 곧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한 뒤에 한무제가 사군을 건치하였는즉, 고구려 건국이 사군 건치 략 백 몇십 년 전이 된 것이 무의함이 (삼)이니, 고구려 당대의 비기와 그 자손 제왕의 건립에 계한 비문이 먼저 명증하고, 비록 외국인의 전문적 기록이지만 북사가 또한 부증하니, 고구려 년대의 백 몇십 년의 소감되었음이 더욱 확실하다.
안순암(순암 안정복) 선생이 문무왕의 고구려 족자 안승(안승)을 봉한 신라 문무왕의 어에 「년장팔백」의 어를 인하여 고구려 년조의 소감됨을 인하였으나, 기실 「년장팔백」의 「팔」은 구로 작함이 가할지니, 대개 고구려의 년대를 소감한 뒤에 「구백」을 「팔백」으로 고쳐 고구려 형국이 칠백오년의 위증을 만든 것이니라.
어찌하여 고구려 년대가 소감되었느뇨. 이는 고대 건국의 선후로 국가의 지위를 다투는 풍기[추모(추모)와 송양(송양)의 립도 선을 다툰 류]가 있으므로, 신라가 그 건국이 고구려와 백제의 뒤짐을 치하여, 이국을 멸한 뒤에 기록상의 세대와 년조를 소감하여 모두 신라 건국 이후의 국을 만듦이며, 동부여·북부여 등국은 신라와 은원 없는 선대의 국이지만 이미 고구려의 년조를 백 몇십 년이나 소감하매, 사실의 관계상 고구려·백제의 부조행인 동부여의 연대와 고구려·백제의 형제행인 가라·옥저 등국의 연대까지 소감한 것이니라.
그래서 이제 전사에 보인 고구려 건국 원년에서 백 몇십 년을 너머 기원 일백구십 년 경의 전후 수십 년 동안을 동·북부여, 고구려의 분립한 시기로 잡고 그 이하 모든 열국도 같은 시기로 잡아 열국사를 역서하려 한다.
(이) 열국의 강역
열국의 연대만 소감될 뿐 아니라 그 강역도 거의 소감되어 북방의 국이 수천리를 옮기어 남방으로 온 자가 한 둘 뿐이 아니다. 강역은 또 하고로 소멸되었느뇨? 신라 경덕왕이 북방의 주군을 잃고 그 북방의 고지명과 고적을 남방으로 옮김이 제(일)인이 되며, 고구려가 쇠약하여 압록강 이북을 고토로 인치 못하여 전대의 지리를 기할 때에 북방의 국을 또한 남방으로 옮긴 것이 많음이 제(이)인이 되어, 조선의 지리 전고가 말할 수 없이 뒤바뀌어 비록 근세 한구암(구암 한백겸)·안순암(순암 안정복) 제선유의 수정을 지나 다소의 회복이 되었으나, 열국시대의 지리는 그 퇴축됨이 의구하다. 이제 그 대략을 말하리라. (갑)은 부여니 신조선(진한)이 최초에 삼국의 부여로 분하니, (일)은 북부여니, 북부여는 아사달에 도한 바 『삼국지』에 「현토지북천리」라 하였은즉, 금 합이빈(하얼빈)이거늘 선유들은 금 개원이라 하였으며, (이) 동부여니, 동부여는 갈사나에 도한 바,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칠 때에 「북벌」한다 운하였은즉, 고구려의 동북 금 혼춘 등지가 동부여이거늘 선유들은 금 강릉이라 하였으며, (삼)은 남부여니,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공파한 뒤에 동부여가 양분하여 (일)은 고갈사나에 유하니 곧 동부여요, 우 (일)은 남방에 신갈사나를 건하니, 곧 남동부여니 전자는 미구에 고구려에 투하여 국호를 제하고, 후자는 문자왕 삼년 - 기원 사백구십사년에 비로소 고구려에 병합된 바, 남동부여는 곧 함흥이거늘 선유들은 남동부여의 강역을 모를 뿐 아니라 남동부여란 명칭도 몰랐으며, (을) 사군이니, 위만(위만)이 동도한 패수가 『위략』의 만반한 - 『한서』 「지리지」의 요동군의 문번한 - 금 해성·개평 등지인즉, 금 한우락임이 가하며 한무제가 점령한 조선이 패수 부근 위만(위만)의 고지인즉, 그 건치한 사군만 삼조선의 국명·지명을 가졌다가 요동군내에 가설한 자이거늘, 선유들은 매양 사군의 위치를 금 평안·강원·함경 등 각도와 고구려의 도성인 금 환인 등지에서 찾았으며, (병)은 낙랑국이니, 낙랑국은 한의 낙랑군과 각별한 금 평양에 국한 자이거늘, 선유들은 이를 혼동하였고, 기외 고구려·백제의 초대의 국도와 신라·가나의 위치는 선유들의 수정한 바가 대략 틀림없으나, 주군 혹 전쟁 지점의 위치는 거의 신라 경덕왕 이후 이설한 지명으로 인하여 그대로 착오되었으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이를 교정하여 열국사를 역서하려 한다.
제이장 열국의 분립
일. 동부여의 분립
(일) 해부루의 동천과 해모수의 산굴기
북부여와 양 동부여와 고구려의 사국은 신조선(진한)의 판도 내에서 입국한 자라. 그러나 신조선(진한)이 멸망하여 부여 왕조가 되고 부여가 다시 분열하여 우삼국이 되었는지, 부여는 곧 신조선(진한)의 별명이요 따로 부여란 왕조가 없이 신조선(진한)으로부터 우삼국이 되었는지, 이는 가고할 곳이 없거니와, 신조선(진한)이 흉노 모돈(묵돌)에게 전패한 때가 기원전 이백년 경이요 동북 부여의 분립도 또한 기원전 이백년 경이니, 후설이 혹 상근한가 한다.
전사에 동·북 부여의 분립한 사실을 기하여 가로되 「부여왕 해부루(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다니며 기도하여 아들 낳기를 구하다가 곤연(경박호)에 이르러서는 왕이 탄 말이 대석을 보고 눈물을 짓거늘, 이를 괴히 여겨 그 돌을 뒤집은즉 김색 와형의 소아가 있는지라. 왕이 가로되 이는 하늘이 주신 나의 아들이라 하고 수양하여 김와(금와)라 명하여 태자를 삼았다. 이 뒤 얼마 만에 상 - 아란불(아란불)이 왕께 고하여 가로되 “요사이에 천이 나에게 강하사 가로되, 이 땅에는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국을 건하려 하니, 여등은 피하여 동해빈의 가엽원으로 가거라. 그 땅의 토성이 오곡에 의하니라 하더이다.” 하고 천도함을 청하므로, 왕이 이를 좇아 가엽원으로 천도하여 국호를 동부여라 하고, 고도에는 천제자 해모수(해모수)가 오룡차를 타며 종자 백여인은 백곡을 타고 웅심산[일명은 아사산이요 우 일명은 록산이니 금 합이빈(하얼빈)의 완달산]에 내려와 채운은 두상에 뜨고 음악은 운중에 동하더니, 해모수(해모수)가 십여일만에 산하에 내려와, 조우의 관을 쓰며 용광의 칼을 차고 조에는 정사를 듣고 모에는 천에 승하므로, 세인이 천제자라 칭하더라.」
혹자는 「기록을 너무 신화적이라 신거할 수 없다」하나 어느 나라이고 고대의 신화시대가 있어, 후세 사가들이 그 신화 속에서 사실을 채취할 뿐이니, 이를테면 「말이 돌을 보고 눈물짓다」, 「천이 아란불에게 강하였다」, 「해모수(해모수)가 오룡차를 타고 천에서 내렸다」 한 말들은 다 신화이지만, 해부루(해부루)가 인가의 사생아인 김와(금와)를 주워 태자로 삼음도 사실이요, 해부루(해부루)가 아란불(아란불)의 신화에 탁하여 천도를 단행함도 사실이요, 해모수(해모수)가 천제자라 칭하여 고도를 습거함도 사실이니, 총괄하면 동·북 부여가 분립한 역사상의 빼지 못할 큰 사실이다.
다만 우리의 결감하는 바는, 이것이 북부여인이나 동부여인이 부여의 계통을 서술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요, 한갓 고구려인이 그 시조 추모왕의 소자출을 설명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인 고로, 겨우 해부루(해부루)·해모수(해모수) - 동·북부여를 분립한 양대왕의 략사를 말할 뿐이요, 그 이전의 부여 해부루(해부루)의 소자출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함이(일)이오. 또는 그나마 고구려인의 기록의 본문이 아니요, 신라 말엽 한학자인 불교승의 개찬한 것인 고로, 「신가」를 고구려 리독문대로 「상가」라 쓰지 않고 한문의 의대로 상이라 썼으며, 「가시라」를 고구려 리독문대로 「갈사나」라 쓰지 않고 불경의 명사에 맞추어 가엽원이라 써 본래의 문자가 아님이 (이)다.
당시의 제왕은 제왕인 동시에 제사장이며, 당시의 장상은 장상인 동시에 무사요 복사였나니. 대개 해부루(해부루)는 제사장 - 대단군의 직을 세습한 자며, 아란불(아란불)은 강신술을 가진 무사와 미래를 예언하는 복사의 직을 겸한 상가라. 대단군과 상가가 지고한 위를 가졌지만, 신조선(진한)의 관습에 내우외환 같은 것은 물론이요, 곧 천재지변 같은 것도 대단군에게 귀구하여(『삼국지 』 「수한불조 오곡불등 첩귀구어왕 혹언당이 혹언당살」) 천시나 인사에 불행이 있으면 대단군을 대단군으로 인정치 아니하여 폐축하매 이른바, 이때가 흉노 모돈(묵돌)과의 전쟁을 지낸 지가 불원한즉, 아마 그 전패의 치로 인하여 인민의 신앙이 쇠박하여 대단군의 위를 보할 수 없으므로, 아란불(아란불)과 동모하여 갈사나 금 혼춘 등지로 달아나 신국을 건한 것이며, 해모수(해모수)는 해부루(해부루)의 동족이요, 고주몽(고주몽)의 부니, 『삼국유사』 「왕력편」 에 주몽(주몽)를 단군의 자라 하였은즉, 해모수(해모수)도 대단군의 칭을 가졌던 실증이니, 대단군은 곧 천의 대표라 칭한 것인즉 대개 해모수(해모수)가 해부루(해부루)의 동천을 기회하여 천강 대단군으로 자칭하여 왕위를 도모한 것이며, 부여는 불 - 곧 도성 혹 도회의 칭이니, 해부루(해부루)가 동부여라 칭하매 해모수(해모수)는 북부여라 칭하였을지나, 북부여란 명칭이 사에 궐하였으므로 최근 선유들이 양자를 구별하기 위하여 비로소 해모수(해모수)가 왕한 부여를 북부여라 칭하니라.
(이) 남북갈사 - 남북옥저 - 의 양 동부여 분립
해부루(해부루)가 갈사나 - 금 혼춘에 천도하여 동부여가 됨은 전술과 같거니와 갈사나는 무엇이오. 우리 고어에 삼림은 「갓」 혹 「가시」라 하니, 고대의 금 함경도와 금 길림 동북부와 금 연해주 남단에 수목이 울밀하여 수천리 무제의 삼림해를 이룬 고로 「가시라」라 칭하니, 가시라는 삼림국이라는 뜻이다. 가시라를 리독자로 갈사국·가슬라·가서라·아서량 등으로 기하니, 이는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와 「지리지」에 보인 자며 또 혹 「가엽원기」라 하니, 이는 대각국사(대각국사)가 저한 『삼국사』에 보인 자며, 지나사(중국사)에는 가시라를 옥저라 기한바, 만주원류고에 거하면 옥저는 「와지」의 역이오 「와지」는 만주어의 삼림이니, 예 곧 읍루는 만주족의 선조요 읍루가 당시 조선 열국 중에 「언어독이」로 『삼국지』나 『북사』에 특기하였은즉, 우리의 「가시라」를 예족은 「와지」라 부른 고로, 지나인들은 예어를 역하여 옥저라 한 것이며, 두만강 이북을 북갈사라 칭하고 이남을 남갈사라 칭한바, 북갈사는 곧 북옥저요 남갈사는 곧 남옥저이니, 금 함경도는 남옥저에 상당한바, 고사에 남 북옥저를 다 토지가 비미하다 칭하였으나 지금의 함경도는 척토로 칭하니, 혹 고금 토성의 변화인가 하노라. 양 「가시라」의 인민들이 순박 근검하여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며 여자가 다 미호하므로 부여나 고구려의 호민 들이 이를 착취하여 어염과 농산물을 천리에 져다가 바치게 하며 미여자를 뽑아다가 비첩을 삼았다 한다.
해부루(해부루)가 북 「가시라」 - 금 혼춘에 천거하여 동부여가 되어 자 김와(금와) 손 대소(대소)를 지나 대소(대소)가 고구려 대주류왕에게 패사하고, 제 모갑(모갑)과 종제 모을(모을)이 국을 칭하여 모을(모을)은 구도에 거하여 북갈사 혹 북동부여라 칭하고, 모갑(모갑)은 남갈사 혹 남동부여라 칭하였나니, 그 상세는 제삼장에 술하려니와, 역래 학자들이 (일) 동부여가 분렬하여 북동·남동의 양 부여됨을 모르고 일개의 동부여만 기하며, (이) 옥저가 곧 갈사임을 모르고 옥저 이외에서 갈사를 찾으며, (삼) 북동·남동의 양 부여가 곧 남·북의 양 갈사(양 가슬나)요 남·북의 양 갈사가 곧 남·북의 양 옥저임을 모르고 부여·갈사·옥저를 삼개 각별의 지방으로 나누며, (사) 강릉을 가시라 - 가슬나라 함은 신라 경덕왕이 북방의 토지를 잃은 뒤에 이설한 고적인 줄을 모르고 드디어 가슬나 - 동부여의 고도라 하였다.
그래서 지리가 문란하고 사실이 혼란하여 가리를 삼게 못되었거니와, 이제 갈사·가슬·가엽의 리독문의 독법을 깨달아 동일한 「가시라」임을 알며, 대소(대소) 제 모갑(모갑)과 그 종제 모을(모을)의 분거한 양 「가시라」의 위치를 찾아 양 「가시라」가 곳 남·북 옥저임을 알며,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올 때 「남분」이란 말과 주류왕이 고구려에서 동부여를 칠 때 「북벌」이란 말을 인하여 북 「가시라」의 위치를 알아 우와 같이 정리하니라.
(삼) 북부여의 문화
북부여의 역사는 오직 해모수(해모수)의 건도한 사실 이외에는 겨우 북부여의 별명인 황룡국이 고구려 「유류왕본기」에 일견하고는 다시 북부여에 대한 말이 우리 조선인의 붓으로 전한 것이 없고, 만일 전한 것이 있다면 다 지나(중국)사에서 초록한 것이다.
북부여의 서울은 「스라」 - 부사량이니, 곧 대단군왕검의 삼경 - 삼왕검성의 일이요, 금 로령 우수리(오소리)는 곧 「스라」의 명칭의 전한 자요, 그 본지는 금 합이빈(하얼빈)이니 망망한 수천리의 평원으로 토지가 고옥하여 오곡이 잘 되며 종횡굴곡한 송(고명 아리라)이 있어 교통의 편의를 주며, 인민이 근검강용하여 대주 적옥의 채굴과 회금 문수의 직조와 호리 유초의 피물로써 외국에 수출하며, 성곽궁실의 건축과 창고저축의 풍영이 다 고도의 문명를 자랑하며, 왕검 태자 부루(부루)가 하우에게 가르쳤다 운운하는 김간옥첩의 문자도 왕궁에 저장하며, 신지라 칭하는 리독문의 사류나 풍월이라 칭하는 리독문의 시가집도 대개 이 나라에서 수집한 것이다. 해모수(해모수) 이후에 예와 선비를 정복하여 일시 강국으로 칭하다가 그 뒤에 예와 선비는 반하여 고구려로 돌아가고, 국세가 드디어 쇠약하여 조선 열국의 패권을 이룸에 이르니라.
이. 고구려의 발흥
(일)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
고구려 시조 추모(추모)[혹작 주몽(주몽)]는 천생의 용력과 사예를 가지고 과부 소서노(소서노)의 재산을 거하여 웅걸을 초치하며, 교묘히 왕검 이래의 신화를 이용하여 천란에서 강생하다 자칭하여, 고구려를 건국할 뿐 아니라 내로 열국의 신앙을 받아 정신적으로 조선을 통일하며, 외로 그 기행이적의 담을 지나(중국) 각지에 전파하여 그 제왕과 인민들이 교주로 숭배함에 이른 고로, 신라 문무왕은 「립공남해 적덕북산」의 찬을 올리며, 지나(중국) 이천년래 유일한 공자(공자) 반대자인 동한학자 왕충(왕충)이 그 사적을 기재함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로 보면 기원전 오십팔년이 출생의 년이요 기원전 삼십칠년이 그 즉위의 년이지만, 이는 소감된 년대라 부족거요. 추모(추모)가 곧 해모수(해모수)의 아들인즉 기원전 이백년경 동북 부여 분립하던 때가 출생한 때일 것이며 위만(위만)과 동시일 것이니라.
처음에 아리라(송화강)의 부근에 어떤 장자가 유화(유화)·훤화(훤화)·위화(위화)의 삼녀를 두었는데 다 절대의 미인이요 유화(유화)가 더욱 기려하더니, 북부여 왕 해모수(해모수)가 출유하다가 유화(유화)를 보고 경애하여 야합하여 아이를 배었다. 아이를 배었지만 이때에 왕실은 호족과 결혼하고 서민과 하지 아니하므로 해모수(해모수)가 그 뒤에 유화(유화)를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며, 서민은 서민과 결혼하나 남자가 반드시 여자의 부모에게 가서 폐백을 드리고 사위됨을 재걸 삼걸한 뒤에 그 부모의 허락을 얻어 결혼하며, 그 결혼한 뒤에는 남자가 여자의 부모를 위하여 그 집의 머슴이 되어 삼년의 고역을 다하고야 딴 살림을 차려 자유의 가정이 되는 것인 고로, 유화(유화)의 범행이 발각됨에 그 부가 대노하여 유화(유화)를 잡아 우발수중에 던져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어떤 어부가 이를 건져 동부여 왕 해금와(해금와)에게 바쳤다. 금와(금와)가 유화(유화)의 자색을 사랑하여 후궁에 들여 첩을 삼더니, 미구에 아이를 낳으니 곧 해모수(해모수)와 야합한 결과더라. 김와왕이 유화(유화)에게 힐문한즉, 유화(유화)가 이를 일영에 감하여 낳은 천신의 자요 자기는 아무 범행한 일이 없노라 하였다. 김와왕이 믿지 않고 그 아이를 돼지에게 먹이려 하여 울에 넣어도 보며, 말에 밟혀 죽이려 하여 길에 던져도 보며, 산짐승의 밥이 되라 하여 심산에 버려도 보았으나 다 무효하므로, 이에 유화(유화)의 수양함을 허하였다. 그 아이가 장성하매 용력이 또래에 뛰어나며 사예의 기묘함이 짝이 없는 고로 추모(추모)라 이름하였다. 『위서』에는 추모(추모)를 주몽(주몽)이라 쓰고 주몽(주몽)은 부여어에 선사자의 칭이라고 해하였으며, 『만주원류고』에는 「금 만주어에 선사자를 (탁림망아) ‘주릴무얼’이라 한즉 주몽(주몽)은 곧 ‘탁림아’라. 」하였다.
그러나 주몽(주몽)을 광개토왕의 비문에는 추모(추모)라 하고 문무왕의 조에는 「중모」라 하고 주몽(주몽)이라 하지 아니하였다. 주몽(주몽)이라 함은 지나(중국)사의 소전을 신라 문사들이 습용하여 「고구려본기」에 올리게 된 것인바, 추모·중모는 「줌」 혹「주무」 로 독할 것이니, 이는 조선어요. 주몽(주몽)은 주물로 독할 것이니, 이는 예어 - 만주족 선대의 어니, 지나사(중국사)의 주몽(주몽)은 예어를 술한 자니, 원류고에 운운한 바가 근리하니라. 본서에는 비문을 쫓아 추모라 쓴다.
금와왕이 칠형제의 자를 두니, 장자는 대소(대소)라 대소(대소)가 추모(추모)의 재용을 샘하여 왕을 권하여 죽이려 하나, 늘 유화(유화)의 주선으로 화에 면하더니, 추모(추모) 십구세가 됨에 어구의 목마를 맡아 기르다 비장하게 먹이고 홀로 준마 하나를 골라 바늘로 혀를 찔러 마가 먹지 못하여 날로 수척하더니, 왕이 어구의 마를 열하여 추모(추모)의 공을 칭하고 그 수마를 상으로 주거늘, 추모(추모)가 바늘을 빼고 다시 위양하여 신수두의 십월대제에 타고 나아가 수렵에 참여할 새, 왕이 겨우 추모(추모)에게는 사시 일개를 주었으나 마는 잘 달리고 추모(추모)는 잘 쏘므로 추모(추모)의 사획이 대소(대소)의 칠형제의 것보다 몇 갑절이 되니, 대소(대소)가 이에 더욱 샘하여 살해하려는 음모가 더욱 심하거늘, 추모(추모)가 알고 처 예씨를 취하여 밖으로 실가의 안심함을 보이고 속으로 오이(오이)·마이(마리)·합부(협보) 등 삼인과 공모하여 비밀히 모 유화(유화)에게 고별하고 처를 버리고 도망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니, 이때에 추모(추모) 이십이세더라.
졸본부여에 이르니, 당지의 소서노(소서노)란 미인이 당호 연타발(연타발)의 녀로서 부의 재산을 상속하여 해부루왕의 서손 우태(우태)의 처가 되어 비류(비류)·온조(온조) 이자를 낳고, 우태(우태)가 죽으므로 과거하여 시년이 삼십칠세라. 추모(추모)를 보고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니, 추모(추모)가 이에 그 재산을 거하여 명장 부분노(부분노) 등을 연납하며 민심을 수람하여 기업을 경영할 새, 흘승골의 산상에 건도하여 국호를 「가우리」라 하여 리독자로 고구려라 쓰니 가우리는 「중경」 혹 「중국」이란 뜻이더라.
졸본부여 왕 송양과 사예를 교하여 이를 절복하고, 이어 부분노(부분노)를 보내 그 무고를 습하여 탈취하여 마침내 그 국을 강하고, 부근의 예족을 구축하여 거민의 해를 제하고, 오이(오이)·부분노(부분노) 등을 보내어 태백산 동남의 행인국(지점 미상)을 멸하여 성읍을 삼고, 부위염(부위염)을 보내어 동부여를 쳐 「북가시라」의 일부분을 탈취하니(광개토왕 비문에「동부여구시추모왕속민」 은 이를 가리킴인 듯), 이에 고구려의 기초가 서니라.
전사에 왕왕 「송양을 국호라」 하였으니, 이상국집 동명왕편에 인용한 『구삼국사』로 고하면 비류왕 송양(송양)이라 하였으니, 비류는 곧 부여니 졸본부여를 칭한 것이니, 송양(송양)은 국명이 아니라 졸본부여 왕의 명이니라. 또 추모(추모)가 졸본부여 왕녀를 취하여 왕이 무자하므로 왕 붕후에 그 위를 사하였다 하나, 졸본부여 왕녀 - 곧 송양(송양)의 녀를 취함은 추모(추모)의 자 유류(유류)니, 추모(추모)의 취한 자는 소서노(소서노)요 졸본부여 왕녀가 아니니라. 추모왕을 「본기」에 「동명성왕」이라 하였으나 동명은 한몽으로 독할 것이니 한몽은 신수두 대제의 명이니, 신수두 대제에 존사하므로 한몽 - 동명의 호를 올린 것이요, 「성왕」 성은 주무의 의역이니라.
(이) 동부여와 고구려의 알력
추모왕의 뒤에 자 유류왕이 사위하고 유류왕의 뒤에 자 대주류왕이 사위하니, 유류(유류)는 「본기」의 류리명왕 유리(유리)니, 유류·류리·유리는 다 「누리」로 독할 것이니, 「세」란 뜻이며 「명」이란 뜻이며, 대주류왕은 「본기」의 대무신왕 무휼(무휼)이니, 무·주류·무휼은 다 「무뢰」로 독할 것이니, 박의 의며 신의 의거늘, 이제 「류리」와 「명」은 시로 쓰고 류리는 왕의 명으로 쓰며, 무와 신은 시로 쓰고 무휼(무휼)은 명으로 씀은 「본기」의 망단이다. 이제 비문을 좇아 류리·대무신을 유류·대주류로 쓰노라.
유류왕 때에 동부여가 강성하여 김와왕의 자 대소왕이 사위하여 고구려에 신례를 책하고 질자를 보내라 하거늘, 왕이 이를 준행하려다가 양 태자를 희생함에 이르렀다. 제일차의 태자는 도절(도절)이니, 유류왕이 동부여에 유질하려 하나, 도절(도절)이 불행하므로 왕이 진노하매 도절(도절)이 우분하여 병이 들어 죽었고, 제이차의 태자는 해명(해명)이니, 해명(해명)은 용력이 절인한 자라. 유류왕이 동부여의 침략을 외하여 국내성 금 집안현으로 천도하매, 해명(해명)이 이를 겁약한 일이라 하여 종행치 아니하며, 북부여왕(본기의 황룡국왕)이 해명(해명)에게 강궁을 것끼쳐 그 용력을 보자 하매, 해명(해명)이 즉지에 그 강궁을 분질러 북부여인의 힘없음을 조소하더니, 왕이 이를 듣고 해명(해명)을 장래 국가를 위험케 할 준물이라 하여 처음에는 북부여에 보내 북부여 왕의 손을 빌어 죽이려 하였으나, 북부여 왕이 해명(해명)을 경애하여 후대하여 돌려보내므로 유류왕이 더욱 참분하여 해명(해명)에게 검을 주어 자살케 하니라. 양 태자의 죽음이 혹 궁정간 처첩 질투의 원인도 있으려니와 그 문제는 대개 동부여의 외교상 관계이었으니, 유류왕의 대동부여 공구를 가히 미루어 알 것이다.
동부여 왕 대소(대소)가 누차 수만 대병을 발하여 고구려를 치다가 다 성공치 못하였으나 고구려가 실로 곤폐한지라 동부여 왕 대소(대소)가 또 사자를 보내 조공의 궐함을 책하니, 유류왕이 공구하여 애걸의 사로 사자에게 답하려 하였더니, 왕자 주류(주류)[본기의 무휼(무휼)]가 이때에 유소하나 망형 해명(해명)의 기개가 있어, 부왕의 비굴을 부당하다 하여 스스로 부왕의 명을 꾸며 동부여의 사자를 보고, 금와(금와)가 목마의 비직으로 추모왕을 대하고, 대소(대소)가 추모왕을 해하려던 일을 일일이 수죄하고 동부여 군신의 교오함을 책하여 그 사자를 쫓더니, 동부여 대소왕이 이를 듣고 격노하여 또 대거하여 침입하거늘, 유류왕이 왕자 주류(주류)로 인하여 전쟁이 일어났다 하여 매우 노하나, 노경에 주류(주류)를 도절(도절)이나 해명(해명)같이 죽일 수 없으므로, 국내 병마를 모두 주류(주류)에게 주어 출전케 하더니, 주류(주류)가 써하되, 동부여는 병수가 많고 고구려는 적으며 동부여는 마병이요, 고구려는 보병이니, 소수의 보병이 다수의 마병으로 더불어 평원에서 싸움은 불리하다 하여 이에 동부여병이 경유할 학반령의 곡중에 복병하여 동부여병을 돌격하니, 곡로가 기구하여 마병이 불편하므로 동부여병이 모두 마를 버리고 산상으로 오르거늘, 주류(주류)가 병을 종하여 그 전군을 섬멸하고 다수한 마축을 빼앗으니, 동부여의 정예가 이 전역에 다하여 다시 고구려와 겨루지 못하더라. 이 전역이 지남에 유류왕이 대희하여 주류(주류)를 봉하여 태자를 삼고 겸하여 병마대권을 맡기더라.
(삼) 대주류왕의 동부여 정복
대주류왕이 학반령의 역에 동부여를 대파하고, 유류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나간 지 사년에, 오만병을 들어 북벌의 사를 일으켜 동부여를 침입할 새, 도상에서 창술에 정한 마노(마로)와 검술에 정한 괴유(괴유)를 얻어 전도를 삼아 가시라의 남에 이르러 니녕을 앞에 두고 진을 치더니, 대소왕이 몸소 마를 타고 고구려진을 직범하다가 마제가 니중에 빠지거늘, 괴유(괴유)가 이를 격참하니라.
대소왕은 죽었으나 동부여인은 더욱 분발하여, 국군이 쟁집하여 대소왕의 수를 갚으려 하여, 대주류왕을 겹겹이 포위하여 마노(마로)는 전사하고 괴유(괴유)는 부상하여 고구려의 사상이 무수하며, 대주류왕은 누차 충출하려 하나 어찌 못하여 칠일을 절식함에 이르더니, 마침 대무가 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거늘, 대주류왕이 이에 초인을 만들어 진중에 버리고 잔병을 끌고 간도로 도망하여 이물촌에 와서 전군이 기피하여 동하지 못하므로 야수를 잡아먹고 간신이 귀국함을 얻느니라.
이 전역은 실로 동부여가 승리하였으나, 다만 대소왕이 죽고 태자가 없으므로 대소왕의 군종형제가 왕위를 다투어 국내가 대란하여, 계제 모갑(모갑)은 종제 백여인과 남가시라 - 남옥저로 나와 출렵하는 해두왕을 습살하고 병을 초집하여 남가시라 전부를 평정하니, 이는 남동부여요. 종제 모을(모을)은 고향에서 자립하니, 이는 북동부여라. 그러나 오히려 제제가 각자 병을 옹하여 모을(모을)을 치므로 병 만여인으로써 고구려에 투강하여, 대주류왕이 드디어 북동부여 전부를 토평하였으나 그 국호는 오히려 존속하였나니, 사에 보인 갈사국은 곧 남동부여요. 동부여는 북동부여며, 『후한서』·『삼국지』 등 서의 「옥저전」에 보인 불내예도 북동부여요, 「예전」에 보인 불내예왕은 남동부여이라.
(사) 대주류왕의 낙랑 정복
최씨가 남낙랑에 거하여 낙랑왕이라 칭함은 이미 제삼편 제사장에 술하였거니와, 그 말왕 최리(최리)에 이르니 곧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하던 동시라. 최리(최리)가 고구려의 위를 외하여 미인의 딸 하나를 두고, 매양 이를 기화로 삼아 고구려와 화친코자 하더니, 이때에 갈사국(남동부여) 왕이 그 손녀의 미인을 대주류왕의 후궁에 바쳐 아들을 낳으니, 얼굴이 기묘하고 풍신이 수랑하여 명을 호동(호동)이라 한바, 호동이 외가에 가는 순로에 낙랑국을 지날 새, 최리(최리)가 출행하다가 만나보고 놀래어 가로되 「그대의 얼굴을 보니 어찌 북국 신왕의 아들 호동(호동)이 아니냐」하고 드디어 호동(호동)을 데려다가 그 딸과 결혼하더라.
낙랑국의 무고에 고각이 있어 소리가 멀리 들림으로, 외적이 있으면 매양 이것을 울리어 제 속국의 군병을 부르거늘, 호동(호동)이 그 아내 최녀를 꾀여, 「고구려가 낙랑을 침입하는 때에 네가 그 고각을 없애라」 하고, 귀국하여 대주류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치더라. 최리(최리)가 고각을 울리려고 무고에 들어가 본즉, 조각조각 부서져 쓸 수 없는지라. 고각의 소리가 나지 아니 하니, 어찌 제 소국의 구병이 올 수 있으랴. 최리(최리)가 그 딸의 소위임을 알고 이를 죽인 뒤에 출강하더라. 호동(호동)은 이 같이 대공을 이루었으나, 왕후가 탈적할까 공하여, 이에 대주류왕에게 「호동(호동)이 자기를 강간코자 하였다」고 무소하여 호동(호동)이 자살함에 이르니, 이에 일대 미남녀의 말로가 동일한 비극이 되고 말았느니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거하면, 대주류왕이 즉위 사년 하 사월에 대소(대소)의 제가 갈사왕(남동부여왕)됨을 기하고, 즉위 십오년 하 사월에 호동(호동)이 최리(최리)의 사위됨을 기하고, 동년 십일월에 호동(호동)이 왕후의 참언으로 자살함을 기하였다. 갈사왕이 있은 뒤에야 대주류왕이 곧 갈사왕 손녀를 취할 수 있으며, 또 그 뒤에야 갈사왕 손녀의 소생인 호동(호동)이 있을 수 있은즉, 설혹 대주류왕 사년 - 남갈사 건국의 원년 사월에 대주류왕이 갈사왕 손녀를 취하여 그달부터 태기가 있어 익년 정월에 호동(호동)을 낳았다 할지라도, 십오년에 이르러 겨우 십일세 소아니, 십일세 소아가 어찌 남의 서방이 되어 그 아내와 멸국의 계획을 행할 수 있으랴. 십일세 소아가 어찌 적모 강간의 무소로 부왕의 혐의를 받아 자살함에 이르렀으랴.
동부여가 원래 북갈사에 도하였은즉, 소위 갈사왕은 분립하기 전의 동부여를 가리킴이 아닌가 하는 이 있겠지만, 그러면 이는 대소왕 때가 되니, 대소왕이 그 딸을 대주류왕에게 줌은 만만 불가능의 일이다. 대개 신라 말에 『고구려사』의 년대를 소감하고 사실을 이리저리 천이하였으므로, 이같이 모순의 기록이 있음이거니와, 대주류왕 이십년에 또 「벌낙랑멸지」라 하였으니, 일낙랑을 재멸할 수가 없은즉, 호동(호동)의 취처와 자살이 다 이십년의 일인가 한다.
이상 술한바, 북부여·북동부여·고구려 삼국은 다 신조선(진한) 고지에서 흥기한 자니라.
삼. 백제의 건국과 마한의 멸망
(일) 백제 소서노 여대왕의 백제 건국
「백제본기」는 「고구려본기」보다도 더 심하게 문란하였다. 백 몇 십년의 소감은 물론이요, 그 시조와 시조의 출처까지 틀렸다. 그 시조는 소서노(소서노) 여대왕이니, 하북위례성 - 금 한양에 도하고 그 붕후에 비류(비류)·온조(온조) 이자가 분립하여 (일) 미추홀 - 금 인천, 우 (일)은 하남위례홀에 도하여 비류(비류)는 망하고 온조(온조)가 왕하였거늘, 「본기」에는 소서노(소서노)를 쑥 빼고 그 편수에 비류(비류)·온조(온조)의 미추홀과 하남위례홀의 분립을 기하고, 온조(온조)의 십삼년에 하남위례홀에 도함을 기하였으니, 그러면 온조(온조)가 하남위례홀에서 하남위례홀로 천도함이니, 어찌 소화가 아니냐. 이것이 (일)오요, 비류(비류)·온조(온조)의 부는 소서노(소서노)의 전부 부여인 우태(우태)인 고로, 비류(비류)·온조(온조)의 성도 부여요. 근개루왕도 「백제가 부여에서 출함」을 자증하였거늘, 「본기」에는 비류(비류)·온조(온조)를 추모(추모)의 자라 함이 (이)오다. 이제 이를 개정하여 백제 건국사를 설하노라.
소서노(소서노)가 우태(우태)의 처로 비류(비류)·온조(온조) 이자를 낳고 과거하였다가, 추모왕에게 개가하여 재산을 기울여 추모왕을 도와 고구려를 창건함은, 이미 본장 제삼절에 술하였거니와, 추모왕이 그 때문에 소서노(소서노)를 정궁으로 대접하며 비류(비류)·온조(온조) 이자를 친같이 사랑하더니, 밋(이윽고) 유류(유류)가 그 모 예씨와 동부여에서 돌아옴에 예씨가 원후가 되고 소서노(소서노)가 소후가 되며, 주류(주류)가 태자가 되고 비류(비류)·온조(온조) 이인의 신분이 덧붙이 자식 됨이 드러났다. 그래서 비류(비류)·온조(온조)가 상의하여 가로되 「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의 우리 모친에게 있거늘, 이제 모씨는 왕후의 위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대일 데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대왕이 계신 때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대왕 만세 후에 유류(유류)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어디에 서랴. 차라리 대왕의 재세한 때에, 미리 모씨를 뫼시고 딴 곳으로 가서 딴 살림을 차림이 가하다.」 하고는 이 뜻으로 소서노(소서노)에게 고하고 추모왕에게 청하여, 다수한 금은주보를 갈라 가지고, 비류(비류)·온조(온조) 이자와 오간(오간)·마려(마려) 등 십팔인을 데리고, 낙랑국을 지나 마한으로 들어갔다.
마한에 들어가니, 이때에 마한왕은 기준(기준)의 자손이더라. 소서노(소서노)가 마한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서북 백리지 - 미추홀 - 금 인천과 하북위례홀-금 한양 등을 얻어, 소서노(소서노)가 왕호를 칭하고 국호를 백제라 하더라. 서북에 낙랑국 최씨가 바야흐로 강성하여 압록강의 예족과 합하여 침핍이 심하거늘, 소서노(소서노)가 처음에는 낙랑국과는 친하고 예족만 구축하다가, 나중에 예족의 침핍이 낙랑국의 지주임을 깨닫고, 낙랑국과 절교하고 성책을 쌓아 방어에 전력하더라.
「백제본기」에 낙랑왕이라 쓰지 않고 낙랑태수라 썼으니, 이는 몇백 몇십 년의 년대를 소감한 뒤에, 그 소감한 년대를 가지고 지나(중국)의 년대와 대조한 결과로, 낙랑을 한군이라 하여 낙랑태수라 쓴 것이며, 예라 쓰지 않고 말갈이라 썼으니, 이는 신라 말엽에 예를 말갈이라 한 당인의 문자를 많이 보고, 드디어 고사기의 예를 모두 말갈이라 고친 것이니라.
(이) 소서노 붕후에 이자의 분국과 그 흥망
소서노(소서노)가 재위 십삼년에 붕하니, 말하자면 소서노(소서노)는 조선사상의 유일한 여제왕의 창업자일뿐더러, 곧 고구려와 백제의 양국을 건설한 자이다. 소서노(소서노)가 붕한 뒤에 비류(비류)·온조(온조) 양인이 상의하여 가로되 「서북의 낙랑과 예가 날로 침핍하여 모씨 같은 성덕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새 터를 보아 천도함이 가하다.」 하고 이에 형제가 오간(오간)·마려(마려) 등과 함께 부아악-금 한양 북악에 올라 서울로 할 만한 자리를 살필 새, 비류(비류)는 미추홀을 잡고 온조(온조)는 하남위례홀을 잡아 형제의 의견이 충돌되었더라.
오간(오간)·마려(마려) 등이 다 비류(비류)를 간하여 가로되, 하남위례홀은 북은 한강을 지고 남은 옥택을 안고 동은 고악을 끼고 서는 대해를 둘러 천험지리가 이만한 곳이 없거늘, 어찌 이곳을 버리고 다른 데로 가려 하느뇨 하나, 비류(비류)가 듣지 아니하므로 할 수 없이 형제가 토지와 인민을 두 쪽으로 갈러 (일)은 비류(비류)가 차지하여 미추홀로 가고, 우(일)은 온조(온조)가 차지하여 하남위례홀로 가니, 이에 백제가 분하여 동·서 양 백제가 되니라.
「본기」에 기한바, 온조(온조)의 십삼년은 곧 소서노(소서노)의 년조요, 그 익년 십사년부터는 곧 온조(온조)의 원년이니, 십삼년에 기한 온조(온조) 천도의 조는, 비류(비류)와 충돌된 뒤에 온조(온조) 부분의 인민에 내린 조며, 십사년 - 온조(온조) 원년에「분한성민」 은 비류(비류)·온조(온조) 형제가 인민을 갈러 가지고, 각기 제 서울로 간 사실일 것이다. 미추홀은 메주골이요, 위례홀은 오리골(본 리골)이니, 금속에 어느 동내든지 왕왕 동에 오리골이 있고 서에 메주골이 있으니, 그 의의는 알 수 없으나 그 유래가 또한 오래도다.
그런데 비류(비류)의 미추홀은 토습수함하여 백성이 살 수 없어 많이 산주하나, 온조(온조)의 하남위례홀은 수토가 적의하고 오곡이 잘되어 인민이 안거하므로, 비류(비류)가 참분하여 병사하고 그 신민은 다 온조(온조)에게로 오니, 이에 동·서 양백제가 다시 합일하니라.
(삼) 온조의 마한 습멸
백제가 마한의 봉토를 얻어 건국하였으므로 소서노(소서노) 이래로 공근히 마한에 대하여 신례를 잡아, 수렵하면서 얻은 장록을 마한에게 보내고, 전쟁하면서 얻은 부노를 마한에게 보내더니, 소서노(소서노) 붕후에 온조(온조)가 서북의 예와 낙랑의 방어에 칭탁하고 북에서 패하 - 금 대동강으로부터 남으로 웅천 - 금 공주까지 백제의 강역으로 획정하여 달라 하여, 마침내 그 허락을 얻고 그 뒤에 웅천에 가서 마한과 백제의 국경에 성책을 쌓더니, 마한왕이 사를 보내어 책하여 가로되, 「왕의 모자가 처음 남래할 때에 발 디딜 땅이 없다가 내가 서북 백리지를 베어 주어 오늘날이 있음이거늘, 이제 국력이 좀 완고하다고 우리의 강토를 눌러 성책을 쌓으니, 어찌 의로 허할 바이냐.」 하니 온조(온조)가 거짓 참괴한 빛을 보이고 성책을 헐었으나, 좌우더러 말하여 가로되, 「마한왕의 정치가 그 길을 잃어 국세가 자꾸 쇠약하여지니, 이제 취치 아니하면 타인에게 돌아갈 것이라.」 하고 미구에 온조(온조)가 수렵한다 칭탁하고 마한을 습하여 그 국도를 점령하고 그 오십여국을 다 토멸하며, 그 유민으로 의병을 일으킨 주동의 전가를 참살하니, 온조왕의 잔학이 또한 심하도다. 기준(기준)이 남주하여 마한의 왕위를 차지하고 성을 한씨라 하여 자손에게 전하다가 이에 이르러 망하니, 『삼국지』에 「준후멸절 마한인복자립위왕」이 이를 이름이니, 온조(온조)를 마한인이라 함은 지나인(중국인)이 매양 백제를 마한이라 칭한 까닭이니라.
온조(온조)는 고구려의 유류(유류)·대주류(대주류) 양대왕과 동시대니, 온조대왕 이후에 낙랑의 침도를 기함이 없음은, 대주류왕이 이미 낙랑을 멸한 까닭인가 하노라.
제삼장 한무제의 침구
일. 고구려의 구년전쟁
(일) 한병이 고구려에게 패퇴한 사실(고구려의 구년전쟁)
조선의 남북 열국이 분립하던 판에 지나(중국) 한무제의 침구가 있었다. 이는 한갓 일시 정치상 대사건일 뿐 아니라, 곧 조선민족의 문화소장에도 비상한 관계를 가진 대사건이다. 고대 동아세아에 불완전한 문자이나마 리독문을 쓰고 역사기록과 정치제도를 가져, 문화를 가졌다고 할 민족은 지나(중국) 이외에 오직 조선뿐인데, 당시에 조선이 강성하여 매양 지나(중국)를 침략 혹 항거하며, 지나(중국)도 제·연·진 이래로 조선에 대하여 방어 혹 침입하였음은 제이편에 진술함과 같이 잦았거니와, 진이 망하고 한이 흥하여서는 북방 흉노의 침략에 고하여 한고조가 흉노 모돈(묵돌)을 치다가, 백등(산서성 대동부 부근)에서 대패하여, 세폐를 바치며 황녀를 모돈(묵돌)의 첩으로 바치는 수치적 조약을 맺고, 그 뒤에 그대로 리행하여 고조의 증손 무제에 이르렀다. 무제는 야심이 충만한 제왕이라. 백년 태평의 나머지에 국력의 부강함을 자하여, 흉노를 쳐 선대의 수치를 씻으려 하는 동시에, 조선에 대하여도 또한 무명의 사를 흥하여 민족적 혈전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한무제의 침입한 조선이 이니, 『한서』 「식화지」(『사기』 「평준서」 동)에 「무제즉위수년 팽오 천예맥조선 치창해지군 칙연제지간 미연소동」이라 한바, 팽오(팽오)가 천한 예맥조선이 (일) 조선이요, 『사기』 「조선열전」에 「누선장군양복 … 좌장군순체 … 수정조선위사군」이라 한바, 양복(양복)과 순체(순치)가 멸한 조선이 우(일) 조선이다. 후자의 조선은 곧 「조선열전」으로 인하여 위씨의 조선인 줄을 인인이 공지하거니와, 전자의 조선은 「식화지」나 「평준서」에 이 같이 간단한 일구만 기재되고, 다른 전기에 재견치 아니하였으므로 역래의 사가들이 이를 어떤 조선인지를 말한 이가 없다. 그러나 나는 써하되, 전자의 조선은 곧 동부여를 가리킨 것이니, 한무제가 위우거를 멸하기 전에 동부여를 군현하려 하여 고구려와 구년 동안 혈전하다가 패퇴한 일이 있다 하노라.
무엇으로 증거하느뇨. 『후한서』 「예전」에 「한무제 원삭원년 예군남여(남려) 등 반우거(우거) 솔이십팔만구 예요동 강한 이기지 위창해군」이라 하고, 『한서 』 「본기」에 「원삭삼년춘 파창해군」이라 하고, 『사기』 「공손홍전」에 「홍수간 … 원파창해지군전봉삭방 … 수룡창해지군」주10)이라 한바, 역래의 학자들이, 우 삼서와 전술한 식화지의 본문을 합하여, 「예맥조선은 예군남여(남려)의 국 - 금 강릉이니, 강릉이 당시 우거(우거)의 속국으로서 한에 반강하므로, 한이 팽오(팽오)를 보내어 그 강을 받고 그 토지로써 창해군을 삼았다가, 그 뒤에 경토가 너무 멀고 비용이 너무 많이 들므로 그 전역을 파한 것이니라.」고 단안하였다. 그러나 이 단안에 류오됨이 좌와 같다.
(일) 지나(중국)사에 매양 동부여를 예로 오록하였음과, 남·북 양 동부여가 일은 금 혼춘이요 우일은 금 함흥임은, 이미 본편 제이장 제이절·삼절에 술하였거니와, 동부여를 금 강릉이라 함은 신라가 그 동북계의 천여리를 잃고, 그 잃은 지방의 고적을 내지로 옮길 때, 동부여의 고적을 금 강릉으로 옮긴 고로 생긴 위설인즉, 예군남여(남려)는 함흥의 동부여왕이요 강릉의 군장이 아니며, (이) 식화지의 본문이 명백히 「무제즉위수년 팽오 천예맥조선」이라 하였으니, 『후한서』에 기한바, 창해군 시설의 년은 무제 즉위 십삼년이니, 십삼년을 수년이라 할 수 없을뿐더러 『한서』 주부언열전의 원광원년 엄안(엄안)의 상소에 「금욕 … 략예주 건치성읍」이라 한바, 「략예주」는 곧 예맥조선의 침입을 가리킨 것이요, 「건치성읍」은 창해설치의 경영을 가리킨 것이니, 원광 원년 곧 원삭 원년의 육년 전에 엄안(엄안)이 예에 대한 침략과 창해군 설치를 간하였은즉, 남여(남려)의 강과 팽오(팽오)의 교통이 벌써 원광 원년의 일이요, 그 육년후인 원삭원년의 일이 아니며, (삼) 원광 원년 창해군 시설의 년은 기원전 일백삼십사년이요, 원삭 삼년 창해군 철파의 년은 기원전 일백이십육년이니, 그러면 한이 동부여를 침략하여 창해군을 만들려는 전쟁이 전후 구년 동안이나 연긍하였으니, 동부여가 만일 우거(우거)의 속국 같으면 우거(우거)가 천구치 아니할 수 없으며, 만일 천구하였다 하면 『사기』 「조선왕만전」에 우거(우거)의 한에 대한 관계-진번진국의 옹알 요동 동부도위의 공살 같은 것을 다 기록하고서, 어찌 이보다 더 중대한 구년전쟁의 사실을 빼었으랴. 전술한바 개정한 년대에 의하면, 이때는 동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 뒤니, 그런즉 남여(남려)는 위씨의 속국이 아니라 고구려의 속국이다.
남여(남려)가 고구려의 속국일진대, 왜 고구려를 반하고 한에 강하였느뇨. 남여(남려)는 대개 남동부여-『후한서』와 『삼국지』의 「예전」에 기한바 불내예왕이요, 「고구려본기」에 기한바 그 손녀로 대주류왕에게 시집보낸 갈사왕이니, 그러면 남여(남려)는 대주류왕 처조요 대주류왕은 남여(남려)의 손서이오. 제삼장에 술한 호동(호동)은 남여왕의 진외증손이니 말하자면 붙이가 가까운 터이다. 그러나 호동(호동)의 처부인 낙랑왕 최리(최리)도 멸하는 판에 어찌 처조와 진외증조를 알아보랴. 고구려가 동부여에 대한 압박이 심하였던 것도 상상할 수 있다. 그런즉 남여(남려)가 왕일 부형의 구수로든지, 목하 압박의 고통으로든지, 어찌 고구려에 대하여 보복할 생각이 없으랴. 이에 동일한 고구려에 대한 원한을 가진 낙랑 각 소국들과 연합하여 우거(우거)를 찬통하여 고구려를 배척하려 하나, 우거(우거)가 실로 고구려보다 미약하여 고구려를 항치 못하므로, 남여(남려)가 이에 우거(우거)를 버리고 한을 통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한을 통하려면 부득불 위씨의 국을 경유할 터인데, 우거(우거)는 동부여가 혹 위씨국의 비밀을 한에 설할까 하여 국경의 통과를 불허한 고로, 『사기』 「조선왕만전」에 「진번방중국 욕상서입견천자 우거우옹알불통」이라 함이니, 「진번방중국」은 곧 동남부여와 남낙랑 등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남여(남려)는 마침내 해로로 한을 통하여 정곡을 고하매, 야욕이 창만한 한무제가 어찌 이 기회를 놓치랴. 드디어 남동부여를 장래의 창해군으로 예정하고, 팽오(팽오)로 대장을 삼아 연·제-금 직예·산동의 병마와 량향을 총발하여 바다를 건너 고구려와 싸워 남동부여와 남낙랑 열국을 구원하다가, 고구려의 대항이 의외로 강경하여 구년간 혈전을 계속하여 한의 패전이 빈수하매, 이에 창해군 혁파의 체면어로써 병을 거두고 전사를 결국한 것이다.
이 같이 구년간 양국 사이에 혈전이 있었으면, 사마천(사마천)이 하고로 『사기』 「조선열전」이 이를 기치 아니 하였느뇨? 이는 다름 아니라, 「위중국휘치」가 공구(공구, 공자) 『춘추 』 이래 지나사가의 유일한 종지가 되었을뿐더러, 『삼국지 』 「왕숙전」에 거하매, 사마천(사마천)이 『사기』에 경제와 무제의 득실을 직서하였더니, 무제가 이를 보고 대노하므로 효경본기와 금상본기(곧 「무제본기」)의 양편을 삭거하였으나, 이로 말미암아 그 뒤에 천을 부형하였다 한바, 고구려에 대한 전패는 한무제 같은 상무자의 유일한 치욕으로 자휘하는 바이리니, 만일 이 일을 직서하였으면 불알 까이는 부형뿐 아니라 목 달아나는 참형까지 당하였으리니, 그 궐루함이 고의일 것이며, 평준서에 겨우 그 사실을 비치었으나, 「팽오가 매멸조선」이라 하여 조선을 멸한 줄로 쓴 것도 또한 시휘를 피한 것 일지며, 반고(반고)의 『한서』 식화지에는, 그 사실이 너무 실직함을 악하여 「멸」자를「천」자로 고쳤으나 그 전부를 실기하지 못함은 천과 일반이다.
그러면 한무제와 싸운 자는 대주류왕 - 곧 「고구려본기」의 대무신왕일 것이다. 그러나 「본기」에는 년대를 삭감한 까닭에 한무제와 동시인 대주류왕이 한광무와 동시가 되며, 지나사의 낙랑기사와 조화하려는 까닭에, 대주류왕이 도리어 한에게 낙랑국을 빼앗기었다는 무록을 쓴 것이니라.
(이) 한무제의 위씨 침감 - 위씨조선의 멸망
한무제가 구년 동안 장시간의 혈전에 패퇴하여 이후 십칠년 동안 조선열국을 엿보지 못하였으나, 그 마음이야 어찌 동방침략을 잊었으랴. 이에 위씨는 비록 조선 열국의 (일)이나, 그 왕조가 원래 지나(중국)족의 종자요, 그 장상들도 왕왕 한의 망명 여얼이므로, 이를 초유하여 조선 열국을 잠식하는 선도를 만들려는 중에, 더욱 위씨에게 길을 빌려 동부여를 구하고 고구려를 치는 편의를 얻으려 하여, 기원전 일백○구년에 한무제가 사자 섭하(섭하)를 보내어, 먼저 한과 동부여와 왕래사절이 위씨국의 국경을 통과하는 인가를 달라고, 우거(우거)를 한의 국위로 협하며 금백의 리로 꾀이나, 우거(우거)가 완강이 청종치 아니하였다. 섭하(섭하)가 이에 한무제의 밀지에 의하여, 귀국하는 길에 양국의 국경인 패수 금 한우락에서 우거(우거)가 보낸 전송사자 - 우거 부왕을 찔러 죽이고 질주하여 한으로 달아나, 한무제에게 「조선국 대장을 죽였노라」고 외치니, 한무제는 실로 딴 흉계를 가졌으므로 그 소살의 여하인임은 탐문치도 않고 그 공으로 섭하(섭하)를 요동 동부도위를 배하더니, 하가 임소에 온 지 미구에 우거(우거)가 전사를 한하여 병을 발하여 하를 습살하였다.
무제가 이를 구실로 삼아, 좌장군 순체(순치)는 보병 오만으로 요수를 건너 패수로 향하고, 루선장군 양복(양복)은 누선병 칠천으로 발해로 떠 렬수로 들어가 우거(우거)의 서울 - 왕검성(조선 고대 삼 왕검성)의 그 좌우로 협격하려다가, 양복(양복)은 열구에 이르러 등육하여서는 대패하여 산중으로 도망하여 잔병을 거두어 자보하고, 순체(순치)는 패수를 건너려 하나, 위씨의 병이 거수하여 여의치 못하는지라. 한무제가 양장의 패함을 듣고, 이에 사자 위산(위산)을 보내어 금백을 흩어 우거(우거)의 군신을 먹이고 그 상호간을 이간하더라.
위씨의 국은 원래 조선과 지나(중국) 류구의 집단인 고로, 그 군신들이 위씨에 대한 충의보다 황금에 대한 욕심이 비상히 치열하므로, 그 군신이 주전·주화의 갑·을 양파로 갈리어 서로 경알하다, 밋(이윽고) 한의 비밀한 김백이 흩어짐에, 을파들이 돌연히 성하여 우거(우거)로 하여금 그 태자를 한군 중에 보내 한장에게 사죄하고 군량과 마필을 진공하기로 한과 약함에 이르더라. 그러나 우거(우거)는 「태자가 호위병 만인을 데리고 패수를 건너가 한장을 보게 하라」 하며 한장은 「태자가 만명의 군대로 패수를 건너려면 무장을 갖추지 말고 오라」 하여 양편이 서로 상지하여 교섭이 파열하더라.
그러나 그 금백이 효력을 내어 우거(우거)의 재상 로인(노인)·한음(한음)·삼(삼)과 대장 왕겹(왕겹)이 한에 통의하고 전쟁에 힘쓰지 아니하므로, 한장 순체(순치)는 패수를 건너 왕검성의 서북을 치고, 양복(양복)은 산중에서 나와 왕검성의 동남을 치더라. 한무제가 교섭의 파열로 위산을 죄하여 참형에 처하고, 제남태수 공손수(공손수)로 사자를 삼아 전권을 주어 양장을 감독하는 동시에 더욱 다수의 금백을 휴대하여 우거(우거)의 군신을 매수케 하더니, 이때에 순체(순치)와 양복(양복)이 서로 강을 받기를 다투어 부화하거늘, 공손수(공손수)가 순체(순치)를 좌단하여 양복(양복)을 불러 순체(순치)의 군중에 가두고, 순체(순치)로 하여금 그 군을 병하여 싸우게 하고 한무제에게 귀보하니, 한무제가 「금백만 낭비하고 위씨 군신을 강치 못하였다」고 대노하여 또 수를 참하더라.
미구에 한음(한음)·왕겹(왕겹)·로인(노인) 등의 금백 받은 일이 발각되어 로인(노인)은 피참하고 한음(한음)·왕겹(왕겹) 양인은 도망하여 한군에 강하더니, 익년 하에 삼(삼)이 우거(우거)를 암살하고 성을 거하여 강하거늘, 우거(우거)의 대신 성기(성기)가 삼(삼)을 토하더니, 우거(우거)의 왕자 장(장)이 삼(삼)에게 반부하여 로인(노인)의 자 최(최)와 합하여 성기(성기)를 죽이고 성을 개하여 위씨가 이에 망하니, 한무제가 그 땅을 나누어 진번·임둔·현토·낙랑 사군을 만들더라.
이때의 사실은 오직 『사기』 「조선열전」에 거할 뿐인데, 조선열전 중에 한이 금백으로 위씨 군신에 뢰한 일이 없음은 하고이뇨. 이는 사마천(사마천)이 금상본기의 화(전절에 보임)로 부형을 당하여 동부여에 대한 한의 패전을 적지 못하는 심리를 가진 고로 직서치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한이 전쟁에는 패하고 뇌물로 성공한 사실이 지상에 뚜렷이 보이나니, 이를테면 「만득이병위재물침 강기방소읍」이라 하여, 위만(위만)의 건국을 병위와 재물의 양자로 성취됨을 기함은 은연히 한무제를 영사하여 위씨를 멸할 때에 당당한 병력으로 못하고 재물로 적을 매수하는 비열한 수단으로써 함을 기자함이며, 「견위산 인병위왕유우거」라 하여 「병위」 이자만 쓰고 「재물」 이자는 빼었으나, 이때에 순체(순치)와 양복(양복)은 이미 패전하고 증원병도 가지 아니하여 병위가 도리어 우거(우거)보다 약한 때인데 무슨 병위가 있으랴. 이는 곧 상문의 「병위재물」 사자를 승하여 위산(위산)이 가져간 것이 「병위」가 아니라 재물이란 뜻을 포함함이며, 위산(위산)과 공손수(공손수)가 다 무고히 피참함을 기함은, 「한무제가 금백만 쓰고 성공 못함을 노함」을 표시함이며, 위씨 망후에 순체(순치)와 양복(양복)이 (일)은 피참하고, 우(일)은 피출하고, 봉후의 상을 받은 자는 위씨의 반신 로인(노인)의 자 최(최)와 왕겹(왕겹) 등 사인 뿐이니, 이는 곧 위씨의 멸망이 한의 병력에 있지 않고 한의 재물을 받아 매국한 간신에게 있음을 로골한 것이니라.
(삼) 한사군의 위치와 고구려 대한관계
위씨가 망하매 한이 그 땅을 나누어 진번·임둔·현토·낙랑 사군을 설하였다 한바, 사군 위치의 문제는 삼한 연혁의 쟁론에 내리지 않는 조선사상 쟁론의 문제가 되어왔다. 만반한·패수·왕검성 등 위씨의 근거지가 금 해성·개평 등지(이는 제이편 제이장에 상술한 것)일뿐더러 당시에 금 개원 이북은 북부여국이요, 금 흥경이동은 고구려국이요, 금 압록강 이남은 낙랑국이요, 금 함경도 내지 강원도는 동부여국이니, 우 사국의 이외에서 한사군을 구할 것인즉, 사군의 위치는 금 요동반도 이내에 구할 뿐이다. 그러나 사군 위치에 대하여 이설이 백출함은 대개 좌열한 수인이었다.
제(일)은 지명의 동이를 잘 구별치 못한 까닭이니, 이를테면 패수·낙랑 등은 다 「펴라」로 독할 것이니, 금 대동강은 당시의 「펴라」란 물이요, 금 평양은 당시의 「펴라」란 서울이니, 물과 서울을 다 같이 「펴라」라 명칭함은 마치 금 청주 「까치내」란 물 곁에 「까치내」란 촌이 있음과 같이, 「펴라」란 물위에 있는 서울인 고로 또한 「펴라」라 명칭한 것이요, 패수의 「패」는 「펴라」의 「펴」음을 취하며 패수의 「수」는 「펴라」의 「라」의 의를 취하여 펴라로 독한 것이요, 낙랑의 「락」은 「펴라」의 펴의 의를 취하며, 낙랑의 「랑」은 「펴라」의 「라」의 음을 취하여 펴라로 독한 것이요, 기타 낙랑·평양·평양·평나·백아강 등도 다 「펴라」로 독할 것이니, 그 해석은 여기에 략하거니와, 한무제가 이미 위씨조선 - 곧 불조선(변한)을 멸하여 요동군을 만들고는 왕왕 신·말 양조선의 지명을 가져다가 위씨조선의 고지명을 대할 새, 금 해성·한우락 본명이 알티(안지 혹 안시라 한 자)거늘 이를 고쳐 패수라 하였으며, 『사기 』작자 사마천(사마천)은 그 고친 지명에 의하여 사군 이전의 고사를 설하였으므로 「한흥 … 퇴이랑수위계」주11)와 「만 … 동주출색도패수」의 등 어가 있으며, 진번이 비록 신·불 양조선의 합칭이나 한이 이를 취하여 고구려를 진번군으로 가정(하문에 상술)한바, 『사기』의 「시전연 상략속진번조선」주12)과 「만 … 초역속진번조선」 등의 「진번조선」은 신·불 양 조선을 가리킨 것이나, 「진번, 임둔 개래복속」과 「진번방중국 상서욕입 견천자」주13) 등의 진번은 다 사군 이후 사군의 (일)인 진번을 가리킨 것이니, 또한 후래에 고친 지명에 의하여 고사를 설한 자니, 마치 을지문덕(을지문덕) 이후에 살수의 명칭이 청천강이 되었은즉, 을지문덕(을지문덕) 시대에는 청천강이 없으나, 우리가 「을지문덕(을지문덕)이 청천강에서 수병을 파하였다」 하는 류거늘, 역래의 학자들이 이를 모르고 『사기』의 패수와 진번 등을 사군 이전의 명칭으로 아는 동시에, 한우락·패수 대동강·패수의 양 패수와 양 국명인 진번과 일군명의 진번, 양 진번을 혼설하며, 제(이)는 기록의 진위를 잘 변별하지 못한 까닭이니, 이를테면 『한서』 「본기」 무제 원봉 삼년의 진번·임둔 주의 「신찬왈 무릉진번군치삽현 거장안칠천육백사십리 … 둔군치동이 거장안 육천일백삼십팔리…」주14)라 한바, 『무릉서』는 곳 무릉인 사마상여(사마상여) 작이라 하나, 『사기』 「사마상여전」에 「상여기졸 오세 천자시사후토」주15)라 하고, 『사기집해』에 「원정사년…시립후토」라 한바, 원정 사년은 기원전 일백십삼년이요, 상여의 사는 그 오년전인 원수 육년 - 기원전 일백십칠년인즉, 상여는 원봉 삼년 - 기원전 일백영팔년 - 진번·임둔 설군의 년의 십년전에 이사한 자니, 십년전에 이사한 상여가 어찌 십년후에 양군 위치를 말할 수 있으랴.
그러면 무릉서가 위서인 동시에 그 서중 진번·임둔 운운은 위증임이 무의하며, 또는 『한서』 「지리지」에 요동군 군현지 이외에 따로 현토와 낙랑의 양군의 군지가 있으므로, 독사자로 하여금 요동반도 이외에서 현토·낙랑 양군의 존재를 인케 함이나, 『위략』의 만반한이 곧 『한서』 「지리지」 요동군의 문번한임과 『사기』의 패수가 곧 요동군 번한현의 패수임이 이미 확증이 있은즉, 지리지의 현토·낙랑 양군 운운은 후인의 위증임이 무의하거늘, 역래의 학자들이 이 같은 작위의 공안이 있음을 모르고, 매양 우 『한서』 「본기」 진번·임둔 주나 지리지 낙랑·현토의 양 군지를 김석불간의 서로 오신하였다. 이 원인으로 인하여 사군의 위치에 대한 고거가 비록 분운하나 하나도 그 정곡을 얻은 이가 없음이라 하노라.
사군은 원래 토상에 그은 자가 아니요, 지상에 그린 일종 가정이니, 말하자면 고구려를 멸하거든 진번군을 만들리라, 북동부여-북옥저를 멸하거든 현토군을 만들리라, 남동부여-남옥저를 멸하거든 임둔군을 만들리라, 낙랑국을 멸하거든 낙랑군을 만들리라, 하는 가정 뿐이요 실현한 자가 아니다. 한무제가 그 가정을 실현하기 위하여 우 각지에 대하여 침략하기를 시작하였을 것이며, 낙랑과 양 동부여는 전술과 같이 고구려에 대한 숙원이 있으므로 한의 력을 빌어 고구려를 배척하려 하였을 것이요, 고구려는 전자의 대주류왕의 전승한 기세로 인하여 한과 결전함에 출할 것이다. 그 전쟁이 대개 기원전 일백○팔년경 곧 위씨 멸망의 년에 시하여 기원전 팔십이년에 이르러 종국한바, 한이 패하여 사군 실설의 희망이 영절된 고로, 진번·임둔 양군은 그 명칭을 폐지하고 현토·낙랑 양군은 요동군내에 교설함에 이름이니, 『한서』 「본기」에는 진번군을 파하였다 할 뿐이요, 임둔군을 파하였다는 말은 없으나, 『후한서』 「예전」에 「소제파진번임둔 이병낙랑현토」라 함을 보면, 임둔군도 진번군과 동시에 폐함이며, 『후한서』 「예전」에는 현토를 구려(한 고구려현을 가리킨 것)에 사하다 하며, 『삼국지』 「옥저전」에는 처음에 옥저로써 현토성을 삼았다가, 후에 고구려 서북에 사하다 하였으나, 옥저전의 불내예왕은 북동부여와 남동부여의 왕을 가리킨 것이요, 예전의 불내예왕은 낙랑을 가리킨 것인즉, 양동부여와 낙랑국은 다 당시에 독립왕국이니, 그러면 현토군이 옥저 - 곧 북동부여에서 요동으로 이사한 것이 아니라, 다만 북동부여로 현토를 만들려던 기도가 실패하였으므로 비로소 요동 - 금 봉천성성에 현토군을 교설함이며, 낙랑군도 또한 동시에 교설하였을 것인바, 그 위치는 확언할 수 없으나 대개 금 해성 등지인가 한다.
하고로 진번·임둔을 파하는 동시에 현토·낙랑 양군을 교설하였느뇨? 이는 다름 아니라 곧 전술한 낙랑국과 남동부여국이 고구려를 원함이 심하여 한이 패퇴한 뒤에도 양국이 오히려 사자를 보내 밀통하며 상민이 왕래하여 물화를 호역하므로 한이 요동에 현토·낙랑 양군을 교설하여 양국에 대한 교섭을 맡게 하며 혹 고구려와 개전되는 경우에는 양국을 이용하였나니. 이는 한의 양국에 대한 관계여. 고구려는 매양 양국의 한과 통하는 증적을 발각하면 반드시 문죄의 사를 기하였나니. 이는 고구려의 양국에 대한 관계니, 수백년 동안 양국으로 인하여 고구려 대한의 진취를 장애하였다.
본서에 양 낙랑을 구별하기 위하여 낙랑국은 남낙랑이라 쓰며, 한 요동의 낙랑군은 북낙랑이라 쓰거니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보인 낙랑왕과 「신라본기」에 보인 낙랑국은 다 이 남낙랑을 가리킨 것이거늘, 역래 학자들이 매양 「요동에 있는 북낙랑은 모르고 남낙랑을 낙랑군이라 주장」하는 동시에, ‘『삼국사기』의 낙랑국 낙랑왕은 곧 한군 태수의 세력이 동방에 웅시하여 세가 일국왕과 같으므로 국 혹 왕이라 칭’하였다고 단안하였으나, 고구려와 접경인 요동태수를 요동국왕이라 칭하지 아니하며, 현토태수를 현토국왕이라 칭하지 아니하였은즉, 어찌 홀로 낙랑태수를 낙랑국왕이라 칭하였으랴. 그 억설됨이 무의하니라.
근일 일인이 낙랑 고분에서 혹 한대 연호를 새긴 기명을 발견하고, 금 대동강 남안을 위씨 고도-곧 후래 낙랑군치라 주장하나, 이따위 기명은 혹 남낙랑이 한과 교통할 때 수입한 기명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고구려가 한을 전승할 때에 부획한 기명이 될 것이오. 이로써 금 대동강 연안의 낙랑군치임을 단언함은 불가하니라.
