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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 "우리는 지금 모두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다": 그는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의 예술가인가? (번역)

걷는생각 2023. 4. 24. 01:14

'We are all Edward Hopper paintings now': is he the artist of the coronavirus age? | Edward Hopper | The Guardian

 

'We are all Edward Hopper paintings now': is he the artist of the coronavirus age?

With his deserted cityscapes and isolated figures, the US painter captured the loneliness and alienation of modern life. But the pandemic has given his work a terrifying new significance

www.theguardian.com

"이 미국 화가는 황량한 도시풍경과 고립된 인물을 통해 현대인의 외로움과 소외감을 포착한다. 하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그의 작품에 무서울 정도로 새로운 의의가 부여되었다."

어젯밤 문앞에서 NHS(영국 국민보건서비스)를 위해 박수를 치는 사람들의 모습에 감동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2020년 3월 의료인들에게 영국 국민들이 각자의 장소에서 박수를 보냈던 퍼포먼스를 가리킴) 이 사진들은 TV와 뉴스 사이트를 가득 채웠고, 강제된 고독 속에서도 모두 외롭지만 함께 연대하는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SNS에는 그다지 안심할 수 없는 이미지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모두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안에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어보입니다. 

[Morning Sun]의 침대에 앉은 여자처럼, [Cape Cod Morining]의 창문 밖을 바라보는 여자처럼, 섬뜩하게 텅 빈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외로운 창가에 앉아 서로에게 차갑게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WhatsApp의 한 사용자는 "이제 우리는 모두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입니다"라며 호퍼의 장면을 모아놓았는데, 적막한 영화관에 홀로 있는 여성, 현대식 아파트에 홀로 남겨진 남성, 외로운 상점 직원, 식당의 1인용 테이블에 멀리 떨어져 앉은 사람들에 관한 그림이었습니다. 밈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지만, 이것이 진지한 논평인지 자기 연민이 결부된 농담인지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봅시다. 지금 우리 모두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 주인공이라면, 코로나19의 가장 심각한 사회적 결과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외로움의 위기가 임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합의하고 있는 인간 접촉의 상실은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호퍼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적어도 이런 상황입니다. 1882년 뉴욕주에서 태어난 이 화가는 고독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습니다. 1920년대, 스콧 피츠제럴드가 재즈 시대의 파티광들을 기록하는 동안 호퍼는 평생 파티에 초대받은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호페에게 비춰지는 현대의 삶은 극도로 비우호적입니다. 그의 가련한 영혼을 고립시키는데에는 팬데믹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에게 차가운 판유리 창문, 모두가 독립된 아파트에 사는 우뚝 솟은 도시 건물, 외진 곳에 있는 주유소 등 현대 도시와 풍경의 구조는 고독을 양산하는 기계와 같습니다.또한 그가 그려내는 사람들은 스스로 할 만한 것을 많이 찾지 못합니다. 

오래된 예술 작품에서 고독은 유익한 점이 있습니다. [서재의 성 제롬]이라는 제목의 그림에서 학구적인 은둔자는 책과 멋진 책상, 애완용 사자가 있는 잘 꾸며진 서재에서 더할나위 없이 편안해 보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카스파르 데이비드 프리드리히의 그림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에서 산책을 나온 낭만주의자는 인간의 방해 없이 숭고한 자연을 흡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고립을 추구합니다. 그는 혼자서도 무섭도록 행복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공유되고 있는 것은 만족스럽거나 선택된 고독의 이미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호퍼의 공포'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호퍼의 열렬한 팬 중 한 명인 알프레드 히치콕은 철도에 의해 고립된 기묘하고 오래된 집을 그린 호퍼의 그림으로부터 영화 [사이코]의 베이츠 저택의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우리 모두는 소외되고 원자화된 개인에 대한 호퍼의 끔찍한 비전을 무시하고 대신 공동체로서 살아남기를 희망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서로 떨어져 지내면서 그런 희망을 품어야하고 모든 사람들이 집에서 완벽하게 괜찮은 척하는 것은 바이러스 전쟁의 공허한 프로파간다처럼 지독하게 부정직할 수 있습니다. 

호퍼의 메시지는 현대인의 삶이 매우 외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호퍼의 그림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아파트 창문안에 있는 것처럼 식당이나 레스토랑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있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모더니스트 예술의 전형입니다. 에드바르드 뭉크는 이미 [저녁 때의 카를 요한 거리]에서 군중 속에서도 고립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술가들이 현대의 조건을 규정한다고 여겼던 고립감을 숨기는데 더 능숙합니다. 평상시에도 카페에 혼자 앉아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제는 휴대폰을 통해 사회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 현대는 많은 사람들을 한때 표준이었던 사교성과는 완전히 단절된 도시적 생활방식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브뤼겔이 그린 산업화 이전 시대의 농부들의 삶은 혼자가 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세상을 보여줍니다. 부엌은 붐비고, 카니발은 물리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악몽과도 같았습니다. 브뤼겔을 보면 왜 영국의 많은 사람들이 브뤼겔 시대의 마지막 피난처였던 펍을 포기하기를 꺼려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고 싶기 때문에 현대의 고독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지금 호퍼의 예술은 다음과 같은 까다로운 질문을 제기합니다. "현대적 삶에서 자유가 사라진다면, 우리에게 외로움 외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