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斷想
안세영 선수를 보면서 되새겨 본 아웃퍼포머의 조건
걷는생각
2024. 8. 6. 10:30
마흔 넘어서 마주보는 운동하지 말라는 설득력 있는 조언을 듣고 조기 은퇴한 배드민턴을 안세영 선수 덕분에 오랫만에 챙겨봤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몇몇 정황과 발화는 평소에 내가 생각했던 아웃퍼포머(업계 상위 1% 남짓의 성과자)의 조건과 부합하는 것 같아서 교육학적 관심에 입각해 기록해 두고 싶다.
1) 탁월한 유전자
안세영 선수의 부친은 국가대표 복싱 선수 출신, 어머니는 체조 선수 출신. 동호인으로 꽤 오래 배드민턴 해온 입장에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탁월한 유전자를 추측해보면 순발력(부친)과 유연성(모친)이라고 생각한다.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는 순발력과 온갖 아크로바틱한 동작을 할 수 있는 기름칠 잘 된 관절은 배드민턴하는데 더 할 나위 없이 유리한 조건이다. 이 유전자를 갖지 못한 분들은, 안타깝지만 동호인 레벨에서도 실력 향상이 매우 더디고 어려웠다고 기억한다. 아주 거칠게 말하면, 헬창보다는 멸치가 더 잘되기 쉬운 종목이다.
2) 전공&진로 선택
아무리 탁월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날개를 펴기 적절한 업계를 적시에 진로로 잡지 못한다면 1)의 조건이 무의미하다. 부모님 두 분다 은퇴 후 생활체육으로 배드민턴을 하신 분들이고 그 덕분에 안세영은 초1 때부터 라켓을 잡을 수 있었다. 엘리트 코스로 봐도 빠른 편. 종목 불문 엘리트 체육은 자라나는 근육에 기본기를 각인시켜 나가는 조기 교육이 핵심이다. 이건 나이가 들어서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따라잡을 수 있는 훈련이 아니다. 끔찍한 상상 하나 해보자면, 부모가 모두 엘리트 체육을 경험한 입장에서 내 딸은 운동시키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초1 때부터 앉혀놓고 문제집만 풀게 했으면 안세영 선수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3) 동기화(motivation)를 위한 주변 환경
1)과 2)를 충족한 친구들은 보통 주변에서 천재소리를 들으면서 주목을 받게 되어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몇 살 위의 언니/오빠들을 떡바르고 다니다 보면(안세영은 중학교 3학년때 고등, 대학, 실업 선수들을 이기고 국대에 선발되었다), 당연히 업계가 시시하다는 마음이 들 법도 하다. 천재들을 열심히 하게 만들 동기화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이럴 때, 더 높은 과제를 제시하고 채찍질하는 코치의 역량도 필요하지만 결정적인 건 라이벌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내가 아슬아슬하게 넘지 못하는 업계의 라이벌. 범접할 수 없는 상대라면 경쟁심도 생기지 않는다. 안세영 선수에게는 당시 세계 1위였던 천위페이(중국)가 있었다. 도쿄 올림픽에서도 이 선수에게 8강에서 탈락하고 나서 한 말이 의미심장하다. "이래도 안 됐으니 더 열심히 해야되는 거겠죠" 천재에게서 이런 말이 나오게 할 수 있는 환경에 놓인 것 또한 천운이다.
나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말하면서 '노력'이라는 단어는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올림픽이나 뉴스에서 보는 아웃퍼포머들에게서 확인하기 가장 간편한 '현상'일 뿐이라는 점은 덧붙이고 싶다. 자신의 길에 대한 애착, 자신의 역량에 대한 믿음, 그것을 뒷받침 해줄 수 있는 환경도 없이 백지 상태에서 피땀 흘려 노력하는 인간은 없다. 그건 '노력'에 대한 지독한 오해이자 거대한 사회적 스캠(scam)이라고 생각한다.