제사장 계립령 이남의 양 신국
(일) 계립령 이남의 별천지
계립령은 금 조령이니, 금 문경읍의 북산을 계립령이라 하나, 고대에는 조령의 칭호가 저릅재니, 저릅은 삼의 고어니, 저릅을 리독자의 음으로 계립이라 쓰고 의로 마목이라 쓴 것이니, 그러므로 조령이 곧 계립이다. 계립령 이남은 금 경상남북도의 총칭이니, 계립령의 일대로 금 충청북도를 막으며, 태백산(봉북의 태백산)으로 금 강원도를 막으며, 지리산으로 금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를 막고, 동과 남으로 바다를 둘러 따로 일국이 된 고로, 조선 열국의 당시에 사 부여(고구려도 혹 호 졸본부여)가 분립한다. 고구려가 동부여를 정복한다, 또 낙랑을 정복한다, 위씨가 한에게 망하여 그 땅이 사군이 된다, 백제가 마한을 멸한다 … 하는 소란이 있었지만, 령 이남은 그런 풍진의 소식이 격절하여, 진한·변진의 자치부 수십국이 그 비미한 토지에 거하여, 도·맥·서·속 등 농업과 잠상·직작을 힘써 곡류와 포백류를 산출하며, 철을 채하여 북방 제국에 공급하고, 변진은 음악 좋아하여 변한슬(불한(변한)고)이란 것을 창작하여 문화가 매양 발달하였으나, 일찍 북방의 유민으로 마한의 봉지를 받은 고로, 마한의 절제를 받고 마한이 망한 뒤에는 백제의 절제를 받았다. 그러나 그 절제는 소극적으로 (일) 신수두의 건설과 (이) 신한(진한) 칭호를 불허하며, 적극적으로 (일) 매년의 조알과 (이) 토물의 진공을 예행할 뿐이더니, 미래의 진한의 자치부는 신라국이 되고, 변진 자치부는 육가라 연맹국이 되어 차제로 백제를 반항함에 이르니라.
(이) 가나 육국의 건설
금 경상남도 등지에 변진의 십이자치부가 설립되었음은 제삼편 제사장 제사절에 술하였거니와, 우의 각 자치부를 거의 「가라」라 칭하니, 「가라」는 대소의 의니, 각부가 각기 그 제알을 쌓아 천수를 막아 대소를 만들고 그 부근에 자치부를 설하여 그 부명을 「가라」라 칭하였다. 가라를 리독자로 「가라」·「가락」·「가야」·「구사」·「가야」 등으로 썼나니, 야·사·야 등은 고음에 다 「라」로 독한 것이요, 「가라」를 혹 「관국」이라 썼나니, 관은 그 음의 초성 중성을 떼서 「가」로 독하고 국은 기의의 초성 중성을 떼어 「라」로 독한 것이라. 기원 사십이년경에 각 가라의 자치부원 - 아도간·여도간·피도간·오도간·류수간·류천간·신천간·신귀간·오천간 등이 금 김해읍 구지봉 상에 모여 대계(계는 당시 자치회의 명)를 설하고, 김수로 육형제를 추천하여 육「가라」의 군장을 심을 새, 김수로는 제일 가라 곧 김해를 주하여 「신가라」라 칭하니, 「신」은 대의 의며 수의 의니 신가라는 전사에 금관국이라 쓴 것이 적당하니, 「가락」 혹 「구사」라 썼으나 양자가 다 「가라」의 리독자인즉 이로써 육가라를 총칭함은 가하나, 다만 신가라를 전칭함은 부당하니라.
제(이)는 밈라가라니, 금 고영의 전천을 막아 가라를 만들고 리독자로 「미마나」 혹 「임나」로 쓴 자니, 육가라 중에 그 후예가 가장 강대한 고로, 전사에 대가라 혹은 대가야라 기하였으며, 제(삼)은 안라가라니, 금에 함안의 전천을 막아 가라를 만들고 리독자로 「안라」·「아니나」 혹 「아니량」이라 기한 것인데, 아니량이 후래에 와전하여 아호나가 되고, 아호나가 또 와전하여 아나가 되니라.
제(사)는 고링가라니, 금 함창이오. 또한 천을 막아 가라를 만들고 리독자로 기한 것인데, 고링가라가 와전하여 「공갈」이 되었나니, 금 「공갈못」이 그 유허니, 육가라 고적 중에 오직 이것 하나가 전하며, 그 물속에 연화연엽이 오히려 수천년 전의 풍광을 말하는 듯하더니, 이조(조선) 광무 년간에 총신 이채연(이채연)이 논을 만들려 하여 그 제알을 터 아주 폐허가 되게 하니라. 제(오)는 「별뫼가라」니, 별뫼가라는 「별뫼」란 산중에 착성한 가라로 금 성주니, 리독자로 「성산가라」 혹 「벽진가라」로 기한 것이오. 제(육)은 「구지가라」니, 금 고성 중도니, 또한 천을 막아 가라를 만들고 리독자로 「고자가라」라 기한 것인데 육가라 중의 최소국인 고로, 또한 소가야라 칭하니, 육가라국이 처음에는 형제의 연맹국이었으나 그 뒤에 년대가 내려 갈수록 촌내가 멀어져 각자의 독립국이 되어 각자의 행동을 취하였는데, 『삼국사기』에 이미 「육가라본기」를 빼고 오직 「신라본기」와 열전의 신라와 관계된 가라의 일만 기한 중에 신가라를 김관국이라 쓴 이외에는 기타 오가라는 거의 구별이 없이 모두 가야라 써, 그 가야가 어떤 가라를 가리킨 것인지 모르게 된 것이 많은지라. 이제 본서에는 할 수 있는 대로 이를 구별하여 쓰며 육가라의 연대도 삭감을 당한듯하므로 신라의 전에 기하노라.
(삼) 신라의 건국
역래의 학자들이 다 「신라사가 고구려·백제 양 국사보다 비교적 완전하다」 하였으나 이는 아주 모르는 말이다. 고구려사와 백제사는 삭감이 많거니와 신라사는 위선이 많아 사료로 근거할 것이 퍽 적으니, 이제 신라 건국사를 말할 새 이를 략론하리라.
신라의 제도가 육부 삼성으로 조직된바, 「신라본기」에 거하면 육부는 처음에 알천양산·돌산고허·무산대수·자산진지·김산가리·명활산고야의 육촌이러니, 신라건국 후 제삼세 유리왕 구년(기원 삼십이년)에 육촌의 명을 고치고 성을 준바, 알천양산은 양부·성 이, 돌산고허는 사양부·성 최, 무산대수는 점양부·성 손, 자산진지는 본피부·성 정, 김산가리는 한지부·성 배, 명활산고야는 습비부·성 설이라 하였다 하며, 삼성은 박·석·김 삼가니, 처음에 고허촌장 소벌공(소벌공)이 양산 밑 나정 곁에 마가 꿇어앉아 욺을 바라보고 쫓아가 본즉, 마는 간 곳이 없고 대란이 있으므로 이를 쪼갠즉 영아가 나오거늘, 이를 수양하여 성을 박이라 하니, 그 나온 대란이 「박」만 함으로「박」의 음을 취함이라 하며 명 혁거세(혁거세)라 하니, 혁거세(혁거세)는 독법과 의의가 다 부전하였으며, 년 십삼에 영달숙성함으로 인민이 존하여 거서간을 삼으니, 거서간은 당시의 말에 귀인의 칭호라 하니, 이것이 신라 건국 원년(기원전 오십칠년)이니, 이는 박씨의 시조이요.
신라의 동에 왜국이 있고 왜국의 동북 일천리에 다파나국이 있는데, 다파나국 왕이 녀국왕의 녀를 취하여 아이를 밴지 칠년만에 대란을 낳으므로, 왕이 불상한 일이라 하여 내버리라 하매, 녀가 불인하여 백으로 싸고 금독에 넣어 바다에 띄우더니, 그 금독이 금관국의 해변에 이름에, 금관국인은 괴히 여기어 취치 아니하고, 진한의 아진포구에 이르니, 이때는 박혁거세 삼십구년(기원전 일구년)이니, 해빈 노구가 이를 건져 본즉, 영아가 그 속에 있는지라, 이를 수양하여 금독에서 탈출한 고로 명을 탈해라 하고, 금독이 떠오던 당시에 작조가 따라 오며 울었으므로 「작」자의 변을 떼어 성을 석이라 하니, 석씨의 시조요.
석탈해 구년(기원 육십오년)에 금성(신라 서울 즉 경주) 서의 시림에 계명성이 있음을 듣고 대보 호공(호공)을 보내 가본 즉, 금색 소독이 수지에 걸리고 그 하에서 백계가 욺으로, 그 금독을 취하여 열어본즉, 또한 소아가 있으므로 수양하여 이름을 알지(알지)라 하고, 금독에서 나온 고로 성을 김이라 하니, 이는 김씨의 시조라 하였다.
독에서 나왔다 알을 깠다 하는 신화는, 고대인이 그 시조의 출생을 신이하도록 장식한 신화이거니와, 다만 육부 삼성의 사적이 고대사의 원본이 아니요, 후인의 증가와 산절이 많음이 가석하니, 이를테면 조선고사의 모든 인명·지명이 처음에는 우리말로 짓고 리독자로 기하였으며, 그 뒤에 한문화가 성행하면서 한자로 개작하였나니. 전자는 「메주골」을 「미추홀」 혹 『매초홀』이라 쓴 류며, 후자는 메주골을 인천이라 개명한 류거늘, 이제 알천양산을 돌산고허 … 등 한자로 지은 육촌에 명칭이 육부의 본명이요, 양부·사양부 … 등 리독자로 지은 육부 명칭이 육촌에 후명이라 함이 「어찌 선후의 순서를 전도함이 아니냐?」의 의문이 있음이 (일)이요. 신라가 불경을 수입하기 이전에는 모든 명사를 다만 리독자의 음의를 맞추어 할 뿐이다가, 밋(이윽고) 불학이 성행한 뒤에 다소의 괴승려들이 비슷하기만 하면 불경의 숙어를 맞추어 다른 리독자로 개작하였나니. 예를 들면 소지왕을 혹 비처왕이라 칭하니, 소지나 비처가 다 「비치」로 독한 것이나 비처는 원용의 리독자며 소지는 불경에 맞추어 개작한 리독자요, 유리왕을 혹 세리지왕이라 칭하니, 유리나 세리가 다 「누리」로 독한 것이나 유리는 원용의 리독자며 세리는 또한 불경에 맞추어 개작한 리독자이다. 탈해왕도 주에 일명 「토해」라 하였은즉 탈해나 토해는 다 「타해」 혹 「토해」로 독할 것이며 그 어의는 무엇인지 모르나 당시의 속어로 지은 명사임은 명백하니, 토해는 원용의 리독자며 탈해는 개작의 리독자니, 불경에 「탈해」란 말이 있으므로 「토해」의 토를 탈로 개작한 것인바, 원래는 당시 속어의 취음이요 탈출 혹 해출의 의가 없거늘, 김독에서 탈출한 고로 명을 탈해라 하였다 함이 괴승배의 부회임을 단언할 수 있음이 (이)요.
삼성 시조가 다 대란에서 나왔은즉 그 대란은 다 「박」만 할 것이거늘, 하고로 삼성 시조가 동일한 박씨가 되지 않고 박조 이외에 이조는 석씨·금씨가 되었느냐? 석·금 이성이 다 금독에서 나왔은즉 하고로 동일한 김씨가 되지 않고 일은 석씨가 되며, 우일은 김씨가 되었느냐? 석탈해의 김독에 작이 수명하였으므로 「작」자의 변을 떼어 석씨가 되었은즉, 금알지가 올 때에 계가 수명하였은즉 계자의 변을 떼어 해씨가 됨이 가하거늘, 하고로 양자에 이례를 써 전자는 김씨가 되지 않고 석씨가 되며, 후자는 해씨가 되지 않고 김씨가 되었느냐? 신화라도 이 같이 잡난하여 조리가 없을뿐더러, 게다가 한자 파자장의 수작이 섞이어 리독문시대에 실례와 많이 틀림이 (삼)이요. 초년에 초창한 신라는 경주 일우에 거하여 열국 중 최소국이거늘, 「변한이 국으로 래강하다 동옥저가 량마 이백필을 진공하」「다」함이 거의 사세에 부당할뿐더러, 「북명인이 전을 경하다가 예왕인을 얻어 헌하다」함은 더욱 황설인 듯하니 하고요 하면, 북명은 북 「가시라」 - 북동부여의 별명 - 금 혼춘 등지요, 고구려 대주류왕의 시위장사 괴유(괴유)의 장지거늘 이제 혼춘 농부가 전중에서 왕인을 얻어 수천리를 발섭하여 경주 일우의 소국인 신라왕에게 바쳤다 함이 어찌 실화이랴. 이는 경덕왕이 동부여 곧 북명의 고적을 금 강릉으로 옮긴 뒤에 조작한 황설이니, 다른 것도 거의 신용할 가치가 적음이 (사)이다.
신라가 열국 중 문운이 가장 늦게 발달하여 역사의 편찬이 겨우 그 건국 육백년 후에 비롯하여 억지로 북방 제국의 신화를 모방하여 선대사를 꾸민바, 그나마도 궁예(궁예)·견훤(견훤) 등 병화에 소탕하고 고려조의 문사들이 남산·북산의 검불을 주어 만든 것인 고로, 신라본기의 기록의 진위를 가려냄이 고구려·백제 양 국사나 한 가지거늘, 사가들이 흔히 신라사가 비교적 완비한 줄로 알아 그대로 준신하였도다.
여의 연구에 의하면 신라는 진한 육부의 총칭이 아니요, 육부 중 일부인 사양부이니, 신라나 사양은 다 「새라」로 독할 것이며, 새라는 천명이니 「새라」의 위에 있으므로 「새라」라 칭한 것이오. 사양은 사훼(진흥왕 비문에 보임)라고도 기하였으니 사훼는 새불이니 또한 「새라」위에 있는 「불」-원야인 고로 칭한 것이며, 「본기」의 신라의 초명을 「서라벌」이라 하였으나 서라벌은 「새라불」로 독할 것이니, 또한 「새라」의 「불」이란 뜻이오. 시조 혁거세(혁거세)는 곧 고허촌장 소벌공(소벌공)의 양아인바, 고허촌은 곧 사양부 인즉 「소벌공(소벌공)」의 「소벌」은 또한 사훼와 같이 「새불」로 독할 것이니 지명이며, 「공」은 존칭이니 새불 자치회의 회장인 고로 「새불공」이라 함이니, 말하자면 소벌공(소벌공)은 곧 「고허촌장」이란 뜻이거늘 소벌공을 마치 인명같이 씀은 사가의 오기다. 새라 부장의 양자인 박혁거세(박혁거세)가 육부의 총왕이 된 고로, 국호를 「새라」라 하고 리독자로 「사라」·「사노」·「신라」·「서나」 등으로 쓴 것이며, 삼성의 박씨뿐만 아니라 석·김 양씨도 다 사양부의 귀성이니, 삼성을 특존함은 또한 삼신설에 의방한 것이며, 「본기」에 석탈해왕 구년(기원 육십오년)에 비로소 김씨 시조인 영아 김알지(김알지)를 주었다 하나, 파사왕 원년(기원 팔십년)에 왕후 사성부인 김씨는 허루갈문왕(추존한 왕을 신라에서 갈문왕이라 함)의 딸이라 하였은즉, 그 날을 따짐에 허루(허루)는 거의 알지의 부집되는 김씨일 것이니, 이로 미루어 보면 박·석·김 삼성이 당초부터 사양부 중에 서로 연혼하는 거족이다가 동모한 결과에 육부 전체를 가져 삼성호왕의 국을 만들매, 이에 진한 자치의 국이 변하여 세습제왕의 국이 됨에 이름이니라.
제오편 고구려 전성시대
제일장 기원 일세기 초 고구려의 국력 발전과 그 원인
(일) 대주류왕 이후의 고구려
기원 일세기 이후로 기원 삼사세기까지에 한강 이남 곧 남부의 조선 열국들은 아직 초창 신립한 때요, 압록강 이남 곧 중부의 조선 열국들은 다 쇠미하고 압록강 이북 곧 북부의 조선 열국들도 거의 경패하여, 가나나 신라나 백제나 남낙랑이나 동부여 양국들이 다 가기할 것이 적고, 오직 고구려와 북부여가 가장 대국으로 열국 중에 웅장하였으나, 그러나 대주류왕 이후 연대의 삭감됨을 따라 사실도 모두 탈루되어 그 사적을 논할 수가 없다. 이제 지나(중국)사에 거하여 고구려가 지나(중국)와 선비에 대하여 정치적 관계된 일이사항을 기할 뿐이다.
(이) 고구려 대 지나(중국)의 관계(왕망의 흥망과 고구려의 발흥)
고구려가 동부여와 남낙랑의 관계로 인하여 늘 한과 쟁하더니, 기원 일세기경에 한의 외족에 왕망(왕망)이란 괴걸이 나와 (일) 고대사회주의인 정전법을 실행하며, (이) 한문화로 세계를 통일하여 일종 (사자략)적 국가의 건설을 시하여 지나(중국) 본국뿐 아니라, 조선 열국까지도 다소 관계를 발생하였다. 말하자면 금 중화민국 이전에 지나(중국)의 수천년 동안 조대의 변역과 군웅의 쟁탈이 무상하였지만, 기실 을의 세력으로 갑의 세력을 대할 때에 민중에게는 일시 「성요역 부부세」 육자의 혜정으로 고식적 안녕을 주다가, 미구에 다시 구규를 회복하여 폭로써 폭을 역하는 악극이 될 뿐이니, 이를 무의식한 내란이라 칭할지언정, 「혁명」이란 휘호는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왕망(왕망)에 이르러서는 실제로 토지를 평분하여 빈부의 계급을 없이 하자는 의견을 대담하게 실행하려 하였으니, 이는 동양 고대 유일한 혁명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제 정전세 발생의 경과와 왕망(왕망)의 흥망의 략사를 말하리라.
정전설은 지나(중국)의 춘추말 전국초(기원전 오세기 경)에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발생한 자니, 당시에 열국이 병치한 중에 나라마다 귀족이 전권하여 호사를 극하며 전쟁이 끊일 날이 없어 부세가 날로 높으며, 부인이 빈인의 토지를 겸병하여 인민의 생활이 곤난하기 막심하므로, 유약(유약)·맹가(맹가) 등 일부 학자들이 이를 구제하려 하여 토지평균설-정전설을 창함에 이르렀다. 피등의 말에 거하면 「지나(중국)의 하·상·주 삼대가 다 정전제를 행하여 정자형의 구백무 전지를 팔가에 분급하여 일가가 일백무씩을 경작하고, 그중 일백무는 공전이라 하여 팔가가 공동으로 경작하여 공용에 쓰게 하며, 또 각기 사작 백무에서 십분의 일을 공세로 바쳐 십일세라 칭하였다」 하며, 「선대의 성왕은 다시 나오지 않고 중국이 분열하여 전국이 됨에, 제후왕들이 그 인민에게 부세를 많이 받기 위하여 정전을 파괴하는 동시에 정전에 관한 문적까지 없이 하였다」 한다.
어느 민족이고 그 원시공산제가 있었음은 금일 사회학자들의 공인하는 바인즉, 지나(중국)도 그 태고에 균전제도가 있었을 것은 물론이어니와, 그러나 피등(유약 맹가 등)이 주장한 정전제는 당시 조선의 균전제를 목격 혹 전문하여 이를 모방하려 한 것이요, 피등의 자한 바와 같이 자가의 고적에서 근거한 것은 아니다. 다만 조선의 균전은 팔가동전이 아니요 사가동전이니, 금 평양이나 경주에 끼친 기자형의 고전이 충분이 이를 증명하며, 그 세제는 십분의 일을 취하는 십일제가 아니요, 이십분일을 취하는 이십일세이었느니, 맹자(맹자)의 기한바 「맥이십이취일」이 이를 명백히 지적한 것이다. 피등이 사가동전제를 팔가동전제로 고치며 십분일의 세칙을 이십분일의 세칙으로 고쳐 조선과 달리하고는, 자존적 근성이 심후한 피등이 이를 조선에서 가져왔다 함을 휘닉하고, 중국 선대 성왕의 유제라고 위탁하는 동시에 조선을 이맥이라 칭하고 조선의 정전은 이맥의 제라 척하여, 춘추의 공·곡 양전이나 맹자에 동일하게 「소호십일자 대맥소맥야」라 하며, 「맥 오곡부생 유맥생지 … 무백관유사지양 고이십취일이족」이라 하였다. 『후한서』 부여·옥저 등전에 「토지평창 … 비미 … 의오곡」이라 하며, 『위략』의 부여·고구려 등전에 기관 유상가대노패자라 하였은즉, 맹씨 공양·곡양씨 등의 운운이 근거도 없고 논리에 부합하는 배조선론임을 볼 것이다. 조엽(조엽)의 오월춘추에는 「하우의 정전이 조선(본문의 주신)의 것을 방행한 것」이라 하였으니, 이는 공정한 자백이니라.
피등이 정전세을 아무리 고조로 불렀으나, 본래 민중을 휘동하여 부귀계급을 타파하려든 운동이 아니요, 오직 군주나 귀족을 유세하여 그 기득한 부귀를 버리고 그 소유를 민중에게 평균히 나누어 주자 함인 고로, 민간에 아무 반향이 없었고 군주나 귀족들은 바야흐로 권리의 쟁탈에 급급하여 정전설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었고, 밋(이윽고) 진시황이 지나(중국)를 통일하여 열국을 멸하고 전지나(중국)의 재부를 독점하여 아방궁을 지으며 만리성을 쌓다가 이세에 망하고, 팔년 대란을 지나 한이 흥하매, 석일 열국의 끼친 귀족과 토호들이 많이 멸망하여 부귀계급이 훨씬 감소하며, 인구도 전란중에 소모하여 경작지 부족의 환이 없었으므로 유래의 사회문제가 얼마 동안 적연하였으나, 밋(이윽고) 이백년의 태평세월이 지남에 인구는 비상히 번식하고 거농과 대상이 발생하여 부자는 수군의 토지를 가진 이가 있는 대신에 입추의 지가 없는 빈민이 있어, 사회문제가 학자나 정론가의 사이에 다시 치연하게 되었다. 그래서 혹은 「한전의」를 발하여 인민의 전토를 약간무이로 제한하자 하며, 혹은 주례란 글을 지어 이를 지나(중국) 고대에 정전제를 실행한 주공(주공)이란 성인이 지은 글이라고 위탁하여 당시의 제도를 반대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한의 제실은 쇠미하고 외척의 왕씨가 세세로 대사마·대장군의 직을 가져 정권과 병권을 농단하더니, 밋(이윽고) 왕망(왕망)이 대사마·대장군이 되어서는 한의 평제와 유자영(유자영)의 양대 황제를 독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신이라 하는 동시에 왕망(왕망)은 실로 전술한 바, (일) 정전제의 실행과 (이) 한문화의 세계통일이란 양대 이상을 가진 자이다. 그래서 주례를 모방하여 전지나(중국)의 정전구획에 착수하며, 또 사자를 발하여 인국에 보내 다수한 재물로 그 군장을 먹이며, 인명·지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고치고 한문을 전습함을 꾀함이더라.
선시에 흉노가 남·북 이부에 분하였는데, 북흉노는 금 몽고(몽골) 북부에 거하여 한과 대항하나 남흉노는 몽고(몽골) 남부에 거하여 한에 신복하더니, 이때에 왕망(왕망)의 사자가 남흉노 단우 「낭아지사(낭아지사)」를 달래어 가로되, 이자 이상의 명은 중국문법에 위반이니 「낭아지사」란 명을 고치어 「지」라 명하며, 「흉노」란 「흉」자가 불순하니 「강노」라 고치며, 「단우」란 「단」자가 의미가 없으니 「복우중국」이란 의로 「복우」라 고치라 하였다. 낭아지사(낭아지사)가 처음에는 불긍하였으나, 왕망(왕망)의 재물을 탐하여, 이에 한이 준 흉노단우 낭아지사의 인문을 버리고, 이 새로 주는 「강노복우 지」란 인문을 받았다. 그러하나 왕망(왕망)이 또 생각하기를, 「남흉노의 관할하는 부중이 너무 중다하니, 혹 일후에 환이되지 않을까 하여 그 부중을 나누어 십이복우를 만들어 십이복우를 내라 」함으로, 낭아지사(낭아지사)가 대노하여 드디어 왕망(왕망)과 항전함에 이르렀다.
왕망(왕망)이 제장을 보내 흉노를 칠 새, 요동에 조하여 고구려현병을 발하니 고구려현이란 무엇이뇨? 한무제가 고구려국을 현하려다가 패퇴하여 소수 - 금 태자하 부근에 일현을 두고, 조선 열국의 망명자 피부자 등을 살려 고구려현이라 칭하여 현토군에 속하며, 그 중에 통리하는 장관 일인을 두어 고구려후라 칭하여 현토군에 속한 것이다. 해현인들이 원도에 출정함을 불욕하므로 강제의 징발을 행하거늘, 해 현인들이 색에 출하여 전장에 가지 않고 모두 구도가 되어 약탈을 행하여 왕망(왕망)의 요서대윤 전담(전담)이 추격하다가 패사한지라. 왕망(왕망)이 대장군 엄우(엄우)를 보내, 해현후 추(추)를 꾀여다가 참수하여 장안에 전치하고 대첩을 보하는 동시에, 고구려현을 하구려현이라 고치고, 조를 내려 제장을 격려하며, 승세를 타 조선 열국과 흉노 각부를 쳐 한화적 시설을 재축하거늘, 조선 열국 - 북부여·고구려 등국이 대 공수동맹을 결하여, 왕망(왕망)의 변경을 자주 침하여 왕망(왕망)이 이에 대조선 대흉노의 전쟁을 위하여 부세를 증가하며 인부를 징발하여 전지나(중국)가 소동하였다.
그래서 부민들만 왕망(왕망)을 반대할 뿐 아니라 빈민들도 군기하여 왕망(왕망)을 토벌함으로, 이 마침내 패망하고 한 광무제가 한을 중흥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왕망(왕망)병의 침입을 유류왕 삼십일년의 일로 기하고, 후 추를 고구려장 연비(연비)로 하였으나, 이는 『삼국사기』 작자가 (일) 고구려 고기에 연대 삭감의 공안이 있음을 모르고, 고기의 연대를 『한서』의 연대와 대조하며, (이) 『한서』의 고구려가 고구려국과 관계없는 한 현토군의 고구려현인 줄을 모르고, 이를 고구려국으로 오인하여 『한서』의 본문을 그대로 초록하는 동시에, 다만 유류왕이 왕망(왕망)의 장사의 손에 죽어 그 머리가 한도 장안에까지 갔다 함은, 피등 사대노의 안중에도 너무 엄청난 거짓말인 듯하므로, 「고구려후추」 오자를 「아장연비」 사자로 고친 것이다[김부식(김부식)이 흐리터분한 오작은 많으나 턱없는 위작은 못하는 자니, 연비(연비)가 혹 고기 중 작자가 위조한 인물인 듯도 하다. 그러나 유류왕은 명백히 왕망(왕망)의 백여년 이전의 인물이요 『한서』에 운운한 고구려는 명백히 고구려국이 아니니, 설혹 참말로 연비(연비)라는 사람이 있었다 할지라도 유류시대 고구려의 사람은 아니니라].
그러면 왕망(왕망)은 지나(중국)유사 이래 제일차로 의식있는 혁명을 행하려 한 자라. 그러나 인국을 너무 무시하여 남의 언어·문자·종교·정치·풍속·생활상태 등의 모든 역사적 배경의 여하를 불문하고 한문화로 지배하려 하다가, 그 반감을 불러 다소의 민족적 전쟁을 발생케 하여 결과가 내부개혁의 진행까지 저요하여 그 패망의 제일인을 만들었다. 신수두의 교가 비록 태고의 미신이지만, 전래한 년대가 구원하고 유행한 지역이 광대하여 한의 유교로는 이를 대적할 무기가 못되며, 리독문이 비록 한자의 음의를 가차하여 만든 것이나, 조선의 인명 지명 등 명사(고대에는 모두 우리말로 지은 명사)뿐 아니라, 노래나 시나 적바림이나 그 무엇을 물문하고, 이때 조선인에게는 한자보다 편의하였은즉, 한자로 리독자를 대할 가망이 없으니, 왕망(왕망)의 한문화적 동침이 어찌 망상이 아니냐? 하물며 흉노의 본명은「훈」 이거늘, 구태여 「훈」을 흉노로 쓰는 이는 한인이며 고구려의 본명은 「가우리」요 고구려는 그 리독자거늘, 구태여 「고구려」를 「구려」 혹 고구려라 쓰는 이도 한인이니, 한인의 짓도 괘씸하거든 하물며 게다가 본명과 얼토당토않은 문자를 가져 「강노」라 「하고려」라 함이랴. 왕망(왕망)의 패망함이 또한 당연하도다.
(삼) 선비 대고구려의 관계
고구려와 한이 충돌하는 사이에 서서, 고구려를 도우면 고구려가 이기고 한을 도우면 한이 이겨 양국의 승패를 좌우하는 자가 있으니, 곧 선비라 칭하는 종족이 그것이다. 선비가 조선의 서북 - 금 몽고(몽골) 등지에 분포하였다가 흉노 모돈(묵돌)에게 패하여 그 본거지를 잃고 내외 흥안령 부근으로 이주함은 이미 제이편 제삼장에 술하였거니와, 그 뒤에 선비가 양분하여 (일)은 선비라 잉칭하고, 우(일)은 오환이라 칭하니, 우 양자가 언어나 풍속이 거의 동일한 바, 수육을 식하며 수피를 의하여 목축과 수렵으로 생활하는 종족으로 각기 읍락을 나누어 사는데, 전부족을 통어하는 대인이 있고 읍락마다 부대인이 있어, 그 부족들은 다 그 대인이나 부대인의 명자로 성을 삼으며, 투쟁을 기호하므로 소자를 존대하고 노자를 천대하며, 문자가 없으므로 일이 있으면 목각의 신으로 부중을 초집하며, 일체의 쟁송은 대인에게 취결하여 지는 자는 우양으로 배상을 내더라.
조선이 모돈(묵돌)에게 패한 뒤에 선비와 오환이 다 조선에 복속하지 않고 도리어 조선 열국을 침략함으로, 고구려 초에 유류왕이 이를 걱정하여 부분노(부분노)의 계를 종하여 병을 이부에 분하여 일부는 왕이 친솔하여 선비국의 전면을 치며, 우일부는 부분노(부분노)가 솔하여 가만히 간도로 선비국의 후면으로 들어, 왕이 먼저 교전하다가 거짓 패주하니 선비가 그 소혈을 비우고 다투어 추격하는지라. 부분노(부분노)가 이에 소혈을 잠습하여 점령하여 왕군과 함께 복배로 협격하여 드디어 선비를 강복 받아 속국을 삼았고, 오환(오환)은 한무제가 위 우거(우거)를 멸한 뒤에 이를 초유하여 우북평·어양·상곡·안문·대군-금 직예·산서의 지나(중국) 서북 일대에 이거케 하여 흉노의 정찰을 맡게 하더니, 그 뒤 소제 때에 오환(오환)이 날로 번식함으로 당시 한의 집정자 곽광(곽광)이 후일의 걱정거리가 될까 하여, 이에 오환의 선세에 모돈(묵돌)에게 패사하던 참사로써 오환(오환)을 선동하여 모돈(묵돌)의 무덤을 발굴하여 선구를 보케 하니, 흉노의 일연제(일연제) 단우가 대노하여 정기 이만으로써 오환(오환)을 치매, 오환(오환)은 한에 원병을 구하였다. 한이 삼만병을 발하여 구조한다 칭하고 멀리 관망하다가, 흉노의 퇴귀함을 기다려 오환(오환)을 습격하여 무수한 학살을 내, 오환(오환)이 아주 쇠약하여 다시 한과 항하지 못하였다. 왕망(왕망)에게 이르러서는 오환으로 하여금 흉노를 치라 하고 그 처자를 각 주군에 벌모하고, 오환(오환)을 구박하여 흉노를 전멸하기 전에는 그 회환함을 어찌 못하게 하매, 오환(오환)이 원분하여 반망하는 자가 많거늘 왕망(왕망)이 이에 그 벌모한 처자를 살육하니, 그 참혹함이 또한 심하도다.
왕망(왕망)이 망하고 지나(중국)가 대란하매, 고구려 모본왕이 이를 기회하여 요동을 회복하여 양평성의 명을 고쳐 고구려의 구명을 써 오열홀이라 칭하고 선비와 오환을 두합하여 자주 지나(중국)를 치니, 한 광무제가 한을 중흥한 뒤에 요동군을 금 락주에 이설하고 고구려를 막기 위하여 장군 채동(채동)으로 요동태수를 배하더라. 그러나 채동(채동)이 자주 전쟁에 실리하고, 이에 금백으로써 선비추장 편하(편하)를 맡겨 오환추장 흠지분(흠지분)을 살해하거늘, 모본왕이 다시 선비와 오환을 효유하여 다시 공동동작을 취하므로 한이 계책이 궁하여 매년에 이억칠천만전을 고구려·선비·오환 삼국에 공납하기로 조약하고 휴전하더라.
모본왕이 이미 한을 이김에 교오가 심하여 아플 때 사람으로 안석을 삼으며 누울 때 사람으로 베개하고, 꼼짝하면 그 사람을 참살하여 그렇게 죽은 사람이 무수한지라. 시신 두노(두로)가 왕의 베개가 되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일찍이 친우를 향하여 울면서 그 사정을 하소연하니, 그 친우가 가로되 우리를 살게 하므로 임금을 위함이니, 우리를 죽이는 임금이야 도리어 원수가 아니냐. 원수는 죽임이 가하니라 하니, 두노(두로)가 이에 칼을 품었다가 왕을 찔러 죽였다. 모본왕이 피시한 뒤에 군신들이 모본왕의 태자를 불초하다 하여 폐하고 종실에서 태조를 맞아다가 입하더라.
「고구려본기」가 대주류 이후는 확실히 연대가 삭감되었으므로, 「모본왕본기」부터서 비로소 가거할 자료가 될지나, 모본왕을 대주류왕의 자라 함은 그 연대 삭감의 적을 은닉하려는 무록이니, 모본왕은 대개 대주류왕의 삼세나 혹 사세됨이 가하며, 모본왕 때에 요동을 회복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태조 삼년에 요서 십성을 축하여 요동은 그 전에 일차 회복되었던 것이 명백하며, 『후한』 「동이열전」 에 (고구려와 선비가 우북평·어양·상곡·태원 등지를 침략하다가 제동이 은신으로 초함으로 다 다시 강복하였다) 하나 세출전 이억칠천만이 「제동전[채동전]」에 기하였은즉, 이는 세공이요 은신이 아니니라.
제이장 태차 양대왕의 문치
(일) 태차 양대왕의 세계의 오
(일) 왕조의 세계에 틀린 여부를 사가가 아는 체 할 것이 아니지만, 고대사는 연대의 사실이 매양 왕조의 보첩에 딸리어 전한 고로 그 틀린 여부를 가리게 되는 것이다. 이제 제일에 태조의 세계를 말하리라.
전사에 태조를 유류왕 고추가 재사(재사)의 자, 대주류왕의 질이라 하였으나, 유류왕이 이미 말한바 같이 년대 삭감 내의 제왕이요, 광개토경호태왕의 십육세조인즉, 모본왕에게는 삼세조가 되며 태조에게는 사세조가 될지니, 유류왕을 태조의 부인 재사(재사)의 부로 함은 오록이 아니면 무록이다. 재사(재사)는 그 작명이 고추가요 고추가는 곧 「고주가」를 리독자로 기한 자니, 「고주」는 고근이란 뜻이요(금속에도 고근을 고주박이라 함) 「가」는 「신의 씨」란 뜻으로 당시 오부대신의 칭호가 된 자니, 「고주가」는 당시 종친대신의 작명이니(금속에도 원한 동족을 「고죽지 먼등그럭이」이라 함), 재사(재사)가 「고주가」의 위를 가졌은즉 종친대신임은 명백하며, 『후한서』나 『삼국지』에 (처음에는 연나는 왕될 권리를 잃었으나 그 적통대인이 오히려 「고추가」라 칭하여 종묘를 세움을 얻는다) 하였으나, 연나는 서부의 명이요 계나는 중부의 명이니, 고구려의 정제에 중부가 주가 되어 사부가 복속하였은즉, 어느 때라도 중부을 놓고 서부인 연나에서 왕이 났을 리가 없으니, 이는 태조가 연나주장인 고추가 재사(재사)의 자로서 왕이 되고 모본의 태자가 계나를 차지하였던 「신한(진한)」의 자로서 퇴하여 연나의 고추가됨을 가리킨 것일지니, 「본기」에는 태조 이후에 다시 대주류왕의 후예로서 왕위를 입승한 이가 없고 광개토경호태왕의 비에 대주류왕을 그 직조로 쓰였은즉, 태조의 부인 재사(재사)가 대주류왕의 질이 아니라 삼세손이 된 것이다.
이제 또 차대왕의 세계를 말하리라. 전사에 차대왕을 재사(재사)의 자요 태조의 동모제라 하였으나, 태조 당시에 차대왕은 왕자라 칭하였으니, 차대왕이 태조의 제일진대 어찌 왕제라 아니 하고 왕자라 하였느냐. 시왕의 자는 아니나 전왕의 자인 고로, 또한 왕자라 칭하였다 하면 재사(재사)가 왕의 부요 왕이 아니니, 왕부의 자도 왕자라 칭한 예가 있느냐. 태조 즉위할 때에 나이 겨우 칠세요 생모되는 태후가 섭정하였으니, 이 때 재사(재사)가 생존하였을지라도 만사에 감내하는 것이 부인 소아만도 못할 만치 노쇠한 고로, 칠세된 자에게 왕위를 주고 아내가 섭정함에 이름이거늘, 그 뒤에 어찌 다시 강장하여 차대왕과 신대왕과 인고의 삼형제를 낳음에 이르렀으랴. 재사(재사)가 정치상에는 권태하나 아들을 날만한 생식력은 강장하였다 할지라도, 차대왕은 즉위할 때에 나이 칠십육인즉, 태조 십구년이 그 생년이요, 신대왕은 즉위할 때에 나이 칠십칠인즉, 태조 삼십칠년이 그 생년이니, 태조원년에 륭노한 재사(재사)가 십구년만에 또 차대왕을 낳고, 그 뒤 또 이십년만에 신대왕을 낳았다 함이, 어찌 사리에 맞는 말이랴. 대개 차대왕·신대왕과 인고(인고)의 삼인은 태조의 서자요, 차대왕에게 죽은 막근(막근)과 막덕(막덕)의 양인은 태조의 적자인 고로, 신대왕과 인고(인고)가 비록 차대왕(왕자시대의 차대왕)의 전천을 악하나, 초록동색의 록유를 위하여 그 반역의 음모를 고발치 아니함이며, 차대왕도 그 즉위한 뒤에 막근의 형제는 살해하였으나 신대왕과 인고(인고)는 그대로 둔 것이니, 『후한서』에 차대왕을 태조의 자로 기한 것이 실록이요, 「본기」에 차대왕을 태조의 제라 한 것은 오록이거나 혹 무록이니라.
「본기」에 태조의 소자를 어수라 하고 명을 궁이라 하였으나 어수는 리독문에 「마스」로 독할 것이요 「궁」이라는 뜻이니, 전자나 후자가 다 태조의 명이니, 어수는 소자로 「궁」은 명으로 가를 것이 아니며, 차대왕의 명은 수성(수성)이니, 수성(수성)은 「수성」으로 독할 것이니, 오예의 기를 청결시키는 「집몽둥이」를 가리키는 말이며, 태조를 전사에 시라 하였으나 고구려는 시종 시법을 쓰지 아니하였나니, 생시에 그 공업을 예찬하여 「태조」 혹은 「국조」라 쓴 존호이며, 차대왕은 그 공업이 태조에 차한다는 뜻으로 올린 존호이니라.
(이) 태차시대 「선배」의 제도
고구려의 강성은 선배제도의 창설로 시한 바, 창설한 년대는 전사에 전치 아니하였으나 조의(하문에 상)의 명이 「태조본기」에 시견하였은즉, 그 창설이 태·차 양 대왕 때 됨이 가하다. 선배는 리독자로 「선인」·「선인」이라 쓴 바, 「선」과 「선」은 「선배」의 「선」의 음을 취한 것이며 「인」은 「선배」의 「배」의 의를 취한 것이니, 선배는 원래 신수두교도의 보통명칭이러니, 태조 때에 와서 매세 삼월·십월 신수두 대제에 모든 군중을 모아 혹 칼로 춤추며, 혹 활도 쏘며, 혹 깨금질도 하며, 혹 택견도 하며, 혹 강빙을 깨고 물 속에 들어가 물싸움도 하며, 혹 가무를 연하여 그 미악를 보며, 혹 대수렵을 행하여 그 사획의 다과도 보아 여러 가지의 내기에 승리하는 자를 선배라 칭하고, 선배된 이상에는 국가에서 녹을 주어 그 처자를 먹이어 가실에 누가 없게 하고, 선배된 자는 각기 대를 나누어 한 집에서 자며 한 자리에 먹고 아니 자면 고사를 강하거나 학예를 습하거나 하고, 나아가면 산수에 탐험하거나 성곽을 쌓거나 도로를 닦거나 군중을 위하여 강습하거나 하여, 일신을 사회와 국가에 바쳐 모든 곤고를 사양치 않으며, 그 중에서 성행과 학문과 기술이 가장 초출한 자를 뽑아 스승으로 섬기어, 일반의 선배들은 머리를 깎고 조백으로 허리에 두르고, 그 스승은 조백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그 스승 중에 상수는 「신크마리」 - 「두대형」 혹 「태대형」 - 이라 칭하며, 그 다음은 「마리」 - 「대형」 - 라 칭하며, 최하는 「소형」(본어는 무고)이라 칭하고, 전쟁이 일면 신크마리가 그 전부의 선배를 모아 스스로 일단을 조직하여 전장에 다다라, 전승치 못하면 전사함으로 작정하여 죽어 돌아오는 자는 인민들이 이를 개선하는 자와 같이 영행으로 보고 패퇴하면 이를 타기하므로, 선배들이 가장 전장에 용감하며 고구려 당시에 각종의 지위를 거의 골품으로 얻어 미천한 자가 고위에 오르지 못하나, 오직 선배의 단체는 귀천이 없이 학문과 기술로 개인의 지위를 정하는 고로 인물이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산출하였다.
금 함경북도의 재가화상이 곧 고구려 선배의 유종이니, 『고려도경』에 재가화상은 화상이 아니라 형여의 인으로 승같이 髠삭하였으므로 화상이라 칭한다 한 바를 화상 「재가화상이 아니라」 함은 실제에 합하는 말이나, 그러나 형여의 인이라 함은 서긍(서긍)-『고려도경』 작자 지나(중국) 송인-이 다만 지나(중국) 한대의 죄인을 髠삭하여 髠노라 칭한 문자로 인하여 드디어 재가화상을 형여의 인이라 억단한 것이다. 대개 고구려는 망한 뒤에 선배의 유당 들이 오히려 그 유풍을 보전하여 촌락에 은장하여 그 의무를 밟아 오던 바, 선배의 명칭은 유교도에게 빼앗기고 그 단발한 까닭으로 재가화상이란 가명칭을 갖게 된 것이며, 후예가 빈곤하여 학문을 하지 못하여 조상의 고사를 날로 잊어 자가의 내력을 자증치 못한 것이다.
송도의 수박이 곧 선배 경기의 일부분이니, 수박이 지나(중국)에 들어가 권법이 되며 일본에 건너가 유도가 되고, 조선에는 이조(조선)에서 무풍을 천시한 이래로 그 자취가 거의 전멸하니라.
(삼) 태차대왕의 제도
고구려가 추모왕 때에는 모든 소국들이 벌려 있을뿐더러 모든 규모가 초창하여 국가의 체제를 비치 못하였더니, 태조 때에 와서 차태왕이 왕자로서 집정하여 각종 제도를 작정하였다. 그러나 그 제도가 대개 왕검조선이나 삼부여의 것을 삼작하여 대동소이하게 만든 것이요, 이후에 대마다 다소 변경이 있으나 대개 차대왕의 정한 범위에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신·말·불(진한·마한·변한) 삼한의 제도를 방하여 정부에 재상 삼인을 두니, 가른바 「신가」·「팔치」·「발치」니, 신가는 태대신이란 뜻이니 리독자로 상가라 쓰고, 신가의 별명이 「마리」니 두란 뜻이니 리독자로 대노 「대는 고의에 마주」라 쓰고 「신가」나 「마리」를 한문으로는 「국상」 혹 「대보」라 썼으며, 「팔치」는 굉이란 뜻이니 리독자로 「패자」라 쓰고, 「발치」는 고란 뜻이니 리독자로 「평자」라 쓰고 한문으로 좌보·우보라 썼다. 우 삼자를 만일 한문으로 직역하자면 「두신」·「굉신」·「고신」이라 함이 가하나, 문자의 아관을 위하여 「대보」·「좌보」·「우보」라 하였다. 『삼한고기』·『해동고기』·『고구려고기』 등서에 혹 전자를 쫓아 대노·패자·평자라 기하고, 혹 후자를 좇아 대보·좌보·우보라 하였거늘, 김부식(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리독와 한역의 이동을 변별치 못하고, 철없는 붓으로 마구 빼고, 마구 넣고, 마구 섞고, 마구 갈랐으므로, 「좌·우보를 개하여 국상을 만들었다」 , 「패자 아무로 좌보를 삼았다」 등의 소화가 그 『사기』 중에 가끔 있다.
전국을 동·남·서·북·중 오부에 나누어 동부는 「순라」, 남부는 「불라」, 서부는 「연라」, 북부는 「줄라」, 중부는 「가우라」라 하니, 순나·관나·연나·절나·계안나는 곧 순라·불라·연라·줄라의 리독자인 바, 관나의 「관」은 의를 취하여 불(관은 고독 부을 관)으로 독할 것이요, 그 별명인 「비류나」의 「비류」는 음을 취하여 「불」로 독할 것이니, 지나사(중국사)의 「관나」는 곧 고구려의 리독자를 직접 수입한 것이거늘, 『삼국사기』에 관을 「관」으로 개하여 의의를 일렀으며, 기타의 순·연·절·계 사나는 다 음으로 쓴 것이니, 중부는 곧 신가의 관할이오. 동·남·서·북 사부는 중부에 속한 바, 각히 「라살」이란 일명의 대관을 두어 리독자로 누살이라 쓰고 한문으로 도사라 쓰니, 도사는 라살 - 곧 누살이니 도사의 「도」는 「라」의 의역이요 「사」는 음역이거늘, 신서에 「대성에는 누살을 두니, 당의 도독과 같고 여성에는 도사를 두니 당의 자사와 같다」함은 억단이다. 신가는 정권뿐 아니라 내외 병마를 전장하여 권위가 매우 중대하여 대왕과 견줄 만하나, 대왕은 세습으로 부동의 존위에 있고 신가는 매 삼년만큼 대왕과 사부 라살과 기타 중요관원들이 대회의를 열고 적당한 임무를 골라 선임하여 삼년이면 개체하고 공적이 있는 자는 계임을 허하며, 라살은 대개 세습이지만 왕왕 왕과 신가의 명령으로 파면하였다. 오부 중에 각이 오부를 나누고 부마다 또 삼상오경을 내고 관명 위에 부명을 가하여 구별하니, 이를테면 동부에 속한 순라는 순라의 순라며, 불라는 순라의 불라며, 기지도 이와 같고, 동부에 신가는 순라 신가라 칭하며, 「불라의 신가」라 칭하고, 기타도 이와 같으니라.
이밖에 「일치」라는 자는 도부와 사령을 주하니, 리독자로 「을지」 혹 「우태」라 쓰고 한문으로 주박라 쓰며, 「살치」란 자는 대왕의 시종이니, 이독자로 사자라 쓰고, 기타 중외대부·과절·부과절 등은 그 음의와 직장을 알 수 없으며, 『삼국지』·『후위서』·『양서』·『후주서』·『당서』 등서에 십이급의 관명을 재하였으나, 매양 조선어를 모르는 지나(중국) 사가들이 그 전문한 것을 역한 것인 고로, 『삼국지』에 주부 이외에 또 우태를 재함은 주부가 곧 우태의 의역임을 모르는 까닭이다. 『신·당서』에 누사 이외에 또 누살을 재함은 누사가 곧 누살의 와전임을 모르는 까닭이다. 통전에 고추가를 빈객 맡은 자라 함은 당시 고구려의 종친대관인 고추가가 외교관된 것을 보고 드디어 고추가를 외교관으로 오인한 것이며, 『구당서』에 「조의두대형이 삼년만큼 체대하다」함은 선배의 수석을 대신의 수석으로 오인한 것이니라.
제삼장 태차 양대왕의 한족구축과 고강회복
(일) 한의 국력과 동침의 차제
모본왕이 일시 요동을 회복하였음은 이미 제일장에 술하였거니와, 모본왕이 피시한 뒤에 태조가 칠세에 즉위하여 국내의 인심이 위의함으로 요서에 십성을 축하였으나, 이때에 한의 부강이 절정에 달하여 지나(중국) 유사 이래의 제일회라 할 수 있게 되었다. 명장 반초(반초)가 서역도호가 되어 금 서아세아의 차사·선선 등 국을 멸하고, 지중해에 임하여 대진-금 이태리(이탈리아)와의 신식을 통하여 백석장대의 인종과 양피지에 쓰는 행 문자의 이야기가 『후한서』에 올랐으며, 서헌(서헌)이 오천여리의 원정군을 일으켜 금 외몽고(몽골) 등지에 나아가 북흉노를 대파하여 북흉노가 흑해 부근으로 들어가 동고트족을 압박하여 서양사상에 민족 대천동의 시기를 이루고, 이로부터 이백여년의 흉노대왕 아틸라가 유럽 전부를 요난하는 원인을 만들었다. 한이 이만한 국력을 가진 때니, 어찌 요동을 고구려의 고지라 하여 영구히 양여하랴. 어찌 고구려나 선비에 영구히 이억칠천만의 치욕적 세폐를 바치고 마랴. 이에 세폐를 정지하고 경기(경기)를 보내 병을 솔하고 요하를 건너 육현을 다시 빼앗고 경기(경기)로 요동태수를 배하여 동침할 기회를 기다렸다.
(이) 왕자 수성(차대왕)의 요동회복
『후한서』에는 당시한을 침략한 중심인물을 오인하였으나, 기실 태조는 당시 고구려에 군임한 제왕일 뿐이요, 전쟁에 대하여는 거의 차대왕 - 왕자 수성(수성)의 일이다. 전쟁이 처음에는 한이 주동자가 되어 요동을 침탈하는 동시에 고구려를 침입하매, 고구려는 이를 반항하는 피동적 지위에 있었고, 그 다음에는 고구려가 주동자가 되어 요동을 회복하는 동시에 진하여 한의 변경을 잠식하며, 한이 이를 반항하는 피동적 지위에 있던바, 요동 회복의 전역은 기원 일백오년에 비롯하여 일백이일년에 맞추니, 수미가 십칠년이더라.
우 전역의 초년-기원 일백오년은 왕자 수성(수성)의 나이는 삼십사세라. 「고구려가 비록 토지의 광과 인구의 중은 한에 불급하나, 다만 고구려는 대산 심곡의 국인 고로 거수하기에 편리하여 소수의 병으로도 한의 다수의 병을 방어하기에 넉넉하며, 한은 평원 광야의 국인 고로 침입함이 용이하여, 고구려가 비록 일거에 한을 파하기는 어려우나 자주 틈을 타서 그 변경을 요난하여 이를 피폐케 한 뒤에 이를 격멸한다」하여, 수성(수성)이 드디어 장구의 침요로써 대한전쟁의 방략을 정하고 정병으로 요동에 들어가 신창·후성 등 육현을 쳐서 수병을 격파하며 재물을 약탈하고, 그 뒤에 예와 선비를 유하여 해마다 한의 우북평·어양·상곡 등지를 침략하여 한의 십칠년 동안의 인축과 재력의 모손이 비상하였다.
기원 일백이십일년 정월에 한의 안제가 고구려의 침핍함을 걱정하여 유주자사 풍환(풍환)·현토군수 요광(요광)·요동태수 채풍(채풍)을 명하여 유주 소속의 병력으로써 고구려를 치라하거늘, 수성(수성)이 이에 태조의 명을 받아 신치총사령이 되어 이천인으로써 험조에 거하여 환 등을 막고, 삼천인으로써 간도를 쫓아 요동·현토의 각군을 분소하여 환 등의 후방의 접제를 단하여, 드디어 환(환) 등을 대파하고 동년 사월에 수성(수성)이 다시 선비병 팔천으로써 요동의 요대현을 칠 새, 고구려 정병을 신창에 잠복시켰다가 요동태수 채풍(채풍)의 구병을 습격하여 채풍(채풍)과 이하 장관 백여인을 참살하고 무수한 사졸을 살상 혹 부로하여 드디어 요동군을 점령하고, 동년 십이월에 또 백제와 예의 기병 일만을 발하여 현토·낙랑 양군을 점령하여 이에 위 우거(우거)가 계의 잃었던 고토 - 조선의 고 오열홀의 전부를 완전히 회복하니, 한이 다년 전쟁에 국력이 피폐하다가 또 이 같이 대패하매, 재전할 힘이 없어, 드디어 요동을 할여하며 세폐를 다시 회복하기로 조건을 삼아 고구려에게 화를 걸하고 피부인을 속환할 새, 매명에 겸 사십필이요 소아는 이십필이더라.
요동·낙랑 등의 회복이 「태조본기」나 『후한서』에 보이지 않았으나 「당가탐전」에 가탐(가탐)의 요동낙랑 함어한건안지제라 한 말을 재한 바, 가탐(가탐)은 당대의 유일한 사이고사의 연구자인즉, 그 말이 반드시 출처가 있을 것이나, 다만 건안은 기원 일백구십육년 한헌제의 원년이니, 고구려가 중쇠한 때인즉, 건안은 곧 건광의 오요, 건광은 곧 기원 일백이십일년 한안제의 연호요, 왕자 수성(수성)이 채풍(채풍)을 참하고 한병을 파하던 때니, 이때에 고구려가 요동군 내에 가설한 현토·낙랑 등 군을 회복함이 무의하니라.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매, 금 개평현 동북 칠십리에 환도성을 축하여 서방 경영의 본영을 삼고, 국내성과 졸본성과 병칭하여 삼경이라 하였다. 환도의 위치에 대하여 후인의 쟁론이 분운하여 혹 환인현 부근 - 금 혼강 상류 금 안고성이라 하며, 혹 집안현 홍석정자산상이라 하나, 전자는 산상왕이 이설한 제이 환도요. 후자는 동천왕이 이설한 제삼의 환도니, 이는 제오편에 술하려니와, 태조의 환도는 곧 제일회의 시축한 제일환도니, 『삼국사기』 「지리지」에 「안시성 혹운 환도성」이라 하며 『삼국유사』에 「안시성 일명 안촌홀」이라 한바, 「환」은 우리말에 「알」이라 하니, 「환도」나 「안시」나 안촌은 다 「아티」로 독할 것이니, 같은 한 지방 - 금 개평 동북 칠십리의 고허됨이 명백하거늘, 후인들이 전후 삼 환도를 구별치 못하고 매양 환도를 일처에서 찾으므로 아무리 환도의 고증에 노력하나 환도의 위치는 의구히 애매하였더니라.
제삼장 차대왕의 왕위찬탈
(일) 태조의 가정의 불화
왕자 수성(수성)이 이미 요동을 회복하고 한의 세폐를 받음에, 태조 그 공을 상하여 신가를 배하여 군국대사를 총임하여 이에 위권이 일신에 집하고 성망이 천하에 떨치니, 수성(수성)이 만일 이 성망을 이용하여 나아가 요서를 쳤으면 삼조선의 서북고강을 전부 회복하기가 용이하였겠지만, 그러나 수성(수성)이 가정에 대한 불평이 공명에 대한 열심을 감살하여, 이에 요동 회복의 익일에 한의 걸화를 허락(전장에 보임)하고 귀국하더라.
가정에 대한 불화는 무엇이뇨. 수성(수성)은 태조의 서자요, 막근(막근)·막덕(막덕) 형제가 태조의 적자임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막근(막근)은 고구려 왕실의 가법에 의하여 왕위를 상속할 권리가 있고, 수성(수성)은 그 혁혁한 무공에 의하여 또한 태자됨을 희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수성(수성)이 요동의 역을 마치고 홀급히 돌아와 원정의 념을 끊고, 밖으로는 정사에 근로하며 현신 목도루(목도루)·고복장(고복장)을 인용하여 팔치와 발치를 삼아 인망을 거두며, 안으로는 사당을 길러 태자의 위를 얻기를 도모하니, 불라(비류나) 일치 미유(미유)와 환나 일치 어지류(어지류)와 불라 조의(당지의 「선배」 령수가 수성(수성)의 뜻을 알고, 이에 도부하여 태자위의 찬탈을 밀모하더라. 그런데 태조는 수성(수성)으로 태자를 삼으려 하나 가법에 걸리고, 막근(막근)으로 태자를 삼으려 하나 수성(수성)에게 걸리어, 오랫동안 태자를 세우지 못하더라. 수성(수성)이 전정한 지 십여년에 태자의 위를 어찌 못하여 원망의 색이 이따금 얼굴에 보이며 모의의 적이 때때로 외간에 드러나니, 막근(막근)이 태자의 위를 빼앗길 뿐 아니라, 또는 수성(수성)에게 죽을까 구하나 병권도 없고, 또 위망이 수성(수성)에게 불급함으로 그 대항할 방책이 오직 태조의 마음을 돌림에 있음을 깨달았다.
이때에 고구려 신수두에 신단의 무사는 비록 부여와 같이 정권을 가지지는 못하였으나 복술로써 남의 길흉화복을 예언한다 칭하여, 일반의 신앙을 받아 귀천의 계급을 물문하고 일체의 의난을 무사에게 결정을 구하는 때라. 막근(막근)이 무사에게 뢰하여 도움을 걸하더니, 기원 일백사십이년에 환도성에 지진이 나고, 또 태조의 꿈에 표범이 범의 꼬리를 물어 끊는 것을 본지라. 태조가 마음이 좋지 못하여 무사를 불러 꿈을 풀어 달라 한즉, 무사가 이를 수성(수성)을 참소할 기회로 알고 「범은 백근의 어른이요 표범은 범의 작은 씨요, 범의 꼬리는 범의 뒤니, 아마 대왕의 작은 씨가 대왕의 뒤(후예란 말)를 끊으려 하는 자 있어 꿈이 이러한가 합니다」 하여 슬그머니 서자 수성(수성)이 적자 막근(막근)을 해하리라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태조가 수성(수성)을 사랑하는 마음에 어찌 거연히 무사의 말에 기울어지랴. 다시 불치 고복장(고복장)을 불러 물으니, 고복장(고복장)은 수성(수성)의 당은 아니지만, 아직 수성(수성)의 음모를 모름으로, 「선을 하면 온 복이 내리고 불선을 하면 온 화가 이르니, 대왕이 나라를 집 같이 걱정하시고 백성을 아들 같이 사랑하시면, 비록 재이와 악몽이 있을지라도 무슨 화가 되리잇가」 하여 무사의 말을 반대하여 태조의 마음을 위안하더라.
(이) 수성의 음모와 태조의 선위
수성(수성)이 사십년 동안이나 정권을 장악하여 위복을 전천하며, 매양 막근(막근)을 살해하여 왕위 상속의 권을 빼앗으려 하나, 다만 태조가 이미 연로하였으므로 그 붕서함을 기다려 일을 행하려 하며, 태조는 양간의 감정을 조화하여 자기백세 후에도 아무 변란이 없도록 한 뒤에 태자를 봉하려 하여 긴 세월을 경과하여 왔다.
기원 일백사십육년은 태조가 재위한 지 구십사년이요, 수가 만백세되는 경년이니, 수성(수성)도 이때에 나이 칠십육이라. 수성(수성)이 백세 노인인 태조의 건강함을 보고 혹 자기가 태조보다 먼저 죽어 왕위가 막근(막근)에게 속할까 하여, 동년 칠월에 왜산(연혁 미상)에서 사냥하다가 석양을 돌아보며 탄식하니, 좌우가 그 뜻을 알고 모두 그 힘을 다하여 왕자의 뒤를 따라 행동할 것을 맹서하나, 그 중 일인이 홀로 가로되 「대왕이 성명하사 인민이 애대하거늘, 왕자가 좌우의 소인을 데리고 성명한 대왕을 폐하려 함은 일선의 사로써 만근의 중을 인함과 같을 뿐이다. 만일 왕자께서 생각을 고쳐 효도로써 대왕을 섬기면 대왕이 반드시 왕자의 선을 알아 읍양하실 마음이 있을 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대화가 있으리라」하여 반대하더라. 수성(수성)이 이를 듣기 싫어하니, 좌우가 수성(수성)을 위하여 그를 살해하고 음모가 더욱 급하더니, 고복장(고복장)이 그 눈치를 알고 태조에게 들어가 고하여 수성(수성)을 주함을 청하더라. 태조가 이에 「인신의 부귀」로는 수성(수성)의 마음을 달래지 못할 줄을 깨달았으나, 차마 죽이지 못하여 고복장(고복장)의 청을 거절하고, 수성(수성)에게 왕위를 선하고 별궁으로 퇴거하니, 수성(수성)이 입하여 차대왕이라 호하더라.
고구려본기 태조 팔십년에 「재보패자 목도루지수성유이지 칭질불사」라 기하고, 차대왕 이년에 「좌보 목도루 칭질퇴로」라 기하였으니, 이에 이미 십오년 전에 칭질불사한 목도루가 어찌 십오년 후 차대왕 이년에 또 칭질퇴로할 수 있으랴. 김부식(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각종 고기에 취하여 아무 선택 없이 잡취하였음이 이 같이 심하도다. 하물며 좌보나 패자가 다 팔치의 역이어늘, 좌보·패자라는 겹말의 명사를 문자에 올리었으니, 어찌 가소한 일이 아니냐.
또 「태조본기」에 구십사년 팔월 「왕견장 습요동서안평 살대방령 약득낙랑태수처자」주16)라 한 바, 이는 『후한서』에 「질환지간 고구려왕백고 복범요동서안평 살대방령 약득낙랑태수처자」주17)란 본문을 초록한 것이다. 질환지간은 질제와 환제의 간을 가리킨 것이니, 질제와 환제의 간은 태조 구십사년인 고로 김부식(김부식)이 이것을 본년에 초입한 것이며, 백고(백고)는 신대왕의 명이니 이때는 신대왕 원년 전 이십년인 고로, 김부식(김부식)이 「고구려왕백고」란 육자를 「견장」으로 고친 것이다. 그러나 이때 태조의 가정에 차대왕과 막근(막근)의 상쟁으로 인하여 외사를 물을 사이가 없는 때인즉, 『후한서』의 질환지간은 환영지간 - 환제와 영제의 간 - 신대왕 때로 개정함이 가하거늘, 김씨가 이를 태조 구십사년의 일로 초입함이 벌써 망작임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정녕하게 달까지 박아 「팔월」이라 함은 하거이뇨? 김(김부식)씨 『삼국사기』에 내외의 기록을 초취할 때 만일 모호한 곳이면 아무 근거없이 연월을 자정하고 자구를 가감한 것이 많으니라.
제사장 차대왕의 피살과 명임답부의 전권
(일) 차대왕의 이십년 전제
차대왕이 태조의 선위를 받아 이십년 동안 고구려에 군임하여 전제를 행하다가 연나조의 명임답부(명림답부)에게 피시되었다. 그러나 차대왕본기가 간략 소루하여 그 전제한 정도의 고저와 피시한 원인의 무엇임을 알기 어렵다. 이에 「본기」의 전문을 여기에 역재한 뒤에 일론코저 하노라.
차대왕의 휘는 수성(수성)이니, 태조대왕의 동모제(동모제 삼자는 서자로 개정할 것) 용장하고 위엄이 있으나 인자가 적더라. 태조대왕의 추양을 얻어 위에 즉하니, 년이 칠십육이더라.
이년 춘정월에 관나패자 미유(미유)를 배하여 우보를 삼다. 삼월에 우보 고복장(고복장)을 주하다. 고복장(고복장)이 사할 때에 가로되, 통재라. 원호여. 아가 당시에 선조 근신이 되어 어찌 적란의 인을 보고 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선군이 나의 말을 듣지 아니하여 여기에 이르렀거니와, 금군이 대위에 올라 마땅히 정과 교를 새로이 하여 백성에게 시할지어늘, 이제 불의로써 충신을 살하니, 내가 무도의 세에 살진대 죽음이 낫다 하고 형에 즉하니, 원근이 이를 듣고 분한치 않는 이가 없더라. 추칠월에 좌보 목도루(목도루)가 질을 칭하여 퇴로하거늘, 환나(연나로 개함이 가함) 우태어지류(우태어지류)로 좌보를 삼아 작을 가하여 대왕부를 삼다. 동십월에 비류나조의 양신(양신)으로 중외대부를 삼아 작을 가하여 우태를 삼다. 이상은 다 왕의 고구러라. 십일월에 지진하다
삼년 하사월에 왕이 누구를 시키어 태조대왕의 원자 막근(막근)을 죽이니, 기제 막덕(막덕)이 화가 연급할까 공하여 자액하다. 추칠월에 왕이 평유원에서 사냥하다가 백호가 따라 오며 울거늘, 왕이 이를 사하나 맞지 않더라. 왕이 무사에게 물은데 무사 가로되 호는 요수니 길상이 아닌데 하물며 백색의 호니, 더욱 괴변이니이다. 그러나 천제께서 인군에게 순순히 면고치 못함으로 요괴를 보임은 인군더러 공구하여 수성하라 함이니, 왕이 만일 덕을 닦으시면 화를 전하여 복을 만들 수 있습니다. 왕이 가로되 흉이면 흉할 뿐이요 길이면 길할 뿐이거늘, 이제 임이 흉하다 하고, 또 길하다 하니 어찌 속이는 말이 아니냐 하고 드디어 무사를 베더라.
사년 하사월 정묘 회에 일식하다. 오월에 오성이 동방에 취하다. 일관이 왕의 노를 외하여 무하여 가로되 「이는 군의 덕이요 국의 복이니이다.」 하니 왕이 대희하다. 동십이월에 빙이 없었다.
팔년 하육월에 적상하다. 동십이월에 뇌하고 지진하다. 회에 객성이 월에 범하다.
십삼년 춘이월에 성이 북두에 패하다. 하오월 갑술 회에 일식하다.
이십년 춘정월에 일식하다. 삼월에 태조가 별궁에서 귁기니(죽으니) 년이 백십구세더라. 동십월 연나조의 명임답부(명림답부)가 민의 불인을 인하여 왕을 시하고 호를 차대왕이라 하다.
운운한 것이 차대왕본기의 전부이다.
최말절에 「명임답부가 불인을 인하여 왕을 시하여」라 하였으나, 그 이상의 기사를 소고하면 차대왕이 인민에게 불인케 한 정사가 하나도 없다. 고복장(고복장)은 차대왕의 음모를 고발하던 자인 고로 살한 것이며, 목도루(목도루)는 차대왕과 막근(막근)의 중간에서 애매한 태도를 가지던 자인 고로 축한 것이며, 무사는 태조의 꿈을 야릇하게 풀어 차대왕을 해하려던 자인 고로 살한 것이며, 막근(막근) 형제는 차대왕과 상대되던 구적인 고로 살한 것이니, 이것을 아무리 참혹불인이라 할지라도 사원의 보복이요 인민에게는 이해관계가 없는 일일뿐더러, 또 이것이 모두 차대왕 이년 내지 삼년간의 일인즉, 십팔년 후 차대왕 이십년에 반란한 명임답부의 유일한 구실이 될 수 없으며, 그 이외의 기사는 일식 지진 성변 등 뿐이니, 이 같은 천문지리의 변화는 차대왕의 정치 선악의 관계없는 일인즉, 이로써 인민에게 불인하게 한 증거를 삼을 수 없다.
그러면 차대왕이 패망하고 명임답부(명림답부)가 성공한 원인이 어디 있느뇨? 차대왕이 패한 뒤에 좌보 어지류(어지류)가 군공으로 더불어 차대왕제인 백고(백고) 신대왕에게 권진한바, 어지류(어지류)는 처음부터 차대왕을 도와 왕위 찬탈을 계획하던 죄괴요 그 군공은 대개 미유(미유)·양신(양신) 등일 것이니, 이로 미루어보면 차대왕의 패망은 곧 사당의 이반으로 인한 것일 것이다. 차대왕 즉위 이전 십여년 동안에 차대왕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왕위 찬탈을 계획하던 사당들이 도리어, 차대왕과 이십년 동안 부귀를 누리다가 일조에 이반함은 하고이냐? 이는 그 원인을 찾기 쉬운 자이다.
