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收藏庫/재독

일체유심조에 관한 해석

걷는생각 2021. 12. 7. 19:08

불교의 가르침인 ‘일체유심조’는 물질세계에도 적용되나요?

“인간의 멀리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자동차를 만들게 했고, 하늘을 날고 싶은 마음이 비행기를 만들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이라는 ‘일체유심조’의 불교 가르침이 물질세계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법륜스님의 금강경 강의에서는 물질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것 같아서요.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스님들의 법문 속에서도 법문을 하는 스님에 따라 그 해석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해석이 맞는가, 저 해석이 맞는가, 이 말이 맞는가, 저 말이 맞는가’ 하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말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는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꾸 언어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어요. 간혹 교회를 다니는 사람 중에 성경 말씀을 절대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이나 불경을 통해 사람이 행복해져야 하는데, 도리어 성경이나 불경을 절대화 하면 사람이 성경이나 불경에 매여서 살아가게 되고, 성경이나 불경이 오히려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기도 합니다. 사람에 옷을 맞추어야지 옷에 사람을 맞추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를 잘못 따르게 되면 이처럼 말씀을 절대화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 대한 해석도 이 글자가 뜻하는 바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우선 ‘일체(一切)’는 비단 물질세계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무언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감촉하고, 머리로 생각해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즉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곧 일체(一切)입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만 우리의 세계 안에 있고,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건 우리의 세계 안에 없는 것과 같아요. 다시 말해 일체(一切)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접촉에 의해 형성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체는 12처(處), 18계(界)라는 불교의 교리 체계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가 모양을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감촉을 느끼고, 생각해서 결국 우리가 안다고 인식하게 되는 과정은 앞으로 가상현실이 생기면 이해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우리가 보고 들어서 아는 세계는 사실 실재의 세계가 아니라 두뇌에서 해석된 일종의 가상현실입니다. 실제로는 두뇌에서 처리된 정보를 우리가 인식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우리가 나무를 볼 때 실제로는 우리가 나무를 보는 게 아니라 나무에 반사된 빛이 눈을 통해 시신경을 건드리면 뇌에 전자기 신호가 전달되고 그것이 뇌를 통해 나무의 이미지로 재현됩니다. 우리는 그 이미지 영상을 보고 나무가 저기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러니 실제의 나무와 눈에 보이는 나무는 다릅니다.

이렇게 바깥에서 전달된 신호를 우리가 받아들일 때, 사람마다 형성된 각자의 업식에 따라 이미지를 조금씩 다르게 인식합니다. 똑같은 걸 보고 있어도 다르게 본다는 겁니다. 가령, 여기 탁자 위에 있는 컵을 본다고 해봅시다. 컵이라는 물질 자체를 다르게 보는 건 아니지만, 컵이 큰 지 작은 지를 물어보면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합니다. 같은 컵을 가지고 물어보는데 어떤 사람은 크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작다고 합니다. 이때 크다고 말하는 사람은 커피잔처럼 이 컵보다 작은 것과 비교하면서 이 컵이 크다고 인식하고, 작다고 말하는 사람은 맥주잔처럼 이 컵보다 큰 것과 비교하면서 이 컵이 작다고 인식합니다.

이 물건이 새 것인지 헌 것인지 물어도 어떤 사람은 새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헌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물건이 무거운 지 가벼운 지를 물어도 어떤 사람은 무겁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가볍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컵인지를 물어봐도 어떤 사람은 물컵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찻잔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다르게 말합니다.

우리가 지칭해서 말하는 어떤 존재는 그것이 우리에게 인식되는 바를 뜻합니다. 그 존재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우리의 인식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들의 정신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를 불교식 표현으로 ‘마음이 짓는 바’라고 하고, 한자로는 ‘유심조(唯心造)’라고 하는 겁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금덩어리를 은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금이라는 물질이 은으로 바뀐다는 뜻이 아닙니다. 금덩어리가 가치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따질 때는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금에는 본래 정해진 값이나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의 가치는 사람이 정하고, 이는 곧 사람의 마음이 정하는 것입니다. 금이 귀하다고 할 때 이건 우리의 마음이 금을 귀하다고 인식하는 겁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윤리, 도덕, 가치는 모두 마음이 지은 것입니다.

이 물건이 내 것이라는 생각도 마음이 지은 겁니다. 실제로는 그냥 물건일 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일체(一切)는 모두 우리 마음이 짓는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더럽다’, ‘깨끗하다’ 하는 것도 다 마음이 짓는 겁니다.

해골바가지는 그저 바가지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건 우리의 마음이 짓는 겁니다. 원효대사가 밤에 자다가 목이 말라서 주변을 더듬어 보니 물이 담긴 바가지가 있었어요. 목이 마를 때는 그 물을 너무 맛있게 마시고 잤는데, 다음날 일어나서 보니 해골에 담긴 물이었던 거예요. 그걸 알고서는 구역질을 했습니다.