고구려는 원래 일인전제의 국이 아니라 벌족공치의 국이니, 국가의 기밀대사는 왕이 전결치 못하고 왕과 오부의 대관들이 대회의의 결정으로 행하며, 형살 같은 것도 회의의 결정을 밟아서 행하는 자라. 차대왕은 부왕을 수하며 당시 신앙의 중심인 무사를 살하는 자로서 비록 어지류(어지류) 등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왕위에 오른 뒤에는 이 무리를 안중에 두지 않고 군권의 유일함을 주장하여 매사를 전단으로 독행함으로, 연나의 선배, 령수 명임답부(명림답부)가 그 본부의 선배로써 외반하고 어지류(어지류) 등이 내응하여, 태조의 붕서한 뒤를 기회하여 차대왕을 습살하고 벌족공치의 국을 회복한 것이니라.
혹자는 명임답부(명림답부)를 조선사상에 제일차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라 하나, 혁명은 반드시 역사상 진화의 의의를 가진 변동을 칭하는 자니, 벌족공치를 회복한 반란이 어찌 혁명이 되리오. 명임답부(명림답부)는 일시 정권양탈의 효웅이라 함은 가하나 혁명가라 함은 불가하니라.
(이) 명임답부의 전권과 외정
명임답부(명립답부)가 이에 차대왕을 죽이고, 차대왕 당년에 해를 피하여 산곡에 잠둔하여 있던 백고(백고)를 세워 신대왕이라 호하고, 사령을 국내에 내려 차대왕의 태자 추안(추안)까지 사하여 양국군을 봉하고 차대왕의 준엄한 형법을 폐하니, 국인이 크게 열복하더라. 명임답부(명립답부)가 이에 신가가 되어 군국 대소사를 모두 통할하고 팔치와 발치를 겸임하며 예·양 제맥의 부장을 병령하니, 그 위권이 태조 때 왕자 수성(수성)보다 지나더라. 「본기」에는 명임답부(명림답부)가 국상으로 패자를 겸하다』 하고, 또 「재·우보를 개하여 국상을 삼음이 이때에 시하다. 이는 일 국상이 곧 신가인지 모르며 패자가 팔치 곧 좌보인지 모르고 건방지게 내린 주해니라.」
태조 때 한이 요동을 금 란주에 이설함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기원 일백육십구년에 한이 요동을 회복하려 하여, 경임(경림)으로 현토태수를 배하고 대거하여 침입하거늘, 답부(답부)가 군신들과 신대왕의 어전에 회의를 열고 전수의 편의를 논할 새, 다 출전을 주장하나 답부(답부)가 써하되, 아는 병중은 소하나 지리의 험조를 가졌고, 한은 병중이 다하나 운량의 간난이 있으니, 아가 먼저 수하여 한의 병력을 태케 한 뒤에 출전하면 백전백승할 방략이라 하여 선수후전으로 책을 정하여 각주군에 명하여 인민과 량미와 축류를 거두어 성진 혹 산보로 들게 하고 고수하더니, 한병이 침입한 지 누삭에 약하나 소득이 없고 전하려 하나 응치 아니함으로 군량이 다하여 기피하여 퇴군하거늘, 명임답부(명림답부)가 좌원까지 추격하여 한병이 척인필마로 돌아감을 어찌 못하더라. 명임답부(명림답부)가 이에 한의 구병을 파하매, 이에 강토를 개척하랴 할 새, 먼저 선비 명왕 단석괴(단석괴)를 유하여 한의 유·병 이주 금 직예·산서 양성를 침요케 하고, 그 뒤를 이어 고구려의 병으로 한을 벌하려 하다가 병졸하니, 년이 일백십삼세라. 신대왕이 친임하여 통곡하고 왕장의 예로 장하더라.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에 신대왕 사년(기원 일백오십오년)에 「한 현토태수 경임(경림)이 래침하여 아병 수백인을 살하거늘, 왕이 강하여 현토에 걸속한다」 하고 신대왕 오년(기원 일백오십육년)에 「왕이 주부 연인(연인)과 대가 우거(우거)를 보내 … 요동태수 공손도(공손탁)을 도와 부산적을 치라」 하고 팔년(기원 일칠이)에 「한 이 대병으로 아에 향하거늘 … 답부(답부)가 좌원에서 추격하여 이를 대파하여 한군이 필마도 불반하다」한 바, 전 이조는 『후한서』와 『삼국지』에서 후 일조는 고기에서, 초록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사략』에는 「신대왕 오년에 한 현토태수 경임(경림)이 대병으로 래침하거늘 … 명임답부(명림답부)가 좌원에서 대파하여 …」한 바, 그 연조가 『후한서』 「영제 건녕 이년 현토태수 경임 … 백고강」함과 부합한즉, 경임(경림)의 구병이 명임답부(명림답부)에게 패함이 명백하거든, 김부식(김부식)이 이를 양회의 사실로 오분하여 (일)은 신대왕 사년, 우 (일)은 신대왕 팔년의 조하에 기한 것이며, 공손도(공손탁)은 『삼국지』에 거하면 한헌제 영평 원년에 비로소 요동태수가 된 바, 영평 원년은 기원 일백구십년이오, 신대왕 오년 후 이십년인즉 신대왕이 이십년 후 요동태수 공손도(공손탁)을 도울 수 없음이 또한 명백하거늘,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 김부식(김부식)이 그대로 신대왕본기 중에 오재한 것이다. 그러나 패주한 경임(경림)을 대첩으로 기하며 연대도 닿지 않는 공손도(공손탁)을 신대왕의 종주국으로 기하였으니, 이런 곳에서 지나사의 무필이 많음을 볼 것이니라. 동국통감에는 「현토태수 경임(경림)이 래침하다가 명임답부(명림답부)에게 패한 것」을 신대왕 팔년일로 기하여 또 조선사략과 다르다. 대개 이조(조선) 초엽에는 삼한고기·해동고기 등 수종이 있어 『삼국사기』 이외에도 참고할 만한 서적이 더러 있던 중 고기가 이동이 있는 까닭이니라.
제오장 을파소의 상업
(일) 왕후의 간정과 좌가려의 난
기원 일백칠십구년에 신대왕이 죽고 고국천왕이 즉위하여는 왕후 우씨 - 연나 우소(우소)의 녀가 절대의 자색으로 왕의 총애를 받아, 후의 친척 어비류(어비류)는 「팔치」가 되고, 좌가려(좌가려)는 「불치」가 되여 정권전천할 새, 그 자제들이 교폭하여 남의 처녀를 빼앗아 비첩을 삼으며, 자질을 잡아 노복을 만들며, 남의 양전미택을 빼앗아 소유를 만들어 국인이 원방하는 자 많거늘, 왕이 이를 살펴 알고 죄를 가하려 하더니, 좌가려(좌가려) 등이 드디어 연나부로써 반하더라.
왕이 기내 병마를 모집하여 이를 토평하고, 이에 후족의 간정을 징계하여 사부 대신을 조하여 가로되, 「근자에 관을 총으로써 수하고 위를 덕으로써 진치 못하여 덕이 백성에 류하여 왕실을 동하였으니, 이는 다 나의 불명한 소치니 여사부는 각기 하에 재한 현량을 거천하라」 하니 사부가 협의하여 동부 안류(안류)로써 조에 응하더라.
(이) 을파소의 등용
고국천왕이 안류(안류)를 써 국정을 맡기려 하니 안류(안류)가 「자기의 재능이 대임을 응할 수 없다」 하여 서압록곡 처사 을파소(을파소)를 천하더라. 을파소(을파소)는 유류왕조에 대신 을소(을소)의 후손이니, 고금의 치란에 익으며 민간의 이폐를 잘 알며 학식이 넉넉하나 세속에 아는 자가 없으므로, 초야에 처하여 밭을 갈아 생애하고 벼슬할 뜻이 없더니, 고국천왕이 비사후례로 맞아 스승의 례로 대하며 중외대부를 삼아 일치의 작을 가하고 가르침을 청하더라. 을파소(을파소)가 그 받은 바 관작이 오히려 자기의 포부를 펼 수 없으므로 고사하고 다시 현능을 구하여 고위를 주어 대업을 성취함을 청하니, 왕이 그 뜻을 알고 을파소(을파소)로 신가를 배하여 백관의 상에 거하여 국정을 처리케 하더라. 군신들이 을파소(을파소)가 초야한미한 처사로서 일조에 고위에 처함을 샘하여 비난이 자자하거늘, 왕이 조를 하하여 가로되 “만일 「신가」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족멸하리라” 하고 더욱 파소를 신임하니, 파소 제우에 감격하여 지성으로 국정을 임하여 상벌을 삼가며 정령을 밝히어 국내가 대치하여 고구려 구백년간 제일 현상으로 칭하더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에 「고국천왕(혹운 국양) 휘은 남무[남무)(혹운 이이모(이이모)] 신대왕백고지제이자 백고훙 국인이장자발기불초 공립이이모위왕 한헌제건안초 발기원위형불득립 여소노가각장하호삼만여구 예공손강강 환주비류수상」이라 하였으나, 이는 김부식(김부식)이 『삼국지』 「고구려전」 에 본문을 초록한 것인 바, 발기(발기)는 곧 「상산왕본기」 가운데의 발기(발기)요 이이모(이이모)는 곧 상산왕 연우(연우)니, 『삼국지』 작자가 발기(발기), 연우(연우) 양인을 신대왕의 자로 오전함이거늘, 김씨가 경신하여 고국천왕 남무(남무)를 곧 이이모(이이모)라 하며 남무(남무)를 곧 발기(발기)의 제다 하였으니 일오요. 『삼국지』 「공손도전」 에 거하면 공손강(공손강)의 부 공손도(공손탁)이 한헌제 초평 원년에 요동태수가 되어 건안 구년에 사하고 공손강(공손강)이 사위한 바, 한헌제 초평 원년은 고국천왕 십이년 경이니, 고국천왕 즉위 초에는 공손강(공손강)은 그만두고 그 부 공손도(공손탁)도 아직 요동태수를 꿈꾸지 못한 때거늘, 김씨가 이를 고국천왕 즉위 원년의 기사로 적었으니 재오이다. 전술한 바 신대왕 오년에 「조공손도 토부산적」의 문을 합하여 보면 김씨가 곧 공손도(공손탁)을 하시의 인인줄 모르는듯하니 또한 기괴하다.
제오편 고구려의 중쇠와 북부여의 멸망
제일장 고구려 대지나(중국)의 전패
(일) 발기의 반란과 제일 환도 - 금 개평의 잔파
기원 일백구십칠년에 고국천왕이 죽고 사속이 없었다. 왕후 우씨가 좌가려(좌가려)의 난 이후로 정치에 입을 벌리지 못하고 답답하게 궁위에 처하여 있다가, 왕이 죽으매 정치무대에 재현할 열망을 쌓아둔 나머지에 애통보다 희열이 많아 상사를 휘닉하여 발표치 아니하고, 그 밤에 미복을 입고 비밀히 왕의 장제 발기(발기)의 집에 찾아가, 발기(발기)를 보고 「대왕은 사자가 없으니 그대가 후계될 자가 아니냐.」고 홀리는 말을 드리더라. 그러나 발기(발기)는 순나의 고추가로 환도성간을 겸하여 요동 전토를 관리하여 위권이 혁혁할뿐더러, 또는 고국천왕이 돌아가면 왕위를 사할 권리가 당당한 고로, 우씨의 말을 새겨듣지 않고 엄정한 어조로 우씨를 책하여 가로되 「왕위는 천명이니 부인의 물을 바가 아니며, 부인의 야행은 례가 아니니 왕후의 할 일이 아니라」 하더라. 우씨가 크게 참분하여 그 길로 곧 왕의 제이제 연우(연우)를 찾아가, 왕의 죽음과 발기(발기)를 찾아갔다가 핀잔 본 경과를 낱낱이 호소하니, 연우(연우)가 크게 기뻐하여 우씨를 맞아드리어 야연을 베풀고 연우(연우)가 친히 고기를 베다가 손가락을 다친지라. 우씨가 치마끈을 끊어 싸주고 함께 손목을 잡고 입궁하여 동숙하고, 익일에 고국천왕의 상사를 발표하는 동시에 왕의 유조를 꾸며, 연우(연우)로 왕의 후계를 삼아 즉위하더라.
발기(발기)가 연우(연우)의 왕됨을 듣고 대노하여 격문을 발하여 연우(연우)가 우씨를 밀통하여 차례를 건너뛰어 왕위를 참하는 죄를 폭백하고, 순나병을 발하여 왕궁을 원공하다가 격전한 지 삼일에 국인들이 발기(발기)를 돕는 자가 없으므로 패하여, 순나 하호 삼만을 거느리고 요동 전토를 들어 한 요동태수 공손도(공손탁)에게 투강하여 구원을 청하더라. 공손도(공손탁)은 한말의 효웅이니, 기원 일백구십년에 한의 난조를 보고 요동태수됨을 구하여 요동에서 왕함을 꿈꾸나, 이때 요동의 본토는 차대왕의 점령한 뒤이므로 고구려의 소유요, 한의 요동은 금 란주에 이설하여 토지가 매우 협소하여 공손도(공손탁)이 항상 고구려의 요동을 엿보더니, 밋(이윽고) 발기(발기)의 강을 받음에 대희하여 드디어 정병 삼만을 발하여 발기(발기) 강병으로써 선봉을 삼아 고구려에 침입하여 차대왕의 북벌군의 대본영이던 환도성 - 제일 환도에 들어 읍락 소탕하고, 비류강으로 향하여 졸본성을 공하거늘, 연우왕이 왕제 계수(계수)로써 신치 「전군총사령」을 삼아 거전하여 한병을 대파하여 좌원까지 추격하니, 발기(발기)가 군급하여 계수(계수)를 돌아보며, 계수(계수)야 네가 차마 너의 장형을 죽이려느냐? 불의한 연우(연우)를 위하여 너의 장형을 죽이려느냐 한다. 계수(계수)가 가로되, 연우(연우)가 비록 불의하나, 너는 외국에 강복하여 외국병을 끌어 조상 부모의 강토를 유린하니 연우(연우)보다도 더 불의하지 않으냐? 하니 발기(발기)가 크게 참회하여 배천(곧 비류강)에 이르러 자살하더라.
발기(발기)가 일시의 분을 참지 못하여 매국의 죄를 지었으나, 계수(계수)의 일언에 량심이 회복하여 자살함에 이르렀으나 그 매도한 오열홀 - 요동은 회복하지 못하여 공손도(공손탁)의 소유가 되어, 공손도(공손탁)이 드디어 요동왕이라 자칭하고 전요를 나누어 요동·요중·요서 삼군을 만들고, 바다를 건너 동래 제군(금 연태 등지)를 점령하여 일시에 강위를 자랑하더라.
연우왕은 이에 금 환인현 혼강 상류-령안고성에 환도성을 이설하고 그 곳으로 천도하니, 이는 곧 제이 환도더라.
(이) 동천왕의 제일 환도 회복에 경영(오·위 통지의 전말)
연우왕이 형수 우씨의 손에 왕위를 얻고 우씨로 왕후를 삼더니, 미기에 우씨 연로함을 싫어하여 주통촌에 미처녀 - 후녀(명)를 잠취하여 소후를 삼아 동천왕을 낳았다.
기원 이백이십칠년에 연우왕이 죽고 동천왕이 사위하니, 이때에 지나(중국)가 사대 세력으로 나뉘었으니, (일)은 위의 조씨니, 업-금 직예성 업현에 도하여 금 양자강 이북을 소유하고, (이)는 오의 손씨니, 건업-금 강소성 남경에 도하여 양자강 이남을 소유하고, (삼)은 촉의 유씨니, 성도-금 사천성 성도에 도하여 금 사천성을 소유하고, (사)는 요동의 공손씨니, 양평-금 요양에 도하여 금 란하 이동과 요동반도를 소유한지라. 고구려가 공손씨와는 적국이요, 촉과는 도로가 격원하여 교통이 될 수 없거니와 위·오 양국과도 왕래가 없더니, 기원 이백삼십삼년에 공손연(공손연)(도의 손)이 간계로써 위·오 양국의 사이에서 이익을 취코저 하여, 오제 손권(손권)에게 견사하여 표를 올리고 신이라 칭하며 위를 공공함을 청한즉, 손권(손권)이 대희하여 사신 허미(허미) 등으로 하여금 수천병을 거느려 공손연(공손연)에게 보내거늘, 공손연(공손연)이 허미(허미)로써 위를 교하는 미끼를 삼으려 하여, 먼저 허미(허미)의 보호장사 진조(진조) 등 육십여인을 잡아 현토군 - 금 봉천성성에 가두어 죽이려 하였다. 진조(진조) 등이 성을 넘어 도망하여 고구려로 들어가 속여 가로되, 「오제 손권(손권)이 고구려 대왕에게 올리는 공물이 적지 않으며, 또 고구려와 맹약하여 공손연(공손연)을 쳐 그 토지를 나누자는 도서도 있었더니, 불행히 해선이 대풍을 만나 해로에 방향을 잃어 요동의 해안에 도착하여, 공손연(공손연)의 관리에 수탐한 바 되어 공물과 도서는 다 빼앗기고, 일행이 다 포착되어 유수되었다가 다행히 틈을 얻어 호구를 벗어나 이에 이르렀더이다」 하므로 동천왕이 대희하여 진조(진조) 등을 불러 보고, 인하여 조의 이십오인에게 명하여 해로로 진조(진조) 등 일행을 호송할 때, 초피 천장과 둔계피(갈계피) 십패로 손권(손권)에게 증여하고, 고구려의 육군과 오의 수군으로 공손연(공손연)을 공멸할 조약을 체결하니라. 익 삼년에 손권(손권)이 사굉(사굉)·진굉(진굉) 등을 사하여 다수한 의복과 진보로써 공납하거늘, 동천왕이 또 일치-주부-착자(책자)·대고(대고) 등을 보내어 약간의 예물로 답사하더니, 착자(책자)가 오에 이르러, 「(일) 오의 수군이 취약하여 해로로 공손연(공손연)을 습할 수 없는데, 오가 다만 허성으로 자랑하여 고구려에 후한 증물을 받자하며, (이) 손권(손권)이 고구려를 볼 때에는 비록 공근하나, 그 내용으로 그 국내에 선포할 때에는 동이를 정복하여 그 사자가 입공하였다」하여, 비실의 구어로 그 신민을 속임을 발견하고 돌아와 진문하였다.
동천왕이 이를 듣고 대노하여 위제 조예(조예)에게 밀사를 보내, 고구려와 위가 대오·대요동에 공수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가 요동을 치거든 위가 육군으로써 고구려를 돕고, 위가 오를 치거든 고구려가 예의 수군으로써 위를 도와, 이미 양적을 멸한 뒤에 요동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오는 위가 차지하기로 하고, 그 익년에 오사자 호위(호위)가 고구려에 오거늘, 그 머리를 끊어 위에 보내, 이에 고·위 양국의 교제가 매우 잦으니라.
(삼) 공손연의 멸망과 고·위 양국의 충돌
기원 이백삼십칠년에 동천왕이 신가 명임어수(명림어수)와 일치 착자(책자)·대고(대고) 등을 보내어 수만병을 발하여 양수로 나아가 공손연(공손연)을 칠 새, 위는 유주자사 관구검(관구검)에게 명하여, 또한 수만 병으로써 요수로 나오니, 공손연(공손연)이 곽흔(곽흔)·유포(유포) 등을 보내어 고구려를 막고 비연(비연)·양조(양조) 등을 보내어 위를 막더라. 미구에 위병은 패환하고, 공손연(공손연)은 이에 연왕이라 칭하여 천자의 위의를 쓰며 전력을 다하여 고구려를 막더니, 익년에 위가 태위 사마의(사마의)를 보내어 십만병을 발하여, 먼저 관구검(관구검)으로 하여금 요대를 쳐 연의 수장 비연(비연)·양조(양조) 등과 상지케 하고, 사마의(사마의)는 가만히 북으로 진군하여 드디어 공손연(공손연)의 서울인 양평을 돌위하더라. 공손연(공손연)의 정병이 다 고구려 방어를 위하여 양수에 출진하고 양평이 공허하므로 비연(비연) 등이 환구하다가 대패하고, 공손연(공손연)이 성중에서 피위한 지 삼십여일에 기아하여 중위를 충출하려다가 금참한 바 되니, 공손씨가 요동을 거한 지 무릇 삼세 오십년만에 망하니라. 대개 위가 이렇게 공손씨를 용이히 멸함은 고구려가 공손연(공손연)의 후방을 견제한 까닭이거늘, 겨우 『삼국지』 「동이열전」 에 「태위사마선왕 솔중 토공손연(공손연) 궁견주부대가 장수천인조군」이란 기사이외에 「위명제본기」나 「공손도전」에는 일자도 제급하지 아니하였다.
이는 피의 사가의 고유한 상내략외의 필법을 지킴이거니와, 「고구려본기」에는 「위유[견]사마선왕 토공손연(공손연) 왕견주부대가 장일천인 조군」주18)』이라 한바, 사마의(사마의)를 사마선왕이라 함을 보면, 『삼국지』 「동이열전」 의 본문을 그대로 초록하였음이 명백한데 수천인을 개하여 일천인이라 함은 하고인가? 이제 피아사의 사실에 관한 기록 시말을 참작하여 상과 같이 정리하니라.
위가 이미 공손연(공손연)을 멸하고 요동의 전부를 강함에, 고구려에 대한 맹약을 배하여 편토를 고구려에 돌리지 아니하므로, 동천왕이 노하여 자주 병을 발하여 위를 토벌하여 서안평을 함락하니라. 서안평은 전사에 금 압록강 입해구라 하니, 이는 『한서』 「지리지」 를 거함이나 공손연(공손연) 성시에 고구려와 오·위의 교통이 매양 서안한서평으로 말미암아 해로로 되었은즉, 이때의 서안평은 대개 양수 부근됨이 가하니라. 고대의 지명은 매양 천이가 잦았느니라.
(사) 관구검(관구검) 입구와 제이 환도 - 금 령안고성 함락
기원 이백사십오년 경에 위가 동천왕의 자주 침입함을 걱정하여 유주자사 관구검(관구검)을 보내어 수만병으로 입구하거늘, 왕이 비류수에서 영전하여 관구검(관구검)을 대파하여 삼천여 병을 참하고 양맥곡까지 추격하여, 또 삼천여명을 참하고 왕이 써하되, 「위의 다수병이 아의 소수병만 못하다.」 하고, 이에 제장은 다 후방에서 관전케 하고 왕이 몸소 철기 오천을 거느리어 진격하더니, 관구검(관구검) 등이 아병의 소수임을 보고 죽도록 혈전하여 자꾸 전진하므로 왕병이 퇴각하니, 후군이 경궤하여 드디어 참패하여 상자가 일만팔천인을 출한지라. 왕이 천여기로 압록원으로 달아나니, 관구검(관구검)이 드디어 환도에 들어와 궁실과 민거를 소탕하며, 역대의 문헌을 실어 위국으로 보내고, 장군 왕반(왕기, 왕기)로 하여금 왕을 추하거늘, 왕이 죽령에 이르러서는 제장이 다 분산하고 오직 동부 밀우(밀우)가 시위하였더라. 추병이 박진하여 형세 매우 위급하므로 밀우(밀우)가 결사대를 뽑아 위병과 싸우고, 왕은 그 틈을 타 도망하여 산곡에 들어가 산졸을 거두어 험조를 보수하고, 군중에 령을 내리어 밀우(밀우)를 살리어 오는 자는 중상하리라 하니, 남부 유옥구(유옥구)가 령에 응하여 전지에 가 밀우(밀우)가 기진하여 땅에 엎드러짐을 보고 업고 돌아와, 왕이 다리살을 밀우(밀우)에게 베어 먹여 량구에 깨어나거늘, 왕이 이에 밀우(밀우) 등과 함께 남갈사로 달아나더라.
그러나 위병의 추격은 아직 멀지 아니하므로 북부 뉴유(유유)가 「이 같이 국가흥망이 달린 판에 험을 모치 아니하면 위국을 돌릴 수 없다」 하여, 이에 식물을 갖추어 위군 중에 들어가 거짓 강서를 바쳐 가로되, 「과군이 대국에 득죄하여 해빈에 이르러, 다시 더 갈 곳이 없으므로 강을 걸하며 먼저 많지 않은 토물로 군중에 호공하노라」 하니, 위장이 접견하거늘, 뉴유(유유)가 식기 중에 감추었던 칼을 빼어 위장을 찔러 죽이고, 왕은 장사를 명하여 위군을 충격하니, 위군이 궤란하여 다시 진을 이루지 못하고 요동의 낙랑으로 퇴주하더라.
우의 전역에 대한 기사는 김부식(김부식)이 『삼국지』와 『고기』를 잡채하여 「고구려본기」에 넣었으므로 상하문의 기사가 서로 모순되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일), 「관구검(관구검)이 병 만인으로써 고구려를 침하다」 하고 「왕이 보기 이만인으로 역전하다」 하였은즉, 고구려병이 위병보다가 갑절이거늘, 그 하에 동천왕의 어를 재하여 가로되 「위의 다수의 병이 아의 소수의 병만 못하다」 함은 하어인가? (이) 비류수에서 위병 삼천여급을 참하고, 양맥곡에서 또 위병 삼천여급을 참하였은즉, 만명의 위병이 이미 육천여명의 사자를 출하여 다시 성군할 수가 없을지거늘 그 하에 「왕이 철기 오천으로 추격하다가 대패하였다」 함은 하어인가? 「관구검전」에 그 결과를 기하여 가로되, 「론공행상 후자백여인」이라 하였은즉 출사의 중과 전역의 대를 가히 추지할지니, 어찌 구구한 만인의 출명뿐이랴. 다만 피사에 상내략외의 예를 수하여 그 기재가 이에 그칠 뿐이니라. 「고구려본기」에는 우의 전역을 동천왕 이십년(기원 이백사십오년)이라 하였으니, 동천왕 이십년은 위폐제방(방)정시팔년이오, 『삼국지』 「관구검전」 에는 「정시중 … 출현토토구려 … 육년복정지」라 하였으므로, 해동역사에 정시 오년·육년의 양회 전쟁으로 분기하였으니, 정시 오년·육년은 동천왕 십팔년·십구년이다. 그러나 『삼국지』 「본기」 에는 정시 칠년에 「유주자사관구검 토고구려」라 하여, 「고구려본기」와 상합한다. 하를 종함이 가하냐?
최근 기원 일천구백오년에 청 집안현지사 모씨가 집안현 판석령의 령토에서 발견한 관구검(관구검)의 기공비의 파편에 「육년 오월」의 자양이 그 제이행에 났으니, 만일 이것이 진적이라 하면 정시 육년 - 동천왕 십구년이 곧 그 전역의 시요, 재전이란 기록은 오이다. 그러나 청조 인사들이 고물위조의 버릇이 퍽 많아 지나(중국) 현대의 광척한 고비 고와가 거의 응본이라 하니, 해비의 파편은 아직 고고학자의 심정을 요할 것이며, 설혹 이것이 진적이라 할지라도, 이는 불내성 명이요 환도성의 명은 아니니, 하고인가 하면 집안현의 환도성은 제삼 환도성이요 제삼 환도성은 동천왕 때에 아직 건축도 되지 아니 하였으니, 이는 본편 제이장 제칠절에 상기하니라.
(오) 제이 환도 잔파 후 평양에 천도
제이 환도가 잔파함에, 동천왕이 이에 그 서북정벌의 웅심이 랭회가 되어 금 대동강 상의 평양으로 천도하니, 이것이 고구려의 남천의 비롯이다. 평양 천도 이후에 대세의 변한 자가 이니, (일)은 남낙랑의 소속 소국들이 비록 고구려에 복속하였으나, 오히려 대주류왕이 최씨를 멸망하던 구원을 생각하여 강부와 이반이 무상하다가, 이윽고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가 되어 제왕의 거와 군려의 본영이 다 이곳에 있음에 소국들이 기압되어, 차차 절복하며, (이)는 평양 천도 이전에는 고구려가 늘 -서북으로 발전하여 흉노·지나(중국) 등과 충돌이 잦다가, 평양 천도 이후에는 백제·신라·가라 등과 접촉이 되어 북방보다 남방에 대한 충돌이 많았다. 다시 말하자면 고구려가 서북의 국이 되지 않고 동남의 국이 됨은 곧 평양 천도로 원인함이다. 그러나 평양 천도는 제이 환도의 잔파로 원인함이니, 그러므로 제이 환도의 잔파가 고대사상 비상한 대사기의 일이라 할 것이다.
제이장 고구려 대 선비의 전쟁
(일) 선비 모용씨의 강성
선비가 늘 고구려에 복속하여, 비록 단석괴(단석괴)의 웅용으로도 오히려 명임답부(명림답부)의 절제를 받아, 이미 고구려가 발기(발기)의 난을 지나 요동을 잃어버리고 국세가 약하여짐에, 선비가 드디어 리반하여 한에 부하더라. 한말에 원소(원소)와 조조(조조)가 상지할 때에 선비와 오환이 다 원소(원소)에게 부하였다가 원소(원소)가 망함에, 기원 이백칠년에 조조(조조)가 칠월의 림우를 기회하여 노룡새 오백리를 잠출하여, 선비와 오환의 불의를 승하여 그 소혈을 격파하여 오환은 드디어 쇠망하고, 선비는 그 뒤에 가비능(가비능)이란 자가 있어, 다시 웅강하여 자주 한의 유주와 병주를 침략하더니, 한 유주자사 왕웅(왕웅)이 자객을 보내어 가비능(가비능)을 암살하니, 선비가 다시 쇠하더라. 기원 이백오십년 경에 선비가 우문씨·모용씨·단씨·척발씨 사부가 되어 서로 웅을 다투더니, 모용씨 중에 모용외(모용외)란 자가 용맹걸힐하고 부족이 가장 강성하며, 창려 태극성 - 금 동몽고토 특묵우익의 부근을 근거하여 사면으로 구약하더라. 이때에 지나(중국)의 위·오·촉 삼국이 다 멸망하고 진 사마씨가 지나(중국)를 통일하였으나, 자주 모용외(모용외)에게 패하여 요서 일대가 요란치 않은 날이 없더라. 사가들이 왕왕 모용씨의 거한 창려를 금 란주 부근이라 하나 『진서』 「무제본기」 에 「모용외(모용외)가 창려에 구함」을 보면 우의 창려 - 금 란주 진의 창려 아님이 명백하니, 곧 후래 모용외(모용외)의 자 모용기(모용기)의 서울한 용성과 불원의 지됨이 가하니라.
(이) 북부여의 잔파와 의려왕의 자살
북부여는 제삼편에 술한 바와 같이, 조선 열국의 문화원천의 국이었었다. 그러나 신라·고려 이래로 압록의 이북을 잃고는, 드디어 북부여를 조선 역외에 국이라 하여 그 역사를 수습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해모수왕 이후 그 치란성쇠를 알 수 없거니와, 다행히 지나(중국)의 사가들이 피의 정치적 관계된 사실을 몇 마디나 기록한 고로 그 개략을 말할 수 있다.
후한 안제 영초 오년 기원 일백십이년에 부여왕(실명)이 보기 칠팔천인을 거느리고 한의 낙랑을 침입하여 리민을 살약한다 하니, 이것이 곧 사에 견한 북부여의 대외용병의 시일 것이며, 연광 원년 기원 일백이십일년에 부여왕이 자 위구태(위구태)를 보내어 한병과 합력하여 고구려·마한(백제)·예·읍루 등을 파하다』 하였으나, 익년에 한이 차대왕에게 화를 걸하고 배상의 겸을 바친 것을 보면 북부여와 한이 고구려를 파하였다 함은 무록일 것이며, 기원 일백삼십육년에 위구태(위구태)가 왕이 되어 이만기로써 한의 현토군을 습하고, 그 뒤에 공손도(공손탁)이 요동왕이 되어서는 부여의 강을 외하여 종녀로써 처하여 고구려와 선비에 대한 공수동맹을 결하였으니, 위구태왕은 마치 고구려에 차대왕 같이 가장 상무의 주며, 또 기 재위 년간이 해모수(해모수) 이후 북부여의 유일한 전성시대일 것이다.
위구태왕의 뒤에 간위거왕에 이르러서는 적자가 없고 서자 마여(마여)가 즉위하니, 오가와 중에 우가(실명)가 반심을 품었으나 우가의 형자는 왕실에 충하고 국사에 근하고 국인에게 재물을 잘 시여하여 인심이 귀부하더니, 우가의 부자가 반하거늘, 위거(위거)가 이를 금살하고 그 가산을 적몰하고, 마여왕이 귁기매 위거(위거)가 마여(마여)의 자 의려(의려)-겨우 육세된 소아를 세워 보좌하더니, 위거(위거)는 죽고 의려(의려)가 선지 사십일년만에 국방이 소홀하여, 드디어 선비 모용외(모용외)의 정지한 바 되어 모용외(모용외)가 선비의 중을 몰고 북부여의 서울 아사달을 침입함에 이르니라.
모용외(모용외)가 침입함에, 의려왕이 수비가 허약하여 방어하지 못할 줄 알고 칼을 빼어 자살하여 망국한 죄를 국인에게 사하고, 유서로써 태자 의나(의라)에게 왕위를 전하여 회복을 면케 하더라. 의려왕이 국방에 힘쓰지 못하여 국을 위망에 빠지게 한 죄는 없지 않으나, 그러나 강할진대 차라리 죽으리라는 의기를 가져 조선사상 제일차 순국의 왕이 되어 피로써 후인의 기념을 끼쳤으니, 어찌 성하의 맹을 결하여 구차한 생명을 보하려는 용군에 비할 바이랴. 의려왕이 이미 자살함에, 의나(의라)가 서갈사나 - 금 개원 부근의 삼림 중으로 달아나 결사대를 모집하여 선비병을 격각하고 험조를 보하여 신국을 세우더라.
「아사달은 왕검(왕검) 이후 수천년 문화의 고도로서, 역대의 진보뿐 아니라 곧 문헌이 많아 신지의 사며 리독자로 적은 풍월이며, 곧 왕검(왕검)의 태자 부루(부루)가 하우를 가르쳤다」는 금간옥첩에 쓴 문자가 있더니, 모든 것이 모두 선비의 만병에게 소탕되고 마니라.
(삼) 고구려의 멸란 토평과 명장 달가(달가)의 참사
선비가 북부여에 침입하던 육년전인 기원 이백팔십년에 고구려는 예(본기의 숙신)의 반란이 있었다. 예가 원래 수렵시대의 만족으로서 처음에는 북부여에 복속하였더니, 북부여가 조세를 받음이 과중하므로 반하여 고구려에 부하였다가, 고구려가 요동을 잃고 국세가 쇠약함에, 드디어 반란하여 국경을 침입하여 인민의 사상과 축류의 피약이 무수하거늘, 서천왕이 크게 걱정하여 장재를 구한대, 군신들이 왕제 달가(달가)를 천하여 달가(달가)가 기계로써 예의 소혈을 습격하여 그 추장 육칠백가를 부로하여 부여남의 오천에 옮기고 그 각부락을 강하니, 서천왕이 달가(달가)로 안국군을 봉하니라. 서천왕이 죽고 자 봉상왕이 즉위하여는 천성이 시의하여, 달가(달가)가 행열은 숙부요 위명은 전국에 떨치므로, 죄를 얽어 사형에 처하니, 국인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어 가로되, 「안국군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예맥의 난에 죽은 지가 오래였으리라」 하더라.
(사) 모용 퇴패와 봉상왕의 교학
모용외(모용외)는 일대 효웅이라. 진의 정치가 부패하여 지나(중국)가 장차 대란할 것을 보고, 바야흐로 전지나(중국)를 병탄할 야심을 가지나, 만일 동으로 고구려를 절복치 못하면 후고의 걱정이 적지 아니할 줄은 피의 명지하는 바라. 그래서 북부여를 잔파한 뒤에 그 승세를 인하여 곧 고구려를 침입하려 하나, 다만 안국군의 위명을 꺼리어 주저하더니, 달가(달가)의 죽음을 듣고 대희하여 기원 이백구십이년에 경병으로써 고구려의 신성을 범하더라. 이때에 봉상왕이 신성에 순행하였다가 모용외(모용외)의 탐지한 바 되어, 그 포위를 입어 매우 위급하더니, 신성재 북부소형 고노자(고노자)가 오백기로써 외병을 돌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왕을 구하니, 왕이 희하여 고노자(고노자)의 작을 진하여 북부대형을 배하니라.
익삼년에 모용외(모용외)가 또 입구하여 졸본에 들어 서천왕묘를 발굴하다가 구병이 이를 격퇴하거늘, 왕이 모용씨의 자주 침구함을 걱정하니, 신가 창조리(창조리) 가로되, 북부대형 신성재 고노자(고노자)는 지용이 충실한 장수이니, 대왕이 고노자(고노자)를 두고 어찌 선비를 근심하느냐 하고, 드디어 왕을 근하여 고노자(고노자)로 신성태수를 삼더니, 고노자(고노자)가 민을 애하고 병을 련하여 누차 모용외(모용외)의 구병을 격파하여 국경이 안정하더라.
외병이 이에 입구치 못함에, 봉상왕이 이에 교일하여 수년 흉한에 인민이 기곤함을 불구하고 국중의 인부를 징발하여 궁실을 건축하니, 인민이 더욱 류망하여 호구가 모손하더라. 기원 삼백년에 이르러서는, 왕이 군신의 간쟁을 다 거절하고 국중 남녀 년십오 이상을 총발하여 건축에 부역케 하거늘, 「신가」 창조리(창조리)가 고간하여 가로되, 「천재가 잦아 년사가 못되어, 국중 인민이 장정은 사방으로 빌어 흩어지고 노약은 구학에 빠져 죽는데, 대왕이 이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기민을 모두 토목의 역을 시키니, 임금의 일이 아닐뿐더러, 하물며 북방에는 모용씨의 강적이 있어 날마다 우리의 틈을 엿보나니, 대왕은 생각하소서. 임금이 백성을 아끼지 아니하면 인이 아니며, 신하가 임금을 간치 않으면 충이 아니니, 신이 이미 ‘신가’의 자리에 있어 말할 바를 숨기지 못하여 아뢰나이다」 한즉 왕이 써하되, 「임금은 백성의 쳐다보는 바라 임금의 사는 궁실이 장려치 않으면 백성이 무엇을 쳐다 보리요. ‘신가’는 백성을 위하여 명예를 구하지 말라. ‘신가’가 만일 백성을 위하여 죽지 아니하려거든…하리라」 하니, 창조리(창조리)가 봉상왕이 고치지 않을 줄을 깨닫고 동지들과 밀모하여 왕을 폐하려 하더라.
(오) 봉상왕의 폐출과 미천왕의 즉위
봉상왕이 처음에 그 숙부 달가(달가)를 죽이고, 또 그 아우 돌고(돌고)를 의심하여 사형하더니, 돌고(돌고)의 자 을불(을불)이 화가 자신에 급할 줄 알고 출분하더라. 봉상왕이 그 뒤에 누차 을불(을불)을 찾으나 얻지 못하더라.
을불(을불)이 도망한 뒤에 성명을 변하고 몸을 팔아 수실촌인 음모(음모)의 집에 머슴을 살더니, 음모(음모)가 매우 일을 고되게 시켜, 낮이면 나무하고 밤이면 쉬일 새 없이 그 집 문전 초택에 돌팔매를 던져 개구리 소리를 금하여, 그 집 식구들로 하여금 잠을 편히 자게 하거늘, 을불(을불)이 견디다 못하여 돌 해만에 또 도망하여 동촌인 재모(재모)와 동무하여 소금장사가 되더라. 그래서 소금을 사 선편으로 압록강으로 들어와 소금짐을 강동 사취촌의 인가에 부렸더니, 그 집 노구가 공 - 소금을 달라하므로 한 말어치나 주었으되, 노구가 마음에 차지 안하여 더 달라고 보채거늘 허치 아니했더니, 노구 도리어 꽁 - 한 마음을 먹고 음해를 주려 하여, 소금짐 속에다가 가만히 신 한 켤레를 묻어 놓고 을불(을불)이 떠나온 뒤에 쫓아와 소금을 뒤져 신을 찾고, 을불(을불) 등의 양인을 절도로 몰아 압록재에게 고소하여 을불(을불)은 태형을 맞고 소금을 빼앗아 노구에게 주기로 판결되더라. 을불(을불)이 이에 소금장사는 할 수 없으니, 이에 떠업고 머슴살이 할 곳도 얻지 못하여 천촌만락으로 전전걸식하여 날을 보내더니, 옷은 나불나불 떨어지고 얼굴은 보기에도 무섭게 파리하여, 누구도 석일 왕손인가 하는 의문을 내지 못하였더라.
이때에 「신가」 창조리(창조리) 등이 봉상왕을 폐하랴 할 새, 임금될 감으로나 차례로나 모두 을불(을불)이 합당하다 하여, 북부 살이 조불(조불)과 동부살이 소우(소우) 등으로 하여금 을불(을불)을 찾게 하더니, 비류수에 이르러 을불(을불)을 만난지라. 소우(소우)가 을불(을불)의 유시 면목을 기억하므로 나와 절하며 가만히 뜻을 통하여 가로되, 「금왕이 무도하므로 ‘신가’ 이하 제대신들이 협의하여 금왕을 폐하려 하여 왕손을 찾아옴이외다」 하더라. 소우(소우) 가로되, 금왕이 인심을 잃어 국가가 위태하므로 군신들이 「왕손이 품행이 단정하시고 성격이 인자하사 조업을 이을 만하다」 하여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니, 왕손은 의심치 말라 하고 데리고 돌아와, 창조리(창조리)의 동지 조맥남(조백남)의 집에 숨기었다가, 추구월에 창조리(창조리)가 봉상왕을 따라 후산에서 사냥하다가 조리가 갈대 잎을 따 갓에 꽂고 외여 가로되, 「나를 쫓으려는 이는 나와 같이 갈대 잎을 갓에 꽂으라」 하니, 중인이 다 창조리(창조리)의 뜻을 알고 갈대 잎을 따 갓에 꽂는 지라. 창조리(창조리)가 이때 중인들과 함께 봉상왕을 폐하여 별실에 가두니, 왕이 면치 못할 줄을 자각하고 그 아들 형제와 함께 목을 매여 자살하고, 을불(을불)이 왕위에 나가니 사에 미천왕이 곧 이러라.
(육) 미천왕의 료동 전첩과 선비 구축
기원 일백구십칠년-발기(발기) 반란 이후로 기원 삼백칠십년경-고국원왕 말년까지는 곧 고구려 중쇠시대이지만, 그러나 미천왕의 일대는 이 중쇠시대 중에 가장 특성시대이다.
저자가 일찍 환인현에 류할 때에 해지 문사 왕자평(왕자평)(본만인)의 말을 들은즉, 「고구려 고대에 ‘’우굴로란 대왕이 있어, 그 미시에 불우하여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걸식할 때에 가죽으로 신을 만들어 신었으므로, 지금에도 만주에 가죽신 ‘우굴로’(우굴로는 만주 노동자의 신)라 함은 그 대왕의 명으로 명함이며, 그 대왕이 그렇게 걸식하도록 궁곤하였지만, 늘 요동을 차지할 경영을 가져 요동 각지에 걸식할 새, 산천의 험이와 도로의 원근을 알기 위하여 풀씨를 가지고 다니며, 이것을 길가에 뿌려 그 경과한 길을 기억한 고로, 지금 요동 각지의 길가에 우굴로란 풀이 많다」 하더라. 우굴로가 을불과 음이 같고, 또 고구려 제왕 중에 초년에 걸식한 이가 을불(을불)뿐이니, 우굴로는 아마 미천왕 을불(을불)의 미시 제작인가 하노라.
미천왕은 기원 삼백년부터 삼백삼십일년까지 무릇 삼십일년 어위한 제왕이요, 그 삼십일년간의 역사가 곧 선비 모용씨와 혈전한 역사이다. 간루한 「고구려본기」와 부과한 『진서』를 합하여 그 진에 근한 자를 뽑아 왕의 역사를 서술하면 대략 아래와 같을 뿐이다.
(가) 현토 회복
왕자 수성(수성)의 회복한 요동이 연우왕 때에 또 한의 소유가 됨은 전술하였거니와, 미천왕이 즉위하여는 그 제이년에 곧 현토성을 파하여 팔천여인을 부로하여 평양에 옮기고 십육년에 마침내 현토성을 점령하고
(나) 낙랑 회복
낙랑도 또한 한무제의 사군의 일로서 대대로 그 천사가 무상하였지만, 대개 또한 요동 땅에 가설한 것이요, 평양 낙랑과는 거리가 격절한 고로, 「동천왕본기」에 위군은 낙랑으로 퇴하는 때에 동천왕은 평양으로 이도하였으며, 동천왕의 평양 전도한 이후에도 위·진의 낙랑태수는 의구히 존재함이니, 만일 지나(중국)의 낙랑이 곧 조선의 평양 - 남낙랑이라 하면, 이는 평양이 고구려의 왕도되는 동시에 또 지나(중국) 낙랑군의 군치가 됨이니, 천하에 어찌 이 같이 모순당착되는 역사적 사실이 있으리오.
미천왕의 낙랑 점령함은 그 재위 십사년 기원 삼백십사년의 일이니, 진인 장통(장통)이 낙랑·대방 이군(대방도 요동의 가설군이요 장단 혹 봉산의 대방국이 아님)에 거하였으므로, 왕이 이를 공벌한즉, 장통(장통)이 항거할 힘이 못되어, 모용외(모용외)의 부장 낙랑왕 모용준(모용준)에게 구를 걸하더라. 그러나 모용준(모용준)이 부구하다가 패하여 드디어, 장통(장통)을 꾀여 민구 천여가를 몰아가지고 모용외(모용외)에게 투항하여 모용외(모용외)가 유성 - 금 금주 등지에 또 낙랑군을 가설하여 장통(장통)으로 태수를 삼으니, 이에 요동의 낙랑은 고구려의 소유가 되니라.
(다) 요동전첩
요동군치는 양평-금 요양이니, 『진서』에 거하면 「미천왕이 요동을 공하다가 자주 패퇴하고 도리어 맹을 걸하였다」 하나, 『량서』에 「을불 빈구요동 불외능제」주19)라 하여, 모용외(모용외)가 늘 미천왕에게 패한 줄로 기하여 양서가 서로 모순되도다. 그러나 『진서』는 당태종의 작이요, 당태종은 요동을 아무쪼록 지나(중국)의 요동임을 위증하여 자국의 신민을 고무하여 고구려의 요동에 대한 전쟁열을 일으키려 하여, 전대 사서인 『사기』·『한서』·『후한서』·『삼국지』 등 서에 기한바 조선 열국 - 그 중 더욱 고구려에 관계되는 문자를 많이 개찬하였으니, 하물며 그 자수한 『진서』이랴. 그런즉 『양서』 소기가 도리어 진실하며, 현토와 낙랑이 이미 차제로 정복되었은즉, 겨우 수현뿐 남은 요동도 고구려에게 돌아왔을 것이나 아직 충분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만 쓰노라.
(라) 극성전쟁
기원 삼백이십년에 미천왕이 선비의 우문씨와 단씨와 진 평주자사 최비(최비)를 연합하여 모용외(모용외)의 서울 극성을 치더니, 모용외(모용외)가 사국의 사이를 이간하므로, 미천왕과 단씨는 인퇴하고 우문씨와 최비(최비)와 모용외(모용외)와 싸우다가 대패하여, 최비(최비)는 고구려에 투항하고 고구려장 여노자(여노자)가 사성에 거하였다가 외장 장통(장통)에게 패하였다 하니, 이는 『진서』에 전한 바이다. 거의 사실인 듯하며, 여노자(여노자)는 고노자(고노자)의 오인 듯하나 고노자(고노자)는 모용외(모용외)를 누파한 명장이니, 이제 장통(장통)에게 피금하였다는 말이 가의이며, 또는 고노자(고노자)가 봉상왕오년 이후에는 다시 「본기」에 보이지 아니하였은즉, 그동안에 벌서 사망한 것이거늘, 근 사십년만에 돌현한 것도 가의니, 대개 무록인가 하노라.
(칠) 제삼 환도 - 금 집안현 홍석정자산의 함락
기원 삼백삼십일년에 미천왕이 죽고 고국원왕 쇠(쇠)가 사위하더니, 익삼년에 모용외(모용외)도 죽고 그 세자 황(황)이 사위하였다. 고국원왕은 그 야심은 미천왕에 지내나 그 재략이 불급하며, 모용황(모용황)은 그 야심과 재략이 그 부 모용외(모용외)보다 초출하는 효웅일뿐더러 그 서형 한(한)과 그 이자 준(준), 각(각) 등이 다 절세의 기재더라. 고국원왕이 평양의 서울을 서북 경영에 불편하다 하여, 금 집안현 홍석정자산상에 새로 환도성을 축하여 천도하니 이는 제삼 환도니, 태조 때에 왕자 수성(수성)이 쌓은 제일 환도는 아직 적국의 땅으로 되어 있고, 동천왕이 쌓은 제이 환도도 너무 적국에 핍근하므로, 「진하여 전함에 편하고 퇴하여 수함에 이한」 지방을 가려 서울하려 하므로 제삼환 도성을 축함이니라.
모용황(모용황)이 고국원왕이 환도성에 천도하였음을 듣고, 고구려가 장차 북벌할 줄을 알고 먼저 고구려에 침입하여 타격을 주려 하는 동시에, 외면으로는 고구려를 피하여 원둔하는 꼴을 가장하여, 고구려로 하여금 방비에 소홀케 하려 하여, 극성-모용외(모용외) 이래 피의 고도를 버리고 그곳에서 서북으로 더 나아가 용성에 천도하고 군신을 모아 「고구려와 우문씨의 양국에 어느 것을 먼저 침이 가하냐?」고 물은즉, 모용한(모용한)이 써하되, 우문은 비록 강성하나 실로 보수할 뜻을 가졌을 뿐이요, 고구려는 그렇지 아니하여, 우리가 만일 먼저 우문을 치다가 고구려가 우리 뒤를 습할 염려가 없지 아니 하니, 먼저 고구려를 침이 가하며 고구려를 치자면 양로가 있으므로, (일)은 북치로부터 환도성에 향하는 북도요, 우(일)은 남합과 목저로부터 환도성에 향하는 남도니, 북도는 평활하고 남도는 험협하여 고구려가 남도보다 북도를 엄비하리니, 우리가 먼저 그 일부의 병을 북도로 침입한다 칭하고, 가만히 대병을 발하여 남도를 습하면 환도를 파하기가 어렵지 않다』 함에, 모용황(모용황)이 모용한(모용한)의 계를 채용하더라.
고국원왕이 모용황(모용황)의 병이 북도로 침입함을 듣고 피의 계를 모르고 제무를 보내어 오만병으로 북도를 비하여 모용황(모용황)의 장군 왕부(왕부)를 참하고 그 전군 일만오천병을 전멸하였으나, 왕은 소수의 병으로 남도를 방어하다가 모용황(모용황)의 대병을 만나 대패하여 왕이 단기로 도망하니, 환도성이 드디어 적병에게 함락하여 왕태후 주씨도 왕후 모씨도 적병에게 잡히니라.
모용황(모용황)이 이미 환도를 얻고 왕을 쫓으려다가 모용황(모용황)의 장군 한수(한수)가 가로되 「고구려왕이 비록 패주하였으나 각성의 구병이 다 모여 들면 넉넉히 대군의 적이 될 것이오. 또 고구려 국내에 산험이 많아 추격함이 위험하니, 왕을 위하여 계컨대, 고구려왕의 부묘를 굴하여 해골을 가져오고, 그 모후와 생처를 잡아가면 피가 그 사부와 생모 생처를 찾기 위하여 할 수 없이 굴복하리니, 연후에 은신으로 무하여 피를 동치 못하게 하면 장래 우리의 중원 경영에 아무 장애가 없으리라」 하므로, 모용황(모용황)이 그 말을 쫓아 국고에 들어가 역대의 문헌을 불지르며, 모든 진보와 재물은 약탈하고 성곽·궁보·민거를 모두 훼파하고, 미천왕릉을 파 그 시체와 왕태후 주씨와 왕후 모씨를 실고 돌아가더라.
고국원왕이 적병이 비록 돌아갔으나 사부와 생모가 적국에 잡히어 갔으므로, 이를 찾아오기 위하여 비사와 후례로 모용씨를 교하며 부득이 지나(중국)대륙에 대한 경영을 포기함에 이르러, 수십년동안 약국이 되니라. 환도성의 삼차 이전은 고구려 상세 성쇠의 역사를 충분히 설명하는 자라. 태조 때에 왕자 수성(수성) - 차대왕이 요동을 점령하고, 제일차의 환도성을 금 개평 부근에 시축하던 때가 그 최성시대요. 발기(발기)가 반하여 요동을 들어 공손씨에게 항하므로 산상왕이 제이차의 환도성을 금 환인현 부근에 이축하였다가 그것까지 위장 관구검(관구검)에게 잔파하려던 때가 그 쇠락한 시기요. 미천왕이 선비를 구축하여 낙랑·현토·요동 등 군을 거의 차제로 회복하여 중흥의 실을 거하다가 중도에 붕하고, 고국원왕이 사위하여는 제삼차의 환도성을 금 집안현 부근에 이축하였다가, 또 모용황(모용황)에게 잔파를 당하니, 이는 최쇠시대이다. 『삼국사기』에 비록 이러한 관계를 상서치 못하였으나 본기의 지리를 상고하면, 그 대개를 얻을 수 있으며, 『삼국지』에도 이이모(이이모) 갱작신국이라 함은 곧 제이 환도의 신축을 가리킨 것이라.
이상 소록은 『조선사략』과 『삼국사기』에 보인 것을 초록한 것이거니와, 『진서』는 이미 략술한 바와 같이, 당태종이 고구려를 폄욕하기 위하여 허다 비실의 기사를 위조함이 많은 글이다. 그러므로 우의 기사도 가의할 것이 없지 아니 하니, 예를 거하면 모용황(모용황)이 미천왕 묘를 발하여 갔다 하나, 그러나 미천왕 때에 고구려 서울은 평양이었고, 미천왕 붕후 십이년만에 고국원왕이 환도에 천도한바, 고구려 역대의 왕릉은 다 당시 왕도 부근에 있은즉, 미천왕 붕후에 반드시 평양에 묻혔을 것이고, 환도에 묻히지 아니하였을 것이니 환도에 입구한 모용황(모용황)이 어찌 평양에 묻힌 미천왕릉을 굴거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미천왕릉 굴거 운운이 십분 가의인 동시에 그 이하에 기한바, 왕태후와 왕후의 피로 운운도 믿기가 어렵다. 다만 이 뒤에 고구려가 삼십여년 동안 곧 모용씨 멸망하기 이전에는 다시 지나(중국) 대륙을 경영치 못함을 보면 모용씨에게 대패하여 불리한 조약을 맺었던 사실이 있음은 명백하니라.
제육편 고·백 양국의 충돌
제일장 고·백 양국 유래의 관계
(일) 남낙랑 동부여의 존망과 고백 양국의 관계
고추모(고추모)와 소서노(소서노)의 일대 부처가 분리하여 고구려·백제 - 남·북 양 왕국을 건설한 이후에, 고구려는 북방 열국을 잠식하여 북방의 유일 강국이 되는 동시에, 백제는 온조왕이 마한 오십여국을 통일하고 진·변 양한 - 신라·가라를 정복하여 또한 남방의 유일 강국이 된바, 이는 이미 제사편 제오편에 략술하였거니와, 양 강국이 이와 같이 남북에 대치하였으나, 수백년간 피차 일회의 접촉이 없었음은 남낙랑과 동부여가 양국 중간의 장벽이 되었던 까닭이라. 이제 양국 접촉 사실을 쓰려함에, 먼저 남낙랑과 동부여의 존망한 관계부터 말할 수밖에 없다.
남낙랑과 동부여의 열국이 고구려 대주류왕의 정복을 받은 뒤에 고구려를 원한하여 늘 지나(중국)의 원을 빌려 이를 보복하려 하나 여의치 못하고, 밋(이윽고) 태조 때에 왕자 수성(수성)이 한을 전승하고 요동과 북낙랑을 회복하며, 남낙랑과 동부여는 물론 고구려의 위력에 섭복하여 준동치 못하고, 백제도 고구려에게 신복하여 그 요구에 응하여 기병을 내어 고구려 서정에 참가하였으니, 이는 제사편제오편에 역술한 바이거니와, 백제사가 중간에 연대 삭감이 있어, 고구려 태조의 때가 백제의 하왕 하대에 상당한지는 아직 발견할 수 없고, 백제 초고왕 이후에야 그 년대를 겨우 준신할 수 있는바, 초고왕 삼십이년은 곧 고구려 산상왕 원년 - 기원 일백구십칠년이니, 고구려가 발기(발기)의 난으로 하여 요동과 북낙랑을 한인 공손씨(제오편 제일장 참고)에게 피탈함에, 남낙랑과 동부여가 고구려를 반하여 자립하며, 남낙랑의 남부인 대방(-금 장단 내지 봉산 등지)에 호족 장씨가 또 남낙랑을 반하여 대방국을 건하거늘, 백제도 이를 기회하여 고구려와 관계를 끊고 자립하며, 초고(초고)의 자 구수(구수)는 예구를 양척하여 국세가 더욱 강성하고, 백제 고이왕은 초고왕의 동모제니, 기원 이백삼십사년 구수(구수)가 붕서하며, 구수(구수)의 태자[자기의 종손 사반(사반)]의 년유함을 기회하여 그 왕위를 빼앗았다. 이때에 고구려가 관구검(관구검)에게 패하고 남낙랑을 습하여 남낙랑의 구도(금 평양)를 탈취하여 이도하고, 남낙랑은 풍천원(금 평강 철원 간)으로 천사하거늘, 고이왕이 남낙랑의 경을 침하여 그 민구를 약취하더니, 위 낙랑태수 유무(유무)와 대방태수 궁준(궁준)이 남낙랑과 한편이 되어 동부여를 쳐 전승하고 회군하는지라. 고이(고이)왕이 아직 초창한 백제로서 위를 적하지 못할 줄을 알고, 그 약취한 민구를 돌리고 화를 구하더라. 그러하나 유무(유무) 등이 듣지 않고 신라 북부의 팔국을 다 남낙랑에게 떼여 부치려 하거늘, 왕이 노하여 진충(진충)으로 하여금 대방의 기이영(금 미상)을 쳐 왕 궁준(궁준)을 베이고 위병을 물리치니, 대방 왕 장씨가 이에 백제의 위력을 공하여 그 딸 보과(보과)로써 고이의 태자 책계(책계)에게 가하여 백제와 대북방 공수동맹을 맺더라. 밋(이윽고) 기원 이백팔십오년에 책계왕이 구생의 정(정)과 동맹의 의를 위하여 대방을 구하니. 이것이 백제와 고구려의 충돌의 비롯이오.
그 뒤에 고구려는 선비 모용씨의 발흥으로 하여 서북방어에 급급하여 남고할 겨를이 없었으나, 남낙랑과 동부여는 백제의 강을 시기하여, 기원 이백구십팔년에 양국이 진의 원병과 합하여 입구하거늘, 책계왕이 출전하다가 유실에 맞아 붕서하고, 분서왕이 입하여는 자주 남낙랑의 자객에게 암살을 당하고, 비류왕이 북으로 요동과 북낙랑을 파하여 선비를 격각할 뿐 아니라, 또 남방 경영에도 진력하여 남낙랑과 대방을 멸하여 비구에 백제와도 결전하게 되었으나, 미천왕이 붕서하여 그 문제가 유야무야의 속에 매장되고, 미천왕의 자 고국원왕이 입하여 선비에게 패함은 이미 전편에 술하였거니와, 고국원왕이 이에 북방 경영을 버리고 남진주의를 취하여 자주 백제를 침벌하다가, 마침내 백제의 근구수(근구수)를 맞나 패좌하여 드디어 남북혈전의 국을 이루었으니, 차장에 이를 기술하려 하노라.
제이장 근구수(근구수)의 영무와 고구려의 퇴축(부 백제의 해외정벌)
(일) 백제의 대방 탄멸과 반걸양의 접전
백제 근초고왕이 처음에는 왕후 진씨를 총혹하여 후의 친족 진정(진정)을 신임하여 조정 좌평을 삼아, 진정(진정)이 세를 믿고 발호하여 군신을 억압하며 민재를 침탈하여 이십년 동안 국정을 난하거늘, 태자 근구수(근구수)가 영명하여 마침내 진정(진정)을 파하고 폐정을 개혁하며, 대방 장씨를 강하여 그 땅을 군현하고 육군의 군제를 개량하며, 해군을 설시하여 해를 건너 지나(중국)를 침략할 야심을 가지더니, 이때에 고국원왕이 환도를 버리고 평양에 천도하여 선비에게 실패한 치욕을 남방에서 보상하려 하여 자주 백제를 침핍하며, 기원 삼백육십구년에 마 보병 이만을 황·청·적·백·흑오기에 나누어 거느리고 반걸양-금 벽란도까지 이르렀다.
근구수(근구수)가 출전할 새, 요전에 백제 국구의 목자 사기(사기)가 잘못하여 국마 제를 다치고 죄를 외하여 고구려로 달아나 고구려의 군인이 되어 이 싸움에 왔다가, 비밀히 몸을 벗어 근구수(근구수)를 와 보고 고하여 가로되, 피의 군병이 비록 많으나 거의 남의 이목을 속이려는 충수한 의병이 될 뿐이요 오직 적기병이 효용하니, 이것만 깨뜨리면 그 나머지는 스스로 유산할 것이라 하자, 근구수(근구수)가 그 말을 쫓아 정용을 뽑아 적기를 습파하고 고구려병을 전부 격산하여 수곡성 - 금 신계 서북까지 진격하고 돌을 쌓아 기념탑을 만들고, 이에 패하(대동강 상류 - 금 곡산 상원 등지) 이남을 거두어 백제 땅을 만들더라.
(이) 고국원왕의 전사와 백제의 재령 천도
반걸양 전역 후 삼년에 고국원왕이 그 피탈한 땅을 회복하려 하여 정병 삼만으로써 패하를 건너거늘, 근초고왕이 근구수(근구수)를 보내어 미리 하의 남안에 복병하였다가 불의에 영격하여 고국원왕을 사살하고 패하를 건너 함락하니, 고구려가 이에 다시 국내성 - 금 집안현에 천도하고 고국원왕의 자 소주류왕(본기의 소수림왕)을 세워 백제를 방어하거늘, 근초고왕이 이에 상한수 - 금 재령강에 이르러 황기를 세워 크게 열병식을 행하고 서울을 상한성 - 금 재령으로 옮기어 더욱 북방의 진을 꾀하더라.
『삼국사기』 「고구려 지리지」 에는 고국원왕의 평양에 천함을 기하고, 「소주류왕의 국내성에 재환함」을 기치 아니하여 역대의 사가들이 모두 고국원왕 이후에는 고구려가 늘 평양 등지에 서울한 줄로 아나, 그러나 고구려가 국내성을 고국천·고국양·고국원이라 칭한바, 고국원왕의 시체가 그 천도의 역을 따라 북방에 환장하였으므로 고국원왕이라 칭함이니, 이는 이때 고구려가 국내성에 환도한 일증이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문을 거한즉, 평안호태왕은 국내성에서 생장하여 국내성 부근에 사장함이 명백하니, 이는 평안호태왕의 전대에 국내성에 환도한 이증이니, 국내성의 환도는 곧 백제의 침핍을 피함인 것이라.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근초고왕이 고구려 평양을 취하고 퇴하여 한성에 도하였다」 하고, 지리지에는 한성을 곧 남평양이라 하며, 이밖에도 『삼국사기』 중에 한성을 고구려 남평양으로 친 데가 몇 군데나 되나, 그러나 금 한성은 오직 장수왕이 일차 함락한 이외에, 그 이전에는 하년 하월에 고구려 땅이 되었다는 기록이 전무한즉, 북평양은 북낙랑 - 곧 요동의 개평·해성 등지요, 남평양은 곧 금 평양이니, 근초고(근초고) 부자의 공취한 평양이 금 한성이 아니라 금 평양인 일증이오. 지리지에 중반군-금 재령의 일명이 한성인즉, 백제가 이미 평양을 공파하고 북진하여 금 재령에 도하였을 것이 사리에 합할뿐더러, 만일 근초고(근초고)의 공취한 평양이 금 한성이라 하면 어찌 「고구려 평양을 취하여 도하다」라고 기하거나, 「고구려 한성을 취하여 도한다」라고 기치 않고, 구태여 평양과 한성을 갈라 「고구려 평양을 취하고 퇴하여 한성에 도한다」라고 기하였으리오. 이는 근초고(근초고)가 취한 평양이 한성이 아니라 금 평양인 이증이니라.
「본기」에 거하면 근초고왕의 퇴도한 한성 부근에 한수·청목령 등 지명이 있으므로, 혹자는 우의 한수를 금 한강이라 하고 우의 청목령을 금 송악이라 하나, 대개 고대에 도성을 옮기면 그 부근에 지명도 따라 옮기니, 이 우의 한수·청목령 등은 다 근초고왕이 천도할 때에 따라 옮긴 지명이요, 금 한강과 금 송악이 아니니라.
백제에 원래 삼 한강이 있으니, 금 한성에 근한 한강이 (일)이요, 전술한 재령 한성의 월당강 -한강이 (이)요, 후래 문주왕이 천도한 직산 위례성-한성에 근한 금 양성 한내가(강명) (삼)이니, 본서에는 그 구별의 편의를 위하여 제일은 중한수·중한성이요, 제이는 상한수·상한성이요, 제삼은 하한수·하한성이라 하노라.
(삼) 근구수(근구수) 즉위 후 해외경략
근구수(근구수)가 기원 삼백칠십오년에 즉위하여 재위 십년 동안에, 고구려에 대하여는 겨우 일차 평양의 침입만 있었으나, 바다를 건너 지나(중국)대륙을 경략하여 선비 모용씨의 연과 부씨의 진을 정벌, 금 요서·산동·강소·절강 등지를 경략하여, 광대한 토지를 장만하였다. 이런 말이 비록 「백제본기」에는 오르지 아니하였으나, 『량서』와 『송서』에 「백제 략유요서진평군」과 『자치통감』의 「부여 초거녹산 위백제소잔파 서도근연」이 이를 증한다. 대개 근구수(근구수)가 근초고(근초고)의 태자로서 군국대군을 대리하여, 이미 침입하는 고구려를 격퇴하고 진하여 금 대동강 이남을 병탄하고는, 이에 해군을 확장하여 바다를 건너 지나(중국) 대륙을 침입하여 모용씨를 쳐 요서와 북경을 빼앗아 요서·진평 이군을 설하고, 녹산 - 금 합이빈(하얼빈)까지 들어가 부여 서울을 점령하여 북부여가 금 개원으로 천도함에 이르렀으며, 모용씨가 망한 뒤에 금 합서성에서는 진왕 부견(부견)(또한 선비족)이 강성하매, 근구수(근구수)가 또 진과 싸워, 금 산동 등지를 자주 정벌하여 이를 분피케 하였으며 남으로 금 강소·절강 등지를 가진 진을 쳐 또한 다소의 주군을 빼앗았으므로, 제서의 기록이 대략 이 같음이니라.
그러면 >『진서』나 『위서』나 『남제서』에 하고로 이를 궐하였는가? 지나(중국) 사관이 매양 국치를 휘하는 괴벽이 있어, 지나(중국)에 입주한 모용씨의 연이나, 부씨의 진이나, 탁발씨의 위나, 근세의 요·금·원·청 같은 것은 피등이 자가의 역대 제왕으로 인하므로 그 공업을 그대로 기재하였거니와, 그 외에는 거의 이를 삭제하였을뿐더러, 당태종이 백제와 고구려를 침핍할 때에 그 장사를 고무하기 위하여 양국이 지나(중국) 침입한 기록을 없이 하고, 지나(중국)의 양국 토지의 절반이 본래 지나(중국)의 소유이던 것을 위증할 새, 『진서』는 당태종의 자기의 저작인즉, 물론 백제 근구수왕의 대지나(중국) 전공을 뺐을 것이요. 『위서』·『남제서』 같은 것은 당태종 이전의 서인즉 또한 근구수(근수구)의 서정한 이야기를 뺐을 것이요. 오직 『양서』나 『송서』의 「백제 략유요서」의 구는 그 기록이 너무 간단하고 사실이 너무 소략하므로, 당태종이 우연히 주의치 못하여 그 문자가 그대로 유전된 것일 것이다.
그러면 하고로 「백제본기」에는 이런 일을 뺐는가? 이는 신라가 백제를 증악하므로 이를 뺐을 것이요. 또는 후세에 사대주의가 성행하여 무릇 조선이 지나(중국)를 친 사실은 겨우 지나(중국)사에 개견한 자만을 초록하고, 그 나머지는 다 빼어버린 까닭이니라.
근구수(근구수)의 무공에 관한 기록만 이 같이 삭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문화에 관한 것도 많이 삭제되었으니, 이를테면 근구수(근구수)가 십여년은 태자로 십년은 대왕으로 백제의 정권을 잡았는데, 「본기」에 근구수(근구수)의 문화적 사업의 기록이라고는 겨우 박사 고흥(고흥)을 얻어 『백제서기』 - 백제사를 지은 것 한 가지 밖에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일본사의 성덕태자의 사적이 거의 근구수(근구수)의 것을 훔쳐다가 만든 것이라 한다. 「근구수」의 「근」은 음 「건」이니, 백제 때에 「성」을 「건」이라 하였나니. 근초고, 근구수, 근개루의 「근」이 다 성을 의미함이오. 근구수의 「구수」는 음 「구수」니, 「구수」는 마구의 칭이니, 일본의 성덕태자의 「성덕」이란 칭호는 「근구수」의 「근」을 가져간 것이요, 성덕태자가 마구 변에서 탄생하였으므로 「구호」라 명하다 함은 근구수의 구수를 본뜬 것이니, 이로 미루어 「성덕태자가 헌법 십칠조를 제정하다 한 것」과 「불법을 수하다 한 것」도, 다 일본인이 근구수(근구수)의 공업을 흠모하여 이를 본떠다가 피 성덕태자전 가운데에 넣은 것이 명백하니라.
삼국사로 보면, 백제 침류왕 원년 구월에 호승 마라난타(마라난타)가 「진으로부터 오다」 하였다. 사가들이 이를 거하여 백제 불교의 시를 침류왕 원년으로 잡으나, 『삼국사기』에 매양 전왕의 말년을 신왕의 원년으로 삼고, 인하여 전왕 말년의 사를 신왕 원년의 사로 오서한 것이 허다하니, 이는 따로 변론하려니와, 마라난타(마라난타)가 백제에 들어온 해가 근구수왕 말년 기원 삼백팔십삼년이요, 침류왕원년- 기원 삼백팔십사년이 아니니라.
제삼장 광개태왕의 북진정책과 선비 정복
(일) 광개태왕 북토 남정의 시
기원 삼백팔십사년에 근구수왕이 붕서하고, 장자 침류왕이 사위한 지 이년만에 또 붕서하므로, 차자 진사왕이 즉위하였다. 진사왕은 소시부터 총명용무함으로 저칭하였으나, 그러나 천성이 호탕하여, 근구수(근구수)가 성취한 강국의 권력을 빙자하여 인민을 학사하며, 성책을 청목령 - 금 송도로부터 팔곤성 - 금 곡산 등지까지 쌓고, 다시 서로 꺾어 서해까지 이르러 천여리 장성을 쌓아 고구려를 막게 하고, 서울에는 백제 이래 제일회라 할만한 궁실을 비상히 장려하게 짓고, 대지를 파 각종의 어류를 기르고, 지중에는 가산을 만들어 기금과 이초를 길러 오락을 극하여 인민이 원한하고, 해외의 령사는 다 적국에 빼앗겨 국세가 문득 쇠약하였다.
고구려 고국양왕은 곧 진사왕의 동시니, 고국양왕이 조왕 피살의 구와 강토피삭의 치를 갚기 위하여 늘 백제를 벼르나, 이때에 선비의 모용씨가 진에게 망하고, 진왕 부견(부견)이 강성하여 구십만으로 동진을 치다가 대패하거늘, 고국양왕이 이를 기회하여 요동·낙랑(북낙랑)·현토 등 군을 다 회복하더니, 모용씨 중에 모용수(모용수)란 자가 다시 궐기하여, 금 직례성에 거하여, 천왕의 위에 나아가 국명을 다시 연이라 하여 세력을 회복하고, 자주 병을 출하여 요동을 다투며, 또 몽고(몽골) 등지에 䂺려족(본기의 계단)이 강성하여 고구려의 신성 등지를 침략하는지라. 그래서 고국양왕이 즉위 후에 모용수(모용수)와 싸워 요동을 회복하며, 䂺려를 격수하여 북경을 보수하기에 급급하므로 남방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고국양왕 말년에 이르러, 태자 담덕(담덕)- 곧 후래의 광개토경평왕호태왕 이 영무하여, 병마를 맡아 매양 신속한 전략으로 백제병을 습파하여 석현 등 십여성을 회복하니, 진사왕이 누차 대패하여 드디어 한강남의 위례(금 광주 남한)로 천도하고, 담덕(담덕)의 용병을 무서워하여 출전치 못하므로, 중한수 - 금 한강 이북의 주군들이 거의 고구려의 소유가 되며, 관미성-금 강화는 고금에 천험으로 칭하는 곳이지만, 또한 담덕(담덕)의 해군에게 함락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우의 전역을 기하였으나,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에는 이런 말이 없음은 하고인가? 『삼국사기』는 원래 고기에 의거한 것인바, 고기가 이제 전치 못하였으나, 제서에 인용한 고기 문자를 보면 편년사가 아니요, 기전체인 고로 연대의 조사가 매우 인난하거늘, 김부식(김부식)이 착실히 조사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모든 사실을 각왕의 연대에 분배한 고로, 아라가라의 멸망은 법흥 원년의 사거늘 진흥왕 삼십칠년의 사로 되었으며, 담덕(담덕)의 석현 등 성의 회복과 䂺려의 격퇴, 고국양왕 말년에 석현 등의 함락은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태자 담덕(담덕)으로 있을 때의 사를 태자 담덕(담덕)이 왕된 뒤의 사로 오록한 것이니, 이 따위를 잘 분별한 뒤에야 『삼국사기』를 독함이 가하니라.
(이) 광개태왕의 䂺려원정
태자 담덕(담덕)이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태왕의 위에 나아가 䂺려가 자주 변환이 되므로, 그 즉위 후 오년(기원 삼백오십구년)에 원정군을 일으켜 파부산과 부산을 지나 염수에 이르러, 그 부락 육칠백을 파하고 우마군양을 노획하여 돌아오니, 파부산은 수문비사에 금 음산산맥의 와룡이라 하며, 부산은 금 감숙 서북의 아랍선산이라 하며, 염수는 몽고지지에 거하면 염분이 먹은 호수나 하수가 허다하며, 아랍선산 하에 길란태란 염수가 있어 수반에 늘 이척 이상 내지 육척 이하의 염퇴가 의결된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대개 태왕의 족적이 금 감숙 서북까지 미침이니, 이는 고구려 사상의 유일한 원정이 될 것이다.
우의 원정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궐루되고,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문에만 기재된바, 䂺려를 혹 「본기」에 쓰인 계단(거란)인가 하나, 기실 계단(거란)은 선비의 후예니, 태왕시대의 선비는 모용씨·우문씨 등이오. 계단(거란)이란 명칭이 없었은즉, 「본기」의 계단(거란)은 곧 후세 사가들이 䂺려를 계단(거란)으로 망개한 것이다. 䂺려가 계단이 아니면 하족인가? 『위서』나 『북사』에 거하면 흉노의 유예인 연연란 종족이 금 몽고(몽골) 등지에 분포하여 일시 강성하였으니, 䂺려나 연연가 그 자음이 「라라」인즉, 䂺려는 곧 흉노의 후예니라.
(삼) 광개태왕 왜구 척축(부 백제천도)
왜는 일본의 본명이니, 금 일본이 왜와 일본을 갈라, 왜는 북해도의 아이누족이요, 일본은 대화족이라 한다. 그러나 일본 음에 「화」와 「왜」가 동일한즉, 일본이 곧 「왜」인 것이 명백하거늘, 피등이 근세에 와서 조선사나 지나사에 쓰인 왜가 너무 문화없는 흉폭한 만족임을 부끄러이 여기어, 드디어 「화」란 명사를 지어 왜와 같은 것이니, 백제 건국 이후까지도 왜가 준준몽매하여 일본 삼도 중에서 어렵으로 생활할 뿐이요, 아무 문화가 없더니, 백제 고이왕이 이를 교도하여 봉직과 농작과 기타 백공의 기예를 가르치고, 박사 왕인(왕인)을 보내 논어와 천자문을 가르쳐 주고, 백제 가명 - 곧 백제의 리독자에 의방하여 일본 가명이란 것을 지어 주었으니, 금 소위 일본자란 것이다. 왜가 이와 같이 백제의 교화를 받아 백제의 속국이 되었으나, 천성이 침략을 즐기어 도리어 백제를 침요하며 진사왕 말년에는 더욱 창궐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고구려에게 석현 등 십여 주군의 피탈함을 통한하여, 기원 삼백구십일년(광개태왕 원년)에 왕목(왕목)·진무(진무)로 하여금 고구려 신점령지를 습공하고, 일변으로 왜와 친교하여 함께 대고구려 동맹을 결하였다. 익 오년 기원 삼백구십오년에 태왕이 䂺려 원정의 길에서 회군하여, 수군으로써 백제의 연해 연강의 일팔성·구모로성·고모야라성·관미성 등을 함락하고, 육군으로써 미추성·야리성·소가성·대산한성 등을 함락하고, 태왕이 몸소 갑주를 두르고 아리수(금 월당강)를 건너 백제병 팔천여명을 참하니, 백제 아신왕이 인핍하여 왕제 일인과 대신 십인을 볼모로 올리며 남녀 일천인, 세포 천필을 바치고, 「노객」의 맹서를 쓰고 고구려를 피하여 사산(금 직산)으로 천도하여 신위례성이라 칭하더라.
그 뒤에 고구려가 북방 선비와 전역이 있을 적마다, 백제가 그 맹약을 파괴하고 왜병을 불러 고구려 신점령지를 침요하며, 또 신라가 고구려와 한편 됨을 미워하여 왜병으로써 이를 침핍하였다. 그러나 태왕의 용병이 신속하여 북으로 선비를 치는 틈에, 매양 백제의 기선을 제하여 왜를 습파하여, 신라를 원구하여 임나가라 - 금 고령에서 왜병을 대파하므로, 신라 내물왕이 몸소 태왕에게 조견하여 사례함에 이르렀으며, 기원 사백칠년 금 대동강의 수전에 가장 기공을 주하여, 왜병 수만을 전멸하여 갑주 일만여령과 무수한 군자 기를 얻으니, 왜가 이로부터 습복하여 다시 바다를 재도치 못하여 남방이 오랫동안 평온하더라.
(사) 광개태왕의 환도 천도와 선비 정복
태왕은 야심이 충만하고 무략이 절등한 인물이지만, 기실은 동족에 대한 사랑이 많았다. 그래서 백제를 공벌함은 그 왜와 결함을 미워하여 공벌함이요, 토지를 탈취하려는 공벌이 아니다. 태왕의 유일한 목적은 북방의 강성한 선비를 정벌하여 금 봉천·직례 등지를 소유하려 하였으므로, 남방의 전쟁은 매양 소극적 의미를 가진 것이요, 북방의 전쟁이 비로소 적극적 의미를 가진 것이다. 그래서 태왕이 제오도인 안시성(금 개평 부근)에 천도하고, 선비 모용씨와 십여년 전쟁을 계속하여 매양 허를 승하며 불의에 출하여 선비병을 파하여, 마침내 요동으로부터 요서-금 영평부까지 차지함에, 상승의 명장으로 저칭하던 연왕 모용수(모용수)도 패퇴하고 그 후계한 연왕 성(성)·연왕 희(희) 등 지나(중국)사상 일대 효웅들이 다 최절하여, 할 수 없이 수천리의 토지를 고구려에 할여하여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그 준호와 같이 토지를 광개함에 이르렀다.
『진서』에 겨우 「태왕이 연 평주 숙군성을 침하매, 평주자사 모용귀(모용귀)가 도주하다」를 기할 뿐이요, 그 이외는 도리어 연이 상승한 줄로 기하였음은 하고인가? 『춘추』에 「적이 위를 멸한 것」을 기치 아니한 것 같이, 대외전패를 휘함은 지나사관의 상례이거니와, 무릇 당시 이 모용씨의 연이 멸망하고 탁발씨의 위가 강성함도 태왕의 연 침과 직접으로 관계가 있고, 동진 유유(유유)가 궐기하여 선비족·강족들을 전승하고 송 고조 황제될 터를 닦음도, 태왕의 연 침과 간접 관계가 있는 자거늘, 피등이 그 완벽한 상례를 수하여 사실을 사실대로 쓰지 아니하였으므로, 기원 오세기 초의 지나(중국) 대국의 변화한 원인을 엄폐함이니라.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문은, 『진서』와도 다른 - 곧 태왕의 후손 제왕의 설립한 자인데, 그 중에 선비 정벌에 대한 일구가 기재되지 아니하였음은 하고인가? 내가 일찍 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하여 집안현에 이르러 여점에서 만인 영자평(영자평)이란 소년을 만난바, 필담의 하에 비에 대한 이야기가 좌와 같았다. 「비가 오랫동안 초래 중에 묻혔다가 최근에 영희(영희)(또한 만인)가 이를 발견할 새, 그 비문 중에 고구려 토지를 침탈한 자구는 모두 도부로 쪼아내어 인식할 만한 자구가 없어진 것이 많고, 그 뒤에 일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 팔매, 왕왕 자구가 완결한 곳을 석회로 발라 인식할 수 없는 자구가 도리어 생겨나, 진적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첨조된 듯한 감도 없지 아니하다」 하더라.
그러면 이 비문에 태왕이 정작 선비 정복한 대전공이 없음은 삭제된 까닭일 것이니라. 하여간 태왕이 평주를 함락하고 그 뒤에 선비의 쇠퇴를 승하여 자꾸 진취하였다면, 태왕이 개척한 토지가 그 존호 이상으로 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술한 바와 같이 태왕은 동족을 사랑하는 자라. 그러므로 연왕 풍발(풍발)이 연왕 희(희)를 죽이고, 고구려 선왕의 서손으로 연에 벼슬하던 고운(고운)을 세워 천왕이라 칭하고, 태왕에게 보함에 태왕이 써하되, 「이는 동족이니 전할 수 없다」 하고 사자를 보내어 즉위를 하하며 촌수를 따지고 족의를 서하고 전쟁을 그치니, 태왕의 북진정책이 이에 종언을 고하니라. 태왕이 기원 삼백사년-백제 근구수(근구수) 붕년에 낳아, 기원 삼백구십일년에 즉위하여 사백십이년에 국기니(죽으니), 나이 삼십구더라.
광개토경평안호태왕 비의 단편비문이 금 봉천성 집안현 북이리허에 있는바, 장이 략 척이니, 기원 년에 만인 영희(영희)가 발견하여 인행하며 비에 결자가 많더니, 그 뒤에 일인이 그 비를 차지하여 인행 발매하여 그 결자를 혹 석회 도부하여 첨작한 곳이 있으므로 학자가 그 진을 실함을 한한다.
제사장 장수태왕의 남진정책과 백제의 천도
(일) 장수태왕의 역대 정책의 변경
기원 사백십이년에, 장수태왕이 광개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사백구십일년에 붕서하니, 재위 년간이 칠십구년이다. 이 칠십구년 동안은 조선 정치사상에 가장 대변화를 일으킨 시간이다. 무슨 변화이냐? 곧 고구려 역대 제왕들이 혹 북진주의를 쓰며, 혹 남북병진주의를 썼고 종래로 유일한 북수남진주의를 쓰는 자는 장수태왕으로 비롯하여, 드디어 남방삼국대고구려 공수동맹을 환기하였다. 무릇 남방의 백제는 이미 강성하고 신라와 가라도 차차 강성하여 전일의 견줄 바가 아닌즉, 고구려 정치가가 되어는 부득불 남방을 안돌아 볼 수 없지만, 광개태왕은 다만 외족 각국 - 지나(중국)·선비·䂺려 등을 정복하여 동족 각국은 자연 그 기하에 무릎 꿇도록 하였거니와, 장수태왕은 이 정책을 위험시하여 먼저 동족 각국을 통일한 뒤에 외족과 싸움이 가하다 하여, 드디어 광개태왕의 정책을 변경하여 평양으로 천도하고 북수남진주의를 씀에 이르렀다.
이때에 연신 풍발(풍발)이 연왕 희(희)를 죽이고, 고구려의 지손 고운(고운)을 세워 황제를 삼아 광개태왕의 문죄를 면하였으나, 미구에 풍발(풍발)이 고운(고운)을 죽이고 자립하여 천왕이라 하여, 제이세 풍홍(풍홍)에게 이르러서는 선비 별부의 탁발씨가 금 산서 등지에서 건국하여 날로 강대하여 황하 이북을 거의 소유하고 병을 출하여 연을 치니, 풍홍(풍홍)의 국토가 날로 삭축하여 견디기가 극난하므로 자주 사자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를 걸하였다. 태왕은 북수남진이 그의 기정한 정책인 고로 위와 개흔함을 불긍하나, 그러나 연이 모용희(모용희) 이래로 민력을 박할하여 궁실과 원유가 비상히 장대할뿐더러, 궁중에 진보와 미인을 취집한 것이 무수하여 음탕과 호치가 열국의 으뜸으로, 비상한 이기심을 가진 장수왕이 이를 탐하여 연사를 속여 가로되, 고구려가 남방 백제의 난이 있어 아직 대병을 출할 수 없으나, 연주가 즐기어 고구려에 와 유하면 마땅히 장사를 보내어 영접하고, 일후에 시기를 보아 구조하겠다 하여, 연왕 풍홍(풍홍)이 이를 허낙더라.
기원 사백이십육년에 위가 기병 일만과 보병 수만을 발하여 연의 서울 화룡(금 업)을 침입하거늘, 태왕이 말치(좌보) 맹광(맹광)을 보내어 수만 병을 거느리고 연왕 풍홍(풍홍)을 맞을 새, 위병이 이미 연의 서울에 당두하여 서문으로 입성하거늘, 맹광(맹광)이 빨리 동문으로 들어 위에 항한 연 상서령 곽생(곽생)의 병과 싸워 곽생(곽생)을 사살하고, 연의 무고에 들어가 정예한 병기를 취하여 위병을 격파하고 궁전에 방화하며 미인과 진보를 거둬 가지고 돌아 오니라. 위주가 그 미인과 진보의 피탈함은 탄하지 못하고, 다만 연왕 풍홍(풍홍)이 고구려에 류함을 싫어하여 이를 인도함을 청구하였으나, 태왕이 이를 불허하니라. 그러나 위의 환심을 잊지 않으려하여 자주 위와 교통하며, 또 남 지나(중국)의 송과 친교하여 위를 견제하더라.
(이) 위기승의 음모와 백제의 피폐
장수태왕이 이미 외교의 수단으로써 지나(중국)의 위와 송을 견제하고는, 백제를 파멸하기에 전력하였다. 그러나 태왕 부 광개태왕과 같은 전략가가 아니요, 흉지한독한 음모가이다. 그래서 적국에 대하여 칼로 활로 그 정면을 공격하지 않고, 먼저 간책으로 독계로 그 심복을 부식한 뒤에 하수하는 자이다. 그러하므로 그가 평양에 천도한 뒤에 비밀히 조를 내리어, 백제의 내정을 문란케 할 기략을 가진 책사를 구하니, 그 조에 응하여 불교승 도림(도림)이 나왔다.
당시에 백제의 근개루(근개루)는 바둑의 명수요, 도림(도림)도 바둑의 명수라. 도림(도림)이 태왕께 밀고하여 거짓 득죄자의 행장을 차리어 백제로 들어가, 근개루왕을 보고 바둑 동무됨을 얻어 조석으로 근개루(근개루)를 모셔 바둑을 둘 새, 근개루왕이 써하되 자기의 바둑의 적수가 천하에 오직 도림(도림) 하나라 하여 친애함이 짝이 없거늘, 도림(도림)이 수년 동안 근개루의 곁에 있어 왕의 성격과 행위를 골고루 훑어보고는, 이에 말을 내어 가로되 「신이 일개의 망명 죄인으로 태왕의 총애를 받아 의식거처를 이같이 사미케 하니, 이 은혜를 갚을 땅이 없으므로, 이제 신의 우려를 다하여 한 마디를 대왕에게 드리나이다. 대왕의 국이 내로는 산악을 끼고 외로는 하해를 둘러 적병 백만이 어찌하지 못할 천험이니, 대왕이 이같은 천험에 의하여 숭고의 위와 부유의 업을 가지고 사방의 시청을 용동할 만한 기세를 지으면, 사방의 열국이 바야흐로 존사함을 게을리하지 못할지어늘, 이제 성곽을 높이 쌓지 못하며, 궁실을 크게 짓지 못하며, 선왕의 해골을 작은 뫼에 파묻으며, 인민의 가옥이 매년 장마에 강물로 떠나가, 외국인이 보기에 창피한 일이 많으니, 누가 대왕의 나라를 쳐다보며 높이 받들려 하리잇가. 신은 대왕을 위하여 취치 아니 하나이다」 하니, 근개루왕이 그 말을 달게 여기며, 전국 남녀를 총발하여 벽돌을 구어 주회 누십리되는 왕성을 높이 쌓고, 성중에는 하늘에 닿을 듯한 궁실을 짓고, 욱리하 - 금 양성 한래 - 가에서 대석을 가져다가 대석관을 만들어, 부왕의 해골을 넣고 광대한 왕릉을 지어 그 속에 묻고, 사성의 동에서 숭산의 북까지 욱리하의 제언을 쌓아 어떠한 장마에도 수환이 없도록 하더라.
이같은 공역이 지남에, 국고가 탕갈하고 군자도 결핍하고 민력도 잔폐하고 도적이 봉기하여 국세의 위태함이 누란과 같았다. 도림(도림)이 이에 성공한 줄로 알고 도망하여 고구려에 돌아와, 장수태왕에게 그 사실을 아뢰더라.
(삼) 고구려병의 침입과 근개루왕의 순국
장수태왕이 도림(도림)의 회보를 접하고 대희하여, 말치(관명) 제우(제우)와 백제 항장 재회걸루(재회걸루)·고이만년(고이만년) 등을 보내어, 삼만 병으로써 백제의 신위례성-금 직산 부근 고성을 칠 새, 근개루왕이 고구려병의 이름을 듣고, 이에 도림(도림)의 간책에 속은 줄을 알고, 태자 문주(문주)를 불러 가로되, 내가 어리석어 간인의 말을 신용하여 국사가 이 꼴이 되었으니, 비록 급난이 있은들 누가 나를 위하여 힘쓸 이가 있으랴. 고구려병이 이르면, 나는 국가의 희생이 되어 죄를 속하려니와, 너도 나를 따라 부자가 같이 죽으면 무엇에 도움이 있으랴. 너는 빨리 남방으로 달아나, 의병을 모으며 외원을 구하여 조업을 이으라 하고, 울면서 문주(문주)를 보내더라.
제우(제우) 등이 북성을 쳐 칠일만에 함락하고 병을 옮겨 남성을 침에, 성중이 송동하여 싸울 뜻이 없거늘, 근개루왕이 친히 출전하다가 고구려병에게 피집하니, 걸루(걸루)·만년(만년) 등이 처음에는 전일 군신의 의를 차리어 말에 내리어 재배하더니, 돌연히 왕의 얼굴에 세 번이나 침을 뱉어 질욕하고, 왕을 결박하여 아차성 - 금 광진 아차산에 이르러 항을 받으려 하나 듣지 아니하므로 드디어 가해하니, 이에 신위례성 - 금 직산 이북이 모두 고구려의 소유가 되니라.
아신왕이 광개태왕을 피하여 신위례성에 천도함은 이미 전장에 술하였거니와, 정차산(다산 정약용)이 직산을 문주(문주) 남천 후에 잠도라 함은 오단이니, 사성은 직산의 고명이며 숭산은 아산의 고명이니, 본장을 참고하면 직산 위례성이 문주(문주) 이전 곧 아신왕의 천도한 곳임이 더욱 명백하니라.
제칠편 남방제국 대고구려 공수동맹
제일장 사국 연군의 합전과 고구려의 퇴각
(일) 신·백 양국의 유래 관계와 비밀동맹의 성립
장수태왕의 남진정책이 비록 일시 백제를 잔파하였으나, 마침내 남방 삼국 - 신라·가라·백제가 연맹을 만든 원인이 되어, 역사상 초유의 대변국을 이루었다. 이 연맹의 주력이 신라에 있었으므로, 이제 그 경과를 서술하려 할 새, 먼저 신라 대 백제, 고구려의 유래 관계부터 약술하리라.
신라가 자래로 그 지방이 고구려와 격원하고 백제와 접근하므로, 고구려보다 백제와의 관계가 더욱 복잡하였다. 그러하나 『삼국사기』에 기한바, 신라·백제의 관계된 기록은 가신할 것이 적으니, 그 일이의 예를 들리라. 이를테면, (일) 신라가 탈해니사금 이후에 백제와 늘 피차 이백명의 소수 병졸로 늘 연혁도 전하지 않는 와산·봉산 등지를 거의 해마다 쟁탈하였다 하나, 신라는 당초 경주 일우의 소국이요, 백제는 온조(온조) 당년에 벌써 마한 오십여국을 소유하였으니, 어찌 신라와 똑같이 해마다 이백명수의 병을 출하였으랴? (이) 양국이 간혹 화호한 일이 있으나, 백제가 늘 먼저 신라에 향하여 화를 걸하였다 하니, 백제가 신라보다 몇 갑절 되는 대국으로서 어찌 늘 먼저 굴복하였으랴? 백제와 신라의 사이에 가라 육국과 사벌·감문 등 완충국이 있었는데, 어찌 백제가 가라 등국들과는 일회의 충돌이 없고, 도리어 신라를 침벌하였으랴? 대개 신라가 백제를 한함이 심하므로, 그 망한 뒤에 그와 관계된 사적을 많이 개찬 혹 위조 하였으니. 지나(중국)의 삼국지사·남사·북사 등에 보인 말을 보면, 신라가 처음에 백제의 절제를 받았다 하니, 이것이 도리어 가신할 기록일 것이다.
이윽고 근구수(근구수) 이후에 백제가 고구려와 혈전하는 동안에, 비로소 자립하여 백제와 대항하다가, 미구에 고구려의 광개태왕이 나와 국위가 대진하므로, 백제 아신왕이 왜병을 불러 북으로 고구려를 막고 남으로 신라를 침에, 신라 내물니사금이 고구려의 원병을 얻어 왜를 물리치고, 몸소 광개태왕에게 조알하며 왕족 실성(실성)으로 볼모하더니, 내물니사금이 붕서하매 내물(내물)의 자 눌지(눌지)가 유소하므로 실성(실성)이 귀국하여 계위하고, 눌지(눌지)·복호(복호) 형제로써 고구려에 볼모하더니, 그 뒤에 실성(실성)이 고구려의 귀인을 체결하여 눌지(눌지)를 죽이려 하나, 고구려인이 듣지 않고 눌지(눌지)를 돌려보내 실성(실성)을 죽이고 즉위하니라. 눌지니사금이 이같이 고구려 까닭에 왕위를 얻었으나, 고구려가 백제를 병탄하면 신라도 홀로 견디지 못할 줄을 알므로, 박제상(박제상)을 보내어, 신라의 고구려에 대한 성신이 일개 볼모의 유무에 달리지 아니하였다는 말로, 고구려의 군신을 꾀여 애제 복호(복호)를 돌려오고, 비밀히 백제와 상통하여 고구려를 막으려 하며, 백제도 왜는 멀고 신라는 가까움으로, 왜를 끊고 신라와 사귀어 고구려를 막기로 결정하여, 신라·백제 양국의 동맹이 이에 성립하였다.
『삼국사기』에 눌지니사금 삼십구년 - 기원 사백오십오년 -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함에 니사금(이사금)이 병을 보내어 구하다 하였으니, 이는 곧 상기한 양국동맹의 결과이거니와, 이밖에도 고구려 대 동맹양국의 침입전과 동맹양국 대 고구려의 방어전이 잦았을 것이니, 기록에 보임이 없음은 사문이 잔결한 까닭이니라.
(이) 신·백·임·아 사국의 대 고구려동맹
밋(이윽고) 장수태왕이 신위례성을 침입하여 근개루(근개루)의 태자 문주(문주)가 신라에 와 급난을 고함에, 신라가 동맹의 의로 뿐 아니라 그 자위상 부득이 출병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비마립간이 병 일만으로 부원하였으나 근개루왕은 이미 죽고 신위례성은 벌써 잔파한지라. 문주왕이 이에 구도를 회복하지 못하고 물러와 웅진에 도하니, 웅진은 광개태왕의 비문에 고모나라니, 양자가 「곰나루」로 독할 것이니 전자는 의로 쓴 이독자요 후자는 음으로 쓴 이독자이니, 금 공주가 당시의 「곰나루」니라.
이때 금 한강 이남에 신라·백제 이외에 가라 등 육국이 있어 금 경상남도를 분거함은 제삼편에 술한 바거니와, 최초에 신가라가 종주국이요, 임나·아라·고자·고령·벽진의 오가라는 그 후래에 신가라, 기타 삼가라는 미약하여 정치 문제에 용훼할 권리를 잃고, 오직 임나·아라의 양 가라가 강성하여 신라와 대치하였으며, 광개태왕이 왜를 칠 때에도 상당히 병력을 들여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도와 왜와 싸웠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신위례성이 파하고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함에, 양 가라가 다 진경하여 자보를 모하는 동시에, 신라·백제도 그 양국의 힘이 고구려를 막음에 부족함을 감하여, 드디어 양 가라의 동맹 가입을 종용하여, 이에 신·백 양국대고구려 공수동맹이 신·백·임·아 사국 대고구려 공수동맹으로 변하였다.
장수태왕이 신라가 「전차 고구려의 대은 - 광개태왕 정왜의 일을 잊고 백제와 연합함」을 크게 분하여, 기원 사백팔십일년에 대병을 들어 신라의 동북을 침입하니, 신라의 소지마립간이 몸소 비열홀-금 안변에 이르러 방어하다가 대패하여, 고구려병이 승세를 타 남진하여 호오-금 회양 등 칠성을 함락하거늘, 백제의 동성대왕(차장 참고)은 양 가라국과 연합하여 길을 갈라 부원하여 고구려병을 깨치고 그 잃은 땅을 회복하더라.
(삼) 사국동맹의 사십년 계속
사국동맹으로 인하여 장수태왕 남진의 철편이 꺾이고 백제와 신라가 다 자보함을 얻었으니, 그러므로 당시 조선 정치사상 일대 사건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백제 동성대왕이 해외를 경략(차장 참고)하여 백제가 고구려 이상의 강국임을 자랑하던 때까지도, 이 동맹이 오히려 계속하였던 고로, 기원 사백구십사년에 신라가 살수 - 금 대동강 상류의 부근에서 고구려와 싸우다가 견아성에서 피위하여 구를 청하므로, 백제 동성대왕이 병 삼천을 보내어 고구려병을 격퇴하고 위를 풀었고, 익년에 고구려가 백제의 반걸양을 침에, 신라 소지마립간이 또한 구병을 보내어 고구려병을 격퇴하였으니, 우의 동맹이 대개 사십여년을 계속하였음은 명백하며, 이 동맹이 해체된 뒤에야 신라가 가라 침벌을 비롯하니라.
제이장 백제의 위구 격퇴와 해외식민지 획득
(일) 동성대왕 이후 백제의 복강
백제가 신위례성이 잔파하여 외우가 한창 심한 중에 내란이 또 빈빈하여, 문주왕은 곰나루(웅진)에 천도한 뒤 사년(년표에는 삼년)만에 반신 해구(해구)에게 죽고, 장자 왕근왕(「본기」에는 삼근이라 하였으나, 그 일명 「임걸」로 보면 삼근의 「삼」은 왕의 오)이 십삼세의 소아로서 즉위하여, 그 익년에 좌평 진남(진남)·덕솔 진로(진노) 등과 밀모하여 해구(해구)를 베인 영주이지만 삼년만에 십오세의 묘령으로 죽고, 그 해 기원 사백칠십구년에 동성대왕이 즉위하니 대왕의 명은 마모대(마모대)니, 전사에 마모라 씀은 하일자를 략한 것이오, 모대라 쓴 것은 상일자를 략한 것이다.
대왕이 즉위 당시에 년령이 얼마이던 것을 사에 적지 아니하였으나, 왕근(왕근)의 종제인즉 십사 오세에 지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대왕이 십사 오세의 소년으로 이 같은 난국을 당하였지만, 천자가 숙성하고 백발백중의 사예가 있어 고구려와 위를 물리쳐 국란을 평정하였을 뿐 아니라, 바다를 건너 지나(중국)의 금 산동·절강 등지를 점령하며, 일본을 쳐서 속국을 만들고, 기타 전공이 허다하거늘, 『삼국사기』에는 다만 당시 천재인 일이차의 수한과 대왕의 수렵한 일을 기할 뿐이요, 그 나머지는 전궐하였으니, 이는 신라 말엽의 문사들이 삭제한 것일 것이다. 이제 좌에 그 약사를 술하리라.
(이) 장수의 음모와 위병의 침입
이때 지나(중국)가 황해 남북을 갈라 곧 위·제 양국으로 분립하니, 위는 곧 선비족의 탁발씨로 모용씨의 연을 대하여 흥한 자니, 위의 세력이 비상히 창궐하여 당시 유일 강국으로 치게 되었다. 그런데 장수태왕이 남방 사국의 동맹으로 인하여 백제를 병탄치 못하고는, 또 그 「손도 대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신랄한 수완」을 운하여, 제삼국으로 하여금 먼저 백제를 잔파하고, 자기는 그 뒤에서 이익을 거두려 하였다.
그래서 해마다 황금·명주 십승을 가져가 위주에게 주다가, 삼년만에 사자 예실불(예실불)을 빈손으로 위에 보내니, 위제가 그 까닭을 묻거늘 예실불(예실불)이 가로되, 사비 부여에는 황금산이 있고, 섭라(금 제주)에는 명주연이 있어, 이보의 산출이 무한하므로 전일에 이를 캐어 폐하에게 바친 것이거니와, 이제 사비 부여는 백제의 서울이 되고, 섭라도 백제의 정복한 바 되어, 황금산과 명주연이 다 피의 손에 들어가, 우리 고구려인도 이보를 구경할 수 없는데, 어찌 남에게 줄 것이 있으랴 하니, 위의 군신들이 이를 곧이듣고, 백제를 쳐 황금산의 황금과 명주연의 명주를 획취할 야욕이 치밀어, 이에 동침의 사를 일으켰다.
『삼국사기』에는 『위서』 를 초록하여, 예실불(예실불)의 일을 장수태왕의 자 문자왕의 시대의 일로 기하였으나, 남양 예씨의 족보에 거한즉, 예실불(예실불)을 그 시조라 하고, 예실불(예실불)이 위에 사한 일을 상술한 바와 같이 기하였으니, 대개 위가 북으로 고구려, 남으로 제-곧 그 연륙한 나라를 놓고, 멀리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싸움은 해통이 불편한 고대에 있어서 토지를 다투려는 자의 일이 아닌즉, 예실불(예실불)의 - 말에 속아 황금과 명주를 취하려 함인 것이 사실인 듯하며, 위의 백제 침입이 장수태왕 때요 문자왕 때가 아닌즉, 『삼국사기』의 연대가 틀린 듯하므로, 이제 『삼국사기』를 버리고 예씨 족보를 쫓노라.
(삼) 위병의 재입재패
지나(중국)대륙의 국으로 조선에 침입한 자가 허다하나, 그 군병의 수가 약 십만에 달한 자는 탁발씨의 위로 비롯하였으며, 이 같은 대적을 격퇴한 자는 백제의 동성대왕으로 비롯하였다.
『위서』에는 위의 국치를 휘하기 위하여 이를 기치 아니하였으며, 『삼국사기』는 백제의 공업을 샘하여 그 사적을 삭제한 신라의 사필을 인습하였으므로 이를 기치 못하였고, 오직 『남제서』에 그 대개가 기재되었었으나, 그것도 당태종의 차훼를 입어 그 대부분은 잔결하고, 겨우 동성대왕이 남제에 보낸 국서가 남아 있어 그 사실의 편면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 국서는 완전한 본문이냐 하면, ‘중국인이 남의 시문(조선인의 시문)을 고침에 담대하여 중국을 「수방」 혹 「원방」이라 쓴 자구이면, 피가 채집할 때에 반드시 「황도」 혹 「대방」 등으로 고친다’한 박연암(연암 박지원) 선생의 말이 있으니, 심상한 음풍영월한 시나 문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정치상에 관계되는 국서이랴.
우리가 그 국서로 인하여 (일) 기원 사백구년에 위가 양차나 보기 수십만을 내어 백제를 침입하였음과, (이) 동성대왕이 제일차에 영삭장군 면중왕 왕저근(왕저근)·건위장군 팔중후 부여고(부여고)·건위장군 부여력(부여력)·광무장군 부여고(부여고)를 보내어 국군으로써 위병과 영전하여 이를 대파하였음과, (삼) 동성대왕이 제이차에 정로장군 매라왕 사법명(사법명)·안국장군 벽중왕 찬수류(찬수류)·무위장군 불중후 해례곤(해례곤)·광위장군 면중후 목간나(목간나)를 보내어 또 위병을 영격하여 수만급을 참하였음과, (사) 동성대왕이 이 양차의 대전에 대승리를 얻고 국서와 우격을 내외 각국에 보내어 이를 과시하였음과, (오) 동성대왕이 수대 이래 쇠패한 백제에 낳아 국세가 급업한 때를 당하여 우 양차 대전의 승리를 장하여 국운을 만회하고 마침내 내외경략의 터를 닦았음과, (육) 당시 출전한 대장들은 왕저근(왕저근)·사법명(사법명)·부여고(부여고)·부여력(부여력)·부여고(부여고)·찬수류(찬수류)·해례곤(해례곤)·목간나(목간나) 등이었음을 알 뿐이요, 전선의 장단이 얼마이던지? 전역의 구근이 어떠하였던지? 후자는 육전이어니와 전자는 육전이었던지? 해전이었던지? 이는 다 불명하니라.
하고로 전후 양 전역의 대장이 각 사인이었던가? 이는 백제왕도 부여나 고구려와 같이 중·전·후·좌·우의 오군의 제를 써, 동성대왕이 중군대원수가 되고 사인은 각기 사원수가 된 까닭이니라. 하고로 왕저근(왕저근)이나 사법명(사법명)이 동성대왕의 신으로서 또한 왕이 되었는가? 신도 조선의 고제니 대왕은 신하의 역이니, 곧 일국에 군림한 천자의 칭이요, 왕은 한의 역이니 곧 대왕을 보좌하는 소왕들의 칭호인 까닭이다.
(사) 동성대왕의 해외경략과 중도 붕조
조선 역대 이래로 바다를 건너 영토를 둔 자는 오직 백제의 근구수왕과 동성대왕의 양대다. 동성대왕 때는 근구수(근구수) 때보다 더욱 광대하였던 고로, 『구당서』 「백제전」 에 백제 지리를 기하여 가로되 「서도해 지월주 북도해 지고려 남도해 지왜」라 한바, 월주는 금 회계니 회계 부근이 모두 백제의 소유이었으니, 문헌비고에 「월왕 구천(구천)의 고도를 환한 수천리가 다 백제지」라 함이 이를 가리킨 것이오. 「고려」는 당인이 고구려를 칭한 명사니 고구려의 국경인 요수 이서 - 금 봉천 서부가 다 백제의 소유이었으니, 만주원류고에 「금주·의주·애혼 등지가 다 백제」라 함이 이를 가리킨 것이오. 「왜」는 금 일본이니 상인한 『구당서』의 상 양구에 의하면 당시 일본 전국이 백제의 속국이 되었던 것이 무의하니라. 백제가 우의 해외 식민지를 어느 때에 잃었느냐 하면, 성왕의 초년에 고구려에게 패하고 말년에 신라에게 패하여 국세가 일시 쇠약하였으니, 이때에 이르러서는 해외식민지가 거의 몰락하였을 것이니라.
동성대왕이 이같이 전공을 이루었으나, 수한의 재가 심한 때인 것을 불고하고 장려고대한 임류각을 짓고 그 앞에 원림을 기르고 못을 파 진금과 기어를 기르며 수렵을 즐기어 자주 출행하더니, 기원 오백일년 십일월에 사비 부여의 마포촌의 수렵에 대설을 만나 유숙하다가, 왕을 원하는 위사 좌평 가림성주 백가(백가)의 자객의 칼에 죽으니, 재위가 이십삼년이요, 그 연령이 불과 삼십여세더라.
제팔편 삼국혈전의 시
제일장 신라의 발흥
(일) 진흥대왕의 화랑 설치
화랑은 일시 신라 발흥의 원인이 될 뿐 아니라, 후세에 한문화가 발호하여 사대주의파의 사상과 언론이 사회의 인심·풍속·학술을 지배하여, 온 조선을 들어 지나(중국)화하려는 판에, 또 이를 반항 배척하여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온 자는 화랑이다. 송도 중엽 이후로는 화랑의 서언이 아주 인멸하여 비록 직접으로 그 감화를 받은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간접으로 화랑의 유풍 여운을 받아 가까스로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자는 화랑이다. 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려 하면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음과 한 가지인 우책이다.
그러나 화랑파의 자술한 문헌인 「선사」·『화랑세기』·『선랑고사』 … 등은 다 멸절하여, 화랑의 사적을 알자면 오직 화랑의 문외한인 (일) 유교도의 김부식(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이) 불교도 무극(무극)이 지은 『삼국유사』의 양서 가운데에 과화열식으로 적은 수십행의 기록을 신뢰할 뿐이오. 그 수십행의 기록이나마 진확하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이제 『삼국사기』에 보인 화랑 설치의 실록을 말하리라. 그 전문이 좌와 같으니, 이제 동 『사기』 「진흥대왕본기」의 본문을 들면 좌와 같으니 「삼십칠년 춘 시봉원화왈 군신병 무이지인 욕사류취군유 이관기행의연후 거이용지 수간미녀이인 일왈남모 일왈준정 취도삼백여인 이녀쟁연상투 준정인남모어사제 강권주지취 예이투지하수이살지 준정복주 도인실화파산 기후경취미모남자 장식지 명화랑이본지 도중운집 혹상마이도의 혹상열이가락 유오산수 인차 지기인사정 택기선자 천지어조 고김대문화랑세기왈 「현좌충신 종차이수 량장용졸 유시이생 실내포함삼교 접화군생 차여입칙효어가 출칙충어국 노사구(공자)지지야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주주사(노자)지종야 제악막작 제선봉행 축건태자(석가)지화야」 당령호징신라국기왈 택귀인자제지미자 부분장식지 명왈화랑 국인개존사지야」주20) 문말에 김대문(김대문)과 최치원(최치원)의 말을 인용하여 비상히 화랑을 찬미한 듯하나, 세고하면 착오와 황류가 비상하다. 「사다함전」에 거하면 사다함(사다함)이 가라정벌에 참여한 것이 진흥대왕 이십삼년인즉, 삼십칠년 이전에 화랑이 있음이 명백하거늘, 이제 삼십칠년에 화랑이 시하였다 함이 하설이냐? 『삼국유사』에 거하면 원화는 여자 교사니, 원화를 폐한 뒤에 남자 교사를 두어 「국선」 혹 「화랑」이라 칭하였거늘, 이제 원화를 화랑이라 함이 하설이냐?
대개 김부식(김부식)의 때에는 화랑의 명칭도 아주 끊어지지 않고 화랑의 문적이 많이 여존한 때임을 불구하고, 그의 지은 소위 『사기』에 그 설치의 연대를 흐리게 하고, 그 원류의 구별을 가르지 못하였음은 하고이냐? 대개 김부식(김부식)은 유교도 령수로서 화랑파 윤언이(윤언이)을 쫓고(제…편 참고) 화랑의 역사를 말살하는 자이니, 그 심법대로 하면 『삼국사기』 중에 화랑이란 명사를 일자도 남겨 두지 안하였겠지만, 다만 피는 지나(중국)를 숭배하는 자라, 우리의 이야기가 무엇이고 지나(중국)의 서적에 났으면 이를 『사기』에 빼지 못하였던 자라. 그러므로 피가 아무리 화랑을 샘하나, 다만 지나(중국)의 『대중유사』·『신라국기』 같은 글 속에 화랑이란 말이 게재되었으므로, 동 『사기』에도 화랑을 빼지 못하였다. 피가 장말에 인용한 『신라국기』가 겨우 「택귀인자제」 이하 도합 이십사자에 불과하나, 도종의(도종의) 설부가 인용한 『신라국기』에 「신라군신병무이지인」 … 거이용지 등 어가 있으나, 이로 미루어 보면 그 이하 사실과 김대문(김대문)·최치원(최치원)의 논평까지도 대개 『신라국기』의 것을 초록한 것인가 한다. 피가 이와 같이 『신라국기』에 쓰인 화랑 설치의 사적을 인용하고 본국에 유전된 것은 말살하여 버렸다.
그 다음에 『삼국유사』에 적힌 화랑실록은 또 좌와 같으니 「진흥대왕 즉위 다상신선 택인가랑자미염자 봉위원화취도 교이효제충신 내취남모낭·준정낭양화 취도삼사백인 준정투모낭 주음지취 예 지북천중 매살지 기도비읍 유인지기모자 작가유가권 소동창어가 기도문지 심득기시어북천중 내살준정 어시왕하령 폐원화 루왕우념 욕흥방국 수선풍월도 경하령 선량가남자 유덕행자 위화랑 시봉설원랑 위국선지시」주21) 우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비하여 좀 상비하나, 또한 상담에 이른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이 나온 소리가 적지 않으니, 이를테면 진흥대왕이 신선을 상하여 원화, 화랑을 봉하였다니, 원화와 화랑이 도사나 황관의 종류란 말이냐? 『삼국유사』 작자는 불교도인 까닭에 『삼국사기』 저자인 유교도같이 불타의 심술을 가지지 아니하였을 터이나, 그 기록의 모호함은 한 가지다.
국선 화랑은 진흥대왕이 곧 고구려의 선배 제도를 닮아온 자라. 선배를 이독자로 「선인」 혹 「선인」이라 쓴 것은 이미 제삼편에 술하였거니와, 선배를 신수두 단전의 경기회에서 뽑아 학문을 힘쓰며 수박·격검·사예·기마·택견이·깨금질·씨름 등 각종 기예를 하며, 원근 산수에 탐험하며, 시가와 음악을 익히며, 공동으로 일처에 숙식하며, 평시에는 환난구제·성곽도로 등 수축 등을 자임하고, 난시에는 전장에 나아가 죽음을 광영으로 알아 공익을 위하여 일신을 희생하는 것이 선배와 같으니, 국선이라 함은 고구려의 선인과 구별하기 위하여 상에 「국」자를 더 넣어 지은 명사며, 화랑이라 함은 고구려의 선배가 조백을 입어 조의라 칭하듯이, 신라의 선배는 화장을 시킴으로 화랑이라 칭함이니, 또한 조의와 구별한 명사며 원화는 마치 구주 중고 예수교 무사단의 여교사 같이 남자의 정성을 조화하기 위하여 둔 여교사며, 소재만필에 가로되, 「화랑의 설에 사람이 전쟁에 죽은 뒤에 천당의 제일위를 차지하고, 노인으로 죽으면 죽은 뒤의 혼도 노인이 되고, 소년으로 죽으면 죽은 뒤의 혼도 소년이 된다 하여, 화랑들이 소년으로 전쟁에 죽음을 즐기었다.」 하였은즉, 다만 국선의 「선」자로 인하여 장생불사를 구하는 지나(중국)의 선도로 알면 대오다. 최치원(최치원)이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주주사지종야」라 함은, 다만 국선의 교가 유·불·노 삼교의 특장을 갖추어 가짐을 찬탄한 말이니, 국선은 투쟁에서 생활하여 「무위」와 「불신」과는 사이가 아주 천만리나 떨어지는 교다.
전술한바, 『삼국사기』의 「국유현묘지교왈풍류」와 『삼국유사』의 「득조…예명어풍류황권」으로 보면, 국선의 교를 풍류라 명하였음을 가지며, 전술한 『삼국유사』의 「욕흥방국 수선풍월도」와 『삼국사기』 「검군전」의 「복수행어풍월지정」으로 보면, 국선의 도를 또 풍월이라 함은 가지다. 풍류는 지나(중국)문자의 유허풍류의 뜻이 아니라, 우리말의 풍류 - 곧 음악을 가리킨 것이요, 풍월도 지나(중국)문자의 「음풍영월」의 뜻이 아니라, 우리말의 풍월 - 곧 시가를 가리킨 것이니, 대개 화랑의 도가 다른 학문과 기술도 힘을 쓰나 가장 음악과 시가에 전공하여 인세를 교화하였으니. 『삼국사기』 「락지」에 보인 진흥대왕이 지은 도령가와 설원랑(설원랑)이 지은 사내기물락은 물론 화랑의 면작이거니와 의방, 『삼국유사』에 이른바 「신라향가감천지이격귀신」주22)이라, 향가도 또한 거의 화랑의 무리의 작이며, 최치원(최치원)의 향락잡록으로 보면, 이 시가와 음악으로 많이 연극을 행한 자니, 부여인이나 삼한인이 가를 희하여 주야에 가무가 부절하다 함은 『삼국지』에 명재하였거니와, 신라가 습속을 인하여 교도의 방법을 세워 시가·음악·연극 등을 행하여, 인심을 고무하여 유래의 소국으로 마침내 문화상·정치상에 고구려와 백제를 대항함을 얻은 자니라.
화랑의 원류를 적은 『선사』·『선랑고사』·『화랑세기』 등이 다 부전하였으나, 선사는 곧 신라 이전-단군 이래 고구려·백제까지의 유명한 선배를 적은 것이니, 「고구려본기」의 「평양자는 선인왕검지택」이 곧 선사 본문의 일구일 것이며, 『선랑고사』·『화랑세기』 등은 곧 신라 이래의 선배를 적은 것이니, 『삼국사기』 「열전」에 간혹 초록한 것이 있으나, 이는 모두 의쟁에 유공한 화랑의 졸도들 뿐이오. 삼백여 화랑-낭도의 스승들은 하나도 적지 아니하였으니, 여기서도 김(김부식) 씨가 화랑을 말살하려는 심리가 표현되니라.
(이) 육가라의 멸망
김수로(김수로) 육형제가 신가라 - 금 김해·밈라가라 금 고령· 안라가라 - 금 함안·구지가라 - 금 고성·별뫼가라 - 금 성주· 고링가라 - 금 함창에 분왕함과 임라·안라 양 가라가 사국동맹에 참가하여 백제를 도와 고구려를 막음은 이미 제사편과 제칠편에 역술하였거니와, 신라의 지증·법흥·진흥 삼 대왕이 상계하여 육가라를 잠식하여, 진흥 때에 이르러서는 육국이 다 신라의 소유가 되어, 금 경상 좌·우도가 완전히 통일되었다. 이제 육가라 흥망의 략사를 술하리라.
신가라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금관국이라 쓴 자니, 시조 수로(수로) 때에는 신라보다 강성하여 신라의 파사니사금이 그 인근 소방인 음즙벌(금 경주 북경내)과 실직(금 삼척)의 강토 쟁송을 판결치 못하여, 수로왕의 중재를 청하여 수로왕이 일언으로 결정함에, 삼국이 다 열복하였고, 그 결과로 파사왕이 수로왕을 연사하다가, 신라 육부장의 일인인 한지부장 보제(보제)가 위비자로써 대빈을 삼으므로, 수로왕의 노를 촉하여 노 탐하리(탐하리)에게 명하여 보제(보제)를 죽였으나, 파사왕이 감히 수로왕을 겨루지 못하고, 오직 탐하리(탐하리)를 죄하려 하여 탐하리(탐하리)를 숨긴 음즙벌국을 격멸할 뿐이었다. 그러나 수로(수로) 이후에는 국세가 날로 미약하여 임라가라의 침모를 받다가 신라 법흥대왕 십구년 - 기원 오백삼십이년에 그 제십세왕 구해(구해)가 국탕과 처자를 가지고 신라에 투항하여버리니라.
안라가라는 그 년대와 사실이 거의 결락하였으나, 이미 전술함과 같이 고구려의 광개태왕이 남정할 때에 신라와 합하여 고구려에 부하여 백제를 항하며, 백제 문주왕이 걸원할 때에 또 신라 사국동맹에 참가하여 고구려를 막았으나, 비록 소국이지만 당시 정치문제에 빠지지 않던 나라이다. 전사에 안라가라가 멸망한 연조를 기하였으나, 「삼국」「신라본기」 지증왕 십오년에 「소경을 아시촌에 두다」한바, 「안라」의 이독자가 아시랑인즉 지증 십오년 이전에 안라가라가 이미 멸망한 것이니라. 『삼국사기』 「지리」에는 「법흥대왕이 대병으로 아시량을 멸」한바, 선왕 붕년, 신왕 원년으로 오함은 『삼국사기』에 누견한 일인즉, 지증 십오년 곧 지증(지증)의 붕년은 - 곧 법흥대왕의 원년이리니, 안라가 법흥 원년에 망한 것이 아니냐. 그러나 『삼국사기』 「열전」에 거하면, 지증왕 때에 금이사부(김이사부)가 연변 군관이 되어 군마를 국경에 모아 놓고 날마다 병사로 하여금 기주케 함에, 가야인이 이를 습견하여 예사로 알고 방비치 아니하거늘, 이사부(이사부)가 습격하여 이를 멸하다』 하니, 우의 가야는 곧 안라가라를 가리킨 것이니, 안라가라가 대개 지증왕 말년에 이사부(이사부)의 손에 망하여 법흥 원년에 그 서울이 신라의 소경이 된 것이니 지리의 운운은 오니라.
밈라가라는 육가라 중 그 건국 이후에 가장 신라와 악전고투하던 소강국이다. 처음에는 거의 신라와 싸울 때마다 이기다가, 밋(이윽고) 신라 내해니사금 사십년 - 기원 이백구년에 그 소속의 포상팔국(대개 금 남해·사천 등지)이 반하여 연맹군을 일으키어 밈라를 침입하여 크게 승리하고 육천명을 부로하므로, 밈라왕이 그 왕자를 신라에 볼모로 하고 구병을 빌어, 신라 태자 석우로(석우로)가 육부 정병으로 래구하여 팔국 장군을 격살하고 피로병 육천명을 밈라에 탈여하더니, 그 뒤로부터 밈라가 국세가 허약하여 신라에 대항치 못하였다. 그러나 중간에 신라와 합하여 고구려의 광개태왕도 돕고 사국연맹에 참가하여 백제도 구하더니, 밋(이윽고) 신라의 지증·법흥 양 대왕이 안라가라 등을 멸함에, 그 제십육세 가실왕이 공구하여 신라 귀골의 비조부(비조부)와 결혼하여 자보코자 하였으나, 마침내 신라의 습격을 당하여 망하고, 그 뒤에 가실왕이 왕족과 인민들의 신라에 불복하는 자를 거느리고 미을성 - 금 충주로 달아나, 백제에 의뢰하여 신라를 막고 미을성을 서울로 하였더니, 밋(이윽고) 기원 오백오십사년에 백제 성왕이 구양(음 글내) - 금의 백마강 상류에서 신라를 습할 때에 밈라병도 따라갔다가, 신주군주 김무력(김무력)[신가라항왕 구해(구해)의 자]의 복병을 만나 양국 연군이 전몰하였나니, 이는 제구편에 상술하려니와, 기원 오백육십사년에 신라 병부령 김이사부(김이사부)와 화랑 김사다함(김사다함)이 침입하여, 이 천거한 밈라 가라까지 망하니라.
전사에 모두 대가야 곧-밈라가라가 금 고령에 건국하였다가 고령에서 망한 줄로 기하였거늘, 이제 하서에 거하여 밈라가 금 충주에 거하였다 하는가? 『삼국사기』 「열전」에 “강수 중원사량인야”주23)라 하고, 또 강수(강수)의 자술을 기하여 가로되, 「신 본임나가량인야」주24) 하니, 중원경은 곧 충주요 임나가량은 곧 「밈라가라」니, 밈라가라가 충주에 천도하였던 일증이요. 『삼국사기』 「악지」에 「우륵본성열현인」주25)이라 하니, 우륵(우륵)은 밈라가라의 악공이오, 성열현 - 금 청풍은 당시에 충주 곧 「미을성」에 속하였던 땅이니, 밈라가라가 충주에 천도하였던 이증이요, 「신라본기」 진흥 십오년(기원 오백오십사년)에 「백제여가량래공관성」을 기한바, 가량은 또한 밈라가라를 가리킨 것이요, 관성은 백제의 고시산 - 금 옥천 - 구양의 부근이니, 이때의 밈라가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옥천을 침은, 장차 금 영동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고령의 옛 서울을 찾아가려다가 패몰한 것이니, 이는 밈라 가라가 충주에 천도하였던 삼증이니라. 밈라가라가 비록 멸망하였으나, 강수(강수)의 문학과 우륵(우륵)의 음악으로 이름을 전하여 육가라 중 가장 칭도할 만한 나라이다.
구지·벌뫼·고링 삼 가라는 『삼국사기』 「지리」에 다만 「신라에게 멸하다.」 쓰고 하시임을 말하지 아니하였으나, 구지는 안라가라와 가까운즉 그 운명이 밈라가라와 같았을 것이니, 육가라가 이미 멸함에, 신라가 계립령 이남을 전부 통일하여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혈전을 시작 하니라.
제이장 양령 이북 십군 쟁탈문제-고·백·신 삼국간 일백년전쟁과 지나(중국) 수·당 양대 입구 끄나풀이 된 문제-
(일) 무녕왕의 북진, 고구려의 궁축
백제 동성대왕이 비록 반신 백가(백가)에게 암살되었으나 그 아들 무령왕이 또한 영무하여 곧 백가(백가)의 난을 토평하고 동년에 고구려의 불비를 타, 달솔 부여 우영(우영)으로 하여금 정병 오천으로써 고구려 수곡성 - 금 신계를 습파하고, 그 뒤에 수년에 장령 - 금 서흥 철령을 차지하여 성책을 세워 예를 방비하니, 이에 백제의 서북이 금 대동강에 미치어 근구수대왕 시대의 구관을 회복하고, 기원오백오년에 고구려문자왕이 그 치욕을 씻으려 하여 대병으로써 침입하여 가불성(금 미상)에 이르거늘, 왕이 정병 삼천으로써 출전하니, 고구려인이 병수의 소수임을 보고 방비를 설치 아니하거늘, 왕이 기계를 내어 이를 급격하여 대파하여 십여년 동안 고구려가 다시 남범치 못하더라. 왕이 그 틈을 타 내외 유식자를 몰아 농무에 일하게 하며, 제방을 수축하여 수전을 일궈 부고가 더욱 충실하고, 서로 지나(중국)와 서남으로 인도·대식 등 국과 통상하여 문화도 상당히 발달하니, 대왕 향국 이십사년은 또한 백제의 황금시대라 칭할 것이다.
(이) 안장왕의 련애전과 백제의 퇴패
고구려 안장왕은 문자왕의 태자니, 그 태자 되었을 때에 일찍 상인의 행장을 차리어 가지고 개백현 - 금 고양·행주에 유역하더니, 당지의 장자 한씨의 딸 한주(한주)는 절세의 미녀라, 안장왕이 백제 정리의 눈에 띄어 한씨의 집에 도망하여 숨었다가 한주(한주)를 보고 경희하여 드디어 잠통하여 부부의 약을 맺고, 가만히 주에게 「나는 고구려대왕의 태자니, 귀국하면 대병으로써 이 땅을 취하고 그대를 맞아 가리라」 하고 도귀하였다. 도귀하여는 문자왕이 죽고 안장왕이 계위하여 자주 장사를 보내어 백제를 쳤으나, 늘 패전하고 왕이 친정하여 또한 성공치 못하였다.
그런데 당지의 태수가 한주(한주)의 미함을 듣고 한주(한주)의 부모에게 청하여 주와 결혼하려 하거늘, 한주(한주)가 죽기를 결심하고 거절하나 부모의 강박과 태수의 진노가 비상하였다. 한주(한주)가 할 수 없어 「자기가 이미 정둔 남자가 있어 원방에 나아가 돌아오지 못하였으나, 그 남자의 생사나 안 뒤에 결혼 여부를 말하겠다」 하더니, 태수가 더욱 대노하여 가로되 「그 남자가 누구이냐? 어찌 하여 직언치 못하느냐? 이는 반드시 고구려의 간첩인 고로 말을 못함이 아니냐? 적국의 간첩을 통하였은즉, 너는 죽어도 죄가 남겠다」 하고 옥에 가두어 사형으로써 위협하며, 일변은 또 온갖 감언으로 꾀였다. 한주(한주)가 옥중에서 노래하여 가로되, 「죽어죽어 일백번 다시 죽어 백골이 진토되고 넋이야 있든 없든 님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하니, 듣는 자가 다 눈물을 흘리나 태수는 이 노래를 듣고 더욱 한주(한주)의 뜻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 죽이기로 결정하더라.
안장왕이 한주의 갇힘을 밀탐하여 알고, 짝 없이 초작하나 구할 법이 없어, 제장을 조하여 가로되, 「만일 개백현을 회복하여 한주(한주)를 구하는 자가 있으면 금천금과 만호후의 상을 주리라」 하니, 응하는 자가 없었다. 왕의 친매가 있어 안학(안학)이라 명하니, 또한 절세미인이라. 늘 장군 을밀(을밀)에게 가하려 하며, 을밀(을밀)도 또한 안학(안학)을 취하려 하나, 왕이 을밀(을밀)의 문벌이 저미하다 하여 허치 아니하므로 을밀(을밀)이 병을 탁하고 벼슬을 버리고 가거하더니, 이에 이르러 왕의 조를 듣고, 왕께 조견하여 가로되, 천금의 상과 만호의 후가 다 신의 소원이 아니오. 신의 소원은 안학(안학)과 결혼하는 것뿐이올시다. 신이 안학(안학)을 사랑함이 대왕이 한주(한주)를 사랑함과 마찬가지니, 대왕이 만일 신의 소원대로 안학(안학)과 결혼케 하시면, 신도 또한 대왕의 소원대로 한주(한주)를 찾아 올리리이다 하니, 왕이 안학(안학)을 아끼는 마음이 마침내 한주(한주)를 사랑하는 생각을 대적하지 못하여, 드디어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고 을밀(을밀)의 청을 허하더라.
을밀(을밀)이 해병 오천으로써 해로로 떠날 새, 왕께 고하여 가로되, 신이 먼저 백제를 쳐 개백현을 회복하고 한주(한주)를 살리리니, 대왕은 대병으로써 천천히 육로로 쫓아오면 불과 수십일 내에 한주(한주)를 만나리다 하고, 비밀히 감사자 이십인을 뽑아 미복에 무기를 감춰 가지고 미리 앞서 개백현에 들어가니, 태수는 깨닫지 못하더라. 그 생일에 관리와 친우를 모아 크게 잔치를 열고, 오히려 한주(한주)의 마음 돌림을 바라 사람을 보내어 꾀어 가로되,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오늘 너를 죽이기로 정하였으나, 네가 마음을 돌리면 곧 너를 살리리니, 그러면 오늘이 너의 생일이라 함도 가하지 않느냐. 한주(한주)가 대답하여 가로되, 태수가 한주(한주)의 뜻을 빼앗지 않으면 태수의 생일도 되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태수의 생일이 곧 한주(한주)의 사일이 될 것이요. 한주(한주)의 생일이면 곧 태수의 사일이 될 것이올시다 하더라. 태수가 듣고 대노하여 빨리 행형함을 명하더니, 을밀(을밀)의 장사들이 무객으로 가장하고 연석에 들어와 칼을 빼어 다수한 빈객을 살상하고 고구려병 십만이 입성하였다 외치니, 성중이 대란하는 지라. 을밀(을밀)이 이에 군병을 몰고 성을 넘어 들어와 옥을 부수고 한주(한주)를 내어 놓으며, 성중의 부고를 봉하여 안장왕의 옴을 기다리며 한강 일대의 각 성읍을 쳐 항복하니, 백제가 크게 진동하는지라. 안장왕이 이에 아무 장애 없이 백제의 열군을 지나 개백현에 이르러 한주(한주)를 취하고 안학(안학)을 을밀(을밀)에게 배하니라.
이상은 해상잡록에 보인 것이다. 『삼국사기』에 「본기」에는 비록 안장왕이 개백현 금 행주를 점령하였다는 말이 없으나, 그 「지리사」의 개백현 주에는 「개백현 일명왕봉현 한씨미녀 우안장왕지지」주26)라 하고, 달을성현 주에는 「한씨미녀 점봉화 영안장왕지처 고후명 고봉」주27)이라 한바, 한씨는 곧 잡록의 한씨일 것이요. 한씨 미녀는 곧 한주(한주)일 것이요 달을성은 금 고양이니, 곧 을밀(을밀)이 개백현을 점령하고 대왕으로 하여금 한주(한주)를 맞던 곳일 것이며, 그러나 개백은 「가맛」으로 독한 것이니, 「가」는 고구려에서 왕이나 귀인을 칭하는 명사요 「맛」은 만나 본다는 뜻이니, 개는 음이 「개」인 고로 그 음의 상중성을 빌려 「가맛」의 「가」로 씀이니, 하문의 개차정 일명 왕기현이 더욱 「개」가 「왕」의 의임을 증명하며, 「백」은 의가 「맛」인 고로 그 의의 전성을 빌려 「가맛」의 「맛」으로 씀이니, 그러면 「개백」은 이독자로 쓴 「가맛」이요 「왕봉」은 한자로 쓴 「가맛」이니, 「가맛」은 곧 한주(한주)가 안장왕을 만나 본 뒤의 이름이거늘, 사가들이 그 본명을 잊고 또 이독문의 독법을 모르므로, 드디어 개백을 안장왕 이전의 명칭으로 쓴 것이니라. 백제본기 성왕 칠년(안장왕 십일년)에 고구려가 북비 혈성을 발하다 하니, 혈성은 혈구 - 금 강화니, 이것이 곧 을밀(을밀)이 행주를 함락하는 동시에 점령한 것인가 한다.
단심가는 유래로 정포은(포은 정몽주)의 작이라 하나, 우의 기술한 바로 보면 대개 고인의 소작-곧 한주(한주)의 작을 정포은(포은 정몽주)이 창하여, 이조(조선) 태종의 창을 답한 것이요, 포은의 자작이 아닌가 하노라.
(삼) 이사부(이사부)·거칠부(거칠부) 등의 집권과 신·백 양국의 연맹
고구려와 백제가 한창 혈전하는 동안에 신라의 양개 정략가가 나니, 일은 김이사부(김이사부)요, 우일은 김거칠부(김거칠부)니, 『삼국사기』 「열전」에 「이사부(이사부) 혹운 태종」이라 하였으나, 훈몽자회에 「태」를 「잇」으로 훈하였은즉, 「이」 「사」는 음으로 태는 의로 「잇」을 쓰는 것이며, 황은 지금에도 「거칠 황」으로 독하니, 거칠은 음으로 황은 의로 「거칠」을 쓴 것이요, 부는 칠서언해에 매양 사대부를 「사태우」로 음해 하였은즉, 그 고음이 「우」며 종은 의가 마루니, 그러면 이독자의 독법으로 이사부나 태종은 잇우로, 거칠부나 황종은 거칠우로 독할 것이니라.
이사부(이사부)는 기지가 종횡한 자라. 소시에 가슬라 군주가 되었더니, 우산국 - 금 울릉도가 반하거늘, 다 「병을 발하여 토평하자」 하나 이사부(이사부)가 써하되, 우산국은 소도이나 습속이 우한하여 력으로써 복하려면 다수한 군병을 가져야 할 것이니, 계책으로써함만 같지 못하다 하여, 이에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배에 실고 우산국의 부근에 정박하고 고하여 가로되,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놓아 밟아 죽이리라 하니, 우산국이 공하여 강하더라. 그 뒤에 안라·밈라 등 가라를 정복하고 지증·법흥 양 왕조를 역사하여, 진흥대왕 원년(기원 오백사십년)을 당하니, 진흥은 칠세의 소아요 모태후가 섭정하여, 이사부(이사부)가 병부령이 되어 내외병마사를 총지하여 모든 내정 외교를 다 참리하며, 거칠부(거칠부)의 조 잉숙(잉숙)은 「쇠뿔한」(신라 재상의 칭)이요 부 물력(물력)은 아손이니, 왕족으로 세대의 장상가라.
거칠부(거칠부)가 소시에 대지가 있어 고구려를 정찰하려 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고구려에 들어가 각방을 탐정하고 법사 혜량(혜량)의 강당에 참하여 강을 듣더니, 혜량(혜량)은 교힐한 중이라. 거칠부(거칠부)를 달리 보고 사미(새로 중된 자의 칭)가 어디서 왔느냐 묻거늘, 거칠부(거칠부)가 「나는 신라 사람으로서 법사의 이름을 듣고 불법을 배우려고 왔나이다」 하니 혜량(혜량)이 가로되, 노승이 불민하나 또한 그대를 알아보니, 고구려 국내에 어찌 그대를 알아볼 사람이 없으리오. 마땅히 빨리 돌아가라 하며, 또 일후에 거칠부(거칠부)의 소개로 신라의 투항함을 바라더라. 거칠부(거칠부)가 돌아와 한아손(대관명)이 되어, 이사부(이사부)와 함께 국정에 참여하여, 먼저 백제를 결하여 고구려를 파하고, 또 시기를 보아 백제를 습하여 강토 늘리기를 획책하더라.
이때에 백제 성왕이 한강 일대를 고구려에게 잃고 신라와 동맹하려 하니, 무릇 신라가 동맹하였던 육가라를 병탄하였은즉, 성왕이 동맹에 감심함이 아니었겠지만, 당시에 가라가 이미 망하여 동맹할 만한 제삼국이 없으므로 사자를 신라에 보내니, 이사부(이사부)가 흔연히 이를 승낙하여 신라·백제 대고구려 공수동맹이 성립하니라.