‘바가지도 똑같은 바가지이고, 물도 똑같은 물인데, 왜 어젯밤에 그렇게 달콤하고 시원했던 물이 오늘은 구역질이 나게 하는가?’

이런 의문이 드는 순간 원효대사는 깨달았습니다. 같은 물인데 왜 어제는 깨끗했고, 오늘은 더러운가. 결국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것도 모두 마음이 짓는 바라는 걸 경험적으로 깨달은 겁니다. 원효대사도 경전 공부를 하면서 더럽고 깨끗한 게 따로 없고, 모두 다 마음이 짓는 바라는 걸 지식적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화엄경에 수도 없이 나오는 말입니다. 지식적으로는 깨끗하고 더러움이 본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어요. 여러분도 ‘높고 낮음이 없다’, ‘깨끗하고 더러운 게 없다’, ‘귀하고 천함이 없다’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늘 깨끗한 지 더러운 지를 따지고, 귀한 지 천한 지를 따지잖아요. 그런데 해골인 걸 알고서 구역질을 했다는 건 그 순간 진리의 관점을 놓쳤다는 거예요. 놓쳤을 때 놓친 줄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더러움과 깨끗함이 마음에 있다는 걸 체험하게 된 겁니다. 단순히 지식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자기 것이 된 거죠.

경전의 내용을 알려준 후 항상 수업이 끝날 때마다 여러분에게 집에 가서 직접 연습을 해보라고 강조를 하잖아요. 수업 시간에 수업을 듣는 건 부처님이 깨달으신 내용을 배우는 것인데, 그렇게 부처님이 훌륭하신 분이라는 걸 알아도 그건 어디까지나 부처님의 이야기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직접 경험을 해야 여러분의 것이 됩니다. 야구선수가 얼마나 공을 잘 던지는지, 얼마나 공을 잘 치는지, 아무리 많이 알아도 응원석에서 맥주 마시면서 응원만 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의 건강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마당에 나가서 한 번이라도 직접 공을 던지거나 쳐야 내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말하는 일체(一切)는 모두 마음이 짓는 바이고, 이를 축약한 표현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만약 제가 인도에 갔는데 어쩌다 한국과 연락이 닿지 않고, 신문에는 법륜스님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사망했다는 기사가 나왔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리고 며칠 후 유골함이 한국에 도착하면 여러분은 모두 법륜스님이 죽었다고 생각할 거예요. 설령 실제로는 스님이 살아있어도 그때 여러분에게는 법륜스님이 죽은 것과 같습니다.

6.25 전쟁 이후에 실제로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남한에서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가족들이 슬퍼하며 제사도 다 지냈는데, 알고 보니 북한에서 살아있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러니 실제로 대상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나한테 주어지는 정보가 어떠한지가 더 중요한 겁니다. 나한테 그 사람이 죽었다는 정보가 들어오면 나는 그 사람이 죽었다고 인식을 하고, 나한테 그 사람이 살아있다는 정보가 들어오면 나는 그 사람이 살아있다고 인식을 하는 거예요.

만약 법륜스님이 인도에 20년 동안 수행을 하러 떠난다며 길을 나섰는데 막상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교통사고로 죽었지만 20년 동안 국내에 아무런 소식이 전해지지 않으면 여러분은 법륜스님이 살아서 계속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즉, 여러분에게는 법륜스님이 살아있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는 죽었는데도 여러분은 문득 ‘스님은 잘 계시나?’, ‘요즘도 수행을 잘하고 계시겠지?’ 이런 생각을 할 거예요. 그러니 살았다, 죽었다는 인식도 결국 마음이 짓는 것이지 실제가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스스로 인식하는 것에 대해 실제의 모습과 같다고 생각할 뿐이죠.

‘이 아이는 내 아들이다’라고 할 때도 내가 낳았으니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저 ‘내가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하고 인지해야 합니다. 만약 아이를 낳았는데 분만실에서 아이가 바뀌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아이가 바뀐 줄 모르고 계속 아이를 키우면 평생 내 아이인 줄 생각하고 살아갈 겁니다. 그러니 ‘내 아이다’, '내 아이가 아니다' 하는 것도 다 마음이 짓는 것이지, 생물학적으로 내 아이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 아이를 내 아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그렇게 인지하기 때문인데, 우리는 내가 낳았기 때문에 내 아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내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평생을 살았지만 실제로 생모가 아닌 경우도 많고,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평생을 살았지만 병원에서 바뀐 경우에는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마음에서 짓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뇌가 어떻게 인지 하는가의 문제이지 실재가 아닙니다. 부처님은 이미 2,600년 전에 이러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일체유심조’를 잘못 이해해서 남자를 여자라고 생각하면 여자가 되고, 금을 돌이라고 생각하면 돌이 되고, 돌을 금이라고 생각하면 금이 된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마음을 먹으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는 말은 우리가 어떤 원(願)을 세우고 그걸 끝까지 추구하면 언젠가는 달성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일체유심조의 실제 의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