(사) 신라의 십군 습취와 신·백동맹의 파열
기원 오백사십팔년에 고구려 양원왕이 예병을 거느리고 백제의 한북 독산성을 치거늘, 진흥왕이 동맹의 약을 따라 장군 주진(주진)을 보내어 정병 삼천으로 부원하여 고구려병을 격퇴하였다. 이때에 한강 이북은 안장왕의 연애전으로 인하여 모두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우의 한북은 하지인가? 이는 대개 금 양성 한래(한자로 역하면 또한 한강)의 북을 가리킨 것이요, 독산성은 금 수원·진위 간의 독산고성인 듯하다.
양원왕이 이 기별을 접하고 다시 대병을 들어 더욱 침입하여, 익년에 금 충청 동북 일대로 들어와, 고구려는 도살성-금 청안을 거하고 백제는 금현성-금 진천을 거하여 해포를 혈전하나 승부가 나지 아니하는데, 신라는 비록 백제와 동맹이나 병안하고 동치 아니하였다. 우 익년 기원 오백오십일년에 돌궐족이 금 몽고(몽골)로부터 동침하여 고구려의 신성과 백암성을 공하여 양원왕이 병을 분하여 장군 고흘(고흘)을 보내 돌궐을 격퇴하는 동안에, 백제 달솔 부여달기(부여달기)가 정병 일만으로 평양을 돌습하여 점령하니, 양원왕은 달아나 장안성을 신축하고 천도하더라. 장안성은 혹 금 평양이라 하나 만일 평양일진데, 이는 양원(양원)이 평양에서 평양으로 달아남이니, 어찌 말이 되리오. 장안성은 대개 금 봉황성이오 당시의 신평양이니, 「안동도호부」(금 요양) 남지평양팔백리가 그것이니라. 고구려본기 평원왕 이십팔년에 장안성에 이도하였은즉, 양원왕은 일시에 파천하였다가 곧 평양에 환도하고, 평원왕에 이르러 다시 장안성-신평양에 이도한 것이니라.
신라가 만일 그 동맹의 의를 다하여 백제와 협력하여 고구려를 쳤다면, 혹 고구려를 멸하였을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신라가 가까운 백제를 먼 고구려보다 더 증악하는 터이며, 또는 백제를 위하여 고구려를 멸하면, 그 결과로 백제가 강성하여 신라로서 대적하기 어려움을 아는 터이다. 그래서 진흥왕이 가만히 백제의 뒤를 습하여, 그 신득지를 탈취하기로 내정하고 병부령 이사부(이사부)로 하여금 금 충청 동북으로 출병하며, 한아손 거칠부(거칠부)로 하여금 구진(구진)·비태(비태)·탐지(탐지)·비서(비서)·노부(노부)·서력부(서력부)·비차부(비차부)·미진부(부진부) 등 팔장군을 거느리고 죽령 이북으로 출병하니, 백제는 이를 동맹국의 출병이라 하여 매우 환영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투쟁에 무슨 신의가 있으랴. 이사부(이사부)가 백제와 합력하여 도살성을 탈환하고는 곧 백제병을 돌습하여 김현성을 함락하며, 거칠부(거칠부)는 병을 분하여 죽령 이외 백제의 각 진영을 습파하고 백제의 점령한 죽령 이외 고현 이내의 십군을 탈취하니, 이에 백제는 닭 쫓던 개의 울 쳐다보는 꼴이라 하기보다, 「독에 든 쥐요 함정에 빠진 범」이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십군만 빼앗길 뿐이 아니라 평양에 공입하였던 수만 대병도 진퇴유곡으로 패망하니라.
우의 전황은 신라가 그 배맹적 행위을 휘하기 위하여 백제의 평양 공파를 「본기」에서 빼버렸으며, 거칠부(거칠부)의 십군 습취를 누구와 싸운 결과임을 쓰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백제 선공파평양」의 칠자를 우연히 남겨 두어, 이것이 「거칠부전」에 게재되어 이를 후세에 소시하게 되었다.
청안 고명은 「도살」 혹 「도서」니, 양자가 다 「돌시울」로 독할 것이며, 진천 고명은 「흑양」, 「금양」, 「금현」, 「금물내」 혹 「만노」니, 우리 고어에 천을 지물이라. 만을 「거물」이라 한바, 진천은 「거물래」인 고로 흑양의 「흑」과 만노의 「만」은 다 「거물」의 뜻을 쓴 것이며, 「금물」 「금물」은 「거물」의 소리를 쓴 것이며, 「양」, 「내」, 「노」는 다 「래」의 소리를 쓴 것이며, 금양·금현의 「금」은 금물을 축한 것이며 현은 금물 내의 산성을 가리킨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 에 금 경기도는 물론이오, 곧 충청도의 충주·괴산 등지까지도 고구려의 강역에 계하였으므로, 근세에 정다산(다산 정약용) 한진서(한진서) 등 제 선생이 다 써하되, 고구려가 금 한강 이남 일보지를 밟아본 때가 없다 하여 『사기』의 오를 공격하였으나, 이 도살성의 점령으로 보면 고구려가 한강을 건너지 못하였다는 말이 어찌 잠꼬대가 아니냐? 그러나 이는 고구려의 일시적 점령이요, 장시간은 곧 황해도까지도 늘 백제의 땅이었으니, 충북 각지를 고구려 주군으로 만든 『삼국사기』가 오 아님은 아니니라.
죽령 이외 고현 이내 십군은 하지인가? 죽령은 금 죽령이요, 고현은 금 지평 용문산의 오치됨이 가하며, 십군은 금 제천·원주·횡성·홍주·지평·가평·춘천·낭천 등 지됨이 가하니, 후래에 신라 구주의 일인 우수주 관내의 군현이 그것이니라.
(오) 백제 성왕의 전망과 신라 탁지확대
신라가 이미 십군을 취하고는 고구려와 강화하고, 작일 동맹이던 백제를 적국을 삼아 그 동북을 침탈하여 금 리천·광주·한양 등지를 취하여 신주를 두니, 백제가 패군하고 고립하였으나 그 분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밈라가라의 유민을 초유하여 국원성 - 금 충주를 할여하여 다시 왕국을 건케 하고, 기원 오백오십사년에 밈라와 합병하여 어진성 - 진산을 쳐 신라병을 파하고 남녀 삼만구천명과 마 팔천필을 노략하고, 나아가 고시산 - 금 옥천을 칠 새, 신라의 신주군주 김무력(김무력)과 삼년산군(금 보은) 고우도(고우도)가 대병으로 부원하거늘, 성왕이 정병 오천을 뽑아 신라의 대본영을 야습하려 하여, 구천(음글래니 옥천의 명이 이로 얻은 자니 금 백마강 상류)에 이르러 신라의 복병을 만나 전패하여 국기나 신라병이 승세를 타 백제의 좌평(대신) 사인과 졸 이만구천명을 참획하니, 백제 전국이 크게 진동하는지라. 신라가 이 뒤에 더욱 백제를 공벌하여 남으로 비사벌 - 금 전주을 쳐 완산주를 두고, 북으로 국원성을 쳐 제이 밈라를 멸하여 그 땅으로 소경을 만들더라. 진흥대왕이 이와 같이 백제를 파하여 금 양주·충주·전주 등 - 곧 금 경기·충청·전라 등 도내의 요지를 얻고, 곧 고구려를 쳐 동북으로 금 함경도 등지와 금 길림 동북을 소유하니, 이에 신라 토지의 광대함이 건국 이래 제일이러라.
『삼국사기』의 「진흥본기」는 년월의 전도와 사실의 탈락이 일이뿐 아니다. 화랑 설치 년조의 틀림은 이미 본편 제일장에 술하였거니와, 십사년 추칠월에 취백제동북도 위신주라 하고, 동십월에 취백제왕녀위소비라 하니, 아무리 교전이 무상한 때이지만 어찌 사개월 전에 전쟁하여 그 토지를 빼앗으며 빼앗기고, 사개월 후에 결혼하여 옹서국이 되었으랴? 하물며 이는 십군 피탈후 불과 삼년이니, 삼년전에 백제가 신라와 화호하다가 그렇게 속고 삼년후에 또 딸을 주어 그 왕으로 사위를 삼았으랴? 십이년에 「왕순수차낭성(금 충주 탄금대 부근)문우륵급기제자니문 지음악 특환지」라 하였으니, 악지에 우륵(우륵)은 성현현(금 청풍)인으로 그 국의 장란함을 알고 악기를 가지고 신라에 투함아 진흥왕이 국원에 안치하다 한바, 대개 우륵(우륵)은 본래에 제일 밈라 - 금 고령의 인으로 제이 밈라에 들어와, 금 청풍의 산수를 악하여 그곳에 주거하다가 제이 밈라가 흥왕치 못할 줄을 알고 신라에 투함에, 진흥왕이 제이 밈라를 토평한 후에 국원에 안치하고 그 후에 순행차에 우륵(우륵)을 불러 탄금을 들은 것이 금에 충주 탄금대가 그 유지요, 국원성 - 금 충주가 신라의 소유됨이 진흥 십육년인즉, 진흥이 우륵(우륵)의 금을 들음도 십육년 뒤일 것이니, 어찌 십이년에 랑성에 순수하여 우륵(우륵)의 금을 들었다 하였는가.
한양 삼각산 북봉에 진흥대왕 순수비가 있으니, 이는 대왕이 백제를 쳐 성공한 유적이거니와, 함흥 초방원에도 진흥대왕의 순수비가 있은즉, 이는 대왕이 고구려를 쳐서 성공한 유적이거늘, 「진흥본기」에 이 같은 대사건이 다 탈락되지 아니 하였느냐? 『만주원류고』와 『길림유역기』에 거하면, 길림은 본신라의 땅이요, 신라의 계림으로 명을 얻은 것이라 하니, 이는 또 진흥대왕이 고구려를 쳐 강토를 개척하여 금 길림 동북까지 가졌던 일증이요, 박연암집에 복건성의 천주·장주가 일찍이 신라의 땅이 되었다 하니, 하서에 거한 말인지 알지 못하여 인용치 못하거니와, 진흥대왕이 혹 해외도 경략하여 이 유적을 끼친 곳이 있는가 한다.
(육) 고구려의 대신라 침략과 우 온달(온달)의 전사
고구려가 평양이 백제에게 함락되던 때에 신라의 청에 응하여 통호하였으나, 밋(이윽고) 진흥대왕이 그 동변을 습하여 남가슬라로부터 길림 동북까지 습거하며 부득이 개전하여 비열홀 금 안변 이북을 회복하였으나, 그 나머지 강토 - 장수대왕이 점령하고, 안장왕 이후에 재점령하였던 계립령 - 금 조령 이서와 죽령 이서의 열군은 끝끝내 찾지 못하여, 당시 용병의 가장 요새인 북한산은 신라가 소유한 뒤로 길이 이 땅을 가지자는 뜻으로 장한성가를 지어 노래하게 됨에, 고구려인이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거의 해마다 병을 동하여 신라를 침하였으나, 마침내 성공치 못하고, 평원왕의 애서 온달(온달)의 전사극이 연출하여 당시의 시인 문사들이 이 일을 이야기하며 노래하며, 이독자로 기록하여 사회에 유전하여 일반 고구려인의 적개심을 더욱 굳세게 하여, 고구려 멸망할 때까지 신라와는 평화가 길이길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제 전사에 재한 온달(온달)의 이야기를 좌와 여히 연술하려 한다.
온달(온달)(구음은 온대니 백산의 의)은 얼굴은 울룩불룩 하고 성도 없는 한 거지라. 거지이지만 마음은 시원하여 집에는 눈 먼 노모가 있으므로 늘 밥을 빌어다가 공봉하고, 그 나머지는 일 없이 거리로 오락가락 하니, 빈천자를 업신여김은 사회의 상정이라. 그러므로 바보도 아닌 온달(온달)을 누구도 다 바보 온달(온달)이라 부르더라.
평원왕의 따님 하나가 있어, 어릴 때에 울기를 즐김으로 평원왕이 사랑 끝에 실없는 말로 달래어 가로되, 오냐 오냐 울지 마라. 울기를 좋아하면 내가 너를 귀가의 며느리로 주지 않고, 바보 온달(온달)의 계집을 만들리라 하여, 울 때마다 이 말을 하였더니, 밋(이윽고) 따님이 장성하여 시집갈 나이 되니, 상부 고씨와 의혼하려 한즉, 따님이 반대하되 「아버지가 늘- 나더러 바보 온달(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였습니까. 만일 이제에 와서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면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죽더라도 바보 온달(온달)에게 가서 죽겠습니다」한다. 평원왕이 대노하여 가로되, 「네가 만승천자의 딸이 아니냐. 만승천자의 딸이 거지의 계집이 된단 말이냐.」 그러나 따님이 듣지 아니 하고 가로되, 「필부도 거짓말이 없는데, 만승천자로서 어찌 거짓말을 하리잇가. 나는 만승천자의 딸인 까닭에 만승천자의 말이 거짓말이 안 되게 하기 위하여 온달(온달)에게 시집가려 합니다」 하는지라. 평원왕이 어찌 할 수 없어 「너는 내 딸이 아니니, 내 눈 앞에 보이지 말라」 하고 쫓아내더라.
따님이 나올 때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다만 금비환 수십개를 팔뚝에 씌우고 나와 벽도 다 무너지고 네 기둥만 우뚝 선 온달(온달)의 집을 찾아 들어갔다. 들어간즉 온달(온달)은 어디 가고 노모만 있거늘, 그 앞에 절하고 온달(온달)의 간 곳을 물으니, 노모가 눈은 멀었지만 코가 있어 그 귀여운 따님의 향내는 맡았으며, 귀가 있어 그 아리따운 미인의 목소리는 듣는 터이라. 이상하게 여기어 그 면주 같이 보드랍고 고은 손을 만지며, 어디서 오신 귀처녀인지 모르거니와, 어찌하여 빌어먹는 헐벗은 내 아들을 찾는가. 내 아들은 굶다굶다 못하여 산으로 느티나무 꺼풀이나 벗겨다가 먹으려고 나가서 지금까지 오지 아니합니다』 하거늘, 따님이 온달(온달)을 찾아 산 밑에를 가, 느티 꺼풀을 벗겨 지고 오는 사람을 만나 곧 온달(온달)인 줄 알고 그 이름을 물은 뒤에 자기의 찾는 이유 - 결혼하려는 회포를 고하니, 온달(온달)이 생각하되 「사람으로서야 어찌 부귀가의 미녀자로서 빈천한 걸인의 서방을 구할 리가 있으랴」 생각하고 소리를 질러 가로되, 「너는 사람 홀리는 여우나 도깨비요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해가 졌으니 네가 나에게 덤비는 것인가 보다」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돌아와, 사립문을 딱 닫아 매고 들어가서 나오지 않거늘, 따님이 그 문밖에서 한 - 잠을 자고 그 이튿 날 또다시 들어가 간청하니, 온달(온달)은 대답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기만 하고, 노모가 가로되, 내 집 같이 가난한 집이 없고 내 아들보다 더 천한 사람이 없거늘, 그대가 일국의 귀인으로서 어찌 가난한 집에서 서방을 섬기려 하느냐? 따님이 가로되, 「종이장도 마주 든다 하니, 마음만 맞으면 가난하고 천한 것이 무슨 관계가 있으랴」 하고 드디어 금천를 팔아 집이며 밭이며 논이며 종이며 소며 기타 모든 것을 사, 빌어먹던 온달(온달)이 하루에 부아가 되더라.
그러나 따님은 온달(온달)을 한갓 부아만을 만들려 함이 아닌 고로 온달(온달)더러 기사를 배우기 위하여 마를 사오라 하였다. 이때는 전국의 시대인 고로 고구려에서도 마정을 매우 중시하여, 어구의 마를 국마라 하여 잘 먹이고 잘 기르고 화미한 굴레를 씌우나, 다만 대왕이 마를 타다가 상하면 목자와 어자를 죄하는 고로, 목자와 어자들이 매양 효건한 준마가 있으면 이를 굶기고 때리어 병마를 만들어 버리는 일이 많다. 따님이 비록 심궁의 처녀이지만 이런 폐단을 잘 아는 고로 마를 살 때에 온달(온달)더러 「시마를 사지 말고 버리는 국마를 사오라」 하여, 따님이 몸소 먹이고 다듬어 마가 날로 비장하고, 온달(온달)의 기사술도 날로 진보하여 명사 숙수가 온달(온달)에게 양보하더라.
삼월 삼일 신수두 대제의 경기회에 온달(온달)이 참예하여, 기마에 우등하며 사냥해 잡은 금록도 가장 다수되니, 평원왕이 불러 그 이름을 물어 온달(온달)인 줄을 알고 크게 경탄하나, 그래도 따님에 대한 분노가 아주 풀리지를 아니 하여 아직 사위로 인정하지 않더니, 그 뒤에 주(우문씨) 무제가 지나북방을 통일하여 위무를 빛내고, 고구려의 강함을 샘하여 요동에 침입하거늘, 배산의 들에서 영전할 새, 어떤 한 사람이 홀로 용감하게 전투하여 칼질이 능란하고 활법도 신묘하여 수백명 주병을 참획함을 보고, 알아보니 곧 온달(온달)이라. 왕이 탄식하여 가로되, 이것은 참 내 사위라 하고 이에 온달(온달)을 불러 대형을 배하고 총애가 극진하더라.
밋(이윽고) 영양왕이 즉위함에, 온달(온달)이 아뢰어 가로되, 「계림령·죽령 이서의 토지가 본디 우리 고구려의 소유 토지로서 신라에 빼앗겨 그 땅의 인민들이 늘- 통한하여 부모의 국을 잊지 못하니, 대왕은 신더러 불초하다 마시고 군사를 주시면 한 번 걸음에 그 땅을 회복하리다.」 영양왕이 허락하니, 장차 출발할 새, 온달(온달)이 군중에서 서하여 가로되, 「신라가 한수 이북의 우리 토지를 빼앗았으니 이번 걸음에 만일 이를 회복치 못하면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고 아차성(금일 경성 부근의 광진 상의 아차산) 아래 이르러 신라병과 접전하다가 유시에 맞아 죽으니라. 환장하려 하니 상구가 땅에 꽉 붙어 떨어지지 아니하거늘, 따님이 친임하여 울어 가로되, 국토를 못 찾고서야 임이 어찌 돌아가랴. 임이 아니 돌아가는 데야 이 첩이 어찌 홀로 돌아가리오 하고, 또한 졸도하여 깨어나지 않는지라. 고구려인이 이에 따님과 온달(온달)을 그 땅에 병장하니라.
상구가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을 리가 있을까. 당시에 치상하는 사람들이 온달(온달)의 상구를 가지고 돌아가려 할 새, 온달(온달)의 애국의 충렬에 느끼며, 또 그 전일 온달(온달)의 「계림령·죽령 이서가 고구려로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던 말을 생각하고 차마 상구를 들지 못하므로, 드디어 상구가 땅에서 떨어지지 아니 한다는 현상을 이름이니라.
『삼국사기』 「온달전」 에 말단에는 「공주래 무관왈 사생결의 오호귀의 수거이폄」주28)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만일 이같이 공주가 「사자·생자의 길이 다르단 말 뿐으로 울었다 하면, 공주가 국토에 대한 열정만 없을 뿐 아니라 부에 대한 애도 너무 담박하다 할 것이며, 온달(온달)의 상구가 이 말에 동하였다 하면 온달(온달)이 국토의 회복을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요, 상사병에 걸리어 죽은 것이니, 공주 평일에 전마를 사 온달(온달)을 가르치던 본의가 무엇이며, 온달(온달)이 안은한 부귀를 버리고 전쟁에 나선 진정이 어디 있느냐.」
『조선사략』에는 「국토미환 공능환 공기미환 첩안능독환 일통이절 고구려인 수병장공주어기지」주29)라 하니, 조선사략은 물론 시대의 거리상으로는 그 준신할 가치가 『삼국사기』만 못하나, 이 일단의 문구는 군국시대의 사상을 그린 것인 고로, 본저에서 이를 취용하노라.
「정다산(다산 정약용)·한진서(한진서) 제 선생이 온달의 한수 이북 …이란 말에 의하여 고구려가 한수 이남을 차지하여본 때가 없음」 을 증하나, 그러면 온달(온달)의 「계림령 이서가 우리 땅」이란 말은 무엇으로 해하랴? 고구려가 장수대왕 몇 해와 안장왕 이후의 몇 해에 한수 이남을 점령하였던 것은 명백하니, 온달(온달)의 말한바, 「한수」는 금 한수가 아니라 금 양성의 「한내」니라. 년전에 일본인 금서룡(금서룡)이 북경대학에서 조선사를 강연할 때에 온달전은 역사로 볼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 이는 참으로 문맹의 말이다. 온달(온달)의 죽음으로 인하여 고구려·신라 강화의 길이 끊어지고, 백제가 고구려와 동맹하여 삼국흥망의 국을 이룸이니, 온달전은 삼국시대 유수의 문자이다. 그러나 김부식(김부식)의 가멸첨삭을 지나 그 가치가 얼마큼 줄어졌음은 선독사자의 일반 료해할 뿐이다.
제삼장 동서전쟁
(일) 백제왕손 서동(서동)와 신라공주 선화(선화)의 결혼
기원 육세기 하반에, 백제 위덕왕의 증손 서동(서동)은 준수한 도련님으로 삼국중에 가장 이름이 나고, 신라 진평왕의 둘째 따님은 어여쁜 아기씨로 삼국중에 가장 이름이 난바, 진평왕은 아들은 없이 딸만 몇을 낳은 중에 선화(선화)가 그 같이 어여쁘므로 가장 선화(선화)를 사랑하여, 「신라의 왕됨이 나의 자랑이 아니라 선화(선화)의 아비 됨이 나의 자랑이노라」 하며 늘- 선화(선화)를 위하여 사윗감을 얻으려 할 새, 서동(서동)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선화(선화)의 남편으로 그리며, 위덕왕은 그 증손을 위하여 증손부감을 얻으려 할 새, 또한 선화(선화)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서동(서동)의 아내로 그린다.
가족제도의 시대니, 가족의 어른- 양편의 주혼자로서, 하물며 각이 일국의 대왕으로서 이렇게 생각이 될 때에는 물론 그 결혼이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혼이 쉽지만 않을 뿐 아니라 절대로 되지 않을 사정이 있었다. 설혹 누군가 그 결혼을 제의한다 할지라도 진평왕이나 위덕왕이나 반드시 대노하여 역적놈이라고 처형할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것이 무슨 사정이냐 하면, 신라가 누대 이래로 박·석·금 삼성이 서로 결혼하여 자서중 년장자로 왕위를 물리는 고로, 타성의 딸은 혹 삼성의 집으로 들어올 수 있으나, 삼성의 딸은 타성에게로 나아가지 못하는 터이라. 그래서 소지왕이 백제의 동성대왕에게 딸을 주었다 하지만, 법흥왕이 밈라가라의 가실왕에게 누이를 주었다 하지만, 기실은 친딸 친누이가 아니라, 육부 귀골의 딸이요 누이였다. 그런즉 진평왕이 김씨의 진평의 딸인 선화(선화)의 미래 남편은 박씨가 아니면 석씨, 석씨가 아니면 그 동성인 김씨가 될 뿐이니, 어찌 신라인도 아닌 백제의 부여씨인 서동(서동)의 아내가 될 수 있으랴. 이는 선화(선화)편의 사정이요.
백제는 신라와 같이 결혼에 관하여 성자상 엄혹한 제한은 없으나, 위덕왕의 아비 성왕을 죽인 자가 누구냐 하면, 곧 진평왕의 아비인 진흥대왕이요, 진흥대왕은 누구냐 하면 곧 성왕의 사위이었다. 증손부 며느리를 어디서 데려오지 못하여 아비 죽인 원수 놈의 손녀를 데려오랴, 장인을 죽이던 고약한 사위 놈의 손녀를 데려오랴, 엄중한 심리상의 꾸중이 있으니, 서동(서동)의 미래 아내가 백제의 목씨·국씨 등 팔대성의 여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혹 민가의 여자가 될지언정, 어찌 전대 원수인 진흥대왕의 자손이 될 수 있으랴. 이는 서동(서동) 편의 사정이요.
백제나 신라의 군신들이 거의 피차 전쟁에서 상살하던 자의 자손인즉 다 그 결혼을 반대하리니, 이것도 양편이 결혼할 수 없는 부속한 사정이다. 사정이 이러함을 불구하고 서동(서동)은 커갈수록 백제왕가에 태어나지 않고 신라의 민가자제로나 태어났다면 선화(선화)의 얼굴이라도 한 번 쳐다 볼 것을, 선화(선화)의 눈에 내 꼴이라도 한 번 보일 것을 하는 생각이 머리를 찔러, 마침내 백제 왕궁을 도출하여 신라 동경 금 경주를 찾아갔다. 가서는 머리를 깎고 어느 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이때에 신라에서 불교를 존숭하며, 왕이나 왕의 가족들이 궁중에 중을 청하여 제도 올리며 백고좌를 베풀고 대화상의 설법도 듣는 때라. 그래서 서동(서동)이 법연을 기회하여 오래 그리던 선화(선화)와 만날 길을 얻었다. 만나서 두 눈이 마주치자, 선화(선화)는 「백제 서동(서동)이 사랑스러운 사내라더니, 아마 서동(서동)도 저 중만 못할 것이다. 내가 오늘부터는 서동(서동)의 생각을 버리고 저 중을 그리게 된다.」 서동(서동)은 「내가 네 남편이 되지 못할진대 죽어버리리라. 너도 내 아내가 되지 않으려거든 죽어버리어라」 하고, 두 마음이 서로 맺혔다.
그래서 서동(서동)이 선화(선화)의 시녀에게 뢰물하여 밤을 타 선화(선화)의 궁에 들어가 사통함을 얻었다. 선화(선화)는 서동(서동)이 아니고는 다른 사내게는 아내가 되지 않으리라 하며, 서동(서동)은 선화(선화)가 아니고는 다른 여자의 남편이 아니 되리라 하는 겹겹의 맹세가 있었지만, 그러나 주위의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데야 어찌 하랴. 서동(서동)과 선화(선화)가 상의한 결과에, 「차라리 이 일을 들어 세상에 광고하여 세상에서 허하면 결혼하려니와, 그렇게 되지 아니하면 함께 죽으리라」작정하고 서동(서동)이 가끔 엿(이)과 밤(율)과 기타 실과를 많이 사가지고 가시로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꾀여 「선화(선화) 아기씨님은 염통이 반쪽이라네. 본래는 온통이었지마는 반쪽은 떼어 서동(서동)을 주고, 반쪽은 남기어 자기가 가졌으나 상사병을 앓고 있다네. 서동(서동)아 어서 오소서. 어서 오시어 염통을 도로 주사, 선화(선화) 아기씨를 살리소서」 하여 일조의 그 노래가 신라 동경의 곳곳에 퍼지어 모르는 자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선화(선화)는 그 부 진평왕에게 자백하며 서동(서동)은 귀국하여 그 증조 위덕왕에게 직고하여, 만일 다른 방면에 결혼을 제의하면 죽기로 거절하니, 위덕왕이나 진평왕이 다 처음에는 조부모나 부모나 모르는 남녀 사통은 가정의 대변이라 하여, 곧 사형을 내릴 듯하다가 그래도 애녀 애손을 어찌 하랴? 진평왕은 박·석·김 삼성의 결혼습관을 타파하며, 위덕왕은 선부의 구를 잊고 서동(서동)과 선화(선화)의 결혼을 허하여 양국 왕실이 다시 새 사돈이 되니라.
(이) 결혼 후 약 십년의 양국동맹
양국이 결혼한 뒤에 매우 친밀하게 화호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그렇다는 말이 없으니, 이는 신라가 후래에 고타소낭(고타소랑)의 참사(차장 참고)로 인하여 백제를 통한함이 심하여, 밋(이윽고) 백제를 멸하고는 그러한 기록을 모두 소탕하여, 신라 왕가의 여자로서 백제에 출가한 자취를 엄닉하여 버린 까닭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거하면, 서동(서동)이 선화(선화)공주의 미염함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에 와 노래를 지어 군동을 꾀여 부르게 하였다 하며, 여지승람에 무강왕이 진평왕 녀 선화(선화)공주를 취하여 용화산에 미륵사를 지음에,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어 도왔다 하고, 『고려사』 「지리지」 에 후조선 무강왕 기준(기준) 비릉은 세인이 말통대왕릉이라 한다 하고, 주에 혹 백제 무왕의 소명이 서동(서동)이라 한다 하였으니, 무릇 서동(서동)이 백제의 왕위를 물려 받아, 사십이년만에 붕서하여 익를 무왕이라 하였은즉, 무강왕은 후조선 기준(기준)이 아니라 곧 무왕의 오요. 서동(서동)과 말통(말통)은 이독자의 독법으로 독하면, 서동(서동)의 「서」는 의를 취하고 「동」은 음을 취하여 「마동」으로 독할 것이며, 말통 이자가 다 음으로 마동으로 독할 것인즉, 말통대왕은 곧 무왕 서동(서동)과 선화(선화)공주의 합장한 릉이다.
그런데 말통대왕이 왕된 뒤에는 곧 신라와 혈전의 국이 되었은즉, 신라가 혈전의 적국에 대하여 백공을 보내어 사찰 건축에 조역하였을 리가 만무하니, 미륵사의 건축은 대개 서동(서동)이 왕손으로 있어 원당으로 지은 것이며, 그 원당을 지을 때에는 신라· 백제 양 사돈국이 피차 화호하여 고구려에 대한 동맹국이 되었던 고로, 진평왕 원년 내지 이십사년까지는 곧 백제 위덕왕 이십육년 내지 사십오년을 지나, 혜왕 이년, 법왕 이년을 지나 무왕 이년까지는 신라와 백제 사이에 일회의 전쟁이 없었고, 또 양국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수에 사자를 보내어 고구려를 침을 청하여, 수문제·수양제 양대의 침입(제구편 참고)을 기초하니라.
(삼) 동서전쟁 용춘(용춘)의 쟁총과 무왕의 항전
백제가 위덕왕 말년이나 혜왕·법왕의 연간-곧 서동(서동)의 왕증손 되었던 때나 왕손 되었던 때나 왕태자 되었던 때에 늘-신라와 화호하다가, 밋(이윽고) 무왕 삼년 - 곧 서동(서동)이 왕된 뒤, 삼년에는 도리어 신라와 전쟁이 개시되어 백제는 신라의 아모산성-금 운봉을 치고, 신라는 소타·외석·천석·옹잠 - 금 덕유산상에 성책을 쌓아 백제를 막고, 백제는 좌평 해수(해수)로 하여금 사성을 진공하여 신라장군 건품(건품)·무은(무은)과 격전하여, 이 뒤부터는 금 충청북도의 충주·괴산·연풍·보안 등지와 금 지리산 좌우의 무주·용담·금산·지례 등지와 금 덕유산 동의 함양·운봉·안의 등지에 무수한 생명, 재산을 버려, 쇠가 쇠를 먹고 살이 살을 먹는 참극을 연출하매 지하였다.
진평왕은 무왕의 애처의 부니, 속담에 아내에 엎어지면 처가의 말 말뚝에도 절을 한다 하였거든, 무왕이 어찌 자기가 왕되어 정치의 세력을 잡는 날에, 도리어 그 유일한 애처의 부의 왕국을 말 말뚝만치도 보지 안하여, 날마다 병력으로써 유린하려 하였느냐? 신라 왕위의 박·석·김 삼성 상전에, 그 시조 박혁거세(박혁거세) 때부터 판정한 문명의 헌법이 아니라, 처음에는 박·석 이성이 상혼하여 일성의 자서만 왕될 권리를 가졌다가, 그 건국 삼백년 후에 미추니사금이 김씨로서 첨해(점해)의 서가 되어 이성에 가입하여 삼성상전의 국이 되었은즉, 육백년 후에 부여씨가 삼성에 가입하여 사성상전의 국이 됨이 무엇이 불가하리오. 이는 무왕이 신라 왕위를 물릴 권리가 있다 할 것이 (일)이요, 신라가 원래 자·서 연장자로 전왕의 통을 계하는데, 하물며 진평왕은 딸만 있고 아들이 없으며, 비록 맏딸 선덕(선덕)이 있으나 출가한 여승이 되어 정치에 관계하지 아니한즉, 선화(선화)가 비록 둘째딸이지만 선화(선화)의 부 - 무왕은 그 맏사위인즉, 무왕이 신라의 왕위를 물릴 권리가 있다 할 것이 (이)다.
이 두 개의 조건으로 무왕은 신라왕 될 희망을 가졌을 것이요, 진평왕도 또한 왕위를 무왕에게 전할 기도를 가졌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었으면 박·석·김·부여 사성상전의 국이 되어, 신라와 백제가 합하여 일국이 되어 양국 인민이 무의식의 혈전을 면할 것이다. 백제는 부여씨 이하에 (진·국·해·연·목·백·협) 팔대가가 있으나, 기실은 부여씨가 정권을 전주하여 고구려의 벌족공화와 다르고, 신라는 원래 박·석·김 삼성 공화의 국이나 이때에 김씨 일가가 거의 그 왕위상속권을 독점하다시피 된 때니, 양가의 제왕만 마음이 맞으면 양국의 결혼적 연합이 용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일이 어찌 이같이 평순하게 진행되랴. 양국 군신들이 거의 이를 반대하였겠지만, 그 중에 가장 반대의 의견을 품은 자는 김용춘(김용춘)일 것이다. 김용춘(김용춘)은 누구이뇨. 곧 진평왕의 제삼녀 문명(문명)의 남편이니, 선화(선화)가 백제에 시집을 가 멀리 떨어져 있은즉, 진평왕의 애정이 자연히 문명(문명)에게 옮기며, 따라서 제일서 선화(선화)의 남편 서동(서동)보다 제이서-문명(문명)의 남편 김용춘(김용춘)을 더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만일 신라 왕위가 서동(서동)에게 가지 않으면 곧 자기에게 돌아올 필연성을 가졌은즉, 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이를 저희하였을 것이다. 그 반대가 성공하여 진평왕이 드디어 서동(서동)에게 왕위를 물릴 생각을 타소하고, 그 출가위승한 장녀 덕만(덕만) - 곧 선덕대왕을 불러다가 왕태녀를 삼고 김용춘(김용춘)을 중용하여, 장래 명위는 선덕(선덕)에게 있을지라도 실권은 김용춘(김용춘)에게 있게 하였을 것이니, 그 김용춘(김용춘)에게 왕위상속할 명의를 주지 않고 덕만(덕만)에게 준 것은 물론 서동(서동)의 감정을 융화하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동(서동)도 일개 총명한 인물이니, 어찌 이런 수단에 속으랴. 그러므로 그 즉위 후에 김용춘(김용춘)을 죽이려 하여 병을 발하여 신라를 침에, 김용춘(김용춘)이 처음에는 후면에 숨어 진평왕의 유심옥에서 참모하다가, 말래에는 내성사신으로 대장군을 겸하여 실지의 전선에 출현하여, 피차의 악전고투가 거의 해마다 계속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동서전쟁이니라.
(사) 동서전쟁의 희생자 우 전쟁은 전술과 같이 양 동서간의 왕위쟁탈의 전쟁
양 개인의 비렬한 이기주의의 충돌에 불과하지만, 명의는 국가와 민족의 흥망을 비추어, 피차 그 국내의 인심을 고동하며 명예와 작록으로 사사를 사므로, 일변의 비애에 우는 인민이 있음에 불구하고, 일변에 공명에 춤추는 장사가 적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여지승람의 영평 부자연의 고적에 거하면, 신라가 전쟁이 지리하여 민가 정남들이 매양 전쟁에 가면 누차의 고기를 지나도 돌아오지 아니하는 고로, 어느 노부가 누년만에야 그 아들이 전장에서 돌아온다는 기별을 듣고 마중을 나갔다가, 이 연상의 바위 위에서 부자가 서로 만나, 서로 안고 울며불며 오래하며 그리던 자애의 정과 생활의 인난을 하소연하다가, 암하에 떨어져 이 못에 수장한 고로 「부자연」이라 명칭하였다 하며, 『삼국사기』 「설씨녀전」 에 거하면, 설씨여는 한문단족이라, 용안은 염미하고 지행이 수정하여, 견자가 다 흠이하나 감히 범치 못하더니, 진평왕 때에 그 노부가 원지에 방수로 가게 되므로 설녀가 걱정되어 린가 소년 가실(가실)에게 고한즉, 가실(가실)이 대행함을 청하였다. 설녀의 부가 이 말을 듣고 대희하여 가실(가실)과 그 딸을 결혼하려 하나, 설녀가 가실(가실)더러 「전장에 가면 한기 삼년만에 돌아오리니 돌아와 결혼하자 」하여, 가실(가실)이 허락하고 자기의 소유인 마를 설녀에게 주고, 후일의 표신으로 거울을 중분하여 가실(가실)과 설녀가 나누어 가졌다. 밋(이윽고) 가실(가실)이 방수소에 가서는 삼년을 곱치어 육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는지라, 설부가 그 딸의 일을 민망히 여겨 타인에게 의혼할 새, 설녀가 불청하나 부는 강제하였다. 설녀가 도망하려 하여 가실(가실)이 준 마를 타려고 하더니, 이때에 가실(가실)이 곧 달리어 들어 돌아오는데, 의복이 남루하고 형용이 고고하여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는데, 가실(가실)이 곧 달라 들어 깨어진 거울을 주어 합하여 보고 설녀(설여)와 가실(가실)이 서로 호읍하고 성혼하다 하였다.
이상 양단의 기록이 비록 당시 전국시대의 정황의 만분일에 불과하나, 또한 그 인민수고의 경색을 그릴 수 있다. 그러나 무사사회는 이와 전이하니, 하에 이를 약기하리라.
(가) 귀산(귀산)은 파진간 무은(무은)의 자요 사량부(육부의 일)인이라. 소년 추항(추항)과 우선하여 함께 원산법사(원산법사)에게 나아가 교를 청하니, 법사 가로되 불교에 십계가 있으나, 여등은 남의 신자가 되어 봉행치 못하려니와, 화랑의 오계가 있어 가로되 「군을 충으로 섬기며, 부를 효로 섬기며, 우는 신으로 사귀며, 전에는 용으로 나아가며, 생물을 살상함에는 가림이 있어라」 하였으니, 여등은 이를 봉행하라 하더니, … 진평대왕 건복 십구년(기원 육백이년)에 백제가 내침하여 아모성 - 금 운봉을 공위하므로, 왕이 파진간(관명) 건품(건품)·무은(무은) 등을 보내어 방어할 새, 귀산(귀산)과 추항(추항)도 종행하였더라. 그런데 백제가 거짓 패하여 천산 - 금 함양으로 퇴각하여 복병으로써 신라의 추병을 격파하고, 철구로써 무은(무은)을 얽어매어 생금하려 하거늘, 귀산(귀산)이 외쳐 가로되 우리 스승이 나를 가르치신바, 전에 용하라 하였으니 어찌 감히 퇴하려 하고, 추항(추항)과 함께 창을 들어 력전하여 적 수십인을 죽이며, 부 무은(무은)을 구하고 … 금창이 몸에 가득하여 중로에서 죽다.
(나) 찬덕(찬덕)은 모량부(또한 육부의 일)인이라. 용지와 영절이 있더니, 진평왕 건복 이십칠년에 가잠성주가 되어, 명년 십월에 백제의 침입을 만나 피위한 지 백여일이라. 왕이 상주·하주·신주의 병 합오만을 발하여 왕구케 하나 전패하여 인환하거늘, 찬덕(찬덕)이 통분하여 사졸더러, 「삼주 군장이 적의 강함을 보고 진치 못하며, 성의 위함을 보고 구치 못하니, 이는 의가 없음이라. 의가 없이 사는 것은 의가 있게 죽는 것만 못하다」 하고, 이에 양식이 다함을 불고하고 시육을 먹으며 오줌을 마시며 력전하다가, 익년 정월에 인력이 더 할 수 없이 다함에, 드디어 머리로 괴수를 받아 골이 깨어져서 죽으니라. 가잠성은 금 괴산이니, 괴산은 혹 찬덕(찬덕)의 머리로 괴수를 받은 까닭으로 지은 지명이니라.
(다) 해론(해론)은 찬덕(찬덕)의 자이니, 진평왕 건복 삼년에 금산당주로 한산주도독 변품(변품)과 함께 가잠성을 회복하려 할 새, 겨우 교전됨에, 해론(해론)이 가로되 이는 오부의 죽은 곳이라 하고, 단병으로 달리어 나아가 수인을 죽이고 죽으니, … 시인 들이 장가를 지어 적하더라.
(라) 눌최(눌최)는 사량부인이니, … 진평왕 건복 사십일년에 백제 대병이 침입하여 속함·앵잠·기잠·봉잠·기현·용책 육성을 공하거늘, 왕이 상주·하주·귀당·법당·서당의 오군을 명하여 부구하더니, 오군장이 백제의 병진이 당당함을 보고 감히 진치 못하며, 그 중 일장이 건의하여 가로되 「대왕이 오군으로써 우리 제장에게 위하여 국가의 존망이 이 싸움에 있는바, 가커던 진하고 난커든 퇴하라 함이 병가의 언이니, 이제 적세가 강성한데 만일 진하다가 패하면 후회한들 쓸 데 있으랴? 」함에 제장이 다 그렇다 하고 돌아가려 하니, 너무 면목이 없으므로 이에 노진성을 쌓고 돌아가더라. 이에 백제가 더욱 급공하여 속함·기잠·용책 삼성을 함락하거늘, 눌최(눌최)가 기현·앵잠·봉잠 삼성을 고수하다가 오군장이 다 퇴환함을 듣고 분개하여 사졸더러 가로되, 「양춘이 되면 초목이 다 번화하지만 융동이 되면 송백이 홀로 푸르니, 이제 구병은 없고 삼성은 고위하니 이는 지사와 의부의 립절할 날이니 여등은 어찌 하려느냐? 」사졸이 다 눈물을 뿌리고 공사함을 서하더라. 밋(이윽고) 성이 함락되어 군사의 생존한 자가 기인이 못되나 오히려 역전하다가 죽더라.
이상 사역은 곧 신라의 파진간이나 도독이나 오군대장 들이 출동한 동서전쟁에 관한 충신의사의 약사이다. 백제에 재하여의 대전역인 고로 사에 특기한 것이니, 이밖에 소소 전역이 거의 빈 날이 없었으며, 백제사는 대개 결망하여 알 수 없으나 백제가 신라보다 강한한 호전국인즉, 그 희생된 충신의사도 신라보다 많을 것이다. 그러나 양 동서 - 곧 양 개인의 이기주의를 성취하기 위하여 다수한 인민을 죽이는 전역에 희생된 충신 무사 들이니, 이 시대의 충신의사도 또한 가치없는 충신 의사 들이라 할 것이다.
제구편 고구려 대수전역
제일장 임유관전역
(일) 고·수전쟁의 원인
세력과 세력이 만나면 서로 충돌되는 것은 공리요 정리다. 고대 동아세아에 있어서 비록 다수한 종족이 대립하였으나, 다 무무미개한 유목의 만족 들이라 혹 일시 정치상 세력을 가진다 할지라도 문화가 없으므로, 뿌리 없는 나무와 같이 밋(이윽고) 그 붕괴하는 날에는 다시 계속할 터까지 없어질 뿐이거니와, 토착의 민족으로 장원한 역사와 상당히 발달한 문화를 가진 자는 지나(중국)와 조선이니, 지나(중국)와 조선은 고대 동아세아의 양대 세력이니, 만나면 어찌 충돌이 없으랴. 만일 충돌이 없는 때라 하면 반듯이 피차 내부의 파열과 불안이 있어, 각히 그 내부의 통일에 바쁜 때일 것이다.
상고는 말할 것 없거니와, 고구려 건국 이래로 조선은 아직 봉건상태에 있어 열국이 서로 침벌하므로 외정할 힘이 없고, 지나(중국)는 한이 통일하여 외정할 힘이 넉넉하므로 한의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가장 잦았고, 태·차 양대왕 때에는 고구려가 비록 조선을 통일하지 못하였으나, 국력이 매우 강성하여 조선 안에서 거의 대등될 세력이 없으므로, 한을 쳐 요동을 점령하는 동시에 직예·산서 등지도 그 침략의 범위가 되었고, 미기에 왕위쟁탈의 난이 중첩하여 마침내 발기(발기)가 요동으로써 공손도(공손탁)에게 항하여, 고구려가 가장 인민이 집취한 고유한 토지를 잃어 약국이 되었으므로, 그 약국의 지위를 면하려 하여, 조조(조조) 자손의 위나 모용씨의 연 - 곧 지나(중국) 북방 나라에 향하여 도전하는 동안에, 백제와 신라가 남방에서 궐기하여 고구려와 대등되는 세력을 가졌었고, 밋(이윽고) 고국양·소수림·광개 삼 태왕이 일어나 요동을 쳤고, 또 서북으로 계단을 정복하고 열하 등지를 점령하며, 장수태왕이 칠십년간 민력을 휴양함에 인구가 번식하고 국력이 팽창하여 지나(중국)와 쟁형할만하나, 그러나 남방사국의 대고구려 공수동맹이 생기어 후면의 견제를 받으므로, 장수태왕 이래로 드디어 북진주의를 버리고 남방통일에 전력하였었다. 만일 이때에 지나(중국) 대륙이 통일 되었으면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빈번하였겠지만, 지나(중국)도 남북으로 분립하여 산해관 이동을 엿볼 사이가 없었으므로, 위 탁발씨(척발씨)의 백제 침입(제 칠편 제이장 참고)과 주 우문씨(우문씨)의 고구려 침입[곧 온달(온달)이 격퇴] 같은 일시적 침입은 있었으나, 피차의 흥망을 다투는 계속적 혈전은 없었다.
그러나 기원 오백구년 경에 이르러, 주 우문씨의 제위를 빼앗은 수문제 양견(양견)이 진[지나(중국) 강남 육조의 일]을 병탄하고, 전지나(중국)를 통일하여 강대한 제국이 되어 지나(중국) 이외의 국을 깔봄에, 북방의 돌궐이나 남방의 토곡혼은 다 쇠약하여 지나(중국)에 대하여 신례를 잡을 뿐이요, 오직 동방의 고구려란 제국이 가장 강성하여 지나(중국)와 대항하니, 어찌 피 편오자존한 지나(중국) 제왕이 참을 것을 바라랴[수의 황가와 장상들이 거의 선비종이나 지나(중국)에게 동화한 지 이구]. 이것이 수병 입구의 제일 원인이 되니라.
백제와 신라는 누십년 피차 풀지 못할 만한 구수를 맺었지만, 돌연히 옹서의 나라(제팔편 제일장 참고)가 되어 피차 화호하고 양국이 다 고구려를 미워하여, 양국이 매양 사자를 수에 보내어 고구려 치기를 청하며, 또 가끔 고구려 국정의 허실을 알려주어 수의 군신의 야심을 조장하였으니, 이것이 수병 입구의 제이원인이 되니라.
후래 신라가 당에게 망치 않고 그 구구한 반독립이나마 가지고 온 것은, 고구려의 다년 견인한 저항과 연개소문(연개소문)의 맹렬한 진공이 있던 까닭이니, 만일 고구려가 수에게 망하였다면 백제나 신라가 다 수의 군현이 되고 말았을 뿐이 아니냐. -그러므로 우리가 고사를 읽을 때에 신라·백제의 수에 청원한 사실을 보고 책을 물리고 한숨을 지게 되는 것이니라.
(이) 수문제의 모욕적 서사와 강이식의 북벌의론
기원 오백구십칠년은 곧 고구려 영양대왕 팔년이요, 수문제가 진을 병탄하여 지나(중국)를 통일한 지 십칠년이니, 수가 이즈음에 년곡이 자주 등풍하고 갑병이 매우 충족하여, 고구려에 대하여 자웅을 다투고자 하여 무망을 극한, 패만을 극한 모욕적 서사를 보내었다. 그 대개에 가로되,
「짐이 천명을 수하여 솔사를 애육하여 왕에게 해우를 위임함은, 교화를 선양하여 원로방지로 각이 천성을 수케 함이라. 왕이 매양 사절을 보내어 해마다 조공하니[무릇 타국에 견사를 조공이라 씀은 지나(중국)춘추 이래 상례이다. 이를 그 사책 중에 그랬을 뿐이요, 대등국에 보내는 국서에 쓰지는 못하는 것인데, 이제 고구려의 노를 격하여 일전을 구하려 하므로, 고의로 이 말을 쓴 것], 비록 번부라 칭하겠지만 성절이 미진하다. 왕이 이미 짐의 신인즉 짐의 덕을 닮음이 가하거늘, 그런데 왕이 말갈을 구핍하며 계단을 고금하여 왕의 신첩을 만들고, 짐에게 내조함을 저하여 선인이 의를 모함을 분히 여기니, 어찌 이같이 독해가 심하뇨. 짐의 태부에 공인이 불소하니, 왕이 용코저 할진대 주문하면 얼마라도 보낼 것이거늘(그 부강을 과장하는 말), 왕이 석년에 가만히 재화를 행하며 소인을 이용하고 노수를 사장하며 병기를 수리하니, 이것이 무엇을 위하려 함이냐. … 고구려 일국이 비록 토지가 협하고 인민이 소하나, 이제 왕을 출하면 반드시 다른 속관을 보낼 것이다. 왕이 만일 심을 세하고 행을 이하면 곧 짐의 량신이니, 어찌 반드시 다시 관속을 두랴. 왕은 생각하라. 요수가 넓다 한들 장강과 어떠하며, 고구려병이 많다 한들 진국과 어떠하랴. 짐이 만일 생육을 포함치 않고 왕의 죄과를 책할진대, 일장군을 보냄이 족하니, 무슨 대력이 들까마는 그래도 근근히 효유하여 왕의 자신을 바라노라」
하였더라. 『삼국사기』에는 이 글을 평원왕 삼십이년에 수문제가 평원왕에게 보낸 것으로 기재하였으나, 『수서』에는 수문제 개황 십칠년에 평원왕에게 보낸 것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평원왕 삼십이년은 수문제 개황 십칠년이 아니니, 『삼국사기』에는 연조를 오하였으며, 개황 십칠년은 평원왕의 붕서한 지 칠년 뒤니, 『수서』에는 그 왕대를 오하였다. 린국 제왕의 붕서를 매양 그 보상의 년으로 기하고, 따라서 그 사실 발생의 연조를 이개함은 지나(중국) 춘추 이래의 습관인 고로, 『수서』에 이 같은 오록이 있음이거늘, 『삼국사기』는 평원·영양 양 「본기」의 연조는 고기를 쫓고, 피아 관계된 사실은 전혀 『수서』를 초록할 새, 『수서』에 이 글이 평원왕에게 보낸 글이라 한 고로, 동 『사기』에 드디어 이 글을 평원왕 삼십이년에 이재하여 년조를 오하는 동시에 사실의 관계 인물까지 오록한 것이니라.
영양대왕이 이 모욕의 글을 받고 대노하여, 군신들을 모아 회답할 문자를 보내려 하더니, 강이식(강이식)이 가로되, 이 같이 모만 무례한 글을 붓으로 회답할 글이 아니요, 칼로 회답할 글이라 하고 개전함을 주장하니, 대왕이 이를 낙종하여 강이식(강이식)으로 병마원수를 삼아, 하여금 정병 오만을 발하여 임투관으로 향케 하고, 먼저 예(『수서』의 말갈)병 일만으로써 요서를 침요하여 수병을 유하며, 계단병 수천으로써 바다를 건너 금 산동을 치게 하니, 이에 양국의 제일회 전쟁이 개시되니라.
『삼국사기』에는 강이식(강이식) 삼자도 보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수서』만을 초록한 문자인 까닭이거니와, 『대동운해』에는 강이식(강이식)을 살수전쟁의 병마도원수라 하고, 서곽잡록에는 강이식(강이식)을 임투관전쟁의 병마원수라 하여, 량서가 불동하다. 그러나 살수전쟁에는 왕제 건무(건무)가 해안을 맡고 을지문덕(을지문덕)이 육지를 맡았으니, 어찌 병마도원수의 강이식(강이식)이 있었으랴. 그러므로 『서곽잡록』을 쫓노라.
(삼) 임투관의 전역
익년에 고구려의 병이 요서에 침입하여, 수의 요서 총관 장충(장충)과 접전하다가 거짓 패하여 임투관에 나오니, 수문제가 이에 삼십만 대병을 들어 한왕 양양(양량)으로 행군대총관을 삼아 임투관으로 나오고, 주나후(주라후)를 수군총관을 삼아 바다로 뜨게 하니, 주나후(주라후)가 비록 평양으로 향한다 성언하나, 기실은 양선을 령솔하고 요해로 들어와 양양(양량)의 대병에게 군량을 대어 주려 함이더라.
강이식(강이식)이 수군으로 하여 곧 해중에 영격하여 량선을 파하고, 군중에 령하여 벽첩을 지키고 출전치 아니하니, 수병이 양식이 없는 중에 또 육월에 장마를 만나 기아와 질역에 사망이 낭자하여 퇴군하거늘, 강이식(강이식)이 이를 투수 상에 추격하여 전군을 거의 섬멸하고 무수한 군자 기계를 얻고 개선하니라.
『수서』에는 「양양(양량)의 군은 림우 중에 질역을 만나고, 주나후(주라후)의 군은 풍랑을 만나 수군이 퇴각할 새 사자가 십의 구가 된다」 하여, 천연불가항력에 패한 것이요, 고구려에게 패한 것이 아닌 것을 적었으나, 이는 중국의 체면을 위하여 치욕하는 피 소위 춘추필법이니, 임투관전쟁은 물론이요 곧 차장에 살수전쟁의 기록도 이 같은 춘추필법이 많으니라.
여하간 임투관전쟁 이후에 수문제가 고구려를 외하여 다시 출병치 못하고, 피차 휴전의 약을 맺으며 상품 호역을 재개하여 양국은 십여년 동안이나 일 없이 지내니라.
제이장 살수전
(일) 고·수 재전의 원인과 동기
고구려가 장수대왕 이래로 남진주의를 가져 서북의 지나(중국)와는 친교하고 남방의 신라·백제에 대하여 용병하다가, 밋(이윽고) 수가 지나(중국) 남북을 통일함에, 고구려가 이를 두려워하여 우리도 어서 신라와 백제를 멸하여 조선을 통일하여야겠다 하는 생각으로 자주 남정군을 일으켰다.
신라와 백제는 동서전쟁으로 인하여, 피차 화합할 여지가 없이 되어 서로 매년 간과로 상쟁하는데, 또 북방 고구려의 침략이 있어 국력이 피폐하여 견딜 수 없으므로, 양국이 각히 사자를 수에 보내어 고구려 침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수가 임투관 싸움에 징계되어 고구려를 경적치 못할 줄 알고 이를 사절하더니, 밋(이윽고) 수문제가 죽고 수양제가 즉위하여는, 해마다 풍등하여 전국이 부성하고 각지의 창고 미곡이 충일하며, 양제가 순유를 좋아하여, 금 직예성 통주에서부터 황하를 횡단하여 가지고, 금 서강성 항주에까지 삼천리 운하를 파 용주를 타고 이리저리 돌며 토곡혼 금 서장, 서돌궐 - 금 몽고(몽골), 돌궐 - 금 몽고(몽골)동부 등 국의 조공을 받아, 이 하늘 밑에는 오직 수뿐이 강대제국이라고 자랑하려 하는데, 이에 동방의 고구려가 있어 조선의 서북 - 금 황해·평안·함경 삼도와 금 봉천·길림·흑룡 삼성을 전유하여 토지는 비록 수보다 협소하나 인구가 번식하며, 사졸이 용감하여 수와 겨루려 하니, 일찍 병마도원수로 강남의 진을 토평하여 무공을 자긍하고 허영적 야심을 만포한 수양제가 어찌 잠시인들 고구려를 잊었으랴. 그 폭발치 않은 것은 다만 시기를 기다림이다.
밋(이윽고) 기원 육백칠년(양제 즉위 후 삼년) 양제가 수백기를 거느리고 유림 - 금 산서성 녕하에 이르러, 돌궐의 계민가한(계민가한)의 장에 행행하니, 이때에 돌궐이 비록 수에 칭신하나, 또한 고구려의 강을 두려워하여 자주 사자를 보내어 조공하여, 양 속국의 구실을 하므로 고구려가 답빙사자를 보내었더니, 양제가 이를 알고 계민가한(계민가한)을 협하여 고구려 사신을 불러 볼 새, 양제의 총신 배구(배구)가 양제를 꾀어 가로되, 「고구려의 땅은 거의 한 사군의 땅이거늘, 중국이 이를 차지하지 못함은 수치로, 선제가 일찍 이를 멸하려 하였으나 양양(양량)이 재능이 없어 성공치 못하였으니, 전하가 어찌 이를 쉬 잊으리잇가」하여, 양제가 고구려 사자더러 「만일 고구려왕이 조회치 않으면 짐이 마땅히 출순천(침입한다는 뜻)하리라」고 사자를 야유하였다.
사자의 회답한 말과 사자의 귀국한 뒤에, 고구려의 정의가 어떠하였음은 사책이 잔결하여 알 수 없거니와, 배구(배구)는 동번풍속기 삼십권을 만들어, 양제에 올린 중에 평양의 가려와 개골산(금강산)의 영수함을, 그리고 설명하여 순유를 즐기는 양제의 동침할 욕심을 더욱 기동하여, 무명의 병을 여하여 동양 고사상 미증유의 대전을 일으킴에 이르렀다.
(이) 수양제의 침입과 그 전략
기원 육백일년 육월에, 수양제가 고구려를 치는 조서를 내려, 전국병을 익년 정월 내에 탁군 - 금 직예성 탁현에 집중케 하고, 유주총관 원홍사(원홍사)를 보내어, 동래 - 금 연태의 해구에서 병선 삼백소를 짓게 하고, 사월에 강남·회남의 수수 일만인, 노수 삼만인과 영남에 배鑹수 삼만인을 발하여 수군을 증가하고, 오월에 하남·회남에 조하여 병차 오만승을 조하여 군복과 군갑과 군막을 싣게 하고, 칠월에 강남·회남의 민부와 주선을 발하여 여양창·낙구창 등의 창미를 운하여 탁군으로 오게 하니, 강해에는 주선이 늘 천여리를 닿고, 육지에는 각지 운수의 역부가 늘 수십만인이 어 떠드는 소리가 밤낮 그치지 않더라.
익년 정월에 양제가 탁군에 이르러, 제군을 절도할 새 좌우 각 십이군을 나누어, 매군에 대장·아장이 각 일인이요, 기병은 사십대니 일대가 백인이요, 십대가 일단이 되어 사단에 나누고, 보병은 팔십대니 이십대가 일단이 되어, 또한 사단에 나누고, 치중병과 산병도 또한 각히 사단에 나누어, 보병의 사이에 끼우고 개갑· 기치는 단마다 색을 달리 하고, 진·퇴·류·행이 정연하니, 무릇 이십사군이러라. 일일에 일군식 사십리만큼 영을 지어 출발할 새, 사십일만에야 다 출발하니, 수미가 서로 잇고 고각 소리가 산하를 울리고, 기치가 구백육십리를 뻗치고, 최후에 어영군이 출발할 새, 또 팔십리를 뻗치니, 정병이 합 일백십삼만삼천팔백명이니, 호를 이백만이라 하고 궤운병은 사백만이나 되니, 지나(중국) 유사이래 미증유의 대동병이더라.
『수서』에 양제 출군의 명령을 기하여 가로되, 좌 십이군은 루방·장잠·명해·개마·건안·남소·요동·현토·부여·조선·옥저·락랑 등 도로, 우 십이군은 점선·함자·혼미·림둔·후성·제해·답돈·숙신·갈석·동이·체방·양평 등 도로 출하여, 다 평양에 회집하라 하였으니, 명해는 금 강화요, 옥저는 함경도와 혼춘 등지요, 임둔과 동이는 금 강원도니, 평양에 회집하라는 수군이 어찌 혼춘이나 함북이나 평양 이남의 땅으로 출하였으랴. 『자치통감』에 제군의 진행한 실황을 기하여 가로되,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우문술)은 부여도로,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우중문)은 낙랑도로, 좌효위대장군 형원항(형원항)은 요동도로, 우익위장군 설세웅(설세웅)은 옥저도로, 우둔위장군 신세웅(신세웅)은 현토도로, 우어위장군 장근(장근)은 양평도로, 우무위장군 조고재(조고재)는 갈석도로, 좌무위장군 최홍승(최홍승)은 수성도로, 우어위장군 위문승(위문승)은 증지도로 출하여 다 압록수 서에 회하다 하였으니, 낙랑·현토는 한 이래 요동에 가설한 북낙랑·현토도 있으니, 압록수 서라 함도 가하거니와, 옥저가 어찌 압록수 서가 되랴? 그런즉 그 지명이 거의 임시로 가정한 이름이요, 고구려의 본지명이 아니니, 이로서 그 행군의 노선은 상언할 수 없다.
이제 그 전쟁의 광경에 의하여 미루어 보면, 양제의 작전계획이 대략 좌와 같더라. 이십사군을 수·륙 양방면으로 나누되, 육군은 또 양부에 나누어 (일)은 어영군과 기외 십여군이니, 양제가 자장하여 요수를 건너 요동의 각성을 치기로 하고, 우(일)은 우익위대장군 우문술(우문술) 등 구군이니, 좌익위대장군 간중문(우중문)이 참모되고 우문술(우문술)이 사령이 되어 요수를 건너 고구려 서울 평양을 침입하기로 하고, 수군이 또 누만명이니, 우익위대장군 수군총관 래호아(내호아)와 부총관 주법상(주법상)이 량선을 령솔하여 해로로 쫓아 대동강으로 들어 우문술(우문술)과 합하여 평양을 공하기로 한 것이니, 대개 태조대왕 때에 왕자 수성(수성, 차대왕)이 한병의 량도를 끊고 이를 격파한 뒤로 고구려에서 매양 북방의 침입을 방어할 때에, 그 유책을 쓰는 자면 반드시 승리하며 북방의 침입자 들도 가장 이를 경계하는 고로, 이제 수양제는 육군은 로량만 가지고 목적지인 요동·평양 양성에 달한 뒤에는, 수군에 의뢰하여 운수한 량선의 량을 먹고 양성을 위곤하여, 지구전을 지어 고구려를 항복하려 함이다.
(삼) 고구려의 방어와 그 작전계획
후세에 살수전사를 말하는 자가 거의 을지문덕(을지문덕) 일인의 계획으로 치며, 또 을지문덕(을지문덕)이 겨우 수천명의 병졸로 수의 수백만 대군을 격파한 줄로 말하니, 이 무슨 사실과 맞지 않는 말이냐. 고구려가 망할 때도 그 상비병이 삼십만명이 되었은즉, 하물며 영양대왕이 전성하던 이때에는 혹 삼십만명이 지났을 것이며, 또 광개태왕의 비문에 「왕궁솔수군」으로 보거나, 수양제의 고구려에 대한 선전조에 「겸계단도 당건유해씨」로 보거나, 여하간 고구려 수군의 존재함을 알 것인즉 수군도 대략 수만에 근하였을 것이다.
이 삼십여만명으로 남방 백제·신라를 경계하는데 몇 만명이 들었을 것이거니와, 그 나머지도 이십만명이 되니, 이 이십기만명은 수에 대한 전사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수륙대원수는 영양대왕이요, 수군원수는 왕제 건무(건무)요, 육군원수는 을지문덕(을지문덕)인데, 수병이 수륙 양면으로 침입하는 고로, 고구려의 작전계획도 또한 수육 양면의 방어를 병중하는 중에 「선수후전」으로 계획의 중심을 삼아, 육상의 장사들은 인민을 명하여 량미를 거둬 가지고 모두 성내에 입거케 하며, 수군들도 각히 요새항의 안전지대로 퇴수하여 전을 피하다가, 수군의 량식이 다함을 기다려서 연후에 공격하려 하였다.
(사) 고구려병의 패강 승전
을지문덕(을지문덕)이 수병을 복지에 유입하려 할 새, 요하 북서의 군병을 거둬 요하를 지키니, 동년 삼월에 수병이 요하에 이르러 서편 연안의 상하 수백리에 결진하여 마치 벌떼 같이 우글우글 하며, 각단의 군장과 군기는 울긋불긋 하게 햇빛에 비치며, 수군 중 제일 용장인 선봉 맥철장(맥철장)이 부교를 매며 동안에 미치려 하거늘, 을지문덕(을지문덕)이 제장으로 하여금 영격하여 맥철장(맥철장) 등 장사 수십명과 병졸 만여명을 참하고 부교를 절하니, 수병의 물잠수 잘하는 자와 물헤엄 잘하는 자가 저의 상사를 탐하여 다투어 물에 달려들어 격전하며 부교를 다시 매거늘, 을지문덕(을지문덕)이 그 예정한 계획에 의하여 거짓 패하여 퇴군하니, 수양제가 이에 그 전군을 들어 요하를 건너, 양제가 그 어영군과 좌익위대장군 등과 왕웅(왕웅) 등으로 하여금 요동성을 위공하며, 좌둔위대장군 토우서(토우서) 등 십여군으로 하여금 그 부근의 각 성을 위공하며,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우문술) 등 구군은 을지문덕(을지문덕)을 추격하여 평양을 치게 하더라.
이에 앞서 우익위대장군 내호아(내호아)가 강·회 수군 십여만명을 거느리고 량선을 보호하여, 동래 - 금 연대에서 출발하여 창해를 건너 패강구로 들거늘, 왕제 건무(건무)가 비밀히 수군 장졸을 각처 은벽한 항만에 장닉하며, 평양성 하의 인가마다 재백을 열치하고 수군의 상륙을 방임하니, 내호아(내호아)가 그 중에 정병 사만을 뽑아 패강을 거슬러 성하에 돌진하여 금백을 노략하기 위하여 대오가 산란하거늘, 이때 건무(건무)가 결사대 오백명을 뽑아 나곽 공사 중으로부터 이를 돌격하여 파하고, 제군을 호령하여 추격하며, 각처의 수군들도 일시에 출동하여 공격하니, 수군이 강구에 이르러 주선을 다투어 서로 천답하여 죽는 자 무수하며 양선이 다 해저에 패몰하여, 내호아(내호아)가 겨우 단신으로 소선을 타고 도망하더라.
양선이 이미 패몰함에, 이 뒤 평양에 침입하는 우문술(우문술) 등 대군이 무엇을 먹고 싸우리오. 고구려가 벌써 이때에 필승의 지위를 가짐이니, 만일 전공을 등차하면 왕제 건무(건무)가 을지문덕(을지문덕)보다 제일등이라 할 것이다. 왕제 건무(건무)의 공이 이같이 크지만, 독사자들이 흔히 을지문덕(을지문덕)만 아는 것은 어찌된 연고인가? 사마온(사마온)공 통감고이에 내호아(내호아)의 양선이 패회하지 아니하였다면 우문술(우문술)의 살수의 패가 없으리라 하였으니, 대개 여실한 말인가 하노라.
(오) 고구려병의 살수 전승
을지문덕(을지문덕)이 요하에서 퇴군하여 수병의 허실을 탐지코자 하여 거짓으로 위 항사자가 되어 수진에 들어가 그 내용을 살피어 보고 돌아올 새, 우문술(우문술) 등이 그 상모의 륭위함에 놀라, 이것이 고구려의 대왕이나 대대로인가 하여 금주치 못함을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어 다시 만나기를 청하거늘, 을지문덕(을지문덕)이 이때에 이미 패강의 첩보를 들으며 우문술(우문술) 등 제군의 기색 있음을 본지라, 이미 필승의 산을 잡았으니 어찌 호굴에 재입하랴. 질치하여 돌아올 새, 수병을 유인하기 위하여 요새를 만나면 가끔 유진하여 접전하다가 거짓 패하여 일일 중에 칠전칠패 하니, 우문술(우문술) 등이 대희하여 「고구려병은 하잘 것 없다」 하고 장구하여 살수-금 청천강을 건너 평양에 이르렀다.
평양에 이른즉 성외성내의 인가가 고요하여 사람이란 그림자도 볼 수 없고 계견의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거늘, 우문술(우문술) 등이 의심하여 직진치 못하고 사람을 보내어 닫힌 성문을 두드린즉, 성중에서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곧 항복하려 하여 토지와 인구의 문부를 조사하는 중이니 대군은 성외에서 오일만 기다리라 하더라. 전보 같은 것이 없던 고대인 고로, 우문술(우문술) 등이 내호아(내호아)의 전패함을 감감히 모르므로, 내호아(내호아)를 기다려 합공하려 하여 거짓 성중의 대답을 허락하고 성의 부근에 유진하여, 군중이 기아하였으므로 노략을 행하려 하나 인가마다 공허하고 소유가 없으며, 오일을 거듭하여 십여일이 지나도 성중의 동정이 없으므로, 우문술(우문술)이 제군을 지휘하여 진공한즉, 성상에 고구려의 기치가 일시 사면에 꽂이며 화살과 돌멩이가 비 오듯 쏟아지며, 을지문덕(을지문덕)이 역인으로 하여금 소리 질러 가로되, 너희 량선이 바다에 잠기어 먹을 짐은 끊어지고, 평양성은 높고, 부로한바, 수의 수군 장졸의 인신과 기치를 던져 주니, 수병이 이제야 내호아(내호아)의 패함을 알고 군심이 요란하여 싸울 수 없어 우문술(우문술) 등이 퇴환할 새, 을지문덕(을지문덕)은 미리 사람을 보내어 사낭으로 살수의 상류를 막고 정병 수만을 뽑아 천천히 한아하게 수병의 뒤를 쫓더라.
살수에 이르러서는 주선이 하나도 없으므로,우문술(우문술) 등이 물의 천심을 알지 못하여 머뭇머뭇 하더니, 돌연히 고구려승 칠인이 다리를 걷고 물에 들어서며, 오금에 미치지 못하는 물이라 하니, 수병이 대희하여 다투어 물에 들어서더라. 수병이 중류에 못 미쳐서 상류의 사낭을 터놓아 물이 폭력으로 내리어 밀리고, 을지문덕(을지문덕)의 진이 이르러 뒤를 습격하니, 수병이 칼과 활에 맞아 죽으며 물에 빠져 죽고, 남은 자는 나아가 일일일야에 사백오십리를 달리어 압록강을 건너 도망하여 요동성에 이르러서는, 우문술(우문술) 등 구군의 삼십만오천명이 겨우 이천칠백명이 되니, 백의 하나 꼴의 잉여도 못되며, 군기·치중 누거만은 모두 고구려의 노획품이 되었더라.
(육) 고구려의 오홀열 대첩
양제의 어영군과 기타 십여군-누십만명의 수병이 오열홀과 요동 각지의 성을 치나 하나도 함락이 되지 못할뿐더러, 삼월로부터 칠월까지 무릇 사, 오삭동안에 고구려인의 시석에 맞아 죽어 성하의 해골이 산을 만들 만하며, 또 량식을 어찌 못하여 장졸이 기곤하다가, 우문술(우문술) 등의 패환함을 봄에 더욱 싸울 뜻이 없더라.
그러나 수양제가 오히려 최후의 요행을 얻을까 하여, 제군을 오열홀 성하에 집중하거늘, 을지문덕(을지문덕)이 이를 돌격하여 대파하고 인마의 참살과 군기의 치중의 노획이 무수한 터인데, 후래 고구려가 망함에, 당장 설인귀(설인귀)가 그 경관을 헐고 백탑을 세웠으니, 세인들이 이를 당태종이 안시성 침입하였을 때에 당장 울지경덕(울지경덕)이 쌓은 바라 하나 이는 와전이니라.
수의 이십사군 수백만명이 이에 전멸하고, 오직 호분낭장 위문승(위문승)의 잔군 수천이 남아 있어 양제를 보호해 가지고 도주하였더라. 『수서』에 살수 우문술(우문술)의 패전을 기하고, 오열홀 양제의 패전은 기치 아니함은 이른바, 「위존자휘」의 춘추필법이니, 춘추필법을 알아야 지나(중국) 역사를 가독이니라.
요하를 건너 〇〇리허에 발착수가 있는바, 이는 「수」라 명하였지만, 기실은 수가 아니라 요동에 유명한 이백리 진 수렁이요, 그 일명 요택이니, 당태종 요택매골의 조로 보면, 당시 수병이 이 땅에서 비상히 많이 죽었음을 알 것이다. 이것도 대개 고구려병의 추격에 죽었을 것이니라.
말하자면 본전역이 패강·살수·오열홀 삼 대전을 포함한 것인데, 수공은 패강의 전역이요, 차공은 살수의 전역이요, 종결은 오열홀의 전역이니, 모두 살수전역이라 칭함이 부당하나, 이에 오랫동안 연용된 명사이므로 그대로 쓰노라.
제삼장 오열홀, 회원진 양역과 수의 멸망
(일) 수양제의 재구와 오열홀 성주의 방어
수양제가 이미 패귀하여는, 그 패전의 죄를 우문술(우문술)등 제장에게 돌리어 직을 파하여 옥에 내리고, 패전의 욕을 씻으려 하여 익년 정월에 전국 병마를 다시 탁군에 집중하고, 요동 고성(금 영평부니 곧 고구려 태조가 요동을 차지한 뒤에 한이 이 땅에 이설한 자)를 수축하여 군량을 저축케 하고, 「제장의 전차 패전은 군량이 결핍한 까닭이요 전을 잘못한 죄가 아니라」 하여 국내에 조시하고, 다시 그 직을 복하여 고구려 침을 계획할 새, 「작년에 요동을 평정치 못하고 평양을 습함이 실책이라」 하여, 이에 조서로는 대개 작년과 같이 제장의 출정할 길을 지정하였으나, 내용은 다만 오열홀을 먼저 쳐서 이를 함락한 뒤에야 차차 그 지리의 차서를 따라 각 주 군을 평정하여 평양까지 미치려 함이더라.
이때에 수가 그 대패한 뒤를 당하여, 국고가 허갈하고 군액이 전결하고, 민력이 고갈하고 인심이 불울하여, 반란을 기도하는 자들이 지은 「무향요동낭사가」가 돌거늘, 양제가 이를 불구하고 민재를 강탈하여 군량을 삼으며, 민부를 강징하여 병사를 삼고, 교련한 지 수삭만에 요동으로 향하여 우문술(우문술)·이경(이경) 등 제장을 명하여 고구려 래원의 길을 막게 하고, 양제가 몸소 어영 제장을 독솔하여 오열홀을 위공하더라. 당시 오열홀 성주의 성명이 비록 사책에 보이지 아니했으나 대개 지용침의하던 인물이요, 성중에 모든 장졸도 거의 백전을 열역한 용사 들이라. 양제가 비루를 매며 운제를 세우며, 지도를 파며 토산을 쌓아 공성의 술을 있는 대로 다 쓰지만, 성주가 또한 기율을 따라 응전하여 상지한 지 수십일만에 수병의 죽는 자가 허다하더니, 수의 동도수장 양현감(양현감)이 반하는 기별이 들리므로 양제가 군자·군기·공성구 등을 다 버리고, 이갱 밤에 비밀히 제장을 불러 빨리 회군하였으나 성주의 발각한 바 되어, 그 후군이 고구려병의 습격을 받아 거의 사망하니라.
(이) 수양제의 삼구와 노사의 저격
양제가 비록 양현감(양현감)의 난을 토평하였으나 국력의 피폐와 인민의 원한이 극도에 달하였음에, 그러나 양제가 오히려 패전의 욕을 씻으려 하여 국내의 병마를 또 초집하여 회원진에 이르니, 사졸이 다 전자 양차의 패로 인하여 가면 죽을 줄 알므로 중도에서 도망하는 자 많고, 이미 반란한 지방은 징모에 응하지 않는 곳도 있었다.
양제가 이미 싸우기 난함을 깨닫고 중지하려 하나, 더욱 중국의 치소가 되어 반란자를 위압할 수 없을까 하여, 여하한 핑계나 만든 뒤에 휴전할까 하여, 고구려에 향하여 반신 곡사정(곡사정)의 인도를 유일한 조건으로 하고 화의를 제출하니, 곡사정(곡사정)은 곧 양현감(양현감)의 당으로 고구려에 투항한 자러라.
이때에 고구려의 국론이 양파로 나뉘니, 「갑」은 남방의 신라· 백제를 멸하기 전에는 지나(중국)에 대하여는 비사후례로써 화의를 유지함이 가하거늘, 전자에 지나(중국)에 대한 교제가 너무 강경하다가 누년의 병화를 야기하였은즉, 금일부터라도 다시 정책을 변하여 수와 화하자 하며, 「을」은 신라와 백제는 산천이 기험하여 수하기는 이하고 공하기는 난하며, 또 인민들이 견고하여 좀처럼 굴복하지 않고, 지나(중국)의 대륙은 이와 상반하여 평원·광야가 많아 가장 용병하기 좋으며, 인민들이 전쟁을 무서워하여 일방이 궤란하면 타방이 동요한즉, 장수태왕의 북수남진책이 원래 틀린 것이니, 금일부터라도 이 정책을 버리고 남방은 방어만 하고, 정병을 뽑아 수를 치면 비록 다수한 군대가 아닐지라도 성공하기 쉬우며, 이미 성공한 뒤에 그 인민을 안무하고 인재를 채용하면 전지나(중국)를 통일하기가 쉽다 하여, 양파가 늘 의견으로 서로 다투었다.
「갑」은 왕제 건무(건무)의 일파니, 다수한 호족들이 이에 속하고, 「을」은 을지문덕(을지문덕) 일파니, 일부 무장들이 이에 속하니, 양인이 다 대수전쟁에 대공을 세워 국인의 신망이 같이 높은 고로, 따라서 양파의 세력도 거의 상등하며, 영양대왕은 을파를 우하나, 고구려는 호족공화의 나라인고로, 왕이 또한 갑파의 의견을 꺾지 못하더니, 밋(이윽고) 수양제가 곡사정(곡사정)의 인도를 조건하여 화의를 제출함에, 국내에 「갑」파들이 이를 부화하는 자가 훨씬 우세를 점령하여, 드디어 망명 가련한 곡사정(곡사정)의 인도를 허하는 동시에 사자가 국서를 받들고 양제의 어영에 가니, 어떤 장사가 이를 비상히 분개히 여겨 소뇌(노궁)를 품에 품고, 사자의 수행원 맵시를 차리고 가만히 사자의 뒤를 따라 들어가, 양제의 가슴을 쏘아 맞추고 달아나더라. 비록 이로써 화의를 파괴하지 못하고 곡사정(곡사정)의 인도를 중지시키지 못하였으나, 수양제의 넋을 빼앗고 고구려의 사기가 왕성함을 보임에는 넉넉하였도다. 그 활을 맞고 돌아간 수양제는 병도 들고 회노도 심하고 국내가 더욱 대란하여, 불수년에 암살을 당하여 수조가 망하니라.
안정복(안정복) 선생이 본전역을 논하다가, 「영양왕이 살수전승의 위로 인하여 수양제 시부의 죄를 성토하고, 을지문덕(을지문덕) 제장을 호령하여 수를 합병하지 못함」을 한하였으나, 양제 시부설은 의문의 안건일뿐더러 또 수의 궁중비사라. 고구려인이 듣지 못하였을 것이니 말할 것 없거니와, 그러나 해상잡록에 명백히 「이 전역 끝에 을지문덕(을지문덕) 등 일파가 북벌을 주창하였음을 기재하였거늘, 선생이 이를 소저 『동사강목』에 기재치 않음은 하고인가? 아마 비사의 설을 정사에 넣을 수 없다」 함인 것이다. 그러나 정사 『삼국사기』·『동국통감』 등은 사대주의인 기록인 까닭에, 대 지나전쟁에 대하여는 전혀 피의 기록만 인용하였으니, 비사의 설이 도리어 정확한 재료가 끼친 것인가 하여, 본저에는 이를 채록하노라.
제십편 고구려 대당전역
제일장 연개소문의 서유와 그 혁명
(일) 연개소문의 출생과 그 소년의 서유
연개소문(연개소문)은 (일) 고구려 구백년 이래로 전통한 호족공화의 구제도를 타파하여 정권을 통일하며, (이) 장수태왕 이래 철석 같이 굳어온 서수남진정책을 변경하여 남수서진의 정책을 세우며, (삼) 그래서 국왕 이하 대신·호족 수백명을 도살하여 자가의 독무대를 만들고, 서국 제왕 당태종을 격파하여 지나(중국) 대륙에 침략을 시하였나니, 그 선악현부는 별문제로 하고 여하간 당시에 고구려뿐 아니라 곧 당시 동방아세아에 전쟁사 속에 유일한 중심 인물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사실은 겨우 「김유신전」속에 「개김(개금)이 김춘추(김춘추)를 관하였다」는 한 마디 뿐이요, 그 이외에는 전혀 신·구 양 『당서』와 『자치통감』 등 지나(중국)사를 초록한 것뿐인데, 피 지나(중국)사는 곧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상대의 혈적이던 당태종 군신의 입과 붓에서 나온 것으로 재료한 것이기 때문에, 그 준신할 가치가 가장 적다.
연개소문(연개소문)은 고구려 서부에 세족이요, 서부의 명칭이 연나인 고로 성이 연이니, 『삼국사기』에 성을 천씨라 함은, 당인이 당고조의 명 연을 피하여 천으로 연을 대한 것을 그대로 초록한 까닭이니라.
당인 장열(장열)이 규염객(규염객)의 사실을 술하여 가로되, 「규염객(규염객)은 부여국인으로 중국에 와서 적 태원에 이르러, 이정(이정)과 결교하고 이정(이정)의 처 홍불기(홍불기)와 남매의 의를 맺고 중국의 제왕을 도하려다가, 당공 이연(이연)의 자 이세민(이세민)(당태종)을 만나보고는 그 영기에 눌리어, 이에 이정(이정)더러 ‘중국의 제왕됨을 단념함을 고하고, 귀국하여 난을 지어 부여국주가 되었다’한 바(「규염객전」에 대의만 역술한 것), 선배들이 ‘부여국’은 곧 고구려요, 규염객(규염객)은 곧 연개소문(연개소문)이라」 한다. 당태종의 영기에 눌리어 지나(중국) 제왕됨을 단념함은 「제왕은 천정이요 구구한 지력자의 기유할 바가 아니라」는 피국 소설가의 권징적 필법이 될 뿐이거니와, 개소문(연개소문)이 지나(중국)를 침략하려 하여, 그 국정을 탐지하기 위하여 일차 서유한 것은 사실인가 한다. 중국에 전하는 「갓쉰동전」은 이와 한 가지의 소설이니 그 대개가 좌와 같다.
「연국혜」라는 일위 재상이 있어, 년이 오십이 되도록 슬하에 자녀가 없어, 천제를 올리어 일자의 점제를 기도하여 옥동자를 낳아 「갓쉰동」 이라 이름하니, 갓 쉰 되던 때에 낳았다는 뜻이더라. 갓쉰동이 자라나매 용모가 비범하며 재지가 절등한 고로 「연국혜」가 장중의 구슬 같이 사랑하여 곁에 떠나지를 못하게 하더라.
갓쉰동이 칠세되던 해의 문전에서 유희하더니, 어떤 도사가 지나다가 보고 「아깝다, 아깝다」 하고 달아나거늘, 연국혜가 그 말을 얻어 듣고 쫓아가, 가는 도사를 붙잡고 그 이유를 물은즉, 도사가 처음에는 굳이 겸사하고 말하지 아니하다가, 나중에는 하는 말이 「이 아이가 자라나면 공명과 부귀가 무궁할지나, 다만 타고난 수명이 짧아서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하리라」, 그러면 그 흉액을 면할 방법이 없느냐 한즉 「십오년 동안을 이 아이를 내버리어 부모와 서로 만나지 못하면 그 액을 면하리라」 한다.
연국혜가 도사의 말을 믿는 고로, 비록 차마 못하는 마음이 없지 않으나, 갓쉰동의 장래를 위하여 하인을 명하여 갓쉰동을 멀리 멀리 산도 설고 물도 선 어느 시골에 가져다가 버릴 새, 다만 후일에 아들 찾음 표적을 만들기 위하여 먹실로 등에다가 「갓쉰동」이란 삼자를 새기고 보내었더라.
갓쉰동을 버리던 곳은 원주의 학성동이다. 동내에 장자 유씨가 있더니, 그 밤 꿈에 전천에 황룡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괴히 겨 새벽에 나가 보니, 일개 준미한 소아가 있음으로 주어다가 기를 새, 그 등에 새긴 「갓쉰동」 삼자를 보고 이름을 「갓쉰동」이라 그대로 불렀다.
갓쉰동이 자랄수록 미목청수하고 용모가 영발하나 그 내력을 모르므로, 거가가 천인으로 대접하여, 장자는 비록 갓쉰동을 사랑하나 남의 시비를 싫어하여, 그 신분은 높여 주지 못하고, 다만 글 몇 자를 가르쳐 자가의 종으로 부리더라.
하루는 갓쉰동이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더니, 난데없는 청아한 퉁소 소리가 들리므로 지계를 버텨 놓고 그 소리를 찾아간즉, 한 노인이 앉아 불더라. 노인이 갓쉰동을 보고 네가 갓쉰동이가 아니냐. 네가 금일에 배우지 아니하면 장래에 어찌 큰 공업을 이루랴 하고 학문의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갓쉰동이 그 이야기에 취하여 해지는 줄을 모르고 듣는데, 노인이 석양을 가리켜 금일 늦었으니 명일 오라 하고 어디로 획 가버리거늘, 갓쉰동이 그제야 놀래어 가로되, 내가 나무를 하려고 왔다가 빈 지계를 받쳐 놓고 이 해를 보냈으니, 「주인의 꾸중을 어찌 하나」 하고 내려와 본즉, 누구의 것인지 나무를 베어 지계에 지워 놓았더라.
갓쉰동이 그 익일로부터 나무를 하러 가면 반드시 그 노인을 만나고 만나서는, 검술·병서·천문·지리 등을 배우고, 그리고 내려오면 반드시 그 지계에 나뭇짐이 지어 있으므로 지고 돌아올 뿐이더라. 그런데 장자가 아들은 없이 딸 셋만 두었는데 문희·경희·영희니, 셋이 다 수에 가는 미인인데 영희가 더욱 절등하더라.
갓쉰동이 십오세 되던 해, 봄 어느 날에 장자가 갓쉰동을 불러 세 아기씨를 태워 화류 구경을 하라 하거늘, 갓쉰동이 그 말에 의하여 교군을 가지고 문희 방문 앞에 가 「아기씨-가마를 대령했습니다」 한즉, 문희가 버선발로 마루 끝에 나서더니, 「아이고 맨땅을 어떻게 디디겠느냐? 갓쉰동아 네가 거기 엎드려라」 하고 갓쉰동의 등을 밝고 내려가 가마에 들어가며, 경희를 태울 때에 경희도 그랬는지라. 갓쉰동이 대노하여 외주먹으로 그 계집아이를 때려죽이고 싶지마는 장자의 은을 생각하여 굳이 참고, 영희의 방에 가서는 「이 년도 그 년의 동생이니 별다르겠느냐?」는 생각이 나서 「가마를 대령하였습니다」 한 마디 하고는 미리 뜰에 엎드려 있더니, 영희가 문에 나서 보고는 놀래어 「갓쉰동, 이것이 무슨 일이여-」 한다.
갓쉰동이 가로되, 「갓쉰동의 등이야 하느님이 아기씨들을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닙니까. 이 등으로 나무를 져다가 아기씨들의 방을 덥히고, 이 등으로 쌀을 실어다가 아기씨들의 배를 불리고, 아기씨들이 앉으시려거든 갓쉰동의 등을 자리로 쓰시고, 아기씨들이 걸으시려거든 갓쉰동의 등을 디딤으로 쓰시고 …」
이 말이 끝이 나지 아니하여 영희가 달려들어 「아서라. 이것이 무슨 일이냐. 사람의 발로 사람의 등을 밟는 일이 있겠느냐」 하고 갓쉰동을 일으켰다.
갓쉰동이 일어나 영희의 꽃 같은 얼굴, 관옥 같은 살빛과 정다운 말소리에 마음을 잡지 못하여 「나도 어렴풋이 유시의 일을 기억하면 너와 결혼할만한 가정인데…」 하고 눈물이 눈에 돌며, 영희는 갓쉰동의 용모가 비범하며 음성이 우렁참을 보고 「너 같은 남자가 어찌 남의 집에 종이 되었느냐-」 하고 눈물이 흐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 뒤로부터 갓쉰동은 영희를 생각하고, 영희는 갓쉰동을 사랑하여 두 사이의 정의가 점점 가까워져서, 갓쉰동이 「내가 칠세에 집을 떠나던 일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바, 아마 우리 부모가 도사의 말을 믿고 나를 버려 일후에 다시 찾으려 함인 듯하며, 나도 집에 돌아가면 귀인의 아들이니, 너와 결혼하자」고 영희에게 고한즉, 영희의 대답이 「나는 귀인 아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사나이의 아내 되기를 바란다. 만일 네가 사나이가 아닐진댄, 귀인의 아들이라도 나의 남편이 못될 것이요, 네가 사내일진대 종이라도 나는 너 아니면 아내 되지 아니하리니, 너는 너의 회포를 말하라」 한다.
갓쉰동이 가로되, 「달딸이는 매양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는데, 우리는 다만 달딸이를 쳐 물릴 뿐이오. 달딸이에 쳐들어가 보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를 한하여 늘- 달딸이의 땅을 한 번 토평하여 백년의 태평을 도모하고자 하노라」 하고 인하여, 근일에 나무하러 가서 어떤 선관에게 날마다 검술·병서·천문·지리 등을 배운 이야기를 고하니, 영희가 크게 기뻐하며 가로되, 「… 그러나 적국을 치자면 적국의 정형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니, 그러할진대 그대가 친히 달딸국에 들어가, 그 산천을 편답하며 그 국정을 시찰하여 일후 성공할 터를 닦아 가지고 오면, 나는 그대의 아내가 못될지라도 곧 그대의 종이라도 되어 그대 앞에 백년을 모시려 하노라」 한다.
갓쉰동이 쾌히 허락하고 장자의 집에서 도주하여 떠날 새, 영희가 저의 가진 금가락지 은기명 등을 주어 노비를 만들어 달딸국으로 향하여 가더니, 들어가서는 달딸의 말도 배우며 달딸의 풍속도 익히고, 또 그 내정을 알기 위하여 이름을 돌쇠라 고치고, 달딸국 왕의 가노가 되어 거동이 영리하므로 매우 그 왕의 신임을 받더니, 왕의 제이 공자가 영매하고 또 사람을 잘 알아보아, 갓쉰동은 비상한 영물이오 또 달딸의 종자가 아니니, 죽여 그 후환을 끊자』 하고 그 아이에게 고하여, 철책으로 지은 집안에 잡아 가두고 음식을 끊어 굶겨 죽이려 한다.
갓쉰동이 곧 자기 몸이 위경에 빠짐을 깨달았다. 계책이 없어 답답히 앉았다가, 자기 곁에 새매를 길들이려고 잡아 넣은 롱을 보고 와락 달려들어 농을 부수고 그 안에 있는 새매를 다 날려 보내니, 이때에 마침 달딸왕의 부자는 다 사냥 나가고 달딸왕의 공주가 간수하다가 놀래어 가로되, 네가 왜 새매를 다 놓아 보내느냐? 더욱 우리의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죄를 지음이 아니냐』
갓쉰동이 가로되, 「내가 나 갇힌 것을 답답히 여기는 마음으로 매 갇힌 것을 보니, 곧 매를 위하여 답답한 생각이 난다. 나는 나를 풀어주지 않는 사람을 원망하면서 내 곁에 갇힌 매를 풀어 보내지 못하면 매가 얼마나 나를 원망하랴. 내가 차라리 매를 위하여 죽을지언정 매의 원망은 받지 아니하리라 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 갇힌 새매를 풀어 놓았노라」
공주가 듣더니 측은히 여겨 가로되 「내가 우리 둘째 오라버니에게 들은즉, 네가 우리 달딸을 망하려고 생긴 사람이라 하니, 네가 어찌하여 달딸을 망치려 하느냐?」
갓쉰동이 가로되, 하늘이 나를 달딸을 망치려고 낸 사람이라 하면, 너의 오라버니가 나를 죽이려 하여도 죽지 않을 것이요, 또 나를 죽일지라도 나 같은 사람이 또 날 것이니, 너의 오라버니에게 이렇게 잡혀 죽게 된 몸이 어찌 달딸을 망친단 말이냐. 공주가 만일 나를 풀어주면, 나는 저 매와 같이 천산만수로 훨훨 날아다니면서 ‘남무아미타불’을 불러 공주를 애호하여 달라고 외울 뿐이요, 다른 생각이 없겠다.』하니
공주가 더욱 측은한 빛이 있더니, 「오냐, 내 아무리 무능한 여자인들 우리 아버지의 딸이요, 우리 오라버니의 동생이니, 어찌 너 하나를 살리지 못하겠느냐. 얼마 못 되어 우리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돌아오시거든, 너의 무죄함을 고하여 너를 살아가게 하리라.」
갓쉰동이 공주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여 가로되, 「공주는 애쓰지 마소서. 돌쇠 한 놈 죽는 것이 무슨 큰일인가요. 나는 듣자오니, 부처님은 사람을 구할 때에 그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고한 일이 없다 하는데 …」
공주가 그 말하는데 얼굴이 더욱 변색하고 말이 막히더니, 내전불당에 들어가 기도하고 열쇠 철책문을 열어 갓쉰동을 내보내며, 나올 때에 공주가 손목을 잡고 「내가 너를 처음 보았지만 너를 볼 때에 내 마음도 따라간다. 네 몸은 새매같이 훨훨 날아갈지라도 네 마음일랑 나를 주고 가거라」
갓쉰동이 가로되, 「공주가 저를 잊을지언정 저야 어찌 공주를 잊으리이까」 하고 말은 길지만 갈 길이 바쁘다. 「걸음아 나를 살려라」 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도망하여 성문에 나와, 초근을 캐어 먹고 주복야행하여 달딸의 국경을 벗어나 귀국하더라. 달딸의 제이 공자가 돌아와, 공주가 갓쉰동을 사방한 것을 알고 대노하여, 칼을 빼어 그 누이 공주의 목을 베다라 하고.
이하에도 갓쉰동이 귀국한 뒤에 책문을 지어 과거에 급제한 것이며, 영희와 결혼한 것이며, 달딸을 토평한 것이며, … 기타 다른 이야기가 많다. 이같은 것은 모두 략하거니와, 그러나 나는 이를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지나(중국)를 탐정하던 전설의 일단으로 믿노라.
「갓쉰동」은 곧 개소문(연개소문)이니, 「개」는 갓으로 독하고, 「소문」은 「쉰」으로 독할 것이며, 「국휘」는 곳 남생(천남생) 묘지에 쓰인 개소문(연개소문)의 부 - 태조(태조)니, (일)은 그 명이오, 우 (일)은 그 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국휘가 혹 소설 작자의 사작한 이름일 것이며, 달딸국 왕은 곧 당고조요, 제이 공자는 곧 당고조의 제삼자 당태종이니 하고로 당고조와 당태종을 달딸 왕이라 달딸 공자라 하였느냐 하면, 이는 누백년 래 사대주의파의 세력에 눌려, 언문책이라고 천대하던 우리 글로 쓴 려항부녀가 읽는 책도 당당한 지나(중국)대륙의 정통 제왕을 공격 혹은 비난하는 이야기만 하여도 시대의 기휘인 고로, 그 전설 중에 「당」을 「달딸」로, 당고종을 달딸 국왕으로, 당태종을 달딸 국왕의 제이 공자로 고친 것이니라.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병력으로 그 임금과 그 대신 호족 수백인을 벤 사실이 왜- ‘「갓쉰동전」에 빠졌느냐?’ 이것도 구소설의 권징주의에 위반되는 것이라 하여 고친 것이니라.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시대에는 조선에 과거가 없던 시대인즉, 책문을 지어 과거의 맞춘 일이 없을 것이나, 이것은 과거를 천선시하는 이조(조선)에 습관에 의하여 첨부한 것이니라. 「갓쉰동전」을 이 같이 구전설을 고치고 신관념으로 가감하여 지은 소설이니, 그 본물의 신용가치의 여하를 말할 수 없음이 가석하다.
「사염객전[규염객전]」과 「갓쉰동전」의 량서의 기록이 좀 다른 바, 이제 양서의 기록의 진위를 추론하건대, 이때에 고구려가 새로 수양제의 수백만병을 대파하여 전 지나(중국)가 크게 진경하며, 당고조 태종의 문자는 수양제 치하에 있는 태원의 소공원이오, 이정(이정)은 태원의 일소관이오, 태원이 자고로 많이 고구려의 침압을 받던 지방인 고로 더욱 고구려인을 경계하였을 것이며, 당태종은 그 중에 내로 전 지나(중국)를 평정하고 외로 고구려를 침멸할 야심을 가져, 늘-고구려나 고구려인의 행동을 주목하였을 것이다. 그리하려 함에 당태종이 그 중노 중에서 변장한 고구려인 연개소문(연개소문)을 발견하니 얼마나 경악하였으랴. 하물며 『당서』에도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상모가 괴이하고 의기가 호일하다 하였은즉, 당태종이 이를 발견하는 동시에 곧 자가 미래의 강적이 자가의 수중에 잡힘을 알고 비상한 요행한 일로 여겼으리니, 또 얼마나 희약하였으랴? 그 경악희약한 끝에 반드시 죽이려 하였을 것은 불을 보는 것 같이 명확한 사실일 것이니, 리로 추하매 「갓쉰동전」은 가신할 점이 많으며, 신·구 양 『당서』에 당태종의 말을 써 가로되, 「개소문개자 개소문불감출」·「개소랑자야심」 등 모든 언사가 비록 개소문(연개소문)을 염악한 말이나, 그 반면에 개소문(연개소문)을 기탄하는 말임이 드러나며, 『이위공병서』에 막리지 「개소문」, 「자위지병」이란 문구가 또한 개소문(연개소문)을 모멸하였다기 보다는 외경하는 뜻이 보였은즉,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당태종을 만나보고 영기에 눌려 동출하다 문이 하설이뇨. 다른 기록과 대조하매, 「규염객전」은 가의한 점이 많다. 그러므로 본저에는 「규염객전」을 버리고 「갓쉰동전」을 취하노라.
(이) 연개소문 귀국 후의 내외정형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지나(중국)로부터 귀국함은 대개 기원 육백십육년 경(?)이다. 연태조(연태조)의 내외는 그 등에 새긴 이름을 증험하여, 그 아들을 찾고 만리외에 미혼부를 기다리던 유씨가의 영희는 신랑을 맞아 일시 고구려 국내에 기담으로 편전하였다 한다.
이는 다 역사적 사실이 될 것이 없으므로 여기에 략하거니와, 개소문(연개소문)이 귀국한 뒤에, 수양제는 그 신하 우문화급(우문화급)[살수에서 패귀한 장군 우문술(우문술)의 자]에게 참살을 당하고, 군웅이 병기하여 서로 강을 다투어 지나(중국) 전국이 끓는 국같이 부글부글 하다가, 미기에 전술한 당공 이연(이연)의 자 이세민(이세민) - 당태종이 부 이연(이연)을 협박하여, 또한 반군을 일으켜, 처음에는 오히려 수에 대하여 신례를 잡더니, 마침내 군신을 모두 토멸하고는, 드디어 부 연(이연)을 추하여 당황제을 삼고, 또 미기에 당태종이 형 건성(이건성)과 제 원길(이원길)이 쟁권함을 노하여 병을 솔하고, 건성(이건성)·원길(이원길)을 습살하여, 부 연(이연)을 핍하여 제위를 빼앗아서 자립하여, 연호를 정관이라 하여 십오년 동안이나 정쟁에 근로하며, 명신과 현상을 써 각종의 문화사업을 진흥하며 국가사회주의를 행하여, 국내 전토를 모두 공전으로 만들어 백성에게 대략 평균히 분배하며, 십육위를 세워 고구려의 징병제를 참작하여, 상비병 이외 후비병을 두어 전국 인민이 매년 농극에 기사를 익히게 하고, 이정(이정)·후군집(후군집) 등 제장을 발하여 돌궐 - 금 내몽고(몽골)·서돌궐 - 금 서몽고·철륵제욱 - 금 외몽고·고품토곡혼 - 금 서장을 정복하여 문치와 무력이 다 혁혁하니, 이것이 지나(중국)사에 가장 떠드는 「정관지치」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연개소문)이 귀국하던 익년이, 수의 망한 뒤로부터 정관 십오년에 이르매 도합 이십육년이니, 이 이십육년 동안 고구려의 내정은 어떠하였더냐. 왕제 건무(건무)는 을지문덕(을지문덕)과 한 가지로 수병을 쳐 물린 양대 원훈이지만, 을지문덕(을지문덕)은 북진남수주의를 지키고 건무(건무)는 북수남진주의를 써, 양자가 서로 정견을 다투더니 영양왕이 죽고 건무(건무)가 즉위(기원 육백십팔년으로)하여서는 더욱 그 주의를 견집하여, 수·당 흥망의 사이에 을지문덕(을지문덕) 일파의 군신들이 그 기회를 타 서북에 강토를 늘리자고 주장하나, 왕이 다 억제하여 듣지 아니하고 당에 사자를 보내어 화호를 맺고, 수말에 피로한 지나인(중국인)을 다 쇄환하며, 인하여 장수태왕의 남진정책을 다시 써 자꾸 군병을 내어 신라와 백제를 치더라.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이를 반대하여 써 하되, 「고구려의 대환될 자는 당이요, 신라와 백제가 아니다. 왕일에 신라와 백제가 연맹하여, 우리 국가의 토지를 침탈한 일이 있으나, 이제는 정형이 이미 변하여 신라와 백제의 구서가 이미 깊어 서로 화평할 여망이 없은즉, 국가에서 남방에는 견제의 책을 써 신라와 연맹하여 백제를 막거나 백제와 연맹하여 신라를 막거나 하여, 양책의 중에서 그 일책을 쓰면 그 양국이 서로 싸우는 바람에 국가는 가히 남방의 걱정이 없이 되니, 이 틈을 타서 당과 결전하여 다툼이 가하니다. 서국은 국가와 어느 때라도 양립하지 못할 나라이니, 이는 왕사에 험하여 소연한 것인즉, 국가에서 왕년 수백만 수병을 격파하던 때에 곧 대병을 출하여 그 난인을 정토하였더라면 그 정평함이 반장함과 같이 쉬울지어늘 이 천재일시의 호기를 잃음이 벌써 지사의 통한할 바이며, 금일도 좀 늦었으나 그러나 피 이가의 형제가 불목하여 건성(이건성)은 세민(이세민)을 죽이려 하며 세민(이세민)은 건성(이건성)을 죽이려 하는데, 이연(이연)이 혼우하여 양간에서 의위하니, 국가가 만일 이즈음에 대병으로 피를 치면 건성(이건성)이 반하여 국가에 부하거나 세민(이세민)이 반하여 국가에 부하거나 할 것이요, 설성 그렇지 않을지라도 피가 수말에 대패와 또 누년 화란의 뒤를 이에 민력이 아직 소성치 못하였으며, 국력이 아직 회복치 못하여 반드시 전쟁할 여력이 없으리니, 이것도 비상한 호기회어니와 만일 피 형제 양인에 그 일인이 패사하고 일인만 전권하여 세력이 통일된 뒤에는 폐정을 고치고 군제를 바로잡아 국가를 침범하면 토지의 대와 인민의 중이 다 피에게 불급한즉, 고구려로서 무엇으로 피와 대항하리오. 국가 흥망의 기가 여기 있거늘 군신장상들이 이를 아는 자가 없으니 어찌 한심할 바가 아니냐」고 극력으로 정당을 주장하나, 영류왕과 기 대신들이 이를 듣지 아니하더라.
기원 육백이십육년에 이르러 당태종, 곧 당무덕 구년에 그 부의 제위를 빼앗을 때 사자를 보내어 신라와 백제에 대하여 서로 전쟁하지 말 것을 권고하며, 미기에 또 을지문덕(을지문덕)의 전승기념으로 쌓은 경관을 양국 평화의 장애라 하여 그 훼철함을 요구하는지라. 영류왕도 이에 대경하여 당의 침입이 조만간에 필연적으로 사실화될 줄을 깨달았다. 그러나 오히려 북수남진의 정책을 지키어 남방의 침략을 정지하지 않는 동시에, 국내 남녀를 발하여 북부여성으로부터 금 요동반도의 남단까지 천여리의 장성을 쌓아 무릇 십육년 만에야 필하니, 공장과 계역이 전쟁보다 호대하여 남자는 경작하지 못하고 여자는 잠직하지 못하여 국력이 매우 피폐하더라. 『삼국유사』에 장성의 축을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주청에 의한 것이라 하였으나, 이는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노자상과 도사를 청하여 왔다」는 말과 한 가지의 무설이니라.(제육절에 참고)
(삼) 연개소문의 혁명과 대도살
기원 육백사십육년 경에 서부에 살이 연태조(연태조)가 죽으니,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살이의 위를 습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늘-격렬하게 「당을 침」을 주장하므로, 영류왕과 모든 대신과 호족들이 다- 연개소문(연개소문)을 「평화 파괴할 인물」이라고 위험시하여 습직함을 불허하니, 이는 곧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정치상 생명을 할절함이러라.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자신이 공고하여 「내가 아니면 고구려를 구할 사람이 없다」고 자허하는 인물이지만, 또한 소년에 이향과 이국에서 두 번이나 종노릇하던 경력이 있어, 굴할 곳에 굴하는 견인한 인물이라. 습직의 불허함을 당하고는 곧 사부 살이와 기타 호족의 집을 돌아다니며, 「개소문(연개소문)이 불초하나, 제대인이 대죄를 가하지 않고 겨우 습직권을 剶탈하시니, 이만하여도 은의가 지악합니다마는, 오늘부터 개소문(연개소문)도 힘써 회개하여 제대인의 교훈을 쫓으리니, 바라건대 제대인은 개소문(연개소문)으로 직을 습케 하였다가 불초한 일이 있으면 직을 탈환하소서」 하니, 제대인이 그 말을 애긍히 여겨 서부 살이의 직을 섭행케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서울에 있음은 불가하다 하여, 북방으로 쫓아내어 북부여 장성의 역을 가져 감독케 하니,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이에 서부 병마를 거느리고 출발할 일자까지 정하였더라.
요전에 당태종이 고구려의 내정을 탐지하려고 자주 밀사를 파송하는데, 당인은 매양 고구려의 나졸에게 발각되므로 남해 중에 삼불제국 왕에게 뢰물하여, 고구려의 군액 다소와 군대 배치와 군용지리와 기타 내정을 탐정함을 부탁하였다. 삼불제국은 남양 일개 소국으로, 자래로 고구려에 호시하며 조공하여 그 사자가 오면 마음대로 각처에 유역할 수 있으므로, 삼불제왕이 이를 쾌락하고 「조공한다」 명칭하고, 정탐을 실행할 사자를 고구려에 보냈다. 그래서 삼불제 사자가 와서 각항을 탐정하고 귀국한다 칭하고, 해상에 떠서 당으로 향하였다. 그러다가 해중에서 고구려 해라장 해상 경찰장에게 잡혔다. 해라장은 강개한 무사요, 연개소문(연개소문)을 천신같이 숭배하는 자라. 늘-조정이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책을 써 당을 치지 안함을 분개하다가, 이제 당의 밀정- 삼불제 사자를 잡아 가지고, 그 비밀한 문서는 빼앗아 조정에 올리며, 밀정은 죄옥에 내리려다가 「아서라. 대적을 보고도 치지 못하는 나라에 무슨 조정이 있으랴?」 하고, 문서는 모두 해중에 던지며 사자는 먹실로 그 얼굴에다가 하와 같이 새겼다.
면자해동삼불제 기어아아이세민 금년약불내진공 명년당기문죄병
이라 운한 한시 일절을 얼굴에 떠 새기고 다시
고구려태대대로연개소문(연개소문)졸모서
라 썼다. 면부는 좁고 자수는 많아 묵량이 모호하여 알아볼 수가 없다 하여, 다시 그것을 백지에 등사하여 그 사자를 주어 당으로 보냈다.
당태종이 이를 보고 비상히 분노하여 곧 조서를 내려 고구려에 침입하려 한즉, 시신이 간하여 가로되, 「대대로의 성명이 이미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아니었은즉, 이제 사자의 얼굴에 자자한 연개소문(연개소문)은 하인인지도 알 수 없는데, 하물며 하인인지도 알 수 없는 연개소문(연개소문)의 휘하 사졸의 죄로 맹약을 깨트리고 병을 고구려에 가함이 불가하니, 먼저 사자를 보내어 밀서로 왕에게 알아봄이 옳은가 하나이다.」 당태종이 그 말을 좇아 그 사실의 진위를 알려 달라는 밀서를 가진 당 사자가 들어왔다.
영류왕이 이를 듣고, 금병을 보내어 해라장을 조옥에 구인하여 사문한즉, 해라장이 강개히 자백하고 조금도 기탄치 않는지라. 영류왕이 대경하여 서부 살이 - 연개소문(연개소문) 일인을 제한 이외에, 각부의 살이와 대대로 울절 등 각 대관을 당야에 비밀히 소집하여, 해라장이 당왕를 추욕함은 오히려 소사어니와, 그 말단에 대대로도 아닌 연개소문(연개소문)을 대대로로 쓴 것과, 또 허다한 대신들 가운데에 다른 대신은 말하지 않고 홀로 연개소문(연개소문)을 들어 그 휘하 졸로 자부한 것을 보면, 피등 종인들이 연개소문(연개소문)을 추대함이 명백하며, 또는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늘 - 정당설로 군과를 선혹하여 조정을 반대하여 인심을 사니, 이제 이를 베지 아니하면 후환을 몰상할 수 없은즉, 직을 탈하고 사형에 처함이 가하다 하여 중론이 귀일하였다.
그러나 전일 같으면 일도 명령을 발하여 일졸을 보내어 연개소문(연개소문)을 구포함이 가하지만, 금일에는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서부 살이가 되어 대병을 장악하였은즉, 그 걸오한 천성이 구포를 받지 않고 반항할 것이 십의 팔구나 필연한 일이니, 명조로 연개소문(연개소문)을 잡으려면 일차 국내의 요동을 지을 것이거니와, 이제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새로 장성 역사의 감독의 임명을 받아 발정할 날이 멀지 않은즉, 미구에 천폐에 숙사하리니, 이때에 그 반죄를 선포하고 조령으로 잡으면 일장사의 힘으로 넉넉히 연개소문(연개소문)을 묶으리라 하여, 각 대관들이 어전에서 물러나와 비밀히 그날 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천하의 일은 사람의 예상대로 되지 않고 늘- 조모 분각의 사이에 의외로 돌변하는 것이다. 그 어전회의의 비밀이 어디로 풍성을 누설되었던지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이를 알았다. 그래서 심복 장사 들과 밀의하고 선발제인의 계를 쓸 새, 발정 전 모일로 평양성 남에 대열식을 거행하려 하니, 「대왕과 각 대신들이 친임하심을 바란다」고 왕께 주하고, 각부에 통고하였다. 각부 살이와 각 대신들이 가기가 싫으나, 그러면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의심을 발케 하여 대사에 불리하다 하여 일제히 가보되, 오직 대왕은 존엄을 지키어 금병을 끼고 왕궁에 계시면 피가 비록 이심이 있을지라도 왕위에 진압되어 감발치 못하리라 하고, 그날에 모든 대관들이 정연히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열병식장에 다다라 류량한 군악 소리에 인도되어 군막 안에 들더니, 술을 두어 차례나 행한 뒤에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돌연히 「반적을 잡으라」 하는 한 소리에 사변에 대령하였던 장사들이 번개 같이 달려들어 칼·도끼·몽둥이로 일제히 사격하니, 임장한 대관들도 거의 백전 무사 들이지만 겹겹이 포위한 중에서 겸하여 수자상의 다소가 현절하니 어찌 벗어날 가능이 있으랴. 경각간에 대신·호족 등 수백명이 일시에 육장이 되고 선혈로 그 식장을 물들였더라.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이에 휘하 장사를 거느리고 대왕의 긴급명령이 있다 칭하고, 성문을 지나 궁문으로 들어갈 새, 못 들어오도록 막아서는 수병을 칼로 치고 궁중에 돌입하여 영류왕을 찔러 넘어뜨리고, 다시 그 시신을 칼로 쳐 두 도막을 내어 수채 구멍에 던지니, 대왕의 위병들이 다 연개소문(연개소문)의 름연한 위풍과 신속한 행동에 놀래어 하나도 저항하는 자 없어, 이십년전 패강구에서 수장 내호아(내호아)의 수십만 대병을 일격에 섬멸하여 「지용절등」으로 천하에 이름이 진동하던 영류왕이, 의외에 무참하게 연개소문(연개소문)에게 죽어버렸다.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곧 왕의 질 보장(보장)을 맞아들여 대왕을 삼고, 연개소문(연개소문)은 「신크말치」라 칭하여 대권을 전교하니, 보장(보장)은 비록 왕이라 명하나 아무 실권이 없고,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실로 실권을 가진 대왕이러라. 신크말치는 곧 태대대로니, 고구려가 처음에 삼 재상을 두어 신가·말치·불치라 칭하니, 이독자로 상가·대로·패자라 쓴 것이 곧 그것이니, 신가는 정권·병권을 총람하더니, 그 뒤에 신가가 권력이 과중하다 하여 그 명까지 폐지하고, 「말치」·「크말치」라 칭하여 병권은 없이 오직 왕을 보좌하고 백관을 총찰하고 수석대신이 될 뿐이러니, 이제 연개소문(연개소문)이 「크말치」의 위에 「신」자를 더하여 「신크말치」라 하고, 신크말치가 정권과 병권을 총람하며, 살이의 세습을 폐하고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친당으로 임명하며, 사부 살이의 평의제를 파하여 관리의 출척과 국탕의 출납과 선전·강화 등 대사를 모두 신크말치의 전단으로 하고, 왕은 새서만 찍을 뿐이니, 그런즉 연개소문(연개소문)은 고구려 구백년간의 장상·대신 들뿐 아니라 곧 고구려 구백년 간에 제왕도 가지지 못한 권력을 가진 일인이더라.
(사) 개소문의 대당정책
당을 대적하여 이를 격멸하고 지나(중국)로 고구려에 부용을 만들려 함은, 연개소문(연개소문)의 필생의 목적이다.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소년에 서유함은 물론 이 목적을 위함이어니와, 혁명적 수단을 써서 대왕을 죽이며 각부 호족을 무찌르고 정권과 병권을 한 손에 거머쥠도 또한 이 목적을 위함이다.
그러나 당은 토지의 대와 인구의 중이 다 고구려의 몇 갑절이므로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당을 치매, 고구려의 독력으로써 하는 이보다는 열국의 중력으로써 함이 가한 줄로 생각하였다. 이때에 고구려·당 양국 이외에 다소의 열국이 있으니, (갑)은 고구려의 동족인 남방의 신라·백제요, (을)은 고구려의 이족인 돌궐 (금 내몽고)·설연타(금 서몽고 등지)·토곡혼 - (금 서장) 등 제국이니,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처음에 영류왕에게 주하여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연합하여 당과 전하려 하나 영류왕이 듣지 아니하였으며, 밋(이윽고) 김춘추(김춘추)가 고타소낭의 구를 갚으려 하여 고구려에 와서 원을 청하매(제구편 제사장 참고),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춘추(김춘추)를 자가 사저에 관하고 천하의 대세를 담론하며, 인하여 춘추(김춘추)에게 「사구를 잊고 조선 삼국이 제휴하여 지나(중국)를 치자」 하였으나, 춘추(김춘추)가 한창 백제에 절치하는 때이므로 또한 듣지 아니하였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 춘추(춘추)의 래빙을 보장왕 원년이라 하였으나, 이는 동 『사기』가 늘 전왕 원년의 일을 신왕 원년으로 내려 쓰는 까닭이며, 「김유신전」에는 태대대로 개금(개금)이 춘추(김춘추)를 관하였다 하나, 이는 연개소문(연개소문)의 후일의 관함을 미리 이때에 쓴 것이니라. 밋(이윽고)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으매, 신라는 이미 당과 동맹되었으므로, 드디어 백제 의자왕과 사절을 통하여 「백제가 신라와 싸우거든 고구려는 당을 쳐서 당이 신라를 구치 못하게 하며, 고구려가 당과 싸우거든 백제는 신라를 쳐서 신라가 당을 응치 못하게」 하자는 교환조건으로 동맹을 체결하고,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또 오족루(오족루)를 돌궐 제국에 보내어 고구려가 당과 싸울 때에 피등으로 하여금 당의 배후를 습함을 운동하였으나, 이때에 돌궐 제국이 이미 당의 정복한 바가 되어 세력이 미약하여 겨우 설연타 진주가한(진주가한)이 이를 허하는 외에 감히 응하는 자가 없었다. 개소문(연개소문)이 탄하여 가로되, 「고구려가 남진책을 고수하다가 천재일시의 호기를 놓친 것이 적지 않다」 하더라.
제이장 요수전역
요수전역은 전사에 온통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신당서』 「고려전」 에 「신라가 구를 걸함으로 제(당태종을 지한 것)가 오선 사백소을 발하여 량을 운하고 영주독 장검(장검)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하더니, 마침 요수의 범일을 만나 사를 환하다」 하였다 하니, 이는 명백히 기원 육백사십오년 안시성전역의 전 요수의 일대 전역이 있어 당이 전패하였으므로, 당의 사관들이 「위국휘치의 춘추필법」을 써서, 이같이 모호 간략한 수구의 기록만을 남겨 둔 것이다. 이는 대개 당태종이 연개소문(연개소문)이 혁명한 뒤에, 고구려 인심이 위의함을 기회하여 신속히 수군을 발하여 침입하다가 고구려 수군에게 패멸한 것이다. 기록이 넉넉지 못하므로 그 실제를 상기할 수 없으나 이것이 안시성전역의 초본이요, 양국 충돌사의 제일혈인 고로, 이제 그 눈동자만 보여 둔다.
제삼장 안시전역
(일) 안시전역 전 피차의 교섭과 충돌
『삼국사기』의 기한 고구려의 대수·대당 양 전역의 사실이 거의 『수서』와 『당서』을 초록한 것이며, 『수서』·『당서』의 우 양 전역에 관한 기록이 거의 경록임은 이미 전서에 술하였거니와, 그러나 『수서』는 수가 그 전역 후에 곧 멸망하고 그 전역을 기한 자가 수인이 아니요 당인인 고로 경록이 오히려 적거니와, 『당서』는 당의 년대가 장원하여 고구려와의 전쟁한 사실이 곧 당대 사관이 적어서 전한 것인 고로, 시와 비와 승과 패를 뒤집어 꾸미며 경록이 얼마인지 알 수 없다. 이제 『신·구당서』·『자치통감』·『책부원귀』 등에 보인 양국의 교섭 충돌의 경과를 략기하여 그 진위를 변한 연후에 당시의 실정을 논술하리라.
(일) 정관십칠년육월 … 태상승등소 사고려환 청어회원진증치수병 이핍고려 상왈 「원인불복 칙수문덕이래미문 일이백수병능위절역자야」주30)라 한 바, 등소(등소)가 고구려를 보고 온 결과 고구려의 강성을 외하여 수병을 증치함을 청함인즉, 그 수액이 일이백 만을 제청함이 아닐 것이니, 이는 한갓 모멸한 문자로 쓴 것이요 실담이 아니니라.
(이) 윤육월 당제위방현령왈 「개소문 시기군이전국정 성불가이인 이금일병력 취지불난 단불욕노백성 오욕차사글단말갈 요지 하여」주31)라 한 바, 말갈은 곧 예니, 고구려에 복속함이 누백년이요, 계단(거란)도 장수태왕 이후에 고구려에 속하였나니, 당태종이 어찌 당과 계단(거란)을 시켜 고구려를 침요할 수 있으랴. 당태종이 비록 노모하였을지라도 이 따위 실제 맞지 아니하는 말은 없었을 것이니, 이것도 대개 사관의 망록이니라.
(삼) 「… 혹권제가수토고려 제불욕인상벌환」이라 한 바, 당태종이 연개소문(연개소문)을 시군의 적이라 하여 이를 치려 할진대, 춘추의 의로 볼지라도 구상중을 인함이 가하니, 당태종이 도리어 상을 인함을 불긍하였다 함이 하설이뇨? 대개 당태종이 이때에 아직 동침의 방략을 완정하지 못하여 병을 내지 못함이니, 사관의 해설이 이에 부당하니라.
(사) 신라견사언 고려백제소화 장견토 … 당제 명사농승상리현장 재새서 유고려왈 「신라위질국가 이여백제 각의집병 양경공지 명년발병 격이국의 익년정월 현장지평양 막리지이발병 격신라파기양성 고려왕사소지내환 현奬유사구공 신라 막리지왈석수인입구신라 승허탈아지오백리 자비귀아 침지공병미능이」주32)라 한 바, 상리 현장(현장)이 이와 같이 모만한 국서를 가지고 갔으면, 후일 장엄(장엄)(하문에 보임)과 같이 피수하리니, 어찌 무사히 생환하였으랴. 또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이때에 신라 정벌에 중도에 있었으면, 어찌 당사 현장(현장)의 청으로 인하여 소환이 될 수 있으랴. 「신라본기」에 거하면, 수인 입구의 제에 허를 승하여 오백리지를 빼앗은 일도 없고, 또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양성을 습파한 일도 없으니, 이는 대개 당태종이 현장(현장)의 사환을 인하여 출병의 구실을 만들어 국내에 선시하려고 조작한 말이 될 뿐이니라.
(오) 「제장벌고구려모위사자인개탄행장엄분왈 이천자위무사이 외위총이국 감도왕인여유불행 곤오사소야 수청행위막리소수」주33)라 한 바, 장엄(장엄)이 무슨 사명을 가지고 갔는지를 사에 기치 아니하였으나, 요전에 만일 연개소문(연개소문)에게 피수 성피참한 당사가 없으면 어찌 인인이 행을 탄하매 이르렀으랴. 이로써 당 사관들이 매양 국치를 휘하기 위하여 교섭의 전말을 많이 뺐음을 볼 것이니라.
무릇 고구려와 당은 피차 강약을 다투는 불양립의 국이요, 연개소문(연개소문)과 당태종은 이아의 우열을 내기하는 불양립의 인물이니, 이같은 양개의 인물이 양개국의 정권을 잡았은즉, 양국 전쟁의 폭발은 조만간 필연적인 사실이니, 만일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집권이 몇 해만 더 일찍 했다면, 당태종이 동침하기 전에 벌써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서정이 있었을는지도 모를 것이거늘, 다만 당태종이 지나(중국)를 통일한 지 삼십년, 또 제왕이 되어 모든 시설을 그 재지껏 다한 지 이십년, 또 돌궐 먼 토위혼 등 국을 정복한 지 십년이 된 뒤에야 연개소문(연개소문)은 겨우 혁명을 성공하고 「신크말치」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당태종이 먼저 침입한 것이다.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자기가 고구려의 내정외교의 모든 대사건을 다 정리한 뒤에야 전쟁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겠지마는 이는 사세에 허하지 않는 것인 고로, 급급히 남으로 백제를 결하며 서북으로 설연타(설연타) 등을 선동하여 여당을 만들 뿐이요, 당태종은 수양제가 고구려전쟁 까닭에 망함을 징계하나 또한 전쟁치 않을 수 없는 형세에 있음을 자각한 고로, 연개소문(연개소문)의 내부 세력이 아직 완고하기 전 이를 꺾으려하여 급급히 병을 동함이니, 이는 당시 양편의 형세라. 그 이외 피사의 춘추필법적 기재와 아사의 노예적 채집은 거의 신인할 수 없는 망설이니라.
(이) 당태종의 전략과 침입의 선로
당태종의 고구려 침입은 일조일석의 일이나, 그 경영은 거의 이십년 동안의 일이다. 진·한 이후에 흉노가 쇠하고 위·진 이후도 오호는 다 지나(중국)에 이거하고, 그 외에 돌궐·토위혼이 시시로 지나(중국)의 서북에서 궐기하였으나 다 미구에 잔약하고 오직 고구려가 동남동북에서 지나(중국)와 대치하여 탁발씨의 주와 겨루고, 청에 이르러서는 곧 양제의 수백만 병을 전멸하여 위무가 일세를 진경하는 동시에, 지나(중국)와 마주 서서 신수두의 교의라든지, 이독자의 시문이라든지, 기타 음악·미술이라든지, 다 그 고유의 국풍으로 발달하여 정치상 뿐 아니라 엄연히 일대 제국을 형성한 고로, 당태종이 지나(중국) 이외에 또 고구려가 있음을 비상히 질시하여 정관지치 이십년간에, 외면으로는 안한하게 제신들과 치도·치덕을 강론하지만, 그 머릿속에는 곧 유악 모신 방현령(방현령) 등도 알지 못하게 대고구려전쟁에 계획이 오락가락 하였을 것이다. 피가 고구려를 치자면 먼저 수양제의 패인을 연구하여 그 반대적으로 전략을 만들라 하여, 이에 좌와 같은 초안을 작성하였다.
(갑) 수양제의 패한 제일 원인은, 정병을 취치 않고 다병을 취하여, 수자상의 군병은 비록 사백만에 달하나 전투에 능감한 자는 수십만에 불만한 까닭이라 하여, 십년 양성한 군병에서 특별히 정련군 이십만을 추려 내며,
(을) 수양제의 패한 제이 원인은, 고구려의 변경부터 잠식하지 않고 곧 대병으로 평양을 침입하였다가 양로가 단절하고 후원이 없던 까닭이라 하여, 평양을 침입하지 않고 먼저 요동 각 군현을 정복하라 하며,
(병) 수양제의 패한 제삼인은, 수백만 육군이 각히 양미를 자담하여 노중에 군량을 삼고 따로 수군으로 하여금 주선에 각지 창고의 양미를 수운하여 목적지에 도달한 뒤에 유식하는 군량을 삼게 하다가 량선이 고구려의 수군에게 전몰한 까닭이라 하여, 이에 선량의 위험을 보충하기 위하여 국내 우·마·양 등의 목축을 장려하여, 전사 일명이면 기마와 양우 각 일필 양 기필을 분배하여, 노량을 군사가 자담치 않고 우로 운하며, 도달한 뒤에는 량선을 기다릴 것 없이 양식이 충족하고, 또 우·양·마 등 육을 먹게 하며,
(정) 수양제의 패한 제사 원인은, 타방 열국의 원조가 없이 오직 독력으로 고구려와 싸운 까닭이라 하여, 신라 김춘추(김춘추)의 걸원을 인하여 드디어 공수동맹의 의를 맺어, 고구려의 후방을 요란케 하며,
우 방략을 주도하게 작성한 뒤에, 기원 육백사십사년 칠월에 군대는 낙양에 집중하고, 군량은 영주의 대인성(금 진황도)에 집중하고, 영주도독 장검(장검)을 명하여 유·영 이주의 병마를 솔하고 요동 부근을 유격하여 고구려의 형세를 더듬게 하고, 장작대장 염입덕(염립덕)에게 명하여 군량을 대인성으로 운송케 하고, 동년 십월에 형부상서 장량(장량)으로 평양도행군대총관을 삼고, 상하 좌난당(좌난당)은 부총관을 삼고, 방효태(방효태)·정명진(정명진)·염인덕(염인덕)· 유영행(유영행)·장문간(장문간)은 총관을 삼아 강회영협의 정병 사만과 장안·낙양의 용사 삼천을 거느려 해도로 떠나, 명은 평양으로 향한다 하나 기실은 요하로 향함이요, 이적(이적)으로 행군대총관을 삼고, 강하왕 도종(도종)은 장사귀(장사귀)·장검(장검)·집실사력(집실사력)·계필하력(계필하력)·아사나미사(아사나미사)·강덕본(강덕본)·오흑달(오흑달)로 총관을 삼아 육로로 요동으로 추하여 양군이 요동에 합하게 하고, 당태종은 친히 어군 이십만명으로 후계가 되기로 하더라.
(삼) 연개소문의 방어 겸 진공의 전략
당병 침입의 기별이 이르매, 개소문(연개소문)이 제장을 모아 저적할 계획을 강구할 새, 혹은 평원왕 때에 온달(온달)이 주와 싸우듯이 기병으로 마구 무찔러 요동평야에 격전하여 승부를 결함이 가하다 하며, 혹은 영양왕 때에 을지문덕(을지문덕)이 수와 싸우듯이 촌야의 인민과 곡속을 모두 성읍에 입보케 한 뒤에, 평양에 유입하고 량도를 절하여 그 기인함을 타서 격파함이 가하다 하여 중론이 분운하거늘, 연개소문(연개소문)이 가로되, 전략은 형세에 의하여 정하는 것인데, 오늘 형세가 평원왕 때와 영양왕 때와 다르거늘 어찌 그때의 형세와 같이 여겨 전략을 정하리오. 금일에는 지를 택하여 수어하며 기를 수하여 진공하리니 고인의 성규를 교수할 바 아니라 하고, 이에 명령을 내리어 건안·안시·가시·횡악 등 수개의 성읍만 고수케 하고, 그 나머지는 곡속과 초료를 운반 혹 분훼하여 적인으로 하여금 노략할 것이 없도록, 오골성 - 금 연산관으로 방어선을 삼아 용장과 중병을 조치하고, 따로 안시성주 양만춘(양만춘)과 오골성주 추정국(추정국)에게 밀고하여 가로되, 금 당인 수의 패전을 징하여, 양식에 특별히 주의하여 장래 군량의 결핍을 보충할까 하여 군중에 우·마·군양을 무수히 가져왔으나, 추동이 되어 백초가 다 마르고 강물도 또한 얼면 그 우·마·군양을 무엇으로 먹이리오. 피도 이를 알므로 속전을 구할 것이다. 그러나 피가 수의 패전을 징하여, 평양으로 직진치 못하고 안시성을 선공하리니, 양공이 출전치 말고 성을 견수하다가 그 기인하려 할 때를 기다려 양공은 내에서 출격하고, 추공은 외에서 진격함이 가하다. 나는 뒤에서 당병의 후로를 습격하여 아주 그 귀로가 없게 하고 이세민(이세민)을 금하려 하노라 하더라.
(사) 상곡의 횃불과 당태종의 패주
해상잡록에 가로되, 당태종이 출병하기 전에, 일찍 당의 제일 명장 이정(이정)으로 행군대총관을 삼고자 한즉, 이정(이정)이 사하여 가로되, 「군은도 중하거니와 사은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외다. 몸이 일찍 태원에 있을 때에, 개소문(연개소문)을 만나 병법을 배워 몸이 그 뒤에 폐하를 도와 천하를 평정함이 다 그 병법의 힘을 입었은즉, 금일 신이 어찌 감히 전일에 사사하던 개소문(연개소문)을 치리이까」 한대, 태종이 다시 묻되 「개소문(연개소문)의 병법이 과연 고인의 누구와 견주겠느냐?」 이정(이정)이 가로되, 「고인은 알 수 없거니와, 금일 폐하의 제장 가운데에는 적수가 없고, 비록 천위로 임하실지라도 가승하기 어려울까 하나이다.」 태종이 불열하여 가로되, 「중국의 대와 인민의 중과 병력의 강으로 어찌 일 개소문(연개소문)을 두려워하랴.」 이정(이정)이 가로되, 「개소문(연개소문)이 비록 일인이나 재지가 만중에 뛰어난즉, 어찌 두렵지 아니하리이까」 하였다는 기록이 사실이라 하면, 당태종이 이때에 일찍 「영희」 때문에 연개소문(연개소문)을 죽이지 못하였음을 후회하였을 것이다.
기원 육백사십오년 이월에 당태종이 낙양에 이르러, 수 우무후장군으로 수양제를 따라 살수전역에 갔다가 수가 망한 뒤에 당에 벼슬하여 의주자사가 되었다가, 이때에 년로 휴직한 정원숙(정원숙)을 불러 고구려 사정을 물었는데, 원숙(원숙)이 가로되, 「요동은 길이 멀어 양운이 간난하고 고구려가 수성에 능하여 성을 공발하기가 극난하니, 신은 이 길을 매우 위태한 길로 보나이다.」 당태종이 또한 불열하여 가로되, 「금일의 국력이 수의 견줄 바 아니니, 공은 다만 결과나 보라.」 하더라. 그러나 만일을 염려하여 태자와 이정(이정)에게 후방의 고수를 명하고 드디어 출발하더라.
요택(금 발착수)에 이르니, 이백리 니녕에 인마가 통할 수 없는지라. 장작대장 염입덕(염립덕)을 명하여 목석을 운반하여 길을 만들 새, 수시 장사들의 해골이 곳곳에 널렸거늘, 당태종이 제문 지어 애곡하고 군신들을 돌아보며 「금일 중국 자제들이 거의 이 해골들의 자손이니 어찌 복수하지 않으리오」 하며, 요택을 지나서는 웃으며 가로되 「누가 개소문(연개소문)더러 병법을 안다 하느뇨? 어찌 이 요택을 지키지 아니하였느뇨?」 하더라.
요하를 건넌 뒤에 전사가 거의 순리하여 요동 곧 오열홀·백암·개평·횡악·은산도·황성 등을 차제로 함락하고, 다시 이적(이적) 등 제장을 불러 군사회의를 열고 새로 진행할 길을 의논할 새, 강하왕 도종(도종)은 오골성(금 연산관)을 쳐 얻고 곧 평양을 습하자 하며, 이적(이적)과 장손무기(장손무기)는 안시성을 치자 하였다. 수양제가 일찍 우문술(우문술) 등으로 삼십만 대병을 보내어 평양을 습하다가 전군이 패몰함은 당태종이 경계하는 바인 고로, 도종(도종)의 말을 쓰지 아니하고 이적(이적)의 말을 써 안시성을 침하더라.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안시성주 양만춘(양만춘)과 오골성주 추정국(추정국)에게 요동의 전사를 위임하였음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안시성은 곳(아리티) 혹 환도성이라 칭하며, 혹 북평양이라 칭하나니, 태조대왕이 일찍 서북을 경영하기 위하여 설치한 바로서, 발기(발기)의 난에 이를 지나(중국)에 피탈하였다가, 고국양왕이 이를 회복한 이래로 이를 해육의 요충이라 하여 성첩을 가축하며 정병을 배치하고 성중에 늘- 누십만석의 양미를 적치하여 난공불락의 요새로 칭한 지 오래더라.
동년 육월에 당태종이 이적(이적) 등 수십만중을 거느리고 성을 공위하여, 역자로 하여금 성중에 향하여 「여등이 항치 않으면 성은 함하는 날에 다 도륙하리라」 외치거늘, 양만춘(양만춘)이 성상에서 역자로 하여금 당군에 향하여 「여등이 항치 않으면 성에 출하는 날에 다 도륙하리라」 하더라.
당병이 성에 근하면 성중 병이 문득 이를 사도하여 허발하는 살이 없거늘, 당태종이 이에 긴밀히 포위하여 성중을 기군케 하려 하나, 성중은 실로 량저가 넉넉하고 당병은 비록 가져온 양식이 풍부하나 수삭을 지내매 차차 경갈을 고하고, 비록 요동의 수성을 얻었으나 아무 소저가 없는 공성들뿐이요, 수로의 주선은 모두 고구려 수군의 격파한 바가 되어 운량할 길이 없고, 요동은 천기가 조한하여 만일 추풍에 초고하면 우·마·군양은 다만 먹일 것이 없어 아사할지라. 당태종이 이에 랑패가 극하여 강하왕 도종(도종)을 명하여 안시성의 동남에 토성을 쌓을 새, 양토로 수조를 싸서 층층히 쌓아 올리고, 중간에 오도를 내어 왕래케 하여, 육십일 동안의 품과 오십만 공전의 삯을 들이고, 사졸 수만이 매일 육칠차 번을 갈아 교전하여 사상도 적지 아니하였으며, 토산이 이미 이루매 산상에서 포석과 당거를 굴려 성첩을 묻더라. 성중에서 무너진 곳에 목책을 세워 막으나 당할 수 없거늘, 양만춘(양만춘)이 이에 결사대 백명을 뽑아 성이 무너진 곳으로 돌출하여 당병을 쳐 물리치고, 토산을 빼앗아 산상의 당거 포석을 차지하여 이로써 도리어 산하 당병을 쳐 물리니, 당태종이 이에 계책이 궁하여 회군을 꾀하더라.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요동의 전사를 양만춘(양만춘)·추정국(추정국) 이인에게 맡기고, 정병 삼만으로 적봉진 금 열하 부근을 쫓아 다시 남진하여 장성을 넘어 상곡 - 금 하간 등지를 습파하니, 당태자 치(치)가 어양에 유하다가 대경하여 고급봉을 드니 봉화가 일야에 안시성까지 련하였더라.
당태종이 곧 임투관 내에 변란이 있음을 알고 곧 회군하려 할 새, 오골성주 추국정(추국정)과 안시성주 양만춘(양만춘)은 그 봉화로 인하여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이미 목적지에 달함과 당태종이 장차 도망할 줄을 짐작하고, 추국정(추국정)이 전군을 거느리고 안시성 동남의 협곡으로 잠출하여 돌습하고 양만춘(양만춘)이 또한 성문을 열고 공격하니, 당병이 대란하여 인마가 서로 밟으며 도망하며, 당태종은 한우락에 이르러 마제가 니녕에 빠져 요동치 못하고 좌목이 양만춘(양만춘)의 활살에 맞아 거의 생금하게 되었더니, 당의 용장 설인귀(설인귀)가 달려 와서 당태종을 구하여 마를 갈아 태우고, 전군 선봉 유홍기(유홍기)가 단후를 맡아 혈전한 지 량구에 겨우 탈주하니, 성경통지의 해성고적고에 쓰인 바, 「당태종함마처」가 곧 그곳이니, 지금까지 당지의 사인들이 「오히려 당태종이 마가 니녕에 빠지고 활살에 눈을 잃고 생금될 뻔」한 이야기가 상전하더라.
양만춘(양만춘) 등이 당태종을 쫓아 요수에 이르러서는 허다한 당군의 장사를 참획하고, 요택에 이르러서는 당태종이 마를 몰아 니녕에 넣어 교량을 삼아 밟고 넘어가더라. 십월 임투관에 이르러서는,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당군의 귀로를 끊고 양만춘(양만춘)의 추격이 급하여 당태종이 할 바를 모르더니, 마침 풍설이 크게 일어 천지가 아득하여 지척이 부변이라. 양군 인마가 서로 엎어지며 자빠져 미란하거늘, 당태종이 이를 기회하여 도망하여 가니라.
우 안시성의 전역은 또한 동양 고사상의 대전쟁이라. 비록 수자상에 군사는 살수전역의 양국에 불급하나, 그러나 피차 방략의 주도와 군대의 정련과 자력의 모비는 살수전역보담 초과하며, 전역의 시일도 그보다 갑절이 되었다. 이 전역이 곧 양 민족의 운명을 내기 한 대전역이어늘, 당사의 기록은 거의 사리에 모순하니, 이를테면 (일) 백제는 고구려의 동맹국이어늘, 당사에 「백제가 금휴개를 상하여 전군이 입고 출전하매, 갑광이 백일에 빛났다」 하였은즉 고구려와 동맹인 백제가 도리어 적국인 당군에게 무장을 제공함이 아니냐. (이) 당군의 패멸이 곧 양식의 군갈에 원인하였거늘, 당사에 당태종이 백암 등 성을 깨치고 량미를 「십만석 혹 오십만석을 얻었다」 하니, 그 운래한 량향 이외에 소득한 량미가 또 불소함이 아니냐? (삼)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영류왕과 다수한 호족을 죽이고는 연씨가 그 친당을 써 요임에 분배하여 그 유래의 벌족정치를 타파하고 정권을 통일하였거늘, 「당태종이 안시성에 이르매, 북부누살 고연수(고연수)와 남부누살 고혜진(고혜진)이 고구려·말갈(예)병 십오만육천팔백인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하다」 하였은즉, 왕족 고씨가 오히려 남·북 양부를 근거하여 살이의 중임을 맡아 수십만 병을 가졌으니, 연개소문(연개소문) 혁명 이후 고구려의 현상이 어찌 이러하랴? (사) 안시성은 환도성이니 고구려 삼경의 일로서 해륙의 요충인즉, 개소문(연개소문)이 혁명한 뒤에 이 땅을 타당에게 줄 수 없는 바거늘, 당사에 「안시성주[양만춘(양만춘)]이가 재용하고, 성이 험하며 량이 족하므로 막리지[연개소문(연개소문)]의 난에 거수하여 불복하므로, 막리지가 인하여 그 성을 주었다」 하였은즉, 그러면 이때에 고구려가 수개의 국으로 있음이니, 어찌 일단이 되어 수십만의 당병을 막았으랴? (오) 평양 습입의 책은 수양제의 패망한 바거늘, 당사에 「이정(이정)이 이 계책을 쓰지 못하므로 패전의 제일 원인을 삼고, 당태종도 또한 이를 후회한다」 하였은즉, 이는 수양제의 근사를 건망함이 아니냐?
이와 같이 사실에 모순되는 기록이 많음은 하고이뇨. 대개 그 이유가 좌와 같으니,
(일) 사린만방을 다 당의 번복으로 보는 주관적 자존에 구사되어 사관들이 매양 「위존자휘」·「위친자휘」·「위중국휘」 등의 소위 춘추필법으로 경록한 까닭이니, 백제가 고구려의 동맹국인 객관 사실임을 불구하고 제일조의 망발이 있으며,
(이) 요동성·개평성 등을 차제로 점령케 함이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예정적 전략의 계책에 빠진 것을 휘하기 위하여 그 노획품의 풍다함을 부과하다가 제이조의 위증이 있음이며,
(삼) 당태종의 패주한 것을 승리한 것으로 뒤집어 꾸미다가 고씨의 천하가 이미 연씨의 천하됨을 망각하고, 문득 십오만 대병을 가진 고연수·고혜진 양 욕살이 투항하였다 한 제삼조의 망작이 있음이며,
(사) 당태종이 수십만 대병으로 사오삭 만에 일개 안시 고성을 공발치 못한 수치를 엄닉하기 위하여, 「안시성은 곧 당태종이 공발치 못할 뿐 아니라 곧 고구려 본국의 대권을 잡은 연개소문(연개소문)도 어찌 못하였다」는 제사조의 기록이 있음이며,
(오) 당이 고구려에게 패함은 군책·군력의 부족함에서 말미암음이 아니라 이러한 기모가 있어도 쓰이지 못한 까닭이라 하여, 「이도종(이도종)이 평양의 허를 습하자는 진술이 있었다」는 제오조의 치담이 있음이니라.
이상은 그 대략을 말함이거니와, 세고하면 거의 다 이 따위다. 그러므로 이제 당사을 좇지 않고, 해상잡록·성경통지 및 동삼성토인전설 등을 재료하여 적노라.
(오) 당태종이 전독에 죽음과 연개소문의 정당
당태종이 양만춘(양만춘)의 화살에 눈이 빠짐은 초인·야객의 전설이 되어 시가) 음영에 올라, 목은 이색(목은 이색)의 정관음에 「위시낭중일물이나지현화(목)낙백우(시)」라 하고, 노가재 김창흡(노가제 김창흡)의 천산시에 「천추대담양만춘 전사규염낙모자」라 하고, 이외에 이 따위의 시가 많다. 그러나 『삼국사기』·『동국통감』 등 사책에는 당시 전황에 겨우 『당서』를 초록할 뿐이요, 이런 말이 없다. 이는 사대주의파의 사가들이 고대 본국의 외국에 대한 승리의 기록을 모두 산락한 까닭이다. 이것을 지나(중국)사에 참고하건대, 일, 『구당서』 「태종본기」 이, 『신당서』 삼, 『자치통감』 이와 같이 병의 진단록이 호이하여, (갑)은 당태종이 내종으로 죽었다 하며, (을)은 당태종이 한질로 죽었다 하며, (병)은 당태종이 이질로 죽었다 하여, 일대의 전 지나(중국)에 군림한 만승황제의 죽은 병을 늑막염인지 장질부사인지 모르도록 모호하게 기록함은, 대개 고구려인의 독전에 죽는 치욕을 휘하다가 이같은 모순의 기록을 씀이다.
그러나 그 요동에서 얻은 병이라 함은 모든 기록이 동일하니, 양만춘(양만춘)의 화살에 유독으로 죽은 것이 명백하다. 이것이 송 태종이 태원의 전창으로 인하여, 그 독이 년년 복발하다가 삼년 만에 죽은 것은 송사에 휘함과 같으니[진항(진항)의 양산묵담에 보임], 이 뒤 신라와 당의 동맹이 더욱 공고함과 당의 안록산(안록산)·사사명(사사명)의 란이며 번진의 발호가 무엇이고 당태종의 고구려 전독에 죽은 사건과 관계 안된 것이 없거늘, 이제 이를 휘닉하여 사적 사실의 기인을 모르게 하였으니, 춘추필법의 해독이 또한 심하도다.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지나(중국)에 침입한 것도 기록에는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금 북경 조양문 외 칠리지의 황량대를 비롯하여 산해관까지 이르는 동안에 황량대라 이름하는 지명이 십여처인데, 전설에 황량대는 당태종이 모래를 쌓아 량저라고 속이여 고구려인이 내습하면 복병으로 요격하였다 한 곳이라 하니, 이는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당태종을 북경까지 추격한 유적이며, 산동·직예 등지에 띄엄띄엄 고려 이자로 관한 지명이 있고, 전설에는 이것이 다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점령하였던 고지라 하며, 가장 최저한 자는 북경 안정문 외 육십리 허의 고려진과 하간현 서북 십이리 허의 고려성인 바, 당인 번한(번한)이 「고려성 회고시」에 가로되, 「벽지성문계 운림치첩장 수명유만조 사암촉성광 첩고연운기 신화불지장 거연조시변 무복관현장 형극황진리 호봉고도방 경진매비취 황롱상우양 무나당년사 추성숙안행」 이라 운운한 바, 우시로 보면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일시 당의 토지를 출입 침략하였을 뿐 아니라, 성을 쌓고 인민을 이식하여 비고가 운에 연하며 화류가 지에 불하며 시정이 번화하며 관현이 갱장하며 비취보옥 등이 영일하여 신점령지의 부성을 자랑하던 실록으로 볼 수 있다.
당사를 보면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도망해 간 뒤에, 거의 해마다 달마다 고구려 침벌의 병을 발하여 「모년 모월에 우진달(우진달)을 보내어 고려를 벌하여 모성을 파하다」, 「모년 모월에 정명진(정명진)을 보내어 고려를 벌하여 모성을 파하다.…」한 등의 기록이 있지만, 이는 당태종이 고구려 까닭에 눈이 빠지며, 그의 인민 자제들이 많이 사자 혹 상자가 되어 천신 같은 제왕의 위엄이 소지하였는데다가, 고구려에 대한 복수병을 일으키지 않으면 더욱 내외 치소를 끼칠 것이며, 또 만일 재차 대거하자면 수양제의 복철을 밟을지라, 이제 교활한 술책을 내어 달마다 제장을 시켜 「고구려 모지를 침입하였다」, 「고구려 모성을 점령하였다」는 허위의 보고를 올리게 하여, 그 실상 없는 무위를 국내에 보이게 한 것이며, 죽을 때에 유조로 요동의 역을 파함은, 일변으로 자 고종의 「부수불복의 책을 감경하고, 일변으로 인민을 인애한다」는 성명을 민간에서 사려 한 것이니, 그러나 본래에 요동전역이 없었거늘 이제 무슨 전역을 파하랴? 당태종의 일생은 허위뿐이니, 사가나 독사가는 그 기록을 심취할 것이다.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무엇으로써 이와 같이 외정에 성공하였나뇨? 그 근거가 (이)니
발해사에 「대문예왈 (고구려성시사정병을 가리킨 것) 삼십만 항당위적」주34)이라 하고, 『당서』에도 「고려 발신성 국내보기사만」, 「신성건안지노 유십만」, 「고려말갈합병십오만」주35)이라 하니, 이상의 말에 의하면 고구려의 정병이 삼십만에 상하며, 기타 산병도 적지 않음을 알지며, 『고려사』 「최영전」 에 「당태종 이삼십만중 침고구려 고구려발승군삼만격파지」라 하고, 『고려도경』에 「재가화상 … 이조백속요 … 유전사 칙자결위일단 이부전장」주36)이라 하고, 해상잡록에 「명림답부 개소문 차개조의선인출신」이라 하니, 이상의 말에 의하면 승군은 불교의 승이 아니라 곧 「신수두」 단전에 조의무사요,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조의의 수령이었음을 알지니, 그런즉 누십만의 군대와 그 중심인 삼만의 조의군은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외정을 성공한 근거의 (일)이오.
미수 허목(미수 허목)이 가로되 >「호전지국 막여백제」라 하고, 순암 안정복(순암 안정복)이 가로되 「삼국지중 백제최이호전칭」이라 하니, 무릇 백제는 표한 선전의 국으로 고구려와 동맹하였은즉, 그것도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외정을 행한 근거의 (이)라.
최치원(최치원)의 이른바 「고구려 백제성시 강병백만 북요유계제노 남침오월」주37)쓴즉,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백제와 합작한 결과를 말함이니, 「북평」이라 「남정」이라 하지 않고 「북요」라 「남침」이라 함은, 이 글이 존당자인 최치원(최치원)으로서 당의 모 재상에게 올린 글인 고로, 이같이 춘추필법적 구어를 쓰는 것이요, 기실은 이때에 유계! 금 직예, 제노! 금 산동, 오·월 - 금 강소·절강이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 안에 매였던 것이니라.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백제와 관계된 사실은 차편에 상서하리라.
(육) 연개소문의 사적에 관한 무록
신라 때에 연개소문(연개소문)을 백제 원조자라 하여, 그 이후에는 연개소문(연개소문)을 유교윤리상에 군을 시한 적신이라 하여, 또 사대주의에 위반한 죄인이라 하여 늘 - 박대하여, 그에 관한 전설이나 사적을 소멸하기를 일삼았고, 오직 도교의 수입과 천리장성의 건축을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일이라 하나 기실은 『당서』에서 부연하여 온 무록이오 실록이 아니다.
이제 『삼국유사』 본문을 등재하여 그 무록임을 증명하리라. 본문에 좌와 같으니 「… 안당서운 선시 수양제정료동 유선장양명 불리어군 장사유서왈 필위총신 멸피국의 급개씨조선 이개위씨 내양명시지응야 우안고려고기운 수양제 이대업팔년임신 령삼십만병 도해래정 십년갑술 … 제장선사 위좌우왈 짐위천하지주 친정소국이불리 만대지소치 시유우상양명주왈 신사위고려대신 필멸국 보제왕지수 제붕후 생어고려 십오총명신무 시 무양왕(곧 영류왕) 징입위신 자칭성개명금 위지소문 내시중직야 금주왈 정유삼족 국유삼교 신견국중 유유유석무도교 고국위의 왕연지 주당청지 태종견숙달등도사팔인 왕희 이불사위도관 존도사 좌유사지상 … 개금우주 축장성동북서남 시남역녀경 십륙년내필 급보장지세 당태종 친통이륙사래정」주38)이라 한 바, 양명(양명)의 후신이 개씨가 되다 함은 요설이요, 연개소문(연개소문)을 「성개 명김 위지소문」이라 함은 망작이니 변론할 것도 없거니와, 기타 「도교를 수입하였다」, 「장성 건축을 주청하였다」 함도 또한 무록이니, 수양제는 기원 육백십칠년에 죽고 영류왕 - 곧 무양왕이 노자교를 수입함은 『당서』에 명백히 당고조 무덕 칠년「기원 육백이십사년」 인 바,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수양제 죽은 뒤에 났으면 영류왕이 노자교를 수입할 때에 겨우 팔세이니, 이제 「년십오 … 위신 … 주당청지」라 함이 하설이며 장성의 건축은 영류왕 십사년에 시하였은즉, 십육년에 필하였으면 곧 보장왕 오년 - 당태종 입구의 익년에 시필함이어늘, 이제 「십육년내필 … 당태종친통육사내정」이라 함이 하고이뇨?
대개 영류왕은 북수남진주의를 취하여 당과는 화친하고 신라와 백제를 공하려 하는 자며, 연개소문(연개소문)은 남수북진주의를 취하여 백제로써 신라를 견제하고 당을 공하려 하는 자니, 당 황제가 성이 이요 도교 시조의 노자도 성이 이인 까닭에, 당대에 노자를 그 혈통인 선조라 위증하여 극히 존봉하므로, 영류왕이 당과 화친하려 하여 당의 선조인 노자의 교주39)와 그 교도인 도사를 맞아 올릴지니, 종교로는 「신수두」를 존봉하고 정책으로는 당을 진공하려는 연개소문(연개소문)이야 어찌 그 국교를 버리고 적국인 당의 선조 노자의 교인 도교를 영배할 리가 있었으랴. 장성은 진공용으로 쌓은 것이 아니라 방수용으로 쌓은 것인즉, 북방을 방수하려는 영류왕이 쌓은 것일지니, 날마다 북방진공을 주장한, 또 주장을 실행한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어찌 이같이 국력을 들여 민원을 사는 방어용의 장성을 쌓을 리가 있었으랴. 이미 년조에 틀리고 사리에도 이같이 맞지 아니한즉, 양조의 사실이 다 무록임이 무의하니라.
혹왈 “『삼국사기』로 보면,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유·불·도 삼교는 정족과 같아 일을 궐함이 불가하다 하여, 왕께 주하여 도교를 당에 구함”이 보장왕 이년의 일인즉 『삼국유사』에 개금(개금)의 도교 청구 운운이 다만 그 연대를 오함이요, 사실은 확유함이 아니냐? 『삼국유사』에 이를 『고려고기』에서 인용하였다 하였은즉, 『삼국사기』도 이를 『고려고기』에서 인용하였음이 명백하며, 『고려고기』에는 「개금(개금)이 무양왕 곧 영류왕에게 주하여 도교를 당에 수입하였다」 하였은즉, 『삼국사기』 작자 김부식(김부식)이 그 연조를 옮아 보장왕 이년의 일로 썼음이 또한 명백하다. 김부식(김부식)이 매양 각종 고기와 지나(중국)사의 사실을 잡채하여 동 『사기』를 지을 새, 왕왕 년조가 모호한 사실이면 그 사실의 유무를 세구치 않고 마음대로 연월을 개입한 것이 허다한 바,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보장왕에게 도교 수입을 청구하다 운운함도 그 일예이니, 그러한즉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도교수입」, 「장성건축」을 청구하다 한 양 사건은 물을 것 없는 무록이니라.
그러면 그 무록의 작용자는 『고려고기』니 『고려고기』는 하고로 이 같은 무록을 썼나요? 『고려고기』은 대개 신라 말에 불교승의 작물이니 지나(중국)의 위 세조와 당 무종이 도교를 위하여 국내의 모든 불교사를 훼철하고 모든 불교승을 살해한 까닭에, 당시 어느 나라의 불교승들이든지 다 도교에 대하여는 절치원한하는 일이며, 연개소문(연개소문)은 백제와 동맹하여 신라를 멸하려 하던 인물인 고로, 신라 당시의 사회가 연개소문(연개소문)을 극구 훼駡하는 판이라. 『고려고기』 작자가 고기를 지을 새, 『당서』에 「영류왕이 도교를 수입하다」함과 「장성을 건축하다」함을 보고 이에 그 도교 통한하는 심리로 『당서』를 부회하여 방편의 법라를 대취하여 「도교를 믿지 말아라. 도교를 믿다가 고구려와 같이 국이 망하리라. 도교를 수입하여 우리 정신상 생명을 없이 하려 하고 장성의 역을 발기하여 우리 육체상 생명을 없이 하려 하던 자는 곧 연개소문(연개소문)」이라 하여, 연개소문(연개소문)을 미워하는 사회의 심리를 이용하여 도교를 배척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년대와 사세에 맞지 아니하니, 그 무록임이 자명하니라.
본국에 전하는 연개소문(연개소문)은 모든 명사와 사실을 거의 바꾸어 전한 「갓쉰동전」 이외에는 모두 이러한 무사뿐이냐? 여가 이십년 전 서울 명동에서 노상운(노상운) 선생이란 노인을 만난즉, 그의 말에 연개소문(연개소문)은 자가 금해(금해)니, 병법이 고금에 초절한 바, 그의 저한 『김해병서』가 있어 송도 때에도 늘- 각면 병마절도사에게 그 부임 시에 한 벌씩을 어사하였더니 지금에 그 병서가 절종되었으며, 연개소문(연개소문)이 그 병법으로 당 이정(이정)을 가르쳐 이정(이정)이 당의 유일 명장이 되고 이정(이정)의 저한 『이위공병법』은 무경칠서의 일로 치는 바, 『이위공병법』의 원본에는 연개소문(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운 이야기를 자세히 쓰고, 그뿐 아니라 또 연개소문(연개소문)을 숭앙한 구어가 많으므로 당송인들이 연개소문(연개소문) 같은 외국인을 사하여 병법을 배워 명장이 됨은 실로 중국의 대치라 하여 드디어 그 병법을 없이 하고, 지금의 유행하는 『이위공병서』는 후인의 위조인 고로, 편수에부터 「막리지자위지병」이라 한 연개소문(연개소문)에 대한 폄사로 비롯하였다. 그러나 이는 원본이 아니라 하더라. 선생이 이런 말을 어디서 거하였는지, 여가 당시 사학에 암매하여 상문치 못하였다.
요양·해성·금주·복주 등지에 연개소문(연개소문)의 고적과 전설이 많으며 연해주의 개소산에는 연개소문(연개소문)의 기념비가 서 있어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블나고베센쓰크」에 가려면 해중에서 왕왕히 그 산을 바라본다 하니, 일후에 혹 그 비를 발견하여 연개소문(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을 변증하며 결록을 보할 날이 있을까 한다.
정정 = 작일 본난 모두 십일행은 금일 모두의 것이 오식되었기에 금일 재식하오며 이를 심사함.
(칠) 연개소문 사년의 차오 십년
『삼국사기』의 연개소문(연개소문) 사적은 『신·구당서』·『자치통감』 등을 초록함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신·구 양 『당서』, 『자치통감』 등에 다-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사년을 당고종 건봉 원년이라 한 바, 당고종 건봉 원년은 보장왕 이십오년(기원 육백육십육년)에 상당한 고로, 『삼국사기』에도 보장왕 이십오년을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사년으로 썼다. 만일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보장왕 이십오년 - 기원 육백육십육년에 사하였으면,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사하기 이전에 고구려의 동맹국인 백제가 이미 멸망하며 고구려의 서울인 평양도 소정방(소정방)에게 포위를 당하였으니, 무엇으로써 당태종 이정(이정) 등이 연개소문(연개소문)을 외탄하였으며, 소동파(소동파)·왕안석(왕안석) 등이 연개소문(연개소문)을 영웅으로 허여하였으랴? 여는 이로 인하여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사년이 적어도 백제 멸망 이전의 하년이라고 가정하였다.
이 가정을 가지고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사년을 찾은 지 오래였으나 확증을 얻지 못하였더니, 근일에 소위 「천남생(천남생)의 묘지」란 것이 하남 낙양의 토중에서 발견된 바, 그 묘지에 거하면 남생(남생) 형제의 분쟁이 건봉 원년 - 곧 기원 육백육십육년 이전임도 명백하다. 그러나 묘지에 마침내 연개소문(연개소문)이 하년에 사하였단 말이 없다. 그러나 남생(천남생)이 「이십사 임막리지겸수삼군대장군 삼십이 가태막리지 총록군국 아형원도」주40)라 하였으며, 「이의봉사년정월십구일 조질 훙어안동부지관사 춘추사십유육」이라 하였으니, 당고종의 의봉 사년은 기원 육백칠십구년이요, 기원 육백칠십구년에 남생(천남생)이 사십육세이요, 그 이십사세는 기원 육백오십칠년이요, 남생(천남생)이 이십사세 -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이 되어 병권을 잡았은즉, 기원 육백오십사년에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이미 사하여 그 위와 직임은 남생(천남생)에게 대신함이 확증이다.
혹 남생(천남생)의 삼십이세 - 태막리지 되던 해 - 기원 육백육십오년을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죽어 그 위와 직임을 남생(천남생)이 대신한 줄로 볼 이가 있으나, 그러나 『삼국사기』 「본기」에나 「개소문전」에는 다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막리지가 되었다」하고, 『삼국사기』 「김유신전」이나 천남생(천남생) 묘지에는 다 연개소문(연개소문)을 태대대로라 하였으며, 「개소문전」에는 부 서부대인 대대로가 사하여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직을 습하매 당하였다 하고, 천남생(천남생) 묘지에는 증조 자유(자유)[연개소문(연개소문)의 조], 조 태조(태조)[연개소문(연개소문)의 부]가 다 막리지를 임하였다 하여, 갑서의 막리지를 을서에는 「태대대로」 혹 「대대로」라 쓰였고, 병서의 「태대대로」 혹 「대대로」를 정서에는 「막리지」라 쓰인 바, 대로의 「대」는 의가 「마주」인즉, 대개 이독문으로 「대」는 의독하면 「마」가 되며, 막리지의 「막」은 음독하여 「마」가 되고, 막리지의 「리」와 대로의 「로」는 다 음독하여 「ㄹ」이 되어「막리」 나 「대로」는 다 「말」로 독할 것이니, 고구려 말년의 관제에 「말치」가 장상의 임을 겸하여 마치 그 초대의 「신가」와 같은 바, 말치를 이독문으로 「대로」 혹 「막리지」라 썼나니, 대로지라 아니하고 대로라고만 씀은 략자이며, 말치가 임직한 지 몇 해이면 태대의 호를 가하여 「태대대로지」 혹 태막리지라 썼나니, 태대막리지라 쓰지 아니하고 「대막리지」라고만 함은 또한 략자이며, 말치 - 즉 「대로지」 혹은 「태대막리지」가 그 직위는 동일하나, 「신크」 - 「태대」는 곧 그 훈덕을 상하는 품질이니, 『삼국사기』 직관에 각간 김유신(김유신)의 원모를 상하여 「태대각간」이라 하여, 태대 이자를 「각간」의 상에 관한 류니, 남생(천남생)의 이십사세 - 곧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 되는 해 - 기원 육백오십칠년이 남생(천남생)이 정권 병권을 병집한 확증이며 따라서 동년에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죽은 확증이다.
만일 대로와 막리지가 동일한 「말치」 이독자일진대, 하고로 남생(천남생) 묘지에 「증조자유 조태조 부개금 병임막리지」라 하거나 「증조자유 조태조 부개금 병임태대대로」라 하지 않고, 「증조자유 조태조 병임막리지 부개금임태대대로」라 하여 막리지와 대대로를 갈라 썼나요?.
「묘지의 상문에는 남생(천남생)의 본직을 중리위진대형이라 태막리지」라 쓰고, 하문에 남생(천남생)이 당에 항한 뒤에 의구히 태대형의 고작을 배하다 하니, 태대형은 중리위의 진대형을 가리킨 것이나 태막리지를 가리킨 것일 것인데, 이같이 이양의 자로 썼으니, 묘지에 쓰인 관명은 거의 구별할 수 없을 뿐더러 또는 「… 병임막리지 … 임태대로」의 하구가 「내조내부 양야양궁 병집병금 함전국병」인즉, 막리지와 태대대로가 동일한 병권과 국권을 전집하는 유일의 수석 대신임을 볼 것이며, 『당서』 「고려전」 에는 「대대로 총지국사」라 하고, 『당서』 「개소문전」에도 「막리지유당중서령병부상서직」이라 하니, 더욱 양자가 동일한 장상을 겸한 유일한 대관임을 볼 것이다.
그러므로 기원 육백오십칠년에 신크말치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죽고, 그 장자 남생(천남생)이 「말치」가 되어 부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직을 상속하였다가, 그 구년 후로 「신크」 호를 가하여 「신크말치」라 칭함이 무의하니, 구사에 거하여 기원 육백육십육년에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죽었다 함은 물론 대착오어니와, 묘지의 남생(천남생)이 대막리지되던 해를 거하여 기원 육백육십오년에 개소문(연개소문)이 죽었다 함도 대오니,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사는 명명히 기원 육백오십칠년이니라.
혹왈 『신·구당서』 에 다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사년을 늘여 「기원 육백육십육년」이라 함과 천남생(천남생) 묘지에 또한 부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사년을 쓰지 아니함이 다 하고이뇨? 이는 다름 아니라, 당태종이 눈깔이 빠져 죽음이 곧 연개소문(연개소문) 까닭이며 당의 일부 토지도 다 연개소문(연개소문)에게 빼앗기었은즉, 춘추의 의로 말하면 당의 군신이 마땅히 시각을 멈추지 말고 복수를 청함이 가할지어늘, 이제 세월을 천연하여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생전에는 다만 고구려의 침토만 받고, 고구려의 일보지를 침하지 못함은 곧 연개소문(연개소문)을 외탄하여 군부의 수를 잊음이니, 이 얼마만한 수치스러운 일이냐? 이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생전에도 당병이 평양을 포위한 일이 있었다는 표시를 하기 위하여, 이에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사년을 십년이나 늘여 사책에 올린 것이니, 곧 차론에 술하려는 부여 복신(복신)의 사월을 늘인 것과 동일한 수단이다. 고대엔 교통이 불편하고 역사적 서류가 불다하여 린국 명인의 생사를 민간에서는 거의 관편의 선포에 의하여 상전할 뿐인 고로, 이같은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사년의 무록이 드디어 지나(중국) 안에서 실록으로 유행된 것이니라.
(팔) 연개소문의 공업의 약평
유래 사가들이 성패흥망으로써 인의 우열을 정하며, 또 유가의 윤리관으로 인의 시비를 논한 바, 연개소문(연개소문)은 성공하였지만 그 불초자들이 그 유업을 지키지 못한 고로, 춘추필법을 효톤하는 자의 주척한 바 되며, 연개소문(연개소문)을 흉적이라 하여 오직 훼駡와 육욕으로 그에게 가하여 왔다.
그러나 여하한 자가 혁명이냐 하면 반드시 역사상 진화의 의를 가진 변화가 그것이다. 역사란 것이 어느 날 어느 때에 변화의 도정으로 나아가지 않는 때가 없은즉, 또한 어느 날 어느 때에 혁명 없는 때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전부 역사를 가져 혁명사라 칭함이 가하나, 역사가들이 특히 혁명이란 명사를 귀중시하여 문화상 혹 정치상 현연히 시대를 구획할 만한 진화의 의의를 가진 인위적 대변혁을 가리켜 혁명이라 칭한 것이니, 이런 의미로써 정치사상의 혁명을 구하자면 우리 조선 수천년의 역사에 몇몇이 못 될 것이다. 한양의 이씨로 송도의 왕씨를 대한 것이나 이조(조선)에 이시애(이시애)·이괄(이괄) 등의 반란이 그 성패는 다르나 기실은 다 정권양탈의 행동에 불과한즉, 내란이나 역대라 칭함은 가하나 혁명이라 칭함은 불가하다.
이제 연개소문(연개소문)은 그렇지 아니하여, 봉건세습의 호족공치제를 타파하여 정권을 일처에 집중하였으니, 이는 분립의 대국을 통일로 돌리는 동시에 그 반대자는 군주나 호족을 불문하고 일거에 이를 소탕하여, 영류왕 이외 수백 대관을 주륙하고 입구하는 당태종을 격파할 뿐 아니라, 도리어 이를 진격하여 지나(중국) 전국을 진동하였으니, 다만 혁명가의 기백만을 가졌을 뿐 아니라, 또한 혁명가의 재략을 갖추었다 함이 가하니라.
다만 그의 죽을 때에 따로 현재를 골라 자기의 뒤를 이어 조선인 만대의 행복을 꾀하지 못하고, 불초자 형제에게 대권을 맡겨 마침내 기성의 공업을 경복하였으니, 대개 야심이 많고 공덕이 적었던 인물인가 한다. 그러나 그 역사가 민멸하여 오직 적국인의 붓으로 전한 기록을 가지고 그를 논술하게 되어, 사실의 전말을 동관할 수 없은즉, 가벼이 그 일반을 들어 그 전모를 의론함이 불가할 뿐더러, 누백년 사대용노의 사가들이 그 좁쌀만 팥알만한 주관적 안공에 보인 대로 연개소문(연개소문)을 혹평하여, 「신사군이충」의 불구적 도덕율로 그의 행위를 탄핵하며, 「이소사대자외천」의 노예적 심리로 그의 물업을 부인하여, 시대적 대표인공의 유체를 거의 편육도 없도록 씹음은, 나의 통한하는 바라. 이제 이를 위하여 대략 수구의 평을 더하였노라.
제십일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제일장 부여 성충의 위략과 백제의 탁지
(일) 부여 성충의 건책
부여 성충(성충)은 백제의 왕족이니, 소시부터 지모가 절인하여 일찍 예병의 입구함을 당하여 향인을 거느리고 산보를 거수할 새, 매양 기계로써 다수한 ●인을 살상하더니, 예장이 사자를 보내어 「군등의 나라 위하는 충절을 흠모하여 사소한 식물을 올리노라」 하고 궤 한 짝을 바치거늘, 보중인들이 다 궤를 열어 보려 하나, 성충(성충)이 이를 굳이 세워 불에 넣었다. 넣은즉 그 속에 든 것이 벌(봉)과 땡삐 등속이러라. 익일에 또 예장이 궤 한 짝을 바치거늘, 보중인들이 또 이를 불에 넣으려 하매, 성충(성충)이 이를 열어 보게 하였다. 열어 본즉 그 속에 든 것이 화약과 염초 등속이러라. 제삼일에 또 궤 한 짝을 보내거늘, 성충(성충)이 이를 톱으로 켜게 하였다. 켠즉 피가 흐르며 칼 품은 용사가 허리가 끊어져 죽었더라. 이때는 기원 육백사십오년 - 무왕이 죽고 의자왕이 즉위한 해라.
의자왕이 이를 듣고 성충(성충)을 불러 물어 가로되, 「짐이 부덕으로 대위를 이어 부하치 못할까 공구하는 중, 신라가 백제와 풀지 못할 세구가 되어 백제가 신라를 멸치 못하면 신라가 백제를 멸하리니, 이는 더욱 짐의 염려하는 바라. 옛적에 월왕 구천(구천)이 범려(범려)를 얻어 십년 생취하며 십년 교육하여 오를 멸하였으니, 군이 범려(범려)가 되어 짐을 도와 구천(구천)을 만듦이 어떠하뇨?」
성충(성충)이 가로되 「구천(구천)은 오왕 부차(부차)가 교오하여 월의 우를 잊으므로 이십년 생취 교훈을 행하여 오를 멸하였거니와, 이제 아국은 북으로 고구려 남으로 신라의 침구가 쉴 날이 없어, 전쟁의 승패가 순간에 달리며 국가의 흥망이 조석에 있나니, 어찌 한가하게 이십년 생취 교훈할 틈이 있으랴. 그런데 고구려는 서부대인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바야흐로 불궤의 뜻을 품어 미구에 내란이 있을 터인즉 한참 외사를 경영치 못하리니 아직 아국의 근심할 바 아니거니와, 신라는 본래 소국으로서 진흥왕 이래에 문득 강국이 되어 아국과 결원하고 근일에 더욱 심하며 내성사신 용춘(용춘)이 선대왕과 혈전하다가 죽고 그 자 춘추(차편 참고)가 늘 아국의 틈을 엿보았으나 다만 선대왕의 영무하심이 두려워서 거동치 못하였더니, 이제 선대왕이 붕서하였으매 피가 반드시 대왕을 군려에 익지 못한 소년으로 경모하며 또 아국의 상변 있음을 기회하여 불구에 침구가 있으리니, 이에 대한 반공을 연구함이 가하나이다.」
왕이 가로되 「신라가 아국을 침구하면 어디로 들겠느뇨?」
성충(성충)이 가로되 「선대왕이 성열성(금 청풍) 이서 가잠성(금 괴산) 이동을 차지하매, 신라가 이를 통한한 지 오래니 반드시 가잠성을 치리이다.」
왕이 가로되 「그러면 가잠성에 수비를 증함이 가하냐?」
성충(성충)이 가로되 「가잠성주 계백(계백)은 지용을 겸비하여 비록 신라의 전국 병으로 위공할지라도 용이하게 발치 못할 것이니 염려할 바가 아니요, 불의에 출하여 허를 승함이 병가의 상책인즉 신라의 정병이 가잠성을 공하거든 우리는 가잠성을 구한다 성언하고 병을 발하여 다른 곳을 습공함이 가하니이다.」
왕이 가로되「어느 곳이 가하뇨?」
성충(성충)이 가로되 「신이 들은즉 대야주(금 합천) 도독 김품석(김품석)이 김춘추(김춘추)의 애녀 소낭(소랑)의 부가 되어, 권세를 믿고 부하와 군민을 학대하며 음탕과 사치를 일삼아 원부가 된 지 오래인데, 이제 아국이 상변 있음을 들으면 수비가 더욱 소홀할 것이요, 또 신라 정병이 가잠성을 위공하는 때이면 대야가 비록 위급할지라도 창졸히 이를 구하지 못하리니, 아병이 대야를 발하고 승세를 승하여 몰아나가면 신라 전국이 진동하리니, 이를 공멸함이 용이하니이다.」
왕이 가로되 「공의 지략은 고금에 짝이 드물겠다.」 하고, 이에 성충(성충)을 배하여 상좌평을 삼았다.
(이) 대야성의 함락과 김품석의 참사
익년 삼월에 신라가 과연 장군 김유신(김유신)으로 하여금 정병 삼만을 거느리고 가잠성을 치거늘, 계백(계백)이 성을 빙하여 기변으로 응전하여 수삭 동안에 신라병이 다수히 사상하더라. 의자왕이 칠월에 정병 수만을 뽑아 가잠성을 구원한다 칭하고 북을 향하여 발정하다가, 돌연히 병을 회하여 대야주를 향하여 미후성를 위하였다.
대야주는 신라 서방의 중진이요, 관할하는 성읍이 사십여라. 김춘추(김춘추)가 그 여공자 소낭(소랑)을 사랑하여 대야주의 속현인 고타(금 거창)를 그 식읍으로 주어 고타소낭이라 칭하고 소낭(소랑)의 부 김품석(김품석)으로 대야주 도독을 삼아 그 사십여 성을 총할케 하더니, 품석(품석)이 음폭하여 군민을 휼치 않고 재색을 탐하여 왕왕 부하의 처녀를 빼앗아 비첩을 삼는지라. 품석(품석)의 막객 검일(검일)이 그 미처를 품석(품석)에게 빼앗기고 통한하여 늘 보복하려 하다가 백제가 미후성을 위함을 듣고 가만히 사람을 보내어 내응됨을 청하거늘, 의자왕이 부여 윤충(윤충)[성충(성충)의 제]으로 하여금 정병 일만으로써 부하더니, 백제병이 성하에 이르매 검일이 성중의 창고에 방화하여 군량을 소탕하니 성중이 흉구하여 싸울 뜻이 없더라. 품석(품석)의 부처가 할 수 없어 그 막객 서천(서천)으로 하여금 성상에 올라 윤충(윤충)에게 청하여 가로되, 「우리 부처에게 고향에 살아 돌아감을 허하면 전성을 내어 주겠노라.」
윤충(윤충)이 듣고 좌우더러 가로되 「저의 부처를 위하여 국토와 인민을 파는 놈을 어찌 살리리오. 그러나 허치 안하면 성중에 다시 거수하여 얼마 동안 더 싸울지 모르는 것이니 차라리 거짓 허락하고 사로잡음이 가하다」 하고, 서천(서천)에 대답하여 가로되 「천일을 두고 맹서하여 공의 부처에 생환을 허하리라」 하고 가만히 복병하고 거짓 퇴군하니, 품석(품석)이 먼저 그 부하 장사들로 하여금 출성하거늘, 백제가 복병을 발하여 다 격살하니 품석(품석)의 부처는 검일(검일)에게 핍살을 당하니라. 백제병이 이에 입성하였다.
의자왕이 이에 미후성에서부터 친임하여, 윤충(윤충)에게 작을 가하며 마 이십필과 미 일천석을 상하고, 그 이하 장사를 차제로 상장하고 제장을 분견하여 각주군을 공략하니, 대야주는 원래 임나가라의 땅이라. 그 지방 인민들이 고국을 생각하고 신라를 싫어하다가, 밋(이윽고) 백제병이 이르매 모두 환영하므로 사십여 성이 일삭 내에 모조리 백제의 차지가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칠월에 의자왕이 미후 등 사십여 성을 하하고 팔월에 윤충(윤충)을 보내어 대야성을 함하다」라 기하였으나, 해상잡록에는 대야성을 하한 뒤에 사십여 성을 항하였다 한 바, 후자가 사리에 근하므로 이를 좇노라.
대야는 「하래」로 독하는 것이니, 낙동강 상류의 칭이요, 「김유신전」에는 대야를 대량이라 기하였으니, 「야」·「량」 등 자가 고음에 다 「라」 혹 「래」로 독한 것이요, 대야를 신라 말에 합천으로 개한 바, 후세에는 이를 「합천」으로 독하였으나 당시에는 「합」의 첫소리 「하」와 천의 뜻 「래」를 따라 「하래」로 독한 것이니라.
(삼) 고백동맹의 성립
의자왕이 대야주 사십여 성을 차지한 지 미기에,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고구려의 정권을 잡았다. 의자왕이 성충(성충)더러 물어 가로되,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인신으로서 그 임금을 죽이되 고구려의 전국이 습복하여 문죄하는 자가 없음은 하고이뇨?」
성충(성충)이 가로되, 「고구려가 서국[지나(중국)를 가리키는 말]과 전쟁한 지 누백년 만에 처음에는 누차 서국에게 패하다가, 근세에 이르러 날로 강대하여 요동을 차지하여 요서까지 미치며 육상에서만 횡행할 뿐 아니라 해상에까지 드나들며, 영양대왕 때에는 삼차나 백만의 수병을 파하여 국위가 대진하여 고구려의 군민들이 서국과 쟁형하려는 대기염이 하늘을 찌르려 하는 판이거늘, 건무(건무)가 이를 도리어 압박하고 서국과 화친하여 군민의 노를 촉한 지 오래라. 연개소문(연개소문)이 고구려 누세의 장상 명가로서 왕을 반대하고 정당론을 주장하여 국민의 마음을 맞추고 인하여 건무(건무)를 죽인 고로, 고구려 전국이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죄를 묻지 않을 뿐 아니라 바야흐로 그 공을 노래할 것입니다.」
왕이 가로되, 「고구려와 당이 싸우면 하국이 이기겠느뇨?」
성충(성충)이 가로되, 「당이 비록 토지가 고구려보다 넓고 인민도 고구려보다 많으나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전략은 이세민(이세민)의 따를 바가 아니니, 승리는 반드시 고구려에 있을 것입니다.」
의자왕이 가로되, 「이세민(이세민)은 서국의 군웅을 토벌하여 일통의 황제가 되었고 연개소문(연개소문)은 아무 전장의 경력이 없는데, 어찌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전략이 이세민(이세민)보다 낫다 하느뇨?」
성충(성충)이 가로되, 「신이 왕년에 일찍 고구려에 출유하여 연개소문(연개소문)을 만나 보았습니다. 그때에는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아무 직위도 없고, 다만 한 연씨가의 귀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모가 괴위하고 의기가 호일하므로, 신이 이를 기애하여 함께 담론하다가 병법에 미치었습니다. 그래서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지략이 비상함을 아는 것입니다. 이번의 일로 말하더라도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직을 섭한 지 미구에, 성색을 동치 않고 일조에 대신 이하 수백인을 죽이고, 패수전쟁에 일찍 수병을 최파하여 위명이 나타난 건무왕을 쳐 이기고 고구려의 대권을 잡았으니, 이는 이세민(이세민)의 따를 바가 아닙니다.」
왕이 가로되, 「그러면 고구려가 능히 당을 멸할까?」
성충(성충)이 가로되, 「이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만일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십년 이전에 고구려의 대권을 잡았으면 오늘날의 당을 멸할는지 모르나, 그러나 연개소문(연개소문)은 겨우 오늘에 성공하였는데, 이세민(이세민)은 벌써 이십년 전에 서국을 통일하고 치국의 규모가 정밀하며 인민을 애하여 민심을 열복한 지 이구인즉,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비록 전승할지라도 민심이 거연히 당을 반치 아니할 것이니, 그 난이 (일)이요,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비록 고구려를 통일하였으나 이는 그 외형이라, 그 속에는 왕실과 호족의 여당들이 날로 연개소문(연개소문)의 뜻을 엿보아 만일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당을 멸하기 전에 죽고 그 후계자가 감(재)이 아니면 반란이 사방에 일어나리니, 그 난이 (이)니, 양국의 흥망을 미리 말하기 난하니이다.」
왕이 가로되, 「아국이 이제 비록 신라의 대야는 차지하였으나, 아직 그 근본을 복멸치 못하여 그 보복할 마음이 쉬지 않을 것이오. 그러한데 고구려가 당을 멸하거나 당이 고구려를 멸하거나 반드시 남침할 것이니, 그때에 아국이 북은 고구려나 당의 침구를 받고 동으로 신라의 반공을 입을지라. 어찌함이 가하뇨?」
성충(성충)이 가로되, 「이제의 형세로 보건대, 고구려가 당을 치지 않으면 당이 고구려를 쳐 서로 대립할 것이니, 이는 연개소문(연개소문)의 명지하는 바며, 고구려가 당과 싸우자면 반드시 남방의 백제와 신라와는 화친하여야 후고의 우가 없을 것도 연개소문(연개소문)의 명지하는 바며, 백제와 신라는 피차의 구원이 깊어 고구려가 차 일국과 화친하면 피 일국과 적국될 것도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명지하는 바라. 그러므로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장차 양국 중 일국과 화친하여, 피가 당과 전쟁할 때에 남방 양국이 서로 견제되어 고구려의 뒤를 엿보지 못함을 바랄 것입니다. 이제 백제를 위하여 계컨대, 빨리 고구려와 화친하여 백제는 신라를, 고구려는 당을 맡아 싸움이 가하니이다. 신라는 백제의 적이 아니니, 틈을 타 리를 따라 나아가면 모든 편의가 고구려보다 백제에 있습니다.」
왕이 옳다 하고, 성충(성충)을 고구려에 보내더라.
성충(성충)이 고구려에 가 이해로 연개소문(연개소문)을 달래어 동맹의 약을 거의 정하게 되었는데,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돌연히 성충(성충)을 소원히 하고 누월을 보지 아니하거늘, 성충(성충)이 이를 의하여 탐지한즉, 신라 사신 김춘추(김춘추)가 와서, 바야흐로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의 성립을 저희하고, 고구려와 신라의 동맹 체결을 운동하는지라.
성충(성충)이 이에 곧 연개소문(연개소문)에게 투서하여 가로되, 「명공이 당과 싸우지 않으려면 모르거니와, 만일 당과 싸우려 하면 백제와 화치 않으면 안 되리니 하고요 하면 서국이 고구려를 칠 때에 매양 운량의 불편으로 패하였나니, 수가 그 명감이라. 이제 백제가 만일 당과 연합하면 당이 육로인 요동으로부터 고구려를 침할 뿐 아니라, 곧 주선으로 군병을 운하여 백제로 들어와 백제의 미를 먹고 남으로부터 고구려를 치리니, 그러면 고구려가 남북 양면으로 적을 받음이니 그 위험이 어떠하리오. 신라는 동해안에 국하여 당의 운병의 편의가 백제만 못할 뿐더러, 신라가 일찍 백제와 약하여 고구려를 치다가 마침내 백제를 속이고 죽령 이외 고현 이내 십군을 횡점함은 명공이 아는 바니, 신라가 금일에 고구려와 동맹할지라도 명일에 당과 합하여 고구려의 토지를 습취하지 않을 것을 어찌 아느냐?」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이 글을 보고 김춘추(김춘추)를 가두고, 죽령 이외 욱하 일대의 토지를 빼앗으려 하였더라. 이는 제십이편에 술할지라. 이제는 이를 아직 그만 두거니와, 성충(성충)이 드디어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돌아오니라.
(사) 안시전역할 때에 성충의 건의
기원 오백사십사년에 신라가 장군 김유신(김유신)를 보내 죽령을 넘어 성열·동대 등 제성을 습공하거늘, 의자왕이 군신을 모아 응전할 방략을 꾀하더니, 성충(성충)이 건진하여 가로되,
“신라가 누패한 끝에 자보를 생각하지 않고 이제 돌연히 침구를 시하니, 이는 반드시 그 까닭이 있는 것이라. 신이 들은즉 김춘추(김춘추)가 고타낭의 앙갚음을 위하여 누차 가만히 바다를 건너 당에 들어가 원병을 걸하였다 하니, 당주 이세민(이세민)이 해동을 침략할 뜻을 가진 지 오래인즉, 반드시 신라와도 고구려·백제 양국에 대한 음모가 있을 것이라. 신이 그 음모한 바를 헤아리건대, 아마 당은 고구려를 치는 동시에 선병으로써 백제의 서비를 침우하고 신라는 백제를 쳐 고구려를 구치 못하게 하는 동시에, 또 대병으로써 고구려의 후방을 요란하려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가 성열·동대 등 성을 차지하기 전에는 고구려의 후방을 요란케 하지 못할 것이요, 당이 요동을 차지하기 전에는 수로의 운량에 급급하여 백제를 침입할 선병이 없으리니 이제 백제를 위하여 꾀하건대, 아직 성열 등 성을 신라에게 위하고 병을 안하여 기다리면, 당과 신라가 고구려에 대하여 격렬한 전투가 생겨 서로 손을 빼기가 어려울 것이며, 신라는 백제를 려하여 병을 대발치 못할 것이나, 당은 꼭 국을 경하여 고구려에 침입하리니, 백제가 그 틈을 타서 주선으로 정병 수만을 운하여 당의 강남을 치면, 이를 점령하기가 용이할 것이요, 강남을 점령한 뒤에는 그 재부와 민중을 인하여 진취하면, 서국의 북방은 비록 고구려의 소유가 될지라도 남방은 다 백제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신라가 비록 백제를 원할지라도 최이한 소국이 어찌하리오. 오직 머리를 숙여 명령을 들을 뿐입니다. 그때에는 백제가 신라를 취함도 가하며 존함도 가하여 아무 말썽거리가 없나이다.』
의자왕이 이를 좇아 제장을 명하여 변경을 고수하더니, 익년에 과연 당이 삼십만 대병을 들어 고구려에 들어와 안시성에서 싸워 누삭 동안 승부가 나지 않고, 신라는 십삼만 대병을 들어 고구려의 남방에 들어 그 후방에 요란을 도모하거늘, 왕이 계백(계백)에게 명하여 신라의 뒤를 습하여 성열 등 칠성을 회복하며, 윤충(윤충)을 보내어 부사달(금 송도) 등 십여 성을 점령하고, 선병으로써 당의 강남을 습하여 월주(금 소흥) 등지를 점령하여 착착 해외의 탁지를 경영하다가, 마침내 임자(임자)의 참을 만나 드디어 왕의 박대함을 만나 그 뜻을 맞추지 못하였나니, 이는 제삼장에 상술하니라.
제이장 김춘추의 외교와 김유신의 음모
(일) 김춘추의 복수운동
김춘추(김춘추)는 신라 내성 김용춘(김용춘) - 백제 무왕과 동혼전쟁을 시작하던 자 - 의 자라. 김용춘(김용춘)이 죽으매, 춘추(김춘추)가 그 위를 상속하여 신라의 정을 전하며 무왕과 혈전하더니, 무왕이 죽은 뒤에 의자왕이 성충(성충)의 계를 써서(제십편 참조) 대야주를 쳐 김품석(김품석)의 부처를 죽이고 그 관내 사십여 성을 빼앗으매, 춘추(김춘추)가 어떻게 통분하였던지, 그 흉문을 듣고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그의 앞에 사람이나 개가 지나가도 다 깨닫지 못하고 발갛게 피어오른 얼굴빛으로 딴 데를 바라보다가, 돌연히 주먹으로써 기둥을 쳐 가로되, 사나이가 어찌 앙갚음을 못 하리오 하고 일어섰다.
그러나 「신라가 국소민약하니 무엇으로 백제의 앙을 갚으랴? 오직 외원을 빌 뿐이다.」가 김춘추(김춘추)가 기둥진 끝에 생각이었다. 그래서 고구려로 들어갔다. 고구려가 수병 백만을 격파하던 여위를 가져 유일한 강국이요, 연개소문(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유일한 거인이니, 연개소문(연개소문)만 사귀면 백제의 앙을 갚으리라 하여 신·고 양국 동맹의 리로써 연개소문(연개소문)과 거의 동맹이 성취케 되는 판에, 백제 사신 상좌평 부여 성충(성충)이 이를 알고 연개소문(연개소문)에 투서(제십편 참조)하여 연개소문(연개소문)이 드디어 김춘추(김춘추)를 잡아 가두고, 욱리하 일대의 토지를 구함에 이르렀다.
김춘추(김춘추)가 이에 가만히 종자로 하여금 고려 왕의 총신 선도해(선도해)에게 선물을 주고 살려 줌을 비니, 연개소문(연개소문)의 판에 그의 총신이 쓸 데 있으랴. 그러나 선도해(선도해)가 선물을 탐하여 이를 받고 가로되, 내가 공을 살릴 수는 없으나, 공의 살아갈 방략을 가르쳐 주마 하고, 고구려 당시에 유행하는 구토담이란 책자를 주었다. 김춘추(김춘추)가 그 책자를 받아 읽은즉, 그 내용의 대개가 이러하다.
토끼가 거북의 꾐에 빠져서 그 등에 업혀 용왕국으로 벼슬 벌려고 들어갔다. 들어간즉 벼슬을 주려 함이 아니요. 용왕이 병이 들어 토끼의 간이 병에 약이라 하므로 거북을 보내어 저를 꾀여 옴이더라. 토끼가 임시 기지로 곧 용왕을 속여 가로되, 「신은 월정의 자손이라. 달을 보고 잉태하는 고로, 위 보름에 달이 찰 때에는 간을 내어 놓고, 뒤 보름에 달이 기울 때는 간을 다시 넣어 두는 바, 신이 대왕의 나라에 들어올 때에 마침 위 보름에 간을 내어 놓은 때인 고로, 지금은 신의 간이 신의 뱃속에 있지 않고 금강산 속의 어떤 나무 밑에 감추어 두었으니, 신을 다시 내여 보내어 주면 그 간을 가져오리이다」 하고, 드디어 거북의 등에 업혀 나와 육지에 미쳐서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간을 출입하는 일이 어디 있겠느냐. 아나 옛다. 간을 받아라」 하고 깡충 뛰어 달아났다.
김춘추(김춘추)가 선도해(선도해)의 뜻을 알고, 이에 거짓 고구려 왕에게 상서하여 욱리하 일대를 고구려에게 바치겠노라 하니,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이에 김춘추(김춘추)와 맹약하고 방석하여 귀국함을 허하거늘, 김춘추(김춘추)가 국경에 미쳐 고구려 사자를 돌아다보며「땅은 무슨 땅이냐? 어제의 맹약은 죽음을 벗어나려는 거짓말이니라」 하고 토끼같이 뛰어 돌아오니라.
김춘추(김춘추)가 고구려에서 실패하고 돌아오니, 이에 신라가 고구려·백제 양국 사이에 고립한 일약국이 되어 부득불 새 동맹을 해서의 당에 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김춘추(김춘추)가 바다를 건너 당에 들어가 당태종을 보고 신라의 위급한 정형을 진술하고, 힘닿는 데까지 한하여 모든 비사후례를 갖추어 원병을 구할 새, 당조 군신의 뜻을 맞추기 위하여 자 법민(법민)·인문(인문) 등을 당에 유질하며, 본국의 의관을 버리고 당의 의관을 쓰며, 진흥왕 이래로 자기한 본국의 제왕 연호를 버리고 당의 연호를 쓰며, 또 당태종이 편찬한 『진서』와 그 산증한 『사기』·『한서』·『삼국지』 등 - 그 중에 조선에 모멸한 말이 많은 문자를 가져다가 그대로 본국에 유전하여, 사대주의의 병균을 전파하기 시작하니라.
(이) 김유신의 등용
김춘추(김춘추)가 한참 복수운동에 분주하는 판에, 그 보좌인 일명물이 있으니, 곧 김유신(김유신)이다. 당시에 연개소문(연개소문)을 고구려의 대표인물이라 하고 부여 성충(성충)을 백제의 대표인물이라 하면, 김유신(김유신)는 곧 신라의 대표인물이라 할 것이다. 고구려·백제가 망한 뒤에 신라 사가들이 피 양국 인물의 전기적 질료를 말살하고 오직 김유신(김유신)만을 가송하였으므로, 『삼국사기』 「열전」에 김유신(김유신) 일인의 전기가 을지문덕(을지문덕) 이하 수십 개인의 전기보다도 그 페이지가 훨씬 많고, 부여 성충(성충) 같은 이는 그 「열전」에 참여도 못하였다. 그러면 김유신전이 일미한 말이 많음을 가히 추지할 것이다. 이제 그 사리에 합한 자를 추려 보면 대개 좌와 같다.
김유신(김유신)는 신가라국 왕 구해(구해)의 증손이니, 오가라가 거의 신라와 혈전하다가 망하였으나, 신가라는 일전도 없이 국을 양하였으므로, 신라 같이 골품을 다투는 나라로서도 구해(구해)를 감사하여 식읍을 주고 준귀족으로 대우하며, 구해(구해)의 자 무력(무력)은 일찍이 장병 대원이 되어 구천의 싸움에 백제 성왕을 격살한 전공이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귀골들이 김무력(김무력)을 외래의 김씨라 하여 삼성의 김과 구별하여 삼성들과 혼인함을 불허하더니, 무력(무력)의 자 서현(서현)이 일찍 출유하다가 삼성 김씨인 숙흘종(숙흘종)의 여 만명(만명)의 염미함을 보고 정을 금치 못하여 추파로 뜻을 통하여 야합하여 유신(김유신)을 배니라. 숙흘종(숙흘종)이 이를 알고 대노하여 만명(만명)을 가두더니, 만명(만명)이 도망하여 금물내 - 금 진천 - 서현(서현)의 주소에 나가 부부의 예를 이루고 유신(김유신)을 낳으니라. 부 서현(서현)이 일찍 죽고 모 만명(만명)이 유신(김유신)을 기르니라. 유신(김유신)이 처음에는 방탕하여 검속이 없더니, 그 모의 읍유를 받고 감오하여 학업에 종사하여, 년십칠에 화랑의 무리가 되어 중악산 인박산 등지에 들어가서 구국의 기도를 올리고 검술을 익혀 차차 성예가 있으니라. 그러나 유신(김유신)이 가라의 김씨인 까닭에 비상한 반연이 없으면 중용되지 못할 줄을 알고, 이에 당시 총신 내성사신 김용춘(김용춘)의 자 춘추(춘추)와 사귀어 일후 현달한 계제를 얻으려 하여, 일찍 자기 집 부근에서 춘추(춘추)와 제기를 차다가, 일부러 춘추(춘추)의 단추를 차 떨어뜨리고 춘추(춘추)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 자기의 끝 누이를 불러 단추를 달라 하더니, 끝 누이 보희(보희)가 담장경복으로 침선을 가지고 나오는데 그 얼굴과 체모의 미가 춘추(춘추)의 눈을 호리는지라. 춘추(춘추)가 드디어 혼을 청하여 춘추(춘추)가 보희(보희)의 부 김유신(김유신)의 매부가 되니라. 밋(이윽고) 용춘(용춘)이 죽고 춘추(춘추)가 정권을 잡으매, 김유신(김유신)이 그 장재로뿐 아니라, 또 춘추(춘추)의 원인이 있으므로 드디어 신라의 각 군주가 되고, 밋(이윽고) 춘추(춘추)가 왕이 되매, 소뿔한(관명이니 장상을 겸한 명칭)의 위를 얻어 신라의 병마대권을 전장하니라.
(삼) 김유신 전공의 다무
『삼국사기』 「김유신전」으로 보면 유신(김유신)은 전략과 전술이 다 남보다 뛰어나 백전백승의 명장이다. 그러나 대개는 그의 패전은 휘닉하고 소승을 과장한 무록이다.
진덕대왕 원년(기원 육백사십칠년)에 백제병이 화산·감물·동잠 삼성을 치거늘, 유신(김유신)이 보기 일만으로써 거할 새, 고전하여 력이 갈한지라. 유신(김유신)이 비녕자(비녕자)더러 가로되, 「금일에 일이 급하니, 그대가 아니면 누가 능히 중심을 격하겠느냐?」
비녕자(비녕자)가 재배 응락하고 적에 부하매, 자 거진(거진)과 노 합절(합절)이 그 뒤를 따라 삼인이 다 력전하다가 죽으니, 삼군이 감동하여 다투어 분진하여 적병을 대파하고 삼천여급을 취하였다. … 유신(김유신)이 압량주(금 경산)군주가 되어 … 대량주(곧 대야주)의 역을 보하려 하니,
왕이 가로되, 「소로써 대를 적함이 위태하지 아니하냐.」
유신(김유신)이 가로되, 「… 금에 오인이 일심하니 백제를 외할 것이 없습니다.」
왕이 이에 허하거늘, 드디어 주병을 련하여 대량성 외에 이른즉, 백제가 거전하거늘 거짓 패하여 옥문곡에 이르니, 백제가 가벼이 여겨 대중으로 오거늘, 복병을 발하여 전후 협격하여 대파하고, 백제 장군 팔인을 획하며 천여급을 참하고, 사를 백제 장군에게 보내어 아 군주 품석(품석)과 그 처 김씨의 골이 이국의 옥중에 있으니, … 네가 사한 양인의 골을 보내면 나는 생한 팔인을 돌리리라. 백제가 … 이에 품석(품석) 부처의 골을 돌려보내거늘, 유신(김유신)이 … 팔인의 생환을 허하고, 승을 승하여 백제경에 입하여 악성 등 십이성을 발하며, 일만급을 참하며 구천인을 부획하고, 이에 공으로 이손의 작을 얻고 상주행군대총관이 되어 진례 등 구성을 도하며 구천여급을 참하고 육백인을 부로하다. …
이년(기원 육백사십팔년) 팔월에 백제 장군 은상(은상) 석토 등 칠성을 공하거늘, 왕이 유신(김유신)·죽지(죽지)·진춘(진춘)·천존(천존) 등 장군을 명하여 출어하여 삼군을 오도에 분하여 격할 새, 서로 승부가 있어 순일이 되도록 풀리지 아니하여 강시가 야에 만하고 유혈이 저를 표할러라. 이에 도살성 하에 둔하여 마를 헐하고 사를 향하여 재거를 도하더니, 마침 수조가 동으로부터 날아와 유신(김유신)의 막을 지나는지라. 장사가 다 불상의 조라 하거늘, 유신(김유신)이 가로되, 금일에 백제의 탐정이 오리니 여등은 모르는 체하라 하고, 군중에 령하여 가로되, 벽을 견하여 동치 마라, 명일의 구병을 기다려 싸우자 하니, 백제의 탐정이 돌아가 은상(은상)에게 고하여, 은상(은상)이 구병이 오는 줄로 믿고 의심하고 공구하거늘, 유신(김유신) 등이 일시에 분격하여 대파하고 달솔 정중(정중)과 사졸 일백인을 부로하며, 좌평 은상(은상)·자견(자견) 등 십인과 졸 팔천구백팔십인을 참하고, 마 일만필과 개 일천팔백령을 획하며, 기타 기계도 이와 등하더라. 귀로에 백제의 좌평 정복(정복)이 졸 일천인으로 래항하거늘 방송하였다. …
본기의 기록도 이와 약동한 바, 악성은 연혁을 알 수 없으나 진례는 곧 용담·진안 간의 진잉을(고구려의 본명이니, 신라에서 진례라 함)인즉 악성도 그 부근이리니, 이는 전라 동북이 신라의 위협을 받음이며, 석토는 연혁을 알 수 없으나 도살이 곧 청안의 고명인즉 석토도 그 부근이리니, 이는 충청 동북이 신라 소유로 있음이며, 또 유신(김유신)이 이같이 늘 승리를 얻었으면 백제 강토의 궁축이 비상하였을 것인데, 그런데 『당서』에 신라사 김법민(김법민)의 청구의 어에 가로되, 「대성중진병위백제소병 강우일축 … 단득고지 즉청교화」라 하였으며, 『삼국유사』에 「태종대왕 욕벌백제 청병어당 상독좌 우형어색」이라 하였으니, 이때에 백제는 성충(성충)·윤충(윤충)·계백(계백)·의직(의직) 등 현상 명장이 림입하고, 사졸이 백전의 훈련을 겪어 도저히 신라의 적이 아니니, 김유신(김유신)이 몇 번 구구한 소승전은 있었던지 모르나, 전과 「본기」와 같이 혁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사) 김유신 특장의 음모
전술과 같이 김유신(김유신)의 전공이 거의 무록이라 하면, 김유신(김유신)을 무엇으로 칭하느뇨? 대개 김유신(김유신)는 지용있는 명장이 아니요, 음험취한한 정치가이며 그 평생의 대공이 전장에 있지 않고 음모로 린국을 란한 자이다. 그 실례의 일을 들리라.
신라 부산현(금 송도 부근?)령 조미곤(조미곤)이 백제의 부로로 잡혀, 백제 좌평 임자(임자)의 가노가 되어 충근하게 임자(임자)를 섬기어 출입의 자유를 얻음에 이르렀다. 조미곤(조미곤)이 이에 가만히 도망하여 신라에 돌아와 백제의 국내의 정형을 고하니, 유신(김유신)이 가로되 「임자(임자)는 백제왕의 총행하는 대신이라 하니, 나의 뜻을 통하여 신라의 이용이 되게 하면 그대의 공이 누구보다 크리니, 그대가 능히 위를 무릅쓰고 나의 말로 하겠느냐.」 조미곤(조미곤)이 가로되, 「생사를 불고하고 명령대로 하리이다.」 조미곤(조미곤)이 이에 유신의 밀명을 띠고 다시 백제에 들어가 임자(임자)를 보고 가로되, 이 나라의 신민이 되어 이 나라의 풍속을 모름이 못쓸 일인 고로, 미처 여쭙지 못하고 출유하였다가 돌아왔습니다.
임자(임자)가 이 말을 곧이듣고 의심치 않거늘, 곤(조미곤)이 이에 틈을 타 임자(임자)에게 고하여 가로되, 「향자에 실로 고향을 생각하여 신라에 갔다가 왔고 출유란 말은 일시 꾸민 말이올시다. 그런데 신라에 가서 김유신(김유신)를 본즉, 유신(김유신)의 말이 「백제와 신라가 서로 구적이 되어 전쟁이 그치지 않는 즉, 양국 중 일국은 반드시 망할 것이요, 그러면 우리 양인중 일인은 현재의 부귀를 잃고 남의 부로가 되리니, 고컨대 우리 양인이 미리 상약하여 신라가 망하거든 유신(김유신)이 공에 의하여 백제에 다시 벼슬하며, 백제가 망하거든 공이 유신(김유신)에게 의하여 신라에 다시 벼슬하기로 하자. 그리하면 양국 중 하국이 망하든지, 우리 양인은 의구하게 부귀를 보할 것이 아니냐?」 하더이다. 임자(임자)가 잠자코 말이 없으니, 곤(조미곤)이 황공한 빛으로 물러났다. 그 뒤 수일에 임자(임자)가 곤(조미곤)을 불러 전말을 묻거늘, 곤(조미곤)이 다시 유신(김유신)의 말을 복술하고, 또 고하여 가로되, 「국가는 꽃과 같고 인생은 나비와 같은 것인데, 만일 이 꽃이 진 뒤에 저 꽃이 핀다 하면, 이 꽃에서 놀던 나비가 저 꽃으로 옮아가 사시를 늘 봄으로 놀 것이 아니냐. 어찌 구태여 꽃을 위하여 절을 지키어 부귀를 버리고 몸을 굳히랴」 하니, 임자(임자)가 원래 부귀에 얼빠진 비부인 고로, 이 말을 달게 여겨 곤(조미곤)을 보내어 유신(김유신)의 말에 허하거늘,
유신(김유신)이 이에 다시 임자(임자)를 꾀여 가로되, 「일국의 권을 독장치 못하면 무슨 부귀의 위력이 있으랴. 들은즉 백제에는 성충(성충)이 왕의 총애를 받아 말하는 바가 다 시행되고 공은 겨우 그 밑에서 우유한다 하니 어찌 치욕이 아니냐?」 하여 백방으로 임자(임자)를 꾀여 부여 성충(성충)을 참하게 하고, 마침내 요녀 금화(금화)를 임자(임자)에게 천하여 백제 왕궁에 납하여 부여 성충(성충) 이하 현신을 살해 혹 窤축하여 백제로써 백제를 망침에 이르렀나니라.(차장 참조)
제삼장 부여 성충의 자살
(일) 금화와 임자의 참간
임자(임자)가 김유신(김유신)이 보낸 금화(금화) 무녀를 가져, 미래의 화복과 국가 운명의 장단을 전지하는 선녀라 칭하여 의자왕에게 천하였다. 왕이 이에 고혹하여 금화(금화)에게 백제 전도의 길흉을 물으니, 금화(금화)가 눈을 감고 있다가 한참 만에 신의 말을 전하여 가로되, 「백제가 만일 충신 형제를 죽이지 않으면 목전에 망국의 화가 있을 것이요, 죽이면 천만세 영원의 국조를 누리리라」 말한대, 왕이 가로되, 충신을 쓰면 나라가 흥하고 충신을 죽이면 나라가 망함은 고금의 통의어늘, 이제 충신을 형제나 죽여야 백제의 국운이 영원함은 하설이뇨? 금화(금화)가 가로되, 이는 그 명은 충신이로되, 그 실은 충신이 아닌 까닭입니다. 왕이 가로되, 충신 형제가 누구이냐? 금화(금화)가 가로되, 첩이 다만 신의 밀명을 전할 뿐이요, 그 하설임을 아지 못하나이다. 왕이 이에 성충(성충)와 윤충(윤충)의 형제가 다 충자로 명하므로 의로하기를 시작하더라.
임자(임자)가 왕이 성충(성충)에게 대한 마음이 동요된 줄을 알고, 곧 참축코자 할 새, 왕이 마침 임자(임자)와 한음하다가 임자(임자)더러 가로되, 성충(성충)는 어떤 사람이뇨? 임자(임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충(성충)는 재략이 또래에 뛰어나 전쟁의 승패를 예책하면 백에 일실이 없고, 남의 뜻을 짐작하며 언어에 솜씨가 있어 린국에 사하면 군명을 욕되게 아니하나니, 이는 천하의 기재니다. 그러나 그 기재가 있는 것만큼 그를 가어하기가 난하니이다. 신이 들은즉 성충(성충)이 고구려에 봉사하였을 때에, 개소문(연개소문)과 친밀하여 개소문(연개소문)더러 「고구려에 공이 있고 백제에 성충(성충)이 있으니, 우리 양인이 합하면 천하에 얻기 어려운 일이 있으랴」 하여 분연히 백제의 개소문(연개소문)으로 자처하며, 개소문(연개소문)은 성충(성충)더러 「나는 공이 아직 대권을 잡지 못함을 한하노라」 하여 성충(성충)을 매우 후대하였다 하니, 성충(성충)이 이같이 부측한 마음을 가져 린국의 강신과 정의가 밀근하며, 또 그 제 윤충(윤충) 같은 명장이 있으니, 신은 대왕 만세후이면 백제가 대왕의 자손의 백제가 아니요, 성충(성충)의 백제일까 합니다.”
왕이 이에 윤충(윤충)을 파하여 소환하고 성충(성충)을 소대하니, 이때에 윤충(윤충)이 바야흐로 월주를 유진하며, 장사를 훈련하여 당의 강남을 전탄함을 책하다가 돌연히 참을 만나 파환되어, 월주가 미구에 당에게 함락되니, 윤충(윤충)이 울분하여 죽으니라.
(이) 성충의 자살과 그 당의 피축
윤충(윤충)이 죽고 성충(성충)도 또한 소척되매, 금화(금화)가 이에 더욱 기탄 없이 의자왕을 권하여 장려굉대한 왕흥사와 태자궁을 쌓아 국재를 갈하며, 백제 산천에 지덕이 험악하니 철로 진압하여야 좋다 하여 각처 명산에 철주 혹 철정을 박으며, 강해에 철기를 던져 국중의 철을 말리니, 국인이 원질하여 금화(금화)를 가리켜 「불가살」이라 칭하니, 불가살은 백제 신화의 「쇠먹는 신」의 이름이더라. 성충(성충)이 이에 소를 상하여 임자(임자)와 금화(금화)의 죄를 극론하니, 왕의 좌우가 다 임자(임자)와 금화(금화)의 심복인 고로, 다투어 성충(성충)을 참하여 가로되, 「성충(성충)이 대왕에게 총애를 잃은 뒤로부터 늘 분만한 마음을 가지더니, 오늘날 이 소를 올림이니다」 하니, 왕이 성충(성충)을 잡아 어옥에 내리고, 좌평 흥수(흥수)를 고마미지(금 장흥)에 찬하고, 서부은솔 복신(복신)의 직을 탈하여 금고하니, 다 성충(성충)의 당이더라.
성충(성충)이 옥중에서 유소를 올려 가로되, 「충신은 죽을지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나니, 신이 한 말을 올리고 죽으려 하나이다. 신이 천시와 인사를 살피건대, 비구에 병혁의 화가 있을지라. 무릇 병을 용하려면 지세를 택하여 상류에 처하여 적을 응하여야 만전하나니, 적병이 만일 들거든 육로로는 탄현을 막으며 수로로는 백강을 막아 험조를 거한 뒤에 전함이 가하나이다」 하고 식을 절한 이십팔일 만에 죽으니, 곧 고구려 태대대로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죽던 전 일년이러라.
탄현은 후인들이 금 여산·탄현이라 하고, 백강은 금 부여의 백강이라 하나, 백제 망할 때에 신라병이 탄현을 넘고 당병이 백강을 지난 뒤에, 계백(계백)이 황산(금 연산 부근)에서 싸우고 의직(의직)이 부여 전강에서 싸웠은즉, 탄현은 대개 금 보은의 탄현이요, 백강은 대개 금 서천 백마강의 입해구니, 흥수(흥수)의 이른바 기벌포(차장 참고)니라.
제사장 신·당 양국병의 침입과 백제 의자왕의 피집
(일) 신라와 당의 연합 침입
기원 육백오십사년에 진덕여대왕이 붕서하고 김춘추(김춘추)가 그 주위를 이으니, 이 곧 사에 이른바 태종무열왕이다. 태종의 부 용춘(용춘)부터 벌써 대왕의 실권은 가졌으나, 다만 동서인 백제 무왕의 왕위 다툼에 그 감정의 완화를 도하려 하여, 왕의 명의를 제일차는 선덕(선덕), 제이차는 진덕(진덕) 곧 양개 출가여승에게 준 것이러니, 이제에 이르러서 양국의 렬량이 다시 미봉할 수 없이 깊었으므로, 태종이 곧 왕의 명의까지 취함이러라.
태종이 이미 왕이 되어서는 더욱 김품석(김품석) 부처의 앙갚음에 급할 뿐 아니라, 또 백제의 침핍이 전보다 더 심하므로, 그 태자 법민(법민)을 보내어 당의 원병을 청하였다. 당은 이때 당 고종이 즉위하여 고구려에 대한 그 부수를 갚으려 하여, 루차 고구려를 공하다가 다 실패하였으므로, 이에 먼저 신라와 합력하여 백제를 공멸한 뒤에 다시 고구려를 공공하기로 하고, 태종의 청을 허하였다.
(이) 계백과 의직의 전사
기원 육백육십년 삼월에 신라왕자 인문(인문)이 당 행군대총관 소정방(소정방)과 함께 병 십삼만을 거느리고 래주로부터 바다를 건너 육월에 덕물도(금 남양 덕물도)에 이르더라. 신라 태종이 금돌성(금 음성)에 유진하고, 태자 법민(법민)과 대각간 김유신(김유신)과 장군 진주(진주)·천존(천존) 등으로 하여금 병선 일백소로써 영접하니, 정방(소정방)이 법민(법민)더러 「신·당 양국병이 수륙으로 분하여, 신병은 육으로 쫓고, 당병은 수를 쫓아 칠월 십일에 백제 서울 소부리에 회합하자」 하므로, 법민(법민)·유신(김유신) 등이 다시 금돌성으로부터 돌아와 김품일(김품일)·김흠순(김흠순) 등 제장군과 함께 정병 오만을 거느리고 백제로 향하더라.
의자왕이 이제야 장야의 연을 파하고 군신을 불러 전수의 편의를 의할 새, 좌평 의직(의직)은 가로되, 「당병이 익지 못한 자로 멀리 바다를 건너오매 반드시 피곤하리니, 그 처음 하륙할 틈을 타서 돌격하면 깨치기 쉬울 것이요, 당병을 깨치면 신라는 스스로 외겁하여 싸움할 것 없이 무너지리이다」 하고, 좌평 상영(상영)은 가로되, 당병은 원래하여 리가 속전에 있으므로 그 하륙하는 처음에는 장사가 분용하리니, 험을 막아 거수하여 량진 사노한 뒤에 싸움이 가하고, 신라는 일찍 루차 아병에게 패하여 아를 공한즉, 먼저 신병을 쳐 파하고 다시 편의를 보아 당병을 침이 가하니이다』 하여 의론이 분운하거늘, 의자왕이 전일에는 평시나 전시를 물론하고 용단으로 칭하더니, 이때에 와서는 요무와 군소의 포위에 들어 의외에 호도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홀연히 지모장으로 이름 있던 좌평 - 일찍 성충(성충)의 당으로 지목되어 고마미지(금 장흥)에 귀양 간 부여 흥수(흥수)를 생각하고, 사자를 보내어 계책을 물었다.
흥수(흥수)가 대답하여 가로되, 「탄현과 기벌포는 국가의 요충이라. 일인이 칼을 들고 막으면 만인이 덤비지 못할 곳이니, 수륙군의 정용을 뽑아 당병은 기벌포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신병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대왕은 왕성을 거수하다가 피 양적이 양진 사노한 뒤에 분격하면 백전백승할 것입니다.」
사자가 회보하니, 임자(임자) 등이 성충(성충)의 유당이 다시 쓰일까 공구하여 「흥수(흥수)가 오래 귀양을 가서 임금을 원하며 성충(성충)의 구은을 생각하여 늘 보복하려 하므로 이제 성충(성충)의 유소의 찌꺼기를 주워 국을 오하려 하니, 그 말을 쓸 수 없습니다. 당병은 기벌포를 지나게 하며 신병은 탄현을 넘게 하고, 그런 뒤에 분격하면 옹중에 든 자라를 잡음과 같아 양적을 다 분쇄할 것인데, 어찌 험조를 막고 적병과 상지하여 시일을 허비하여 군사의 용기를 줄게 하리잇까」 왕이 그렇다 하여, 다시 궁녀들로 술을 들어 노래하고 전쟁이 앞에 있음을 잊더라.
칠월 구일에 신라대장 김유신(김유신)·김품일(김품일) 등이 오만병을 거느리고 탄현을 지나 황등야군(론산·연산 간)에 이르거늘, 의자왕이 장군 부여 계백(계백)을 보내어 신라병을 막으려 하더니, 계백(계백)이 장차 출전할 새 어허 하여 가로되, 「탄현의 천험을 지키지 않고 오천의 병으로 십배의 적을 막으려 하니, 내 일을 내가 알겠다.」 하고 처자를 불러 가로되, 「남의 부로가 될진대, 차라리 내 손에 죽으라.」 하고 칼을 빼어 그 자리에서 쳐 죽이고 군중에 나아가 병중을 모아 세우고 맹서하여 가로되, 고구려 안시성주 양만춘(양만춘)은 오천중으로 당병 칠십만을 파하였는데, 우리 오천병이 일인으로 십인을 당할진대, 어찌 신라의 오만병을 겁내리오 하고 달려 황등야군에 이르러 험조를 거하여 삼영을 나누어 역전하니, 김유신(김유신) 등이 사진하다가 사패하여 사상이 만여인이 되더라.
김유신(김유신)이 전승할 수는 없고 십일의 약을 부하매 급하여, 품일(품일)과 흠순(흠순)을 돌아보고 가로되, 「금일에 이기지 못하면 약을 부치 못하리니, 당병이 독전하다가 패하면 신라의 수십년 운동이 허지에 돌아갈 것이요, 당병이 승하면 비록 남의 힘으로 복수는 되었다 할지라도, 신라가 당의 모멸에 견디지 못하리니 어찌하면 가하뇨?」 흠춘(흠춘)과 품일(품일)이 가로되, 「금일에 십배의 중으로 백제를 이기지 못하면 신라인은 다시 면목을 들지 못할 것이다. 먼저 나의 자제를 죽여 남의 자제를 죽도록 격려하여 혈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고, 흠춘(흠춘)은 그 자 반굴(반굴)을 부르고, 품일(품일)은 그 자 관창(관창)을 불러 가로되, 「신라의 화랑이 충용으로 이름을 날리더니, 이제 일만의 랑당으로 수천의 백제병을 이기지 못하면 화랑이 망함이요, 또 신라도 망함이라. 여등이 낭당의 두령이 되어 화랑을 망치고 말려 하느냐. 신이 되어서는 충을 다할 것이며, 자가 되어서는 효를 다할 것인데, 위를 당하여 목숨을 바쳐야 충과 효를 다하였다 할 것이다. 충효를 다하고 공명을 세움이 금일의 일이 아니냐.」 반굴(반굴)이 「예」하고 그 도중과 함께 백제진을 돌충하여 다 전사하니, 관창(관창)은 겨우 십육세니 화랑 중에도 가장 소년이라. 반굴(반굴) 뒤를 이어 필마 단창으로 백제진에 직입하여 수인을 베고 사로잡힌지라. 계백(계백)이 그 소년으로서 효용함을 사랑하여 차마 가해치 못하고 어허 하며 가로되, 「신라에 소년 용사가 많으니, 가상하다.」 하고 돌려보냈다. 관창(관창)이 그 부 품일(품일)더러 “금일에 적진에 들어가 적장을 베지 못하였으니 실로 부끄러운 일이라” 하고, 물을 움켜 마시며 목마름을 풀고 다시 그 말을 채찍질하여 장창을 들고 백제진에 들어오거늘, 계백(계백)이 이를 격참하여 그 머리를 말꼬리에 매어 보냈다. 품일(품일)이 이를 보고 도리어 용약하며 「오아의 면목이 산 사람 같으니, 왕사에 죽어도 죽음이 아니라.」 하고 부르짖으니, 신라병이 다 격감하여 용기가 난지라. 유신(김유신)이 이에 다시 총공격을 명하여 수만명이 일제히 돌진하거늘, 계백(계백)이 친히 북을 치며 응전하매 양국병이 서로 육박할 새, 계백(계백)과 그 거느린 백제병이 비록 용장하나 수효가 너무 달림에야 어찌하랴. 한갓 성결한 희생으로 백제사의 끝장을 마치고 전장에 넘어지니, 신라병이 이제 개가를 부르고 백제 왕도로 향하더라.
이때에 당장 소정방(소정방)은 백강구의 기벌포에 이르러, 수리 진풀(니해)에 행군할 수 없어 초목을 베어다가 바닥에 깔고 간신히 들어오는데, 백제왕은 임자(임자)의 말과 같이 옹중에서 자라를 잡으려 하여 그 곳을 지키지 않고, 수군은 백탄(금 백강)을 지키고 육군은 그 안상에 진하더니, 당병이 이미 진풀을 지나매, 후퇴할 수는 없고 전진할 것뿐이므로 용기가 배등하여 백제의 수군을 파하고 안상으로 오르거늘, 의직(의직)이 중군을 호령하여 격전하다가 죽으니, 의직(의직)은 비록 지략은 계백(계백)만 못하나 장용은 상등하여 일시에 당군을 담락케 한 고로, 신라인이 의직(의직)의 죽은 곳을 이름하여 조용대라 하니, 대개 의직(의직)을 용에 비하고 의직(의직)을 죽임을 용을 조함에 비함이러라.
여지승람에는 「소정방(소정방)이 백강에 이르매, 풍우가 대작하여 행군할 수 없으므로 무자에게 물은즉 강용이 백제를 호함이라 하므로 정방(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아 잡은 고로, 강은 백마라 명하고 대를 조용대라 명한 것이라」 하였으나, 백마강명이 정방(소정방)의 도착 전에 있는 고로, 성충(성충)의 유소에 백강구를 말하였으니, 백강은 곧 백마강의 축자며, 일본사에 백촌강이라 칭하였으니, 촌은 뜻이 「말」이니, 백촌강은 곧 백마강의 별역이니, 야설이 그 자체가 황탄할 뿐 아니라 또한 역사와도 모순되니, 해상잡록에 보인 바 의직(의직)이 죽은 곳이라 함이 가하니라.
(삼) 의자왕의 피집과 백제 양도의 함락
김유신(김유신) 등이 계백(계백)을 파하고 그 익일 십일일 백강에 다다르니, 소정방(소정방)이 약기를 지났다 하여 신라독군 김문영(김문영)을 베려 하거늘, 유신(김유신)이 당이 번속으로 신라를 대함을 분하여 눈에 불이 떨어지는 듯하여 보검을 어느덧 빼어 제장을 돌아보며 백제는 그만 두고 당과 싸우자 하더니, 당장 중에 이를 탐지한 자가 있어 정방(소정방)에게 말하여 드디어 문영(김문영)을 놓고 이에 양국병이 합하여 「솝울」을 치더라.
의자왕이 태자 이외의 적자가 수인이요 서자가 사십여인인데, 왕이 평일에 다 좌평의 명의를 주어 국가대계에 다 참모하며 심혹 실권도 행사하더니, 이때에 와서 대략 삼파로 나뉘니, 태자 효(효) 등은 북경 곰나루성을 주보하여 전국의 의병을 격소하자 하며, 차자 태(태)는 「솝울」을 력수하여 부자 군신이 력전하여 각지의 의병을 기다리자 하며, 왕자 융(융) 등은 우주와 폐백을 적병에게 올려 퇴병을 걸하자 하여, 사오십명의 적서자들이 각기 자가의 의견을 주장하여 왕의 앞에서 떠드니, 왕이 좇을 바를 몰라 삼자의 말을 다 허락하여, 융(융)에게 강화의 권을 맡기며, 태(태)에게 전수의 권을 맡기며 몸소 태자와 함께 북경 곰나루성으로 도망하더라.
융(융)이 소정방(소정방)에게 이서하여 퇴군을 구하며 우주를 보내다가 다 퇴각을 만난지라. 차자 태(태)가 이에 대왕의 위에 나아가 군민을 독솔하여 방전할 새, 태자의 자 문사(문사)가 가로되 「대왕과 태자가 생존하였는데, 숙이 어찌 자립하느냐. 만일 사가 평정하면 숙을 쫓는 자는 다 역적으로 죄로 죽으리라.」 하고 좌우를 거느리고 성을 달아나니, 인민이 모두 따르며 군인들도 전의가 없더라.
융(융)은 또 화의의 성립되지 못함을 부끄러이 여겨 성문을 열고 출항하니, 신라병과 당병이 이에 성첩을 받들고 성에 오르더라. 왕후와 왕의 희첩과 태자의 비빈들은 모두 적병에게 욕보지 않으려 하여, 대왕포로 달아나 암석 위에서 강을 향하여 떨어져 낙화암이란 암석이 지금까지 그 열적을 전하며, 제자들은 혹 자살하며 혹 도망하고 의자왕은 곰나루성을 주보하더니, 수성대장이 곧 임자(임자)의 당이라. 왕을 잡아 항하려 하매, 왕이 자문하였으나 동맥이 끊어지지 아니하여, 태자 효(효)와 소자 연(연)과 함께 당의 부로가 되어 당영에 묶여 가니라. 당장 소정방(소정방)은 목을 질러 절반이나 죽은 의자왕을 굴려 「이제도 대국을 항거하겠느냐?」고 웃음거리를 삼으며, 신라태자 법민(법민)은 왕자 융(융)을 굴려 「네 아비가 우리 누이 내외를 죽인 일이 생각나느냐?」고 앙갚음을 하더라.
신라 태종이 소정방(소정방)에게 치사하기 위하여 금돌성의 솝울로 치도한즉 소정방(소정방)이 일찍 「백제를 멸하거든 기회를 보아 신라를 쳐 빼앗으라」한 당고종의 밀지를 받은 고로 신라의 틈을 엿보는지라.
김유신(김유신)이 이를 알고 태종에게 고하여 어전회의를 열고 대항책을 의할 새, 김다미(김다미)가 가로되, >「아병으로 하여금 백제의 옷을 입고 당영을 치면 당병이 출전하며 또 아영에 구를 청하리니, 그때에 불의를 타 습격하면 당병을 파하리니, 그리고 백제 전지를 수복하며 북으로 고구려를 화하고 서로 당을 항하며 민을 무하고 병을 양하여 시를 대하여 동하면 누가 우리를 모하리이까?」
태종이 가로되, 「이미 당의 은을 입어 적국을 멸하고 또 당을 치면 하늘이 어찌 우리를 돕겠느냐?」
김유신(김유신)이 가로되, 「개의 꼬리를 밟으면 주인이라도 무나니, 이제 당이 우리의 주인이 아닌데 우리의 꼬리를 밟을 뿐 아니라 곧 우리의 머리를 깨려 하니, 어찌 그 은을 생각하리잇가?」 하여 당을 침을 고권하나 태종이 마침내 듣지 않고 군중을 명하여 엄비케 할 뿐이더라. 소정방(소정방)이 신라의 경비함을 알고 그 음모를 중지하더라. 속전에 함창 당교에서 당병을 습격하여 대파하였다는 일설을 게재하였으나, 『삼국유사』에는 무실한 말이라고 변정하니라.
백제는 백전의 국이라. 국인이 전에 습하고 의에 용하나, 그러나 유교 수입한 이래 일반 사회가 명분의 굴레에 목을 매어, 성충(성충)와 흥수(흥수)가 비록 외적을 탕평할만한 재략은 가졌으나 명림답부(명림답부)와 같이 폭군을 주참할 기백이 없으며, 계백(계백)과 의직(의직)이 비록 신가를 희생하는 충렬은 가졌으나 연개소문(연개소문) 같이 내부를 숙청할 수완이 없어, 마침내 광망한 의자왕을 처치하지 못하여 임자(임자) 등 일류 소인으로 하여금 수십년 동안 정치상에 중심세력을 잡아, 평시에는 국재를 탕갈하여 일신의 형락에 공하며 난시에는 국토를 거하여 적국에 투항하여 중경과 상경이 다 왕자의 개성으로써 망하고, 그 외 삼경과 각 군현도 또한 모두 반항이 없이 적의 소유가 되었도다. 그러나 인민의 「다물」 운동은 의외에 격렬하여 군왕과 관리들이 매국한 뒤에 분기하여, 도수로서 적병과 싸워 말일의 망국사가 혈우로써 마쳤다. 만일 피등으로 하여금 유교의 명분설에 속지 않고 혁명의 기분을 가졌다면, 어찌 그 구구한 간인 등에게 망국을 맡겨 두었으랴. 이제 차장에 백제의 「다물」 운동의 대략을 말하리라.
제오장 백제 의병의 군기(부여 복신의 약사)
(일) 의자왕 피집 후 각지의 의병
솝울이 이미 적병에게 함락되고 의자왕이 피집하매, 달관 귀인들은 거의 임임(임자)·충상(충상) 등 일반 매국의 당도인 고로 다 그 유수하는 성읍을 거하여 적국에 항하나, 성충(성충)의 유당으로 몰리어 퇴직한 구신들과 초야의 의사들이 망국의 화를 구코저 하여 각처에서 봉기하였다. 이같이 열열한 다물운동의 의사들은 신라사가들이 이를 잔적이라 배척하여 그 사적을 삭제하여 그 성명을 매몰하였으니 얼마나 가석하냐. 이에 「신라본기」·「김유신전」, 『해상잡록』·『당서』·『일본서기』 등 각서에 참조하여 보면, 당시 백제의 의병이 일어나던 지방이 대략 (삼)이니, (갑)은 백제 남부의 동북 - 금 전라도 동북의 금산 내지 진안 등지요, (을)은 백제 서부의 서반 - 금 충청도 서반의 대흥·홍주 내지 임천 등지요, (병)은 백제 중부 - 금 충청남도 남단의 연기 등지니, 이제 삼파의 전말을 략서하여 백제 말년의 혈전사의 일반을 보이려 한다.
(이) 중남 양부 의병의 패망과 서부 의병의 견수
서부의병장 부여 복신(복신)은 무왕의 조카니, 일찍이 고구려와 당에 사하여 외교계의 인재로 이름이 있었고, 서부 은솔이 되어 임존성을 견고하게 수리하며 성중 창고에 양사를 저축하는 외에, 용주를 세워 그 속에 미설을 감추어 일후 의외의 일을 비하더니, 마침내 임자(임자)의 참을 만나 직을 거할 새 군민들이 다 호읍하여 차마 보내지 못하더라.
밋(이윽고) 당병이 중경 「솝울과 상경 곰나루를 함락하여 왕이 피집하매, 성중 군인들이 재임한 은솔은 쫓고, 복신(복신)을 옹대하여 은솔을 삼고 거수할 새, 구 좌평 자진(자진)[『당서』에 도침(도침)]은 주류성[「김유신전」의 두솔성이니 금 연기의 원수산?]을, 구 좌평 정무(정무)는 두시이(금 무주 남이니 신라의 이산현)을 습거하고 병을 합하여 곰나루를 다물하려」 할 새, 복신(복신)에게 사람을 보내어 병력함을 청하더라.
복신(복신)이 가로되, 「이제 적의 대병이 아의 양도와 각 요해를 탈거하고 우리의 군자와 기계를 몰수하였는데, 우리가 초야에서 산졸과 량민을 소집하여 죽창과 목봉으로써 피 궁실검극을 가진 자를 진공하려면, 이는 필패할 일이라. 우리 의병이 패망하면 백제의 운명이 그만이다. 이제 당이 십여만중을 발하여 해를 건너오매, 그 양향은 (일) 신라의 공급과 (이) 아국민에게 약탈한 것을 의뢰할 뿐이나, 그러나 신라는 연년 전쟁에 국고가 탕갈하여 능히 허다한 시일을 공급하지 못할 것이요, 민간의 약탈로는 다수한 군병의 식료를 충할 수 없을 뿐더러, 더욱 아민의 반감을 쌓아 의병의 수를 증가할 뿐이라. 당인도 이를 아는 고로 불과 기일에 반드시 일이만의 수병을 두고 그 대병은 회환하리니, 우리가 이제 다만 험요한 성읍을 견수하다가 이때를 타 피의 수병을 격파하고 조종의 구업을 찾을 터이니, 어찌 요행의 승리를 바라리오.」
하나, 정무(정무) 등이 듣지 않고 곰나루성 동남의 진현성을 쳐 잡힌 의자왕 이하 대신들과 장사들을 빼앗으려다가, 정무(정무)는 두시성으로, 자진(자진)은 주류성으로 달아나 거수하더라.
미기에 당이 곰나루를 웅진도독부라 칭하여 당장 유인원(유인원)은 당병 일만으로, 신라 왕자 인태(인태)는 신라병 칠천으로 공동방수케 하며, 기타 각 중요한 성읍에다 다 양 국병 약간을 배치하며, 각지의 의병들은 신라 태종이 그 토평할 책임을 맡고, 당장 소정방(소정방)이 십만병을 거느리고 구월 삼일에 회환하거늘, 자진(자진)과 복신(복신)이 이에 합병하여 곰나루성을 치려할 새,
복신(복신)이 가로되, 「아군이 패망한 뒤를 당하여 일차의 대승첩이 없으면 인심을 진작할 수 없는데, 곰나루성은 지세가 험준하여 공발하기 지난하니, 차라리 정병을 뽑아 신라병의 귀로를 격퇴함이 가하다.」 하니, 자진(자진)이 또 듣지 않고 곧 중군을 지휘하여 성의 동남 진현성과 왕흥사 령책을 파하여 군자와 기계를 다수히 빼앗고, 곰나루성의 사면에 사오책을 세워 신라 운량의 길을 차단하니, 일시에 의병의 성세가 대진하여 남부 이십여성이 다 향응하였으나 신라 태종이 태자 법민(법민), 각간 김유신(김유신) 등 제장과 함께 려례성(금 무주 남계)을 치므로, 진무(진무)가 출전하다가 패사하고 진현성의 의병도 신라병의 습격을 입어 일천오백명의 사자가 나고 왕흥사 령책의 의병도 칠백병이 전사하더라. 신라병이 이에 임존성을 치거늘, 복신(복신)의 방어가 주도하여 마침내 이기지 못하고, 군량이 부계하므로 십일월 일일에 회군하더라.
(삼) 부여복신의 매전대첩
익년 이월에 부여복신(복신)이 강서의 산졸을 모집하여 강을 건너 진현성을 회복하더니, 당장 - 웅진도독 유인원(유인원)이 정병 일천을 보내어 부전하거늘, 복신(복신)이 중로에서 그 불의를 타 습격하여 일천명에 한 사람도 생환치 못한지라. 유인원(유인원)이 이에 자꾸 사자를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매, 신라 태종이 이손 품일(품일)로서 대당장군을, 잡손 문충(문충)으로서 상주장군을, 아손 의복(의복)으로 하주장군을, 무연(무연)·욱천(욱천) 등으로 남천주대감을, 문품(문품)으로 서당장군을, 의광(의광)으로 낭당장군을 삼아 왕구할 새,
삼월 오일에 그 선봉대가 두량이성(금 정산)에 이르러 진지를 시찰할 새, 복신(복신)이 그 대오의 부계함을 보고 돌출 급격하여 이를 전멸하고, 그 군계를 탈취하여 목봉을 대하고 성을 거수하더니, 신라 대군이 이르러 성을 위공한 지 삼십육일에 사상만 많이 나고 성을 빼앗지 못하여 회환하거늘, 복신(복신)이 사방의 의병을 지휘하여 좌우로 충격하여 다수의 장졸을 베고 군자 기계를 전부 탈취하고 진격하여, 가소천(금 ■■강)에 이르러는 신라의 구병으로 보낸 김흠순(김흠순)의 병과 싸워 대파하니, 흠순(흠순) 등이 단기로 도주하여 신라병이 다시 재출치 못하더라.
복신(복신)이 이에 고 왕자 풍(풍)을 맞아다가 왕을 삼고 곰나루성을 포위하여 신라 운량의 길을 끊으니, 복신(복신)의 위명이 이에 천하에 진동하여, 백제 각 성읍이 다 향응하여 신라와 당이 임명한 관리를 베어 복신(복신)에 응하며, 고구려의 남생(천남생)은 구병을 보내어 북한산성(차장 참조)을 쳐 멀리 복신(복신)을 성원하며, 일본은 시 십만개를 공하여 군용을 돕더라.
제육장 고구려의 당병 격퇴와 백제 의병의 전성(부여 복신의 약사)
(일)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의 내정
고구려 말년사는 전사가 모두 『당서』의 무록을 채록하여, (일) 연개소문(연개소문) 사년을 연장하며, (이)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요수 이서에서 획득한 토지를 삭감하며, (삼) 연개소문(연개소문) 생전과 사후 고구려 대 당의 관계적 사실을 위조하여, 고구려의 멸망한 진상을 잘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곧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연개소문(연개소문)이 기원 육백오십칠년에 죽음은 이미 제십편에 술한 바거니와,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죽은 뒤에 그 계임한 자도 그 자 남생(천남생)이니, 남생(천남생)의 묘지에 거하면, 「구세부터 총명하여 조의선인의 일원이 되고 부의 선으로 랑관이 되어, 중리대형·중리위두대형의 요관을 역임하여, 이십사에 막리지가 되어 삼군대장군을 겸임하다」 하였은즉,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죽고 남생(천남생)이 그 위를 상속함이 명백하다.
연개소문(연개소문)이 죽은 뒤, 고구려와 당의 관계 여하는 사책에 기사가 불명하나, 『신·구당서 』 「고려전」이나 「정명진전」에는 당고종 영휘 육년에 「정명진(정명진)·소정방(소정방) 등이 고구려를 쳐 오월에 요수를 건너 귀단수에서 고구려병을 파하여 천여인을 살획하다」 하고, 『구당서』 「유인궤전」 에는, 당고종 현경 이년에 「인궤(인궤)가 명진을 부하여 고구려를 귀단수에서 파하여 삼천급을 참하다」한 바, 대개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연개소문(연개소문)에게 패귀할 때에 활에 맞은 눈이 덧나서 죽었은즉, 그 친자인 고종과 그 신하인 이적(이적)·소정방(소정방) 등의 복수할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였으랴마는, 마침내 누년 동안 일병도 출치 못함은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위명을 외한 것일 것이요, 이제 돌연히 귀단수의 전쟁이 있음은 무슨 가승할 기회를 엿본 것일 것이다. 그 기회가 무엇이냐 하면, 현경 이년은 곧 기원 육백오십칠년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사년이니,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사를 기회한 것일 것이다. 그러면 고려 정명진(정명진) 등 전에는 하고로 귀단수전역을 영휘 육년 - 곧 기원 육백오십오년 -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사전 삼년의 일로 기하였느뇨? 이는 대개 당시 본 전역의 동기가 당이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상을 승하려 한 것인데, 이제 당의 사관이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사년을 연장하고 본즉, 그 전역의 동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으므로, 피가 그 전역의 동기 - 곧 피 소위 「사출유명」의 구실을 만들고자 하여, 이에 신라 태종의 즉위 원년 - 곧 신라 사자 청구의 년으로 본 전역의 경과된 년을 삼아 각 전기에 그대로 무록하고, 오직 「유인궤전」에는 우연히 검고를 실하여, 그 전역의 년조를 그대로 적은 것이다.
그러면 본 전역은 연개소문(연개소문) 사후, 당이 고구려에 침입한 제일차의 전역이다. 그 승패의 상황이 전치 못하였으나, 대개 연개소문(연개소문)의 점하였던 산해관 이서의 토지 - 곧 당의 구지는 당이 다시 차지하고, 재진하여 누차 요수 이동을 침입하다가 패퇴하여, 당인들이 이에 당의 일국의 력만으로는 도저히 고구려를 이기지 못할 줄을 알고, 신라와 연합하여 좌우로 협공함을 갈상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백제와 고구려는, 또 그 신라를 공공하여 멸하려 하여 신라 북계에 향하여 자주 출병하므로, 신라 태종이 새로 즉위하여 그 태자 법민(법민)을 당에 보내어 구병을 걸하고, 아울러 백제 현신 성충(성충)이 이미 죽고 의자가 교폭하여 외면으로 비록 강성하나 내용은 실로 공허하여, 양국의 병이 공공하면 이를 멸하기 쉬움을 진술하는지라. 당의 군신들이 이 말을 듣고 대희하여 드디어 십삼만 대병을 들어 신라와 협력하여 백제를 멸한 것이다.
백제가 망한 사실은 이미 전장에 략술하였거니와, 백제 망할 때에 남생(천남생)이 백제에 대하여 구병을 출치 못함이 비상한 실책이다. 밋(이윽고) 백제가 망한 뒤에도 당병이 이미 회환하고 의병이 봉기하는 때에, 고구려가 수만의 병마를 출하여, 곧 곰나루 솝울 등지로 직출하여 복신(복신)·자진(자진) 등과 연합하여 혈전하면, 백제가 가히 중흥하였을 것이요, 백제가 중흥하면 넉넉히 신라를 견제하여 당병에 대한 양미의 공급을 불능하게 하였을 것이요, 신라의 양미가 아니면 고구려에 비록 연개소문(연개소문)·양만춘(양만춘) 같은 영물이 없을지라도, 당병이 능히 평양까지 침입치 못하였을 것이며, 설령 침입한다면 수양제의 장졸 같이 패궤하였을 뿐이니, 그러므로 당시 고구려의 안전을 계하려면 먼저 백제의 망을 구할 것이거늘, 이제 사책으로 보매, 신·당 양국병이 이미 백제를 멸한 뒤에 소수의 병을 보내어 칠중성(금 적성)을 공발하고 퇴군하였으며, 밋(이윽고) 부여 복신(복신)이 기병하여 백제 전국이 거의 회복된 뒤에도 겨우 수천명을 총발하여 북한산성 - 남녀 합하여 겨우 이천칠백여명의 신라인이 있는 고성을 공발치 못하고 패퇴하였고, 그 이외에는 백제를 원구한 거동이 없었으니, 남생(천남생)은 후일 매국의 죄를 짓기 전에 그 오국의 죄도 적지 않다. 이같은 용자 남생(천남생)에게 정권을 물리고 죽은 연개소문(연개소문)도 어찌 죄가 없다 하리오.
(이) 평양 당병과 웅진 신라병의 대패
기원 육백육십이년에 당이 임아상(임아상)·계필하력(계필하력)· 소정방(소정방)·설인귀(설인귀)·방효태(방효태) 등 제장을 보내어 삼십오도로 병진하여, 하남북과 회남의 육십칠주 병을 증발하여 평양에 침입케 하며, 랑장 유덕민(유덕민)으로 함자도를 배하여 신라로 들어가 신라병과 합하여 고구려의 남경을 침입하는 동시에, 신라의 양미를 평양에 송치케 하더니, 신라는 이때에 태종[김춘추(김춘추)]의 상사 있음을 불구하고 그 신왕 - 중종문무왕[법민(법민)]이 김유신(김유신)·김인문(김인문)·김양도(김양도) 등 구장군으로 하여금 전국병을 총발하는 동시에, 대차 이십량을 지어 미 사천석·조 이만이천여석을 실어 평양 당군에게 보내려 할 새, 이때에 백제 의병이 태산(금산?)을 거하여 복신(복신)을 응하더니, 당 웅진도독 유인궤(유인궤)가 급사를 발하여 중종에게 고하여 가로되, 만일 태산의 백제병을 그대로 두어 세력이 공고하면, 운량의 길이 끊어져 유진하는 일만칠천의 양국병이 다 아사하여 웅진이 다시 백제의 것이 되고 백제가 다시 회복될 것이오, 백제가 회복되면 더욱 고구려를 꾀하기가 난하리니, 먼저 태산성을 쳐 달라 하므로, 중종이 이에 김유신(김유신) 등 제장과 함께 구월 십구일에 태산성 하에 이르러 항함을 유하며 부귀로써 꾀이거늘, 의병이 고성으로 답하여 가로되 성은 비록 적으나 장졸이 다 의용하여 싸우다가 죽은 백제귀가 될지언정 항복하여 사는 신라인이 되지 아니하리라 하고, 곧 거전하여 팔일 만에 성중 병 수천명이 다 전사하고 성이 함락되니라. 신라병이 진하여 우술성(금 회덕)을 위하니, 우술성은 복신(복신)이 신라 군량의 길을 끊기 위하여 장을 보내어 파수하는 자라. 상치한 지 수십일에 성중의 달솔 조복(조복)과 은솔 파가(파가)가 내응하여 성중 의병 일천명이 다 전사하고 성이 또한 함락하니라.
이에 웅진 운량의 길이 개관되었으나, 평양의 당병이 고구려병에게 대패하여 패강도총관 임아상(임아상)은 유시에 맞아 죽고, 옥저도총관 방효태(방효태)는 그 자 십삼인과 사수(금 보통강)에서 전패하여 전군이 복몰하고, 소정방(소정방) 등 각군은 한시성(금 평양 부근의 서시촌)에 거하여 양식이 핍절하여 신라의 공급을 갈망하여 사자가 자주 오므로, 신라 대장군 김유신(김유신)이 이에 군병을 양부에 갈라, 일부는 김유신(김유신)이 솔하여 평양에 운량케 하며, 일부는 김흠순(김흠순)이 솔하여 웅진에 운량케 할 새, 칠중하에 이르러서는 제장이 다 공구하여 건너려 하지 않거늘, 유신(김유신)이 가로되, 고구려가 망치 않으면 백제는 부흥하고 신라는 위태하리니 우리가 어찌 위험을 꺼리랴 하고, 간도를 쫓아, 제장들과 건너 고구려인이 깨달을까 하여 산험을 타 수십일 만에 평양에 달하여 소정방(소정방)에게 양미를 주니, 정방(소정방)의 군이 일포를 취하고는, 패전한 끝에 재진할 수 없다 하여 바다를 좇아 둔귀하고, 신라병은 유전하려 하나 수효가 고구려에 부적하며, 도환하려 하나 고구려병이 추격할까 하여 정형이 매우 랑패하여, 유신(김유신)이 이에 영중에 정기를 그대로 꽂고 우마의 꼬리에 북과 북채를 매어 서로 쳐 소리가 나게 하며, 장졸들만 가만히 빠져 돌아올 새, 천후와 기한에 사상자가 많이 나며, 또 칠중하에 미쳐 고구려의 추격을 만나 요행히 득탈하고, 그와 동시에 웅진에 운량하던 신라병들은 그 회로에 대설을 만났을 뿐 아니라, 또 백제병의 위격을 당하여 살아간 자가 백명에 일인도 못되더라.
부여 복신(복신)이 다시 곰나루성에 이르러, 성의 부근 사면에 목책을 세워 신·당병의 내외 교통을 차단하니, 백제 전국이 다 향응하여, 신·당 양국이 임명한 신관리를 죽이고 백제 관리를 내어 다 부여 복신(복신)의 지휘 하에 속하니, 이때에는 백제의 다물사업이 이미 완성하였다 할 만하더라.
제칠장 부여 복신의 사와 고구려의 내란
(일) 자진의 통관과 피주
부여 복신(복신)이 처음으로 기병할 때에, 혹이 복신(복신)을 설하여 가로되, 「타인의 체주를 받으면 대사가 패하기 쉬울지라. 공은 무왕의 조카요, 성망이 내외에 미치는 터이니, 자립하여 왕이 되어 전국의 병마를 지휘함이 가하다」 하나, 복신(복신)이 써하되 「이렇게 하면 이는 사로써 인민에 보임이니 의가 아니라」 하고, 의자왕의 자 왕자 풍(풍)을 영립하여 왕을 삼고, 또 자진(자진)은 의병 수창의 공이 있고, 일찍 좌평의 관을 지낸 대신이라 하여 령군대장군을 양여하고, 복신(복신)은 상잠장군이 되어 강서의 병마를 전관하더니,
밋(이윽고) 복신(복신)이 신·당 양국병을 루파하고 곰나루성을 공위하여, 당장 유인궤(유인궤)가 감히 출전하지 못하고, 또 소정방(소정방) 등이 평양에서 패하여 달아나매, 당인이 이에 크게 랑패하여 당고종이 유인궤(유인궤)에 조하되, 웅진 고성을 거수하기 난하니 전군을 거하여 곧 해도로 쫓아 돌아옴이 가하다 하여, 유인궤(유인궤) 등이 이에 도귀하려 하거늘, 복신(복신)이 이를 탐지하고 제장을 모아 당병의 귀로를 요격하여 인궤(인궤)를 금하려 하더니, 자진(자진)이 본래부터 늘 복신(복신)의 재능과 성망이 자기에 지냄을 샘하다가 이 일을 듣고는 더욱 복신(복신)이 대공을 이룰까 하여, 드디어 유인궤(유인궤)에게 복신(복신)의 계책을 밀고하고, 또 인궤(유인궤)더러 당제가 만일 백제의 일국됨을 허하면, 백제가 길이 당의 은에 감하여 당을 존사할 것이요, 복신(복신) 등을 잡아 바치겠다 하여, 인궤(유인궤)가 이에 도귀할 생각을 중지하고 자진(자진)과 서로 신사의 왕환이 잦더라.
복신(복신)의 부장 사수원(사수원)이 그 밀모의 증적을 획득하여 복신(복신)에게 고하니, 복신(복신)이 대노하여 이에 연회한다 탁하고 제장을 모으고 당석에서 자진(자진)을 잡아 그 죄를 선포하고, 풍왕에게 고하여 참형에 처하려 할 새, 왕이 자진(자진)이 비록 죄가 있으나 대신이니, 극형함이 불가하다 하여 형을 감하려 하나, 복신(복신)은 국을 반한 자를 살릴 수 없다 고집하여 마침내 자진(자진)을 참하니라.
(이) 부여 복신의 피살
풍왕이 복신(복신)의 옹립한 바 되어, 늘 병권이 제장의 손에 있음을 의기하더니, 밋(이윽고) 복신(복신)이 자진(자진)을 참하여 전국 병권이 복신(복신)에게 돌아오매, 왕의 좌우가 복신(복신)을 왕에게 참하여 가로되 「복신(복신)이 전횡하여 자의로 대장을 살육하니, 그 안중에 어찌 대왕이 있으랴. 대왕이 만일 복신(복신)을 죽이지 않으면 복신(복신)이 장차 대왕을 죽이리다.」 하고, 이에 풍왕과 복신(복신)을 해하기로 밀모하고, 동년 육월에 복신(복신)이 마침 병이 있어 굴실에서 치료함을 기회하여, 왕이 문병한다 가탁하고 좌우 친신을 거느리고 돌입하여 복신(복신)을 잡아 결박하고, 왕명으로 좌평 이하 각 대신을 불러 복신(복신)의 장심을 뚫어 가죽으로 꿰고 죄를 의할 새, 복신(복신)이 죽으면 적병을 막을 이가 없을 줄은 풍왕도 명지하는 바, 이로 중심에 다시 황혹하여 「복신(복신)의 죄가 사함이 가하냐?」고 물으니, 달솔 집덕(집덕)이 「이같은 악역인은 사하여도 죄가 남는다.」라고 답하였다. 복신(복신)이 집덕(집덕)의 면을 향하여 침을 뱉어 가로되, 「개 같은 치노야.…」 하고 드디어 희광의 칼에 목을 바치니, 백제 인민이 복신(복신)의 죽음을 듣고 모두 눈물을 뿌리더라.
『구당서』에는 「용삭 이년(기원 육백육십이년) 칠월 인궤 인원등 율유진지병 대파복신여중어웅진지동 발기지라성급윤성대산사정등책 … 선시복신 기전기병권 여부여풍 점상시이 복신칭질 와어굴실 장후풍문질 모습살지 풍각이율기친신 살복신」이라 하고, 『일본서기』에는 「천지 이년(기원 육백육십삼년) 육월 백제왕풍장 혐복신모반 이혁관장이박 시난자결 부지소위… 달율덕집득왈 차악역인 불합방사 … 수참이염수 팔월 갑오 신라 문복신사 모직입주유」라 하여, 양서의 년조와 사실이 호이하다. 복신(복신)의 죽은 연조는 신라본기에 거하면, 『일본서기』와 합할 뿐더러, 그 사실로 말할지라도 복신(복신)이 이미 대병을 장하였은즉, 병권이 없는 풍왕을 죽이려면 곧 습살함이 가하거늘, 어찌 굴실에 와하여 풍(풍)의 문병을 기다려 죽이려 하였으랴. 가의할 것이 (일)이오, 신라나 당이 복신(복신)에게 루패하여 일만칠천의 고군으로 위성을 거수하는데, 어찌 아무 변동한 형세가 없이 돌연히 출전하여 지나성 곧 주류성 - 금 연기, 윤성 - 금 정산, 대산 - 금 한산, 사정 - 금 온양 등 각지를 평정하였으랴. 『당서』의 가의가 (이)요, 의병이 누승하여 백제 전지가 대략 회복되었으므로, 풍왕이 복신(복신)을 죽여 그 군권을 확장하려 함일지니, 어찌 각처 성책이 거의 함락된 뒤에 장망의 권리를 차지하려 하여 복신(복신)을 해하였으랴. 『당서』의 가의가 (삼)이라. 그러므로 『당서』를 버리고 『일본서기』를 종하는 동시에 해상잡록의 전설을 취하여 백제 최후 위인의 사적의 결루를 보하노라.
(사) 복신 사후 풍왕의 망
유인궤(유인궤)가 곰나루성에 피위하였으나, 신라와 당이 다 복신(복신)을 외하여 진구치 못하더니, 밋(이윽고) 복신(복신)의 죽음을 듣고 당고종이 그 장군 손인사(손인사)로 하여금 이만칠천병을 가지고 백제 왕자 융(융) - 곧 의자왕의 자로서 당에 부로된 자를 백제왕이라 칭하여, 해도로 쫓아 덕물포에 하육하고 비밀히 사자를 보내어, 「풍왕은 잔인하고 시의가 많아 저를 옹립하고 또 대공이 있는 부여복신(부여복신)을 죽였거든, 하물며 다른 제장이랴. 당은 원래 백제의 토지를 가지려 함이 아니라 오직 백제가 고구려와 한 편 됨이 미워서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침이거니와, 이제 륭(융)은 백제 선왕의 애자로서 능히 대세를 알고 또 황제(당주를 가리킨 말)의 신임을 얻은 고로, 백제왕 작을 주고 대군으로써 옹획하여 귀국케 하니, 백제 총명한 장사들이 짐의 말을 믿어 융(융)을 왕으로 봉대하면 전쟁의 고로가 없이 고국을 회복하고 부귀를 안향하려니와, 만일 대군을 완거하다가는 짐도 공 등을 용서치 않으리니, 공 등은 잔인한 풍(풍)을 인군으로 봉대하여 패하면 대군의 주륙을 받을 것이요, 승하면 풍(풍)의 시의를 입어 복신(복신)과 같이 참사하리니, 이 어찌 지자의 일이냐」 하여, 풍왕의 제장을 꾀이니, 남부 달솔 흑치상지(흑치상지)와 진현성주 사타상여(사타상여)가 바야흐로 풍(풍)이 복신(복신)을 죽임을 창하다가, 드디어 그 관내 이백여성을 가져 융(융)에게 투항하고, 흑치상지(흑치상지)가 서부 달솔 지수신(지수신)에게 투서하여, 풍왕이 잔인하여 백제를 중흥할 영주가 아님을 논하고 인하여 지수신(지수신)을 권하여 항을 공사하자 한즉, 지수신(지수신)이 답하여 가로되, 「아등이 상좌평[복신(복신)을 가리킴]과 함께 의병을 흥하여 백제를 흥복하려다가 중도에 불행하여 간신에 오한 바 되었으니, 어찌 아등의 지통이 아니랴마는, 상좌평이 의병을 창함은 본디 당적을 척축하려 함이거늘, 어찌 상좌평의 사를 통하여 그 복수를 위하여 당에 투항하면 이는 상좌평만 반함이 아니라 곧 백제를 반함이니, 상좌평의 영이 있으면 그 마음의 지통이 장심을 꿰던 독형을 입음보다도 심하리니, 나는 공이 번연히 회오하여 재귀함을 바라노라」 하였더라.
그러나 흑치상지(흑치상지)가 답하지 않고, 팔월에 신·당 양병의 선도가 되어 부하 오만병을 인하여 주유성을 위하니, 이에 백제가 양국으로 나뉘어 지수신(지수신)이 관한 서부는 풍왕에게 속하여 서백제가 되고, 흑치상지(흑치상지)가 관한 남부는 융(융)에게 속하여 남백제가 되어, 서백제는 당을 적대하여 싸우는 동시에 남백제는 당의 노예가 되어 그 지사를 받아 서백제를 치니, 아 - 백제 중흥의 대업을 이같이 창피하게 만든 자는 곧 부여풍(부여풍) - 상좌평 부여복신(부여복신)을 죽인 부여풍(부여풍)이니, 풍(풍)은 곧 중흥의 백제를 멸한 제일의 죄인이다. 풍(풍)이 비록 죄인이나, 풍(풍)이 악한 까닭에 백제를 반하여 당의 노예가 됨에 이르렀으니, 흑치상지(흑치상지)는 곧 백제를 멸한 제이 죄인이다. 전사에 오직 『당서』의 포폄을 따라 흑치상지(흑치상지)를 비상히 찬미하였으니, 이 어찌 치아의 붓이 아니냐.
풍(풍)이 이미 복신(복신)을 죽이고는 적국을 막을 만한 방략이 없으므로, 곧 사자를 발하여 고구려와 왜의 구병을 청하더니, 고구려는 바야흐로 당의 침구를 려하여 발병치 못하고 왜는 병선 사백척을 보내어 원조하더라. 왜병은 백마강 중에, 서백제병은 안상에 열진하여 남백제·신라·당 삼국병과 대전할 새, 신라의 병선이 강의 상류로부터 왜선을 직충하여 불을 질러 몰소하니, 왜병이 패궤하여 다 물속에 빠져 죽고, 서백제의 안상 병은 남백제와 당병의 협공에 패한지라. 삼국병이 이에 총집하여 주류성을 치니, 풍(풍)은 드디어 도주하고 장사들은 전사하니라.
간행사
단재 신채호 선생은 언론인·사상가·역사학자·독립운동가로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한국근대사의 거목입니다.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단재(신채호)의 자취가 여전히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남다른 기개와 포부, 투철한 독립의지를 가졌던 단재(신채호)는 후대는 물론 당대에도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1970년대 후반 단재(신채호)의 저작을 모은 자료집이 이미 발간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빠진 것도 많고, 오류도 보여 전면적인 보완, 개정 작업이 요구되어 왔습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단재(신채호)의 순국 70주년을 맞이한 2006년부터 단재(신채호)의 유고와 논찬을 총망라한 전집 편찬을 계획, 추진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말 구국운동기와 일제 강점하 독립운동기 민족의 활로를 모색하고,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꿈꾼 대표적 민족지성인 단재(신채호)의 고뇌와 투쟁의 역정을 후대에 길이 전하려는 소명의식도 함께 작용했습니다.
광범위한 활동영역과 심오한 사상, 다양한 이념 편력을 가진 단재(신채호)이기에 그 자료를 집대성하여 전집을 편찬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계의 권위자로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편찬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국내외에 산재한 미 발굴 자료를 여러 경로를 통해 수집하고, 기존 자료에 대한 엄정한 고증을 거쳐 정성껏『단재 신채호전집』발간을 추진하여 왔습니다.
그 첫 결실로 우선 역사, 전기 편 4권을 발간합니다. 올해는 광무황제가 헤이그 세계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한국 독립과 인류 평화를 호소한 지 100년이 되는 뜻 깊은 해입니다. 당시 누구보다도 앞장서 언론과 사회단체, 그리고 역사연구를 통해 힘차게 구국운동을 펼친 단재(신채호)이고 보면, 올해 전집 편찬이 우연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작금의 상황은 단재(신채호)에 대한 추모의 정을 더욱 깊게 합니다. 발밑에서는 과거 한국 침략과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일본의 역사왜곡이 계속될 뿐만 아니라 동양의 맹주로 발돋움하려는 군사대국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는 중국이 중화주의로 회귀하면서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의 역사까지 중국사에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의 망치소리가 머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위아래로부터 한국사가 협공을 당하고, 인류의 정의와 평화를 갈구했던 인도주의가 위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단재 신채호전집』 역사, 전기 편 4권의 발간이 지닌 민족적 함의는 이로 인해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한국사 연구를 통해 민족의 활로를 개척한 단재(신채호)의 역사학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거기에 담긴 민족지성의 고뇌와 혜안을 통해 민족 통일과 자존의 길을 찾아가는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재 신채호전집』 발간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윤병석 편찬위원장과 편찬위원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전집 간행을 위해 애쓴 연구원들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입니다.
2007년 8월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한시준
편찬사
단재 신채호 선생은 한국근대사학을 선도한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또한 그는 애국계몽운동과 그를 이은 항일민족언론을 주도한 언론인이며, 저상하는 민족정기를 환기하는 민족문학을 개창한 문인이다. 그보다도 불요불굴의 민족주의 사상을 견지한 단재(신채호)는 일제 침략으로 유린된 국권의 회복과 조국 광복을 위하여 강직하고도 철저한 독립운동에 헌신한 순국선열이다.
단재(신채호)는 1880년 충청도 대덕군 산내(산내)에서 태어나 조실부형하고 8세 때, 고향 청원군 낭성(랑성)으로 이사하여 사간원 정언정언을 지낸 조부 신성우(신성우) 밑에서 전통 한학을 공부하여 14세 무렵에는 사서삼경(사서삼경)을 독파하고 시문(시문)에 뛰어나 인근에 문명(문명)을 떨쳤다. 18세 때에는 개화파 재상 신기선(신기선)의 집에 드나들며 그가 소장한 신구서적을 섭렵하고, 그 이듬해 성균관에 들어가 3년간 관내에서 기숙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의 학문은 성리학에 머문 것이 아니고 제자백가(제자백가)에 통달하고 불교에도 일가견을 이룬 것이었다. 나아가 단재(신채호)는 이무렵 대담하게 신사조를 수용하여 개화혁신과 자주독립을 강조하는 근대 계몽사상가로 급부상하였다.
26세 때인 1905년 회시(회시)에 합격하고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가 신규식·신백우 등과 산동학당(산동학당)을 개설, 신교육운동에 솔선하였다. 얼마 후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초빙되어 격렬한 항일 논설로 구국언론을 펴기 시작하였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논설이 빌미가 되어 그 신문이 폐간되자 양기탁이 주관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옮겨 박은식을 이어 대한제국 최후의 구국언론을 선도하였다.
한편 단재(신채호)는 이무렵 『대한매일신보』에 새로운 ‘조선사(조선사)’의 정립을 시도한 『독사신론(독사신론)』을 연재, 민족주의 사학의 단초(단초)를 열었다. 또한 이와 전후하여 전기물 『을지문덕』·『수군제일위인이순신』·『이태리건국삼걸전』을 저술, 구국을 위한 애국심 고양에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단재(신채호)는 양기탁·이동녕·박은식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에 참여하여 대한제국 최후의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단재(신채호)는 31세 때인 1910년 국망을 앞두고 신민회 동지와 전후하여 망명길에 올라, 그해 6월 청도회담을 거쳐 국치일 전후 러시아 연해주에 첫 망명지를 정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그 곳에서 『해조신문』과 『대동공보』를 계승한 『대양보(대양보)』를 어렵게 간행하다가 권업회 창설에 가담, 언론부장으로 『권업신문(권업신문)』의 주필을 맡아 국외에서 민족언론을 주도하였다. 또한 서북간도와 국내를 연계하는 광복회(광복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3년 남짓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단재(신채호)는 1913년 여름 신규식의 초청에 따라 북만주를 거쳐 중국 상해로 활동지를 옮겼다. 그 후 단재(신채호)는 1936년 2월, 57세를 일기로 일제의 여순 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4반세기 동안의 망명생활을 상해와 북경을 중심으로, 때로는 고구려와 발해의 고지인 남만주 서간도 지방을 왕래하면서 조국 광복투쟁의 최전선에서 헌신하였다.
그 중 3·1운동(1919) 이전에는 상해에서 동제사(동제사)에 참여, 활동하면서 박달학원(박달학원)에서 청소년 교육에 종사하였다. 이어 1914년에는 윤세복의 초청으로 고구려의 흥기지인 서간도 회인(회인)에 가서 대종교에 입교도 하고, 『조선사(조선사)』를 지어 동창학교(동창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1년 남짓 머문 그 곳에서 원근의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 등을 비롯한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답사, 실측하고 백두산에 올라 고대사의 영광을 성찰하기도 하였다.
그 후 북경에 돌아와 『중화보(중화보)』와 『북경일보(북경일보)』 등에 논설을 기고하여 호구하면서, 국사연구에 전심하였다. 그런 중에도 조국광복을 위한 망국민의 애국심을 분발시킬 중편소설 『꿈하늘(몽천)』과 『용과 용의 대격전』을 비롯하여 망명전 국내에서 발표한 『천희당시화(천희당시화)』의 뜻을 이어가는 애국 시문을 적지 않게 창작하였다.
40세가 되던 1919년 3·1운동(1919)을 맞은 단재(신채호)는 조국독립을 확신하고, 상해에 달려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건립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미구에 이승만의 ‘위임통치론’과 여운형·장덕수 등의 ‘도일행적’ 등에 반대하여 임시정부를 떠나, 『신대한(신대한)』을 창간, 임시정부의 외원중시의 독립운동 노선을 비판하였다. 1921년에는 북경에서 박용만·고일천 등과 제이 보합단(보합단)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의 강화를 기도하는 한편 김창숙과 『천고(천고)』를 창간, 독립사상 고취와 한중공동항일투쟁에 진력하였다. 한편 박용만·신숙 등과 남북만주와 연해주에서 감투하는 독립군의 군사통일운동을 일으켜, 독립전쟁의 결행을 통한 혈전(혈전)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단재(신채호)는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해 활동하였다. 1923년 초부터 그 해 5월말 까지 국내외 각지에서 모인 국민대표자들은 대회를 개최하고 독립운동의 이념과 전술, 지도체제 등 여러 현안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두고 개조파와 창조파로 갈려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이 때, 단재(신채호)는 박용만·신숙 등과 함께 공산주의 계열도 섞인 창조파의 주동자로 활동하였다. 창조파는 개조파의 퇴장 불참속에 회의를 속개하여 새로 창조하려는 한정부(한정부)의 헌법까지 제정하고 기존 임시정부의 해체를 주장하였다. 단재(신채호)는 고문에 추대되고 김규식을 수반으로 한 ‘조선공화국정부’도 결국 해체되어 독립운동사상 큰 상처만 남겼다.
단재(신채호)는 국민대표회의 소집보다 약간 앞서 의열단(의열단)의 요청으로 「의열단선언(의열단선언)」이라고도 하는 「조선혁명선언(조선혁명선언)」을 집필, 독립운동사상 불후의 문자를 남겼다. 단재(신채호)는 망명 전후에 걸쳐 그의 민족주의 사상을 이론으로 전개한 명론탁설(명론탁설)도 많지만 그 중에서도 그의 민족주의 사상 내지 민족운동의 전술로 극치를 이룬다고 논찬되는 이 「조선혁명선언」은 민족주의 운동이 ‘민중(민중)’의 기반 위에 서야 할 것을 강조할 뿐 아니라 ‘폭력(폭력)’만이 그 단계에서 가장 유효적절한 전술이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이른바 ‘내정독립론(내정독립론)’은 물론이요, 이른바 ‘외교호국론(외교호국론)’까지도 철저하게 비판하고, 이어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악수하며 부절(부절)하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박삭(박삭)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조선)을 건설할 지니라”라고 하는 ‘민중의 직접 폭력혁명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당시 승승장구하던 일제와의 투쟁에서는 단연코 여러 가지 민족주의 운동 가운데서도 빛나는 혁명이론으로 칭예(칭예)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한말 이래 단재(신채호)의 ‘신민론(신민론)’을 기반으로 한 『독립전쟁론(독립전쟁론)』을 민중의 직접 혁명이론으로 진일보시킨 전술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단재(신채호)는 1925년 전후로부터 무정부주의 운동에 경도하기 시작하여 1927년에는 동방 9개국 대표가 모인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여 그 대회 선언문까지 작성하였다. 또한 그 대회 결의에 따라 실천운동에도 가담, ‘외국위체변조사건’에 연루되어 대만 기륭(기륭)항에서 일제 경찰에게 잡혀 공판정에서 10년 형을 받고, 한말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그 여순감옥에서 8년여를 복역하다 옥사 순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단재(신채호)의 무정부주의 운동은 어디까지나 ‘조선의 독립’을 전제로 하고, 그를 성취하기 위하여 무정부주의의 이념과 전술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재(신채호)는 최후 공판 진술에서 “우리 동포가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라고 의연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망명지에서 남긴 돌출한 단재(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의 저술과 웅혼한 역사문학의 작품들은 이와 같은 격동과 혈투의 독립운동 시절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진 것이다. 더욱이 망명 직후부터 항상 신변에 뒤따른 신병과 궁핍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민족주의 사상의 정립을 위한 남다른 각고 속의 이룩한 연구 결정들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1924, 5년에 『동아일보』에 연재된 『전후삼한고(전후삼한고)』를 비롯한 일련의 연구 논술인 『조선사연구초(조선사연구초)』와 1931, 2년에 『조선일보』에 연재된 『조선상고사(조선상고사)』 및 『조선상고문화사(조선상고문화사)』등은 단재(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의 대표작으로 논찬되고 있다. 또한 문예 작품면에서도 1916년에 창작한 항일 독립의식을 형상화한 『꿈하늘(몽천)』을 이어 1928년에 이르면 민중혁명의 꿈과 이념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용과 용의 대격전』이란 우화적 사상소설을 창작, ‘문호(문호)’의 위상을 보였다.
단재(신채호)는 죽음에 이르게 한 열악한 환경의 옥중에서도 역사 연구의 열정은 식지 않아 출옥하면 『조선사연구초』 등 국내 신문의 연재물의 보완 수정을 기약하였고, 그 때까지 기술하지 못한 『대가야천국고(대가야천국고)』와 『정인홍공략전(정인홍공략전)』 등의 복고(복고)도 간직하고 있었다.
단재(신채호)가 옥사한 후 『신동아』, 『삼천리』, 『조광』 등 언론 잡지에서는 그의 지우와 동지들인 정인보·홍명희·안재홍 등의 단재(신채호) 논찬 글들이 모아져 추모특집이 마련되었다. 특히 단재(신채호)의 성균관 동학인 변영만에 의하여 단재(신채호) 전기도 쓰여졌다. 또한 한용운·최범술·신백우 등에 의하여 『단재신채호유고집』의 간행도 시도되었다. 그러나 식민지하 주변사정으로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국내외에서 단재(신채호)의 기념사업과 유고집 간행사업이 활기를 띄었다. 또한 학계에서 단재(신채호)의 연구성과도 쌓여가게 되었다. 순국 36년을 맞이한 1972년에는 ‘단재전집간행위원회’에서 문화공보부의 지원을 받아 『단재신채호전집(단재신채호전집)』 상하 2권이 간행되고, 곧 『보유편』 1권도 속간되었다. 이어 1977년에는 이를 보완하여 개정판 『단재신채호전집』 상중하 3권과 『별집』이 천관우의 교열을 거쳐 간행되어 단재(신채호) 연구의 한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60주년을 넘기는 현시점에서 볼 때 이와 같은 단재(신채호)의 헌양사업과 연구업적에도 불구하고 ‘사학의 거벽’이며 ‘문예의 문호’로 칭예되는 단재(신채호)의 학덕과 ‘민족언론의 선봉’이며 ‘독립운동의 전범(전범)’으로 지목되는 그의 사상과 행적 입증에는 불비하고 미진한 면이 적지 않다. 그 중 가장 기본적인 문제점은 아무래도 그의 국내외에서 저작한 유문의 수집정리와 애국적 행적 추구가 철저하고 완벽하지 못한 점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해방과 더불어 밀어닥친 좌우의 이념대립과 남북분단 그리고 6·25 전란 등을 겪고도 그대로 지속된 냉전체제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행히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서냉전구조의 변화로 말미암아 망명지 러시아 연해주와 남북만주를 포함하는 중국과의 학술적 교류도 열렸다. 한편 몹시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북한과의 왕래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는 지난 2006년 온 국민의 관심이 크며 남북한이 함께 존경하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60주기를 맞아 현 시점에 알맞은 새로운 『단재신채호전집』의 편찬, 간행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예산 확보와 함께 다음과 같이 독립기념관 연구진과 학계의 전문학자들로 ‘단재신채호 전집 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국내외에 걸친 철저한 자료수집과 체계적 전집편찬에 착수하게 되었다.
위원장 윤병석(인하대학교 명예교수), 위원 김삼웅(전 독립기념관 관장), 김영호(유한대학 학장), 김용달(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김주현(경북대학교 교수), 박걸순(충북대학교 교수), 신용하(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 이만열(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이호룡(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책임연구원), 최광식(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최기영(서강대학교 교수), 최원식(인하대학교 교수), 최홍규(전 경기대학교 교수), 한시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간사 박민영(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조범래(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김주용(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윤종문(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그 후 편찬위원회는 현재까지 10여회에 걸친 편찬위원회의를 개최하며 자료수집 방향과 편찬방침 및 편찬분담, 편찬물 교열 등을 심의하였다. 그 중 편찬방침은 첫째, 이미 편찬 간행된 전집 내용과 그동안 독립기념관에서 수집한 자료를 정밀 점검하면서 국내외에 걸친 미수집 자료의 수집정리에 중점을 두기로 하였다. 특히 최초 망명지였던 연해주와 오랜 활동지였던 중국 및 근년에 알려지기 시작한 북한 소재 자료수집에 유념하여 가능한 수집 방법을 여러모로 모색하게 되었다. 『용과 용의 대격전』을 비롯한 여러 문예 작품과 그 밖에 유고들이 적지 않게 북한에 전래되고 또한 그 곳에서도 나름대로의 단재(신채호) 연구와 저작류들이 발표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이들 자료들을 가능하면 남북공동편찬이라도 추진하여 간행하는 방법까지도 모색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외자료의 수집을 위하여 연구소의 박걸순·김주용 연구원은 몇 차례 관계지역을 출장하여,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아직은 성과가 나타자지 않았다.
둘째, 단재(신채호) 전집에 수록 범위는 그동안 간행·미간행을 물론하고 단재(신채호)가 남긴 시문을 비롯한 모든 저작을 종합하여 역사와 전기·사론·논설·문학 등으로 분류, 편찬하고, 한편 『신대한(신대한)』, 『천고(천고)』 등과 같이 단재(신채호)가 직접 집필도 하고, 편찬간행한 신문잡지도 원형대로 수록하였다. 또한 단재(신채호)의 애국적 행적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애국계몽운동 이래 망명 후 연해주와 남북만주를 포함하는 중국 대륙에서의 독립운동 관련 기록도 종합 수록하였다. 아울러 단재(신채호) 사후 단재(신채호)의 지기와 동지들의 단재론도 정리, 연보와 함께 수록하였다.
셋째, 편찬방법은 단재(신채호) 저술의 원고와 처음 활자화 한 원전을 중시하여 원고는 물론, 신문·잡지 또는 단행본 등으로 활자화된 것과 필사본까지도 원전대로 영인수록하고, 독자의 판독을 돕기 위하여 그 저작 말미에 컴퓨터 활자로 원문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띄어쓰기한 직해본을 붙였다.
편찬위원회는 이와 같이 지난 2년 동안 정성을 다하여 단재 신채호의 저술 유문과 행적 관련 자료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하는 새로운 『단재신채호전집』 편찬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연차사업으로 착수한 이 사업은 지난해 8월에 먼저 제1권 『조선상고사』와 제2권 『조선사연구초』, 제3권 『독사신론』 『대동제국사서언』 『조선상고문화사』 등 3권의 역사편과 제4권 『을지문덕』 『수군제일위인이순신』 『동국거걸최도통』 『이태리건국삼걸전』 등의 전기편을 편찬, 간행하였다. 또한 금년들어 제5권 신문·잡지, 제6권 논설·사론, 제7권 문학, 제8권 독립운동, 제9권 단재론·연보를 편찬하여 이제 전 9권의 새로운 『단재신채호전집(단재신채호전집)』 간행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하나 같이 단재(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을 대표하는 중요 저술들과 웅혼한 역사문학을 포함한 유문을 집대성한 것이다. 또한 단재(신채호)의 국내외에서의 애국적 자취를 밝힐 관련 자료를 수합한 것이다. 그 중 제3권의 『대동제국사서언』은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소장의 필사본을 처음으로 수집, 수록한 것이고, 이밖에도 제5, 6, 7권에는 종래 알려지지 않았던 단재(신채호)의 갖가지 유문이 국내외에서 새로 수집, 정리된 것이 포함되었다.
각 권의 편찬·교열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담당연구원과 관련위원이, 해제는 제1권 이만열, 제2권 박걸순, 제3권 신용하, 제4권 최홍규, 제5권 최광식, 제6권 김삼웅, 제7권 김주현, 제8권 윤병석, 제9권 최기영 위원이 각각 담당하였다.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독립기념관에서 새로 간행되는 이 『단재신채호전집』이 단재(신채호)연구를 크게 심화시킬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민족의 수난과 혈투 속의 자존’으로 상징되는 한국근대사를 올바로 체계화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 믿어마지 않는다.
2008년 4월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 위원장 윤병석
범례
• 목차는 원전을 그대로 따랐다. 원전에서 순서가 달리 나올 경우 바로 잡아 정리하였다.
• 『조선사』는 1931년 6월~10월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을 영인 수록하였다.
• 『조선상고사』는 1948년 종로서원에서 간행한 것을 영인 수록하였다.
• 새 활자본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원전을 활자화한 것이다.
• 새 활자본 『조선사』는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을 저본으로 하였으며, 1948년 종로서원에서 발행한 『조선상고사』를 참조하였다.
• 새 활자본은 원전을 훼손하지 않고 단락, 구두점, 띄어쓰기만 현대식으로 바꿨다.
• 한국, 중국 고전에서 인용한 자료의 내용이 틀렸을 경우 이를 각주로 처리하여 바로 잡았다.
• 색인은 새 활자본에 국